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님은 찬송을 받으시라, 모든 상황 속에서
기쁨의 50일에 되새기는
위그노의 ‘REGISTER’(저항)
무대 위로 올라온 시편 — 뮤지컬 <저항>
광야아트미니스트리의 뮤지컬 <저항: 찬송이 된 사람들>은 38년 동안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신앙을 지킨 위그노 여성 마리 뒤랑(Marie Durand, 1711–1776)의 삶을 중심으로, 박해의 시대를 견뎌 낸 위그노들의 이야기를 무대 위에 펼쳐 보입니다. 이 작품은 마리 뒤랑을 처음부터 흔들림 없는 영웅이 아니라 두려움과 분노, 좌절 속에서도 끝내 믿음을 놓지 않았던 평범한 신앙인의 모습으로 우리 앞에 드러내며, 위그노들이 박해의 시대를 살아내면서 실제로 불렀던 시편 찬양을 작품 안에 담아내면서 그들의 저항이 단순한 투쟁이 아니라 삶을 하나님께 찬송으로 올려드린 신앙의 고백이었음을 보여줍니다.

<photo by 광야미니스트리>
지금 우리는 부활 후 50일간 이어지는 ‘기쁨의 50일’ 절기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뮤지컬 <저항: 찬송이 된 사람들>은 ‘기쁨의 50일’ 절기에 우리가 함께 나누고 있는 부활의 기쁨이 단순한 즐거움을 넘어 그리스도인의 최종적인 결말은 깊은 절망과 죽음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과 승리임을 믿음으로 고백하며 누리는 완전한 소망의 기쁨이라는 사실을 18세기 프랑스 남부, 높은 돌벽으로 둘러싸인 콩스탕스 탑(Tour de Constance) 안을 배경으로 보여줍니다. 위그노는 어떤 사람들이었을까요? 그들이 박해받으며 살아간 시대는 어떤 시대였을까요? 그들은 왜 포기하지 않고, 저항을 선택한 것일까요?

콩스탕트 탑에 갇힌 위그노 여성들의 모습
<The Tower of Constance painting by Jeanne Lombard, 1907.>
‘위그노’를 아시나요?
'위그노(Huguenot)'라는 이름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위그노는 16세기 스위스 제네바의 종교개혁자 장 칼뱅(Jean Calvin)의 신학을 따른 프랑스 개신교인들을 부르는 이름입니다. 한때 프랑스 인구 1,600만 명 가운데 약 200만 명이 위그노였다는 기록이 있을 만큼 그 세력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1572년 성 바르톨로뮤 축일의 대학살과 1685년 루이 14세의 낭트 칙령 폐지를 거치면서 프랑스의 위그노들은 프로테스탄트 신앙을 버리지 않는다는 이유 하나로 갤리선의 노예가 되거나, 콩스탕스 탑 같은 감옥에 평생 갇히거나, 스위스, 네덜란드, 영국으로 망명해야 했습니다. 이때 해외로 망명한 사람의 숫자만 100만 명 이상이었습니다. 상당한 경제력과 기술력을 가진 위그노들의 대규모 망명은 전 유럽의 정치, 경제, 사회적 지형을 바꿨으며, 일부 역사학자들은 이에 따라 프랑스의 경제가 흔들리면서 1789년 대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고 분석하기도 합니다.

위그노 광야교회의 모습
Assembly in the Desert, painting by Jeanne Lombard, 1934.
망명하지 않고 프랑스에 남은 이들은 어떻게 신앙생활을 이어갔을까요? 교회를 빼앗긴 그들은 산속과 동굴, 들판에 모여 비밀 예배를 드렸습니다. 교회 역사가들은 이 시기를 '광야 교회(Église du Désert)'라고 부릅니다. 교회 건물은 사라졌지만, 시편을 부르는 공동체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들이 자주 사용했던 상징이 '망치와 모루'입니다. 박해의 망치가 아무리 거듭 내리쳐도 신앙의 모루는 깨지지 않으며, 오히려 망치가 먼저 닳아 없어지리라는 믿음의 고백이었습니다. 이 광야교회 시대의 한가운데에 마리 뒤랑이라는 한 여성이 있었습니다.

테오도르 베즈가 집필한 『프랑스 왕국 내 개혁교회 교회사』(1580) 표지의 삽화
병사들이 망치로 모루를 때리고 있지만, 모루는 멀쩡하고 망치가 망가지고 있다.
삽화 주위에 ‘모루를 두드릴수록 망치만 더 닳는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38년의 감옥, 우물가에 새겨진 한 단어
마리 뒤랑은 1711년 프랑스 남부 아르데슈 지방의 독실한 위그노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가족 이야기는 그 자체가 한 편의 위그노 박해의 역사입니다. 광야교회의 목사였던 오빠 피에르 뒤랑은 1732년 몽펠리에 광장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했고, 부모 역시 프로테스탄트 신앙을 지키며 고난을 겪었습니다. 마리 자신은 19세에 체포되어 에그모르트의 콩스탕스 탑에 갇혔습니다. 죄목은 단 하나, ‘프로테스탄트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다’라는 것이었습니다.
햇빛조차 제대로 들지 않는 원형 돌탑 안에서 그녀는 38년을 살았습니다. 38년이 어느 정도의 시간일까요? 한 인간의 청춘과 중년을 모두 삼키고도 남는 시간입니다. 우리로 치면 대학을 갓 졸업한 청년이 환갑을 맞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이 긴 어둠 속에서 마리 뒤랑은 단순히 버틴 것을 넘어 공동체를 세웠습니다. 그녀는 함께 갇힌 40여 명의 여성들에게 시편을 읽어 주고, 병자를 간호하고, 외부 광야 교회 지도자들과 비밀 서신을 주고받으며 수감자들의 처지를 바깥세상에 알렸습니다. 그녀는 감옥의 영적 지도자였고, 공동체의 서기였습니다.
가장 유명한 일화는 감옥 한가운데 우물 테두리 돌판에 그녀가 새긴 한 단어입니다. 'REGISTER', 옛 프랑스어로 ‘저항하라’는 뜻입니다. 매일 간수가 빵을 건네며 “가톨릭으로 돌아가겠다는 한마디만 하면 풀어 주겠다.”라고 회유할 때, 동료들 사이에서 “이러다 다 죽는다, 한 번만 ‘예’라고 하자.”라는 동요가 일어날 때, 그녀는 그 우물가의 글자를 가리켰습니다. 이 저항은 무력 항쟁의 구호가 아니었습니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 매일 작은 ‘아니요.’를 선택하는 자기 자신을 향한 신앙 고백이자 다짐이었습니다.

마리 뒤랑의 초상화
Original image by Société de l'Histoire du Protestantisme français.
Uploaded by Stephen M Davis, published on 23 September 2022.
기억해야 할 또 한 명의 이름, 잔 달브레
그런데 마리 뒤랑보다 두 세기 앞서, 위그노 운동의 시작점에 또 한 명의 여성이 서 있었습니다. 16세기 나바라(현재의 스페인 북부 지역과 프랑스 남부 지역에 걸친 작은 독립 왕국, 1620년 프랑스에 합병됨) 왕국의 여왕 잔 달브레(Jeanne d'Albret, 1528–1572)입니다. 가톨릭을 신봉하던 프랑스 왕실 한복판에서 자랐음에도 1560년 크리스마스에 공개적으로 칼뱅주의로 개종한 그녀는, 자신의 영지인 베아른에서 종교개혁을 단행하고 위그노들을 후원하였습니다. 로마가톨릭이 그녀에게 ‘새로운 종교를 심으려 한다’라고 비난했을 때 그녀가 남긴 답은 종교개혁의 본질을 한 문장으로 압축합니다. “저는 새로운 종교를 심으려는 것이 아닙니다. 몰락한 우리의 고대 신앙을 다시 세우려는 것입니다.”

잔 달브레 여왕의 초상화
Portrait au crayon de Jeanne d'Albret, reine de Navarre. Recueil, 1560년대
그녀의 아들이 훗날 프랑스 왕 앙리 4세가 되어 1598년 낭트 칙령을 반포했고, 그 칙령 덕분에 위그노 신앙은 마리 뒤랑의 시대까지 이어질 수 있었습니다. 잔 달브레가 없었다면, 마리 뒤랑이 지켜낸 그 신앙도 같은 모습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16세기의 잔 달브레 여왕과 18세기의 마리 뒤랑, 두 사람은 두 세기를 사이에 두고 있지만, 같은 끈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두 사람 외에도 잔의 어머니 마르가리타 당굴렘, 페라라의 르네 드 프랑스, 제네바의 마리 당티에르, 그리고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광야교회의 수많은 어머니와 자매들까지 종교개혁은 결코 남성만의 작품이 아니었습니다.
위그노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 부활의 기쁨은 고난과 모순되지 않습니다.
위그노들은 가장 어두운 감옥에서 가장 밝은 시편을 불렀습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만이 그 어둠 속에서도 노래할 수 있었습니다. 기쁨의 50일은 단지 고난과 어려움이 없는 기쁨과 즐거움이 아니라 깊은 고난과 죽음마저도 우리 인생의 결말이 아님을 고백하며 소망을 품고 살아가도록 우리를 인도하는 시간입니다.
- 종교개혁은 남성과 여성이 함께 이루어간 역사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루터, 칼뱅, 츠빙글리와 같은 남성 종교개혁자 중심의 종교개혁사만을 익숙하게 접해왔습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의 역사 속에는 잔 달브레와 마리 뒤랑 그리고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수많은 여성의 헌신과 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역사 속에서 흐려진 여성들의 흔적을 기억할 때, 우리는 비로소 참된 교회를 소망하며, 함께 걸어갔던 하나님의 사람들을 온전히 마주할 수 있습니다.
- 우리에게도 일상의 'REGISTER'가 필요합니다.
오늘날 우리를 가두는 콩스탕스 탑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노예로 부리는 갤리선도, 총칼로 협박하는 일도 없습니다. 대신 더 교묘한 회유가 우리의 삶에 다가옵니다. ‘한 번만 타협하면 편해진다.’,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느냐?’라는 속삭임 앞에서, 우리의 신앙은 흔들리지만, 우리는 작지만 당연하게 ‘아니요.’를 선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계산할 수 없는 은혜를 받아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리 뒤랑이 우물가에 새긴 'REGISTER'는 18세기 프랑스 위그노의 흔적을 넘어, 21세기 한국 그리스도인의 마음에 새겨져야 할 단어입니다.
57세에 석방되어 고향으로 돌아온 뒤에도 마리 뒤랑은 타협하며 살아온 이웃들의 차가운 시선을 마주해야 했지만, 네덜란드의 왈론 교회가 보내온 작은 연금조차 가난한 이들과 나누며 살았습니다. 그녀가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찬양한 시편 18편은 거대한 박해 앞에서도, 부활의 기쁨과 소망을 품고, 당당하게 ‘아니오’를 외쳤던 믿음의 선배들이 남긴 신앙 고백이자,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고백입니다.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시편 18편 1절~2절

콘스탕스 탑에 새겨진 ‘Register’
https://museeprotestant.org/
글. 정일석 연구원
문화선교연구원, 장로회신학대학교 역사신학 Ph.D cand
하나님은 찬송을 받으시라, 모든 상황 속에서
기쁨의 50일에 되새기는
위그노의 ‘REGISTER’(저항)
무대 위로 올라온 시편 — 뮤지컬 <저항>
광야아트미니스트리의 뮤지컬 <저항: 찬송이 된 사람들>은 38년 동안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신앙을 지킨 위그노 여성 마리 뒤랑(Marie Durand, 1711–1776)의 삶을 중심으로, 박해의 시대를 견뎌 낸 위그노들의 이야기를 무대 위에 펼쳐 보입니다. 이 작품은 마리 뒤랑을 처음부터 흔들림 없는 영웅이 아니라 두려움과 분노, 좌절 속에서도 끝내 믿음을 놓지 않았던 평범한 신앙인의 모습으로 우리 앞에 드러내며, 위그노들이 박해의 시대를 살아내면서 실제로 불렀던 시편 찬양을 작품 안에 담아내면서 그들의 저항이 단순한 투쟁이 아니라 삶을 하나님께 찬송으로 올려드린 신앙의 고백이었음을 보여줍니다.
<photo by 광야미니스트리>
지금 우리는 부활 후 50일간 이어지는 ‘기쁨의 50일’ 절기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뮤지컬 <저항: 찬송이 된 사람들>은 ‘기쁨의 50일’ 절기에 우리가 함께 나누고 있는 부활의 기쁨이 단순한 즐거움을 넘어 그리스도인의 최종적인 결말은 깊은 절망과 죽음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과 승리임을 믿음으로 고백하며 누리는 완전한 소망의 기쁨이라는 사실을 18세기 프랑스 남부, 높은 돌벽으로 둘러싸인 콩스탕스 탑(Tour de Constance) 안을 배경으로 보여줍니다. 위그노는 어떤 사람들이었을까요? 그들이 박해받으며 살아간 시대는 어떤 시대였을까요? 그들은 왜 포기하지 않고, 저항을 선택한 것일까요?
콩스탕트 탑에 갇힌 위그노 여성들의 모습
<The Tower of Constance painting by Jeanne Lombard, 1907.>
‘위그노’를 아시나요?
'위그노(Huguenot)'라는 이름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위그노는 16세기 스위스 제네바의 종교개혁자 장 칼뱅(Jean Calvin)의 신학을 따른 프랑스 개신교인들을 부르는 이름입니다. 한때 프랑스 인구 1,600만 명 가운데 약 200만 명이 위그노였다는 기록이 있을 만큼 그 세력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1572년 성 바르톨로뮤 축일의 대학살과 1685년 루이 14세의 낭트 칙령 폐지를 거치면서 프랑스의 위그노들은 프로테스탄트 신앙을 버리지 않는다는 이유 하나로 갤리선의 노예가 되거나, 콩스탕스 탑 같은 감옥에 평생 갇히거나, 스위스, 네덜란드, 영국으로 망명해야 했습니다. 이때 해외로 망명한 사람의 숫자만 100만 명 이상이었습니다. 상당한 경제력과 기술력을 가진 위그노들의 대규모 망명은 전 유럽의 정치, 경제, 사회적 지형을 바꿨으며, 일부 역사학자들은 이에 따라 프랑스의 경제가 흔들리면서 1789년 대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고 분석하기도 합니다.
위그노 광야교회의 모습
Assembly in the Desert, painting by Jeanne Lombard, 1934.
망명하지 않고 프랑스에 남은 이들은 어떻게 신앙생활을 이어갔을까요? 교회를 빼앗긴 그들은 산속과 동굴, 들판에 모여 비밀 예배를 드렸습니다. 교회 역사가들은 이 시기를 '광야 교회(Église du Désert)'라고 부릅니다. 교회 건물은 사라졌지만, 시편을 부르는 공동체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들이 자주 사용했던 상징이 '망치와 모루'입니다. 박해의 망치가 아무리 거듭 내리쳐도 신앙의 모루는 깨지지 않으며, 오히려 망치가 먼저 닳아 없어지리라는 믿음의 고백이었습니다. 이 광야교회 시대의 한가운데에 마리 뒤랑이라는 한 여성이 있었습니다.
테오도르 베즈가 집필한 『프랑스 왕국 내 개혁교회 교회사』(1580) 표지의 삽화
병사들이 망치로 모루를 때리고 있지만, 모루는 멀쩡하고 망치가 망가지고 있다.
삽화 주위에 ‘모루를 두드릴수록 망치만 더 닳는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38년의 감옥, 우물가에 새겨진 한 단어
마리 뒤랑은 1711년 프랑스 남부 아르데슈 지방의 독실한 위그노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가족 이야기는 그 자체가 한 편의 위그노 박해의 역사입니다. 광야교회의 목사였던 오빠 피에르 뒤랑은 1732년 몽펠리에 광장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했고, 부모 역시 프로테스탄트 신앙을 지키며 고난을 겪었습니다. 마리 자신은 19세에 체포되어 에그모르트의 콩스탕스 탑에 갇혔습니다. 죄목은 단 하나, ‘프로테스탄트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다’라는 것이었습니다.
햇빛조차 제대로 들지 않는 원형 돌탑 안에서 그녀는 38년을 살았습니다. 38년이 어느 정도의 시간일까요? 한 인간의 청춘과 중년을 모두 삼키고도 남는 시간입니다. 우리로 치면 대학을 갓 졸업한 청년이 환갑을 맞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이 긴 어둠 속에서 마리 뒤랑은 단순히 버틴 것을 넘어 공동체를 세웠습니다. 그녀는 함께 갇힌 40여 명의 여성들에게 시편을 읽어 주고, 병자를 간호하고, 외부 광야 교회 지도자들과 비밀 서신을 주고받으며 수감자들의 처지를 바깥세상에 알렸습니다. 그녀는 감옥의 영적 지도자였고, 공동체의 서기였습니다.
가장 유명한 일화는 감옥 한가운데 우물 테두리 돌판에 그녀가 새긴 한 단어입니다. 'REGISTER', 옛 프랑스어로 ‘저항하라’는 뜻입니다. 매일 간수가 빵을 건네며 “가톨릭으로 돌아가겠다는 한마디만 하면 풀어 주겠다.”라고 회유할 때, 동료들 사이에서 “이러다 다 죽는다, 한 번만 ‘예’라고 하자.”라는 동요가 일어날 때, 그녀는 그 우물가의 글자를 가리켰습니다. 이 저항은 무력 항쟁의 구호가 아니었습니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 매일 작은 ‘아니요.’를 선택하는 자기 자신을 향한 신앙 고백이자 다짐이었습니다.
마리 뒤랑의 초상화
Original image by Société de l'Histoire du Protestantisme français.
Uploaded by Stephen M Davis, published on 23 September 2022.
기억해야 할 또 한 명의 이름, 잔 달브레
그런데 마리 뒤랑보다 두 세기 앞서, 위그노 운동의 시작점에 또 한 명의 여성이 서 있었습니다. 16세기 나바라(현재의 스페인 북부 지역과 프랑스 남부 지역에 걸친 작은 독립 왕국, 1620년 프랑스에 합병됨) 왕국의 여왕 잔 달브레(Jeanne d'Albret, 1528–1572)입니다. 가톨릭을 신봉하던 프랑스 왕실 한복판에서 자랐음에도 1560년 크리스마스에 공개적으로 칼뱅주의로 개종한 그녀는, 자신의 영지인 베아른에서 종교개혁을 단행하고 위그노들을 후원하였습니다. 로마가톨릭이 그녀에게 ‘새로운 종교를 심으려 한다’라고 비난했을 때 그녀가 남긴 답은 종교개혁의 본질을 한 문장으로 압축합니다. “저는 새로운 종교를 심으려는 것이 아닙니다. 몰락한 우리의 고대 신앙을 다시 세우려는 것입니다.”
잔 달브레 여왕의 초상화
Portrait au crayon de Jeanne d'Albret, reine de Navarre. Recueil, 1560년대
그녀의 아들이 훗날 프랑스 왕 앙리 4세가 되어 1598년 낭트 칙령을 반포했고, 그 칙령 덕분에 위그노 신앙은 마리 뒤랑의 시대까지 이어질 수 있었습니다. 잔 달브레가 없었다면, 마리 뒤랑이 지켜낸 그 신앙도 같은 모습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16세기의 잔 달브레 여왕과 18세기의 마리 뒤랑, 두 사람은 두 세기를 사이에 두고 있지만, 같은 끈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두 사람 외에도 잔의 어머니 마르가리타 당굴렘, 페라라의 르네 드 프랑스, 제네바의 마리 당티에르, 그리고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광야교회의 수많은 어머니와 자매들까지 종교개혁은 결코 남성만의 작품이 아니었습니다.
위그노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 부활의 기쁨은 고난과 모순되지 않습니다.
위그노들은 가장 어두운 감옥에서 가장 밝은 시편을 불렀습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만이 그 어둠 속에서도 노래할 수 있었습니다. 기쁨의 50일은 단지 고난과 어려움이 없는 기쁨과 즐거움이 아니라 깊은 고난과 죽음마저도 우리 인생의 결말이 아님을 고백하며 소망을 품고 살아가도록 우리를 인도하는 시간입니다.
- 종교개혁은 남성과 여성이 함께 이루어간 역사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루터, 칼뱅, 츠빙글리와 같은 남성 종교개혁자 중심의 종교개혁사만을 익숙하게 접해왔습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의 역사 속에는 잔 달브레와 마리 뒤랑 그리고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수많은 여성의 헌신과 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역사 속에서 흐려진 여성들의 흔적을 기억할 때, 우리는 비로소 참된 교회를 소망하며, 함께 걸어갔던 하나님의 사람들을 온전히 마주할 수 있습니다.
- 우리에게도 일상의 'REGISTER'가 필요합니다.
오늘날 우리를 가두는 콩스탕스 탑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노예로 부리는 갤리선도, 총칼로 협박하는 일도 없습니다. 대신 더 교묘한 회유가 우리의 삶에 다가옵니다. ‘한 번만 타협하면 편해진다.’,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느냐?’라는 속삭임 앞에서, 우리의 신앙은 흔들리지만, 우리는 작지만 당연하게 ‘아니요.’를 선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계산할 수 없는 은혜를 받아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리 뒤랑이 우물가에 새긴 'REGISTER'는 18세기 프랑스 위그노의 흔적을 넘어, 21세기 한국 그리스도인의 마음에 새겨져야 할 단어입니다.
57세에 석방되어 고향으로 돌아온 뒤에도 마리 뒤랑은 타협하며 살아온 이웃들의 차가운 시선을 마주해야 했지만, 네덜란드의 왈론 교회가 보내온 작은 연금조차 가난한 이들과 나누며 살았습니다. 그녀가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찬양한 시편 18편은 거대한 박해 앞에서도, 부활의 기쁨과 소망을 품고, 당당하게 ‘아니오’를 외쳤던 믿음의 선배들이 남긴 신앙 고백이자,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고백입니다.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시편 18편 1절~2절
콘스탕스 탑에 새겨진 ‘Register’
https://museeprotestant.org/
글. 정일석 연구원
문화선교연구원, 장로회신학대학교 역사신학 Ph.D c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