[기타][교회사로 읽는 기독교 문화 3] 갈등의 시대, 우리가 기억해야할 역사 - 성 바르톨로뮤 축일의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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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4일은 바르톨로뮤(예수님의 제자 중 한 명으로, ‘바돌로매’로 부르기도 함)의 축일입니다. 전승에 따르면, 바르톨로뮤는 인도, 아르메니아, 페르시아에서 복음을 전하다 칼로 살갗이 벗겨져 순교했다고 전해지기에 그를 묘사하는 그림에는 칼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복음을 전하다가 칼에 목숨을 잃은 이를 기리는 날에, 한 하나님을 믿는 이들이 칼로 수많은 형제와 자매를 죽인 비극이 일어났습니다. ‘성 바르톨로뮤 축일의 학살’은 하루 동안 수천 명의 개신교인이 살해당한 사건으로 기독교 역사에서 그 유래를 찾기 힘든 비참한 사건이었습니다. 우리가 이 사건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이 사건이 단순히 슬프고 비참한 역사이기 때문은 아닙니다. 같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던 사람들이 서로를 향한 사랑과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이에 대한 관용을 잃어버리고 각자의 이해관계에 사로잡혀 칼을 들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교회사로 읽는 기독교 문화』 시리즈 세 번째로 기독교 역사에 남겨진 8월의 슬픈 이야기, 성 바르톨로뮤 축일의 학살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위그노, 강력한 세력으로 성장하다.

위그노는 프랑스에서 칼뱅주의를 따르는 개신교도를 일컫는 호칭으로, 1562년 경, 프랑스 인구 1,600만 명 중에서 약 200만 명이 위그노였다는 기록이 있을 만큼 위그노의 성장세는 대단했습니다. 특히 위그노 중에는 부유한 시민층, 지식인층, 일부 고위 귀족들이 많았고, 도시를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했기에 경제적 부를 바탕으로 강력한 정치적 발언권을 확보하고 있었습니다. 전통적인 로마가톨릭 세력은 위그노의 급성장을 위기로 받아들였고, 특히 기즈(Guise) 가문을 중심으로 한 극단적 가톨릭 세력은 위그노를 '이단'으로 규정하며 강경 대응을 주장했습니다. 그들에게 위그노는 단순한 종교적 이단이 아니라 기존 질서를 위협하는 정치적 맞수였기 때문입니다. 1559년 앙리 2세의 갑작스러운 사망과 어리고 약한 왕들의 연이은 즉위로 발생한 권력의 공백기에 위그노와 로마가톨릭의 갈등은 격화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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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바르톨로뮤 축일의 학살, 익명의 작가, 16세기>


결혼식에서 시작된 비극

비극은 1572년 8월 18일, 마르가리타 공주와 위그노 지도자 앙리의 결혼식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 결혼은 앙리 2세의 왕비이자 섭정이었던 카트린 드 메디시스가 종교적 화해를 통해 정치적 안정을 꾀하려는 정략결혼이었습니다.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프랑스 전역의 위그노 지도자들이 파리로 모이자, 긴장은 고조되었고, 극단적 로마가톨릭 세력은 그들을 표적으로 삼았습니다. 1572년 8월 22일, 위그노의 정신적 지도자이자 프랑스 해군의 제독인 콜리니 제독에 대한 암살미수 사건이 발생하면서 양 진영의 긴장은 일촉즉발의 상황으로 고조되었습니다. 수년 동안 여러 차례 군사적으로 충돌하면서 서로에게 쌓여왔던 불신과 불만이 암살미수 사건을 계기로 폭발할 것이 두려웠던 프랑스 왕실과 로마가톨릭 귀족들은 위그노 지도자들을 제거하기로 결정하고 기습적으로 도시를 봉쇄한 뒤 군대를 동원했습니다.

8월 24일 새벽 4시경, 생제르맹록스루아 교회 종소리와 함께 파리 전역에서 위그노에 대한 조직적이고 무자비한 학살이 시작되었습니다. 앞서 암살을 피했던 콜리니 제독을 비롯한 위그노 지도자 대부분이 목숨을 잃었고, 하루 동안 파리에서만 최소 2천 명 이상의 위그노가 학살되었으며, 이후 일주일 동안 전국에서 최소 약 8천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상황이 걷잡을 수 없게 확산하자 국왕인 샤를 9세가 군중에게 진정할 것을 호소했음에도 불구하고, 사태는 전국으로 확산하여 10월까지 프랑스 전역에서 폭력이 발생했으며, 차기 왕위 계승권자 중 한 명인 나바라의 앙리조차 로마가톨릭으로 개종해야 했습니다. 당시의 상황은 개신교의 지도자 테오도르 베즈가 위그노 신자들이 ‘도살장의 양처럼’ 죽임을 당했다고 기록할 만큼 참혹했습니다.


하나의 비극, 서로 다른 평가

성 바르톨로뮤 축일의 학살이 일어난 근본적인 원인에는 종교적 교리와 신념의 차이에서 오는 갈등 외에 정치적인 권력 다툼이 있었습니다. 신앙은 하나의 명분이었고 실제로는 왕실, 기즈 가문, 위그노 지도자 간의 치열한 정치적 갈등이 있었습니다. 종교가 정치적 도구로 전락하고, 그리스도인들의 복음보다 각자의 이해관계를 우선할 때, 얼마나 참혹한 결과를 초래하는지 이 비극적인 사건은 선명하게 보여주었습니다. 위그노 신자들은 이처럼 엄청난 박해를 하나님의 심판으로 받아들이면서도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하나님은 왜 침묵하시는가?’라는 질문 아래 고민했습니다. 로마가톨릭 진영에서는 이 사건을 이단에 대한 거룩한 승리로 받아들이면서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는 이를 기념한 메달을 주조했습니다. (이로부터 약 4백 년이 지난 1997년이 되어서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이 비극에 로마가톨릭교회가 개입했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했습니다.) 반면, 위그노 역사가와 개혁교회 신학자들은 대학살을 사탄과 그 하수인들에 맞서 싸운 영적 전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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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바르톨로뮤 축일의 학살을 기념하여 로마 교황 그레고리 13세가 제작한 메달>

 

역사적 의의와 영향

성 바르톨로뮤 축일의 학살은 프랑스를 비롯한 전 유럽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습니다. 특히 개혁교회 신학자들은 이 사건을 계기로 이전까지는 소극적, 이론적인 수준에 머물렀던 불의한 국가 권력에 대한 저항권 사상을 보다 적극적이고 실천적인 형태로 발전시켰습니다. 테오도르 베즈와 같은 신학자들은 왕이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계약을 위반하도록 강요하고, 신앙을 박해한다면 백성은 무력까지 사용하여 저항할 권리가 있다고 보았으며, 이러한 사상은 계몽주의와 민주주의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학살 이후 수많은 위그노가 신앙을 포기하거나 스위스, 영국, 네덜란드 등지로 망명하는 '디아스포라'의 삶을 살았습니다. 1598년 앙리 4세(나바라의 앙리)의 낭트칙령으로 짧은 평화가 있었지만, 1685년에 루이 14세가 낭트 칙령을 폐지한 뒤 약 30만 명에 이르는 위그노가 프랑스를 떠났습니다. 숙련된 기술자, 부유한 상인, 뛰어난 군인이었던 위그노들이 프랑스를 떠나자, 프랑스 경제는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위그노의 대규모 망명으로 인한 경제의 타격이 향후 프랑스 대혁명으로 전제왕권이 무너지는 출발선이 되었다고 평가합니다. 반면 위그노 망명자들을 수용한 주변 유럽 국가들은 그들의 기술력과 근면성을 자국 산업을 발전시키는 중요한 동력으로 삼아서 스위스의 시계 산업, 프로이센의 가내수공업, 영국의 실크 산업이 위그노 망명자에 의해 발전했고, 이는 유럽의 사회적, 경제적 구조를 완전히 바꾸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daf28eaec94cb.png <성 바르톨로뮤의 날 학살, 뒤부아 프랑수아 作, 1862>


450여 년 전, 그날의 비극이 지금 우리에게 주는 교훈

성 바르톨로뮤 축일의 비극은 단순한 종교적 비극을 넘어 유럽 문명사의 전환점이었으며, 450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이 사건이 우리에게 던지는 교훈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1. 사랑을 잃어버린 맹목적 신앙의 위험성

1572년 8월 24일 새벽, 로마가톨릭 신자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뜻을 행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위그노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이들을 제거하여 신앙을 지킬 수 있다고 확신했지만, 그들의 확신에는 가장 중요한 이웃에 대한 사랑이 없었고, 사랑을 잃어버린 확신은 맹목적 신념이 되었습니다. 위그노와 로마가톨릭 신자는 모두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기독교인이었고, 그들 사이의 차이는 단지 신학적 차이였습니다. 순수한 교리와 신념을 지키는 것은 중요하지만, 교리를 지키기 위해 사랑을 버리고, 폭력을 용인한 결과는 복음의 본질이 파괴되고, 서로 피를 흘리는 비극이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고전 13:1)라고 경고했습니다. 성 바르톨로뮤 축일의 비극은 바울의 이 경고가 현실화한 참혹한 사례였습니다.

 

2. 종교와 정치의 결탁이 가져오는 위험성

성 바르톨로뮤 축일의 학살에는 종교적 동기 외에도 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정치적 야망, 기즈 가문의 권력 욕심, 스페인과의 외교적 갈등 등 복잡한 정치적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습니다. 종교가 정치권력의 도구로 전락했을 때, 그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기독교인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 자체는 문제는 아닙니다. 기독교인은 하나님의 뜻이 이 땅 위에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며, 건강한 정치를 위해 고민하면서 정치에 참여해야 합니다. 하지만 종교가 정치권력과 결탁하여 권력의 도구가 될 때, 신앙의 본질은 왜곡되고 이용될 위험에 노출됩니다. 위그노와 로마가톨릭 양 진영은 모두 세속 권력과 결탁했고, 그 결과가 무고한 생명의 희생과 비참한 전쟁이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신앙은 언제나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실천이라는 복음의 원칙에 따라, 이 땅의 정치가 바른길로 가도록 깨어서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선지자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을 중요한 사명으로 삼아야 합니다.


3. 나와 다른 생각에 대한 관용

성 바르톨로뮤 축일의 학살이 일어나기 전까지 위그노와 로마가톨릭 세력은 나름대로 위태한 공존을 이어가고 있었지만, 극단주의자들은 이러한 공존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나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은 곧 적'이라는 극단적인 사고는 결국 거룩한 축일에 벌어진 학살이라는 참혹한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신앙과 신념에 대한 확신은 필요하지만, 나의 신념을 지키고 그것이 옳음을 증명하기 위해 다른 이에게 폭력을 행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는 없습니다. 성 바르톨로뮤 축일의 비극은 우리에게 이 세상에서 마주하는 수많은 갈등과 충돌의 상황이 심해질 수록 관용, 즉 상대방을 너그럽게 받아들이고 용서하는 태도가 더욱 큰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우리에게 일깨워줍니다. 오늘날 교회에는 보수와 진보, 전통과 개혁 등 다양한 정치적, 사상적 스펙트럼이 존재하고 있으며, 여기에 여러 가지 생각의 차이로 인한 갈등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갈등과 분열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450년 전 바르톨로뮤 축일의 비극은 사랑을 잃지 않은 따뜻한 신앙, 정치권력과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는 건강한 신앙, 나와 다름을 인정하고 관용할 줄 아는 성숙한 신앙의 소중함을 지금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참고문헌] 박경수. "프랑스 종교개혁의 현장을 찾아 (3): 성 바르톨로뮤 축일의 학살". 기독교사상 2016년 12월호(통권 제696호), 241 - 258.

글. 정일석 연구원(문화선교연구원, 장신대(역사신학 Ph.D c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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