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활 메시지를 위한 신학적 성찰>
죽음을 넘어 영원한 소망을 주는 부활
(본문 요 14:6)
100세 시대의 역설적 현실과 과제
2023년 기준 한국인의 기대수명은 약 83세에 이르렀다. 2025년을 기준으로 한국사회는 전체 인구의 20% 이상이 65세 이상이 되는 초고령사회에 진입한 것으로 평가된다.
전통적으로 장수는 복으로 추앙되어 왔으며, 괄목할만한 생명 연장은 주목할만한 문명의 성취다. 그러나 현실에서 장수를 축복이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 수명이 늘어날수록 만성질환을 안고 살아가는 기간도 길어진다. 동시에 노년의 고립 문제가 심화되고 있다. 결국 장수는 축복이면서도 동시에 삶의 고통과 외로움이 가중되고 지속됨을 뜻하기도 한다.
이러한 역설 속에서 죽음에 대한 이해와 준비 또한 여전히 혼란 속에 있다. 죽음을 단지 피해야 하고, 지연시켜야 할 대상으로만 인식한다면 불안은 결코 줄어들지 않는다. 오히려 수명이 길어질수록 불안의 길이와 깊이도 더욱 그 정도를 더하게 될 것이다.
100세 시대는 ‘왜 사는가’, ‘어떻게 늙어갈 것인가’,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라는 질문들과 그에 대한 신학적, 목회적 응답이 요구된다. 과연 생명의 길이를 늘리는 것을 넘어서, 생명의 의미를 깊게 하는 이 시대에 적절한 응답은 무엇일까?
디지털/AI 시대, 과학기술이 제공하는 불멸의 유혹 앞에 선 우리
디지털 기술과 인공지능으로 상징되는 급격한 과학기술의 발달은 인간 삶의 구조 자체를 바꾸어 놓고 있다. 의료 기술은 수명을 연장하고, 유전자 연구는 노화를 늦추는 방법을 탐구하며, 인공지능은 인간의 사고와 감정 표현을 모방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일부 미래학자들은 ‘디지털 불멸’을 말한다. 인간의 기억과 의식을 데이터로 저장하고, 육체가 사라진 이후에도 정보로서 존재를 지속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가장 치명적 유혹은 죽음을 넘어 스스로 생명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유혹이다. 창세기에서 선악과와 함께 등장하였던, ‘생명나무에 대한 유혹의 21세기 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과학기술과 의료 공학은 생명을 ‘관리 가능한 시스템’으로, 통제의 대상으로 삼게 된다. 바로 여기에서 생명의 위기가 시작된다. 존엄은 효율에 우선성을 빼앗기게 된다. 생명이 연장의 문제로 축소되는 순간, 그 의미와 깊이는 자리를 잃게 된다.
죽음을 극복의 대상으로만 보는 인간 영생 프로젝트의 가장 치명적인 문제는, 죽음을 통해 묻게 되는 질문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불멸에 대한 기술적 상상력은 결국 창조주 없이 영원을 소유하려는 시도와 닮아있다. 이것은 ‘바벨탑’의 또 다른 모습이다. 현 시대에 하늘에 닿으려는 인간의 프로젝트다. 문제는 기술의 발전 자체가 아니라 기술이 인간 이해를 바꾸고 있다는 사실이다. 죽음이 극복의 대상이 될 때 노년은 제거해야 할 결함이 되고, 연약함은 고쳐야 할 오류가 되며, 의존은 실패로 간주된다.
성경적 생명관 확인하기: 프쉬케(Psyche)와 조에(Zoe)를 중심으로(창 2:7, 마 16:26, 요 1: 11)
성경은 인간 존재를 단순히 오래 사는 존재로 보지 않는다. 창세기 2장 7절은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고 말한다. 인간은 흙으로 지음받았으나 동시에 하나님의 숨을 받은 존재다.
‘프쉬케’는 유한한 생물학적 생명을 뜻한다. 예수님은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마 16:26)라고 말씀하셨다. 프쉬케는 소중하다. 몸은 하나님의 창조물이며 성전이다(고전 6:19). 그러나 그것은 궁극이 아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조에’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시작되는 생명을 뜻한다. 예수님은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라고 말씀하시며, 영생을 시간의 무한 연장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관계, 즉 관계적 생명으로 정의한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 5:12) 이처럼 생명은 소유물이 아니라 관계의 결과이다.
그리고 마침내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계 21:4)라고 선언한다. 이것이 조에의 완성이다. 단순히 생존이 연장되는 상태가 아니라, 죽음의 권세 자체가 제거된 새 창조다.
프쉬케가 ‘생명의 길이’를 뜻한다면 조에는 ‘생명의 깊이’를 뜻한다. 길이는 의학의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 깊이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결정적이다. 바울의 고백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1)는 조에의 관점에서만 가능하다. 조에의 생명 안에서는 죽음이 단절이 아니라 완성으로 이해된다.
성경적 죽음관 확인하기 : 무덤 앞의 눈물과 부활의 승리
성경은 죽음을 가볍게 여기지 않는다. 동시에 절대화하지도 않는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눈물을 흘리셨다. 그분은 곧 살리실 것을 아셨지만 죽음 앞에서 슬퍼하셨다. 죽음은 환상이 아니며, 단순한 자연현상도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타락 이후 침투한 “원수”다(고전 15:26). 이는 죽음이 단지 생물학적 종료가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사건임을 의미한다. 죽음이 원수인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도전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관계의 하나님이시라면 죽음은 그 관계의 파괴처럼 보여진다.
바로 이 지점에서 부활이 복음이 된다. 예수님의 부활은 “죽음의 죽음”이며 죽음이 최종적 권세가 아니라는 하나님의 통치 선언이다. 죽음은 현실이지만 궁극은 아니다. 죽음은 쉼표이지 마침표가 아니다! “부활은 복음이다”라는 말은 죽음 이후의 소망을 말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 존재의 의미가 죽음으로 무효화되지 않는다는 선언이며, 이 땅에서의 정의와 사랑이 헛되지 않다는 보증이다. 죽음이 마지막이 아니라면 오늘의 삶은 허무에 갇히지 않게 될 것이다. 죽음은 실재다. 그러나 더 실재인 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이다. 그리고 그 신실하심이 역사 속에 드러난 사건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다. 이런 맥락에서 예수님의 ‘빈 무덤’은 죽음의 죽음이자 부활의 선언이다!
부활 설교를 위한 신학적 메시지: 부활로 인하여 바뀌는 삶과 세계(본문: 요한복음 14:6)
성경은 ‘프쉬케의 연장’과 ‘조에의 생명’의 갈림길에 선 우리에게 참 생명이 하나님 안에 있다고 분명히 말한다. 생명의 길이가 늘어나는 시대에, 생명의 깊이를 선택하는 것이 신앙의 결단이다. 그리고 그 깊이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지금’ 시작된다.
요한복음 14장 6절의 말씀은 부활로 인하여 바뀌는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따라가는 신앙인들의 삶의 특징과 차별성을 원칙적으로 선언한다.
첫째, 부활은 단지 죽음 이후의 문제를 해결하는 교리가 아니다. 그것은 지금의 삶을 통전적으로 바꾸는 힘이다. 우선, 가치의 기준을 바꾼다. 세상은 생산성과 효율로 사람을 평가하지만 부활은 한 사람의 생명이 하나님 안에서 존엄하다고 선언한다. ‘생명’이심을 선포하신 예수님을 따라 ‘생명 중심’의 가치로 전환하게 한다.
둘째, 시간의 이해를 바꾼다. 현재는 사라질 순간이 아니라 영원으로 이어진 시간이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 때문에 우리의 부활이 시작되었다”는 고백은 오늘을 새롭게 해석한다. 현재 존재하는 길이 구주의 길과 잇대어진다면 우리의 현재는 영원으로 이어지는 길 위에 존재할 수 있음을 말한다.
셋째, 죽음을 대하는 태도가 바뀐다. ‘진리’와 잇대어 있다면 허무와 불안과 공포로부터 그만큼 자유로울 수 있다. 십자가와 부활로 확증된 ‘길과 진리’이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그를 따를 때 육체의 죽음이 마지막이 아님을 알게 된다. 우리가 따르는 길과 진리가 생명과 이어지기 때문이다. 죽음이 마지막이 아니라면 죽음을 직면할 수 있다. 회피하지 않고 절망하지 않으며 소망 가운데 맞이할 수 있다.
부활은 과거의 기적이 아니라 이미 시작된 새로운 창조를 뜻한다. 그래서 나이 듦은 실패의 시간이 아니라 깊어지는 시간이며, 병상은 절망의 자리가 아니라 영원을 준비하는 자리로 재해석된다. 부활은 미래의 종말을 기다리게만 하지 않는다. 그것은 지금 여기에서 다른 방식으로 살게 한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 때문에 우리의 부활이 시작되었다.”1)
그러므로 요한복음 14장 6절의 말씀은 로마서 12장 1-2절, 고린도후서 5장 17-21절의 말씀으로 나아가게 된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으니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며 세상 가운데 화목의 직분을 따라 사는 것이다.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죽음 이후의 삶을 막연히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시작된 하나님의 생명 안에서 현재를 다르게 살아가는 것이다. 부활 신앙은 죽음의 문화, 곧 끝없이 움켜쥐려는 삶의 방식에서 벗어나 생명을 나누는 구조로 옮겨가는 결단이다. 자기 욕망을 절제하고, 이웃을 위한 소비로 전환하는 절제의 삶, “죽음의 문화를 살려내는 생명 살림의 문화”를 요청한다. 부활절이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서 하신 활동이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음을 감지하는 능력을 회복하는 날”이다. 교회의 모든 활동은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의 만남이 지금 여기서 이루어지도록 돕는 활동”이어야 한다. 부활이 바꾸는 삶의 구조를 실제로 드러내는 공동체, 그것이 곧 부활 신앙을 살아내는 교회다.
결국 가치의 기준, 시간의 이해, 죽음을 대하는 태도의 바뀜을 통하여 부활은 기존의 세계를 바꾸고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간다. 무엇보다 부활로 인해 변화된 신앙인의 가치의 구조와 우선순위는 세상 구조에 대한 의문과 함께 대안을 찾게 한다. 가장 작은 자, 가장 약한 자, 가장 가난한 자의 삶이 하나님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은 우리의 우선순위를 재구성한다.2) 성공이 아니라 충실함이, 효율이 아니라 사랑이 삶의 기준이 된다.
1) 로완 윌리엄스, 『삶을 선택하라: 성육신과 부활에 관한 설교』(서울: 비아, 2017) 146-150
2) 같은 책, 68-69
나가며
오늘날 교회의 우선 과제는 오래 사는 방법을 모색하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길어진 시간을 어떻게 채울 것인가에 있다. 우리는 오래 살기 위한 존재만이 아니라, 영원을 향해 부름 받은 존재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마지막 문장이 아니라 쉼표라면, 오늘은 허무에 갇히지 않게 될 것이다. 죽음의 불안 속에 생존하는 사람이 아니라, 부활의 소망 안에서 담담히 걸어가는 사람이 될 수 있다. 그 소망이 길어진 시간을, 깊어진 의미로 채워 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 죽음의 불안과 공포를 넘는 영원하고 깊은 소망과 의미의 삶을 살아감으로 생명 중심 문화를 형성하기를 소원한다.
* 목회와신학 4월호에 실린 글을 요약, 수정하여 게시합니다.
임성빈(문화선교연구원 CVO, 장신대 명예교수/전 총장)
<부활 메시지를 위한 신학적 성찰>
죽음을 넘어 영원한 소망을 주는 부활
(본문 요 14:6)
100세 시대의 역설적 현실과 과제
2023년 기준 한국인의 기대수명은 약 83세에 이르렀다. 2025년을 기준으로 한국사회는 전체 인구의 20% 이상이 65세 이상이 되는 초고령사회에 진입한 것으로 평가된다.
전통적으로 장수는 복으로 추앙되어 왔으며, 괄목할만한 생명 연장은 주목할만한 문명의 성취다. 그러나 현실에서 장수를 축복이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 수명이 늘어날수록 만성질환을 안고 살아가는 기간도 길어진다. 동시에 노년의 고립 문제가 심화되고 있다. 결국 장수는 축복이면서도 동시에 삶의 고통과 외로움이 가중되고 지속됨을 뜻하기도 한다.
이러한 역설 속에서 죽음에 대한 이해와 준비 또한 여전히 혼란 속에 있다. 죽음을 단지 피해야 하고, 지연시켜야 할 대상으로만 인식한다면 불안은 결코 줄어들지 않는다. 오히려 수명이 길어질수록 불안의 길이와 깊이도 더욱 그 정도를 더하게 될 것이다.
100세 시대는 ‘왜 사는가’, ‘어떻게 늙어갈 것인가’,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라는 질문들과 그에 대한 신학적, 목회적 응답이 요구된다. 과연 생명의 길이를 늘리는 것을 넘어서, 생명의 의미를 깊게 하는 이 시대에 적절한 응답은 무엇일까?
디지털/AI 시대, 과학기술이 제공하는 불멸의 유혹 앞에 선 우리
디지털 기술과 인공지능으로 상징되는 급격한 과학기술의 발달은 인간 삶의 구조 자체를 바꾸어 놓고 있다. 의료 기술은 수명을 연장하고, 유전자 연구는 노화를 늦추는 방법을 탐구하며, 인공지능은 인간의 사고와 감정 표현을 모방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일부 미래학자들은 ‘디지털 불멸’을 말한다. 인간의 기억과 의식을 데이터로 저장하고, 육체가 사라진 이후에도 정보로서 존재를 지속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가장 치명적 유혹은 죽음을 넘어 스스로 생명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유혹이다. 창세기에서 선악과와 함께 등장하였던, ‘생명나무에 대한 유혹의 21세기 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과학기술과 의료 공학은 생명을 ‘관리 가능한 시스템’으로, 통제의 대상으로 삼게 된다. 바로 여기에서 생명의 위기가 시작된다. 존엄은 효율에 우선성을 빼앗기게 된다. 생명이 연장의 문제로 축소되는 순간, 그 의미와 깊이는 자리를 잃게 된다.
죽음을 극복의 대상으로만 보는 인간 영생 프로젝트의 가장 치명적인 문제는, 죽음을 통해 묻게 되는 질문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불멸에 대한 기술적 상상력은 결국 창조주 없이 영원을 소유하려는 시도와 닮아있다. 이것은 ‘바벨탑’의 또 다른 모습이다. 현 시대에 하늘에 닿으려는 인간의 프로젝트다. 문제는 기술의 발전 자체가 아니라 기술이 인간 이해를 바꾸고 있다는 사실이다. 죽음이 극복의 대상이 될 때 노년은 제거해야 할 결함이 되고, 연약함은 고쳐야 할 오류가 되며, 의존은 실패로 간주된다.
성경적 생명관 확인하기: 프쉬케(Psyche)와 조에(Zoe)를 중심으로(창 2:7, 마 16:26, 요 1: 11)
성경은 인간 존재를 단순히 오래 사는 존재로 보지 않는다. 창세기 2장 7절은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고 말한다. 인간은 흙으로 지음받았으나 동시에 하나님의 숨을 받은 존재다.
‘프쉬케’는 유한한 생물학적 생명을 뜻한다. 예수님은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마 16:26)라고 말씀하셨다. 프쉬케는 소중하다. 몸은 하나님의 창조물이며 성전이다(고전 6:19). 그러나 그것은 궁극이 아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조에’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시작되는 생명을 뜻한다. 예수님은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라고 말씀하시며, 영생을 시간의 무한 연장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관계, 즉 관계적 생명으로 정의한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 5:12) 이처럼 생명은 소유물이 아니라 관계의 결과이다.
그리고 마침내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계 21:4)라고 선언한다. 이것이 조에의 완성이다. 단순히 생존이 연장되는 상태가 아니라, 죽음의 권세 자체가 제거된 새 창조다.
프쉬케가 ‘생명의 길이’를 뜻한다면 조에는 ‘생명의 깊이’를 뜻한다. 길이는 의학의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 깊이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결정적이다. 바울의 고백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1)는 조에의 관점에서만 가능하다. 조에의 생명 안에서는 죽음이 단절이 아니라 완성으로 이해된다.
성경적 죽음관 확인하기 : 무덤 앞의 눈물과 부활의 승리
성경은 죽음을 가볍게 여기지 않는다. 동시에 절대화하지도 않는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눈물을 흘리셨다. 그분은 곧 살리실 것을 아셨지만 죽음 앞에서 슬퍼하셨다. 죽음은 환상이 아니며, 단순한 자연현상도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타락 이후 침투한 “원수”다(고전 15:26). 이는 죽음이 단지 생물학적 종료가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사건임을 의미한다. 죽음이 원수인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도전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관계의 하나님이시라면 죽음은 그 관계의 파괴처럼 보여진다.
바로 이 지점에서 부활이 복음이 된다. 예수님의 부활은 “죽음의 죽음”이며 죽음이 최종적 권세가 아니라는 하나님의 통치 선언이다. 죽음은 현실이지만 궁극은 아니다. 죽음은 쉼표이지 마침표가 아니다! “부활은 복음이다”라는 말은 죽음 이후의 소망을 말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 존재의 의미가 죽음으로 무효화되지 않는다는 선언이며, 이 땅에서의 정의와 사랑이 헛되지 않다는 보증이다. 죽음이 마지막이 아니라면 오늘의 삶은 허무에 갇히지 않게 될 것이다. 죽음은 실재다. 그러나 더 실재인 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이다. 그리고 그 신실하심이 역사 속에 드러난 사건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다. 이런 맥락에서 예수님의 ‘빈 무덤’은 죽음의 죽음이자 부활의 선언이다!
부활 설교를 위한 신학적 메시지: 부활로 인하여 바뀌는 삶과 세계(본문: 요한복음 14:6)
성경은 ‘프쉬케의 연장’과 ‘조에의 생명’의 갈림길에 선 우리에게 참 생명이 하나님 안에 있다고 분명히 말한다. 생명의 길이가 늘어나는 시대에, 생명의 깊이를 선택하는 것이 신앙의 결단이다. 그리고 그 깊이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지금’ 시작된다.
요한복음 14장 6절의 말씀은 부활로 인하여 바뀌는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따라가는 신앙인들의 삶의 특징과 차별성을 원칙적으로 선언한다.
첫째, 부활은 단지 죽음 이후의 문제를 해결하는 교리가 아니다. 그것은 지금의 삶을 통전적으로 바꾸는 힘이다. 우선, 가치의 기준을 바꾼다. 세상은 생산성과 효율로 사람을 평가하지만 부활은 한 사람의 생명이 하나님 안에서 존엄하다고 선언한다. ‘생명’이심을 선포하신 예수님을 따라 ‘생명 중심’의 가치로 전환하게 한다.
둘째, 시간의 이해를 바꾼다. 현재는 사라질 순간이 아니라 영원으로 이어진 시간이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 때문에 우리의 부활이 시작되었다”는 고백은 오늘을 새롭게 해석한다. 현재 존재하는 길이 구주의 길과 잇대어진다면 우리의 현재는 영원으로 이어지는 길 위에 존재할 수 있음을 말한다.
셋째, 죽음을 대하는 태도가 바뀐다. ‘진리’와 잇대어 있다면 허무와 불안과 공포로부터 그만큼 자유로울 수 있다. 십자가와 부활로 확증된 ‘길과 진리’이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그를 따를 때 육체의 죽음이 마지막이 아님을 알게 된다. 우리가 따르는 길과 진리가 생명과 이어지기 때문이다. 죽음이 마지막이 아니라면 죽음을 직면할 수 있다. 회피하지 않고 절망하지 않으며 소망 가운데 맞이할 수 있다.
부활은 과거의 기적이 아니라 이미 시작된 새로운 창조를 뜻한다. 그래서 나이 듦은 실패의 시간이 아니라 깊어지는 시간이며, 병상은 절망의 자리가 아니라 영원을 준비하는 자리로 재해석된다. 부활은 미래의 종말을 기다리게만 하지 않는다. 그것은 지금 여기에서 다른 방식으로 살게 한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 때문에 우리의 부활이 시작되었다.”1)
그러므로 요한복음 14장 6절의 말씀은 로마서 12장 1-2절, 고린도후서 5장 17-21절의 말씀으로 나아가게 된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으니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며 세상 가운데 화목의 직분을 따라 사는 것이다.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죽음 이후의 삶을 막연히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시작된 하나님의 생명 안에서 현재를 다르게 살아가는 것이다. 부활 신앙은 죽음의 문화, 곧 끝없이 움켜쥐려는 삶의 방식에서 벗어나 생명을 나누는 구조로 옮겨가는 결단이다. 자기 욕망을 절제하고, 이웃을 위한 소비로 전환하는 절제의 삶, “죽음의 문화를 살려내는 생명 살림의 문화”를 요청한다. 부활절이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서 하신 활동이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음을 감지하는 능력을 회복하는 날”이다. 교회의 모든 활동은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의 만남이 지금 여기서 이루어지도록 돕는 활동”이어야 한다. 부활이 바꾸는 삶의 구조를 실제로 드러내는 공동체, 그것이 곧 부활 신앙을 살아내는 교회다.
결국 가치의 기준, 시간의 이해, 죽음을 대하는 태도의 바뀜을 통하여 부활은 기존의 세계를 바꾸고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간다. 무엇보다 부활로 인해 변화된 신앙인의 가치의 구조와 우선순위는 세상 구조에 대한 의문과 함께 대안을 찾게 한다. 가장 작은 자, 가장 약한 자, 가장 가난한 자의 삶이 하나님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은 우리의 우선순위를 재구성한다.2) 성공이 아니라 충실함이, 효율이 아니라 사랑이 삶의 기준이 된다.
1) 로완 윌리엄스, 『삶을 선택하라: 성육신과 부활에 관한 설교』(서울: 비아, 2017) 146-150
2) 같은 책, 68-69
나가며
오늘날 교회의 우선 과제는 오래 사는 방법을 모색하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길어진 시간을 어떻게 채울 것인가에 있다. 우리는 오래 살기 위한 존재만이 아니라, 영원을 향해 부름 받은 존재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마지막 문장이 아니라 쉼표라면, 오늘은 허무에 갇히지 않게 될 것이다. 죽음의 불안 속에 생존하는 사람이 아니라, 부활의 소망 안에서 담담히 걸어가는 사람이 될 수 있다. 그 소망이 길어진 시간을, 깊어진 의미로 채워 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 죽음의 불안과 공포를 넘는 영원하고 깊은 소망과 의미의 삶을 살아감으로 생명 중심 문화를 형성하기를 소원한다.
* 목회와신학 4월호에 실린 글을 요약, 수정하여 게시합니다.
임성빈(문화선교연구원 CVO, 장신대 명예교수/전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