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들어가는 말
스위스 종교개혁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우리는 종종 장 칼뱅이나 울리히 츠빙글리와 같은 인물들의 이름에 익숙합니다. 하지만 칼뱅이 오기 전, 제네바의 초기 종교개혁을 주도했고, 스위스 보 지역(Pay de Vaud)의 종교개혁을 이끌면서 스위스 종교개혁과 개혁교회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역할을 담당한 중요하지만, 낯선 인물이 있습니다. 그 이름은 피에르 비레(Pierre Viret, 1511-1571)입니다. 비레는 온화한 성품과 뛰어난 설득력으로 '스위스 종교개혁의 미소'라 불리며, 기욤 파렐, 장 칼뱅과 더불어 스위스 종교개혁의 엘리트 삼총사로 불렸지만, 역사의 격랑 속에서 그가 남긴 흔적이 흐려지면서 낯선 종교개혁자가 되었지만, 그의 사상, 특히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대한 통찰은 절대 가볍지 않았습니다.

제네바와 로잔, 프랑스 남부까지 아우른 개혁의 여정
비레의 생애는 16세기 유럽의 종교적 격변기를 그대로 관통합니다. 1511년 스위스 오르브(Orbe)에서 태어난 그는 파리에서 인문주의와 종교개혁 사상을 접한 뒤, 고향으로 돌아와 기욤 파렐과 함께 고향과 스위스의 복음화를 위해 헌신합니다. 그의 활동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파예른에서는 수도사들에게 칼로 공격당했고, 제네바에서는 로마가톨릭 세력의 음모로 독이 든 수프를 먹고 사경을 헤매기도 했습니다. 이때 얻은 육체의 상처는 평생 그를 괴롭혔지만, 그는 이 상처를 ‘간증과 사역의 흔적’으로 고백하며 복음 사역을 이어 갔습니다.
비레의 탁월한 설교와 토론 능력은 많은 이들을 종교개혁의 편으로 이끌었으며, 특히 1536년 로잔 논쟁에서의 활약은 그를 보 지역 개혁의 중심인물로 각인시켰습니다. 로잔의 담임목사가 된 비레는 보 지역과 스위스 종교개혁을 위해 헌신했으며, 제네바에서 칼뱅이 시의회와의 갈등으로 추방되자 임시로 목회하며 칼뱅의 귀환을 준비했습니다. 비레가 주도하여 세운 로잔 아카데미는 스위스 개혁교회의 중요한 목회자 양성기관으로 수많은 지식인이 훈련받았습니다.
하지만 교회의 독립성, 특히 권징과 치리의 권한을 둘러싼 베른 시의회와의 갈등이 격화되면서 그의 로잔 사역은 큰 시련을 맞게 됩니다. 비레는 교회의 영적 권위를 강조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교회가 독립적으로 권징과 치리를 행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반면, 베른 시의회는 교회는 국가의 지시에 따라야 하며, 권징과 치리 역시 국가의 통제에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23년 동안의 갈등 끝에, 비레는 1559년 베른 시의회에 의해 보 지역에서 추방되어 동료들과 함께 로잔을 떠나 제네바로 향했으며, 이후 건강상의 이유로 프랑스 남부로 넘어가 님, 몽펠리에, 리옹에서 목회한 뒤, 프랑스에서도 추방된 뒤에는 잔 달브레 여왕이 통치하는 나바라 왕국으로 가서 생애 말년까지 목회하며 프랑스 개혁교회를 위해 헌신했습니다.

<비레가 목회한 도시 로잔, photo by REGIS COLOMBO>
영적 권위와 세속 권위 사이의 조화와 긴장
피에르 비레 사상의 핵심은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대한 깊은 고찰에 있습니다. 비레는 교회와 국가를 하나님이 세우신 두 개의 독립적인 기관으로 이해하며, 각자는 고유한 영역과 역할을 가진다고 보았으며, 모든 통치의 궁극적 권위가 인간이 아닌 하나님께 있음을 분명히 합니다.
비레에 의하면, 교회는 '영적 통치'를 담당하며 말씀 선포와 성례 집행을 통해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고 신앙을 돌보는 일에 집중하고, 국가는국 물리적인 영역의 '세속적 통치'를 책임집니다. 시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사회 질서를 유지하며, 악을 징벌해야 합니다. 비레는 이 두 기관이 서로의 영역을 존중하며 협력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도 교회의 독립성과 영적 순수성을 강조했으며, 이를 위한 핵심적인 제도로 권징(勸懲), 즉 교회의 치리를 강조했습니다.
교회의 영적 검, 권징
비레에게 권징은 교회가 세속 권력과 구별되는 가장 중요한 표지였습니다. 권징을 중요하게 보면서도 교회의 표지에는 포함하지 않았던 칼뱅에 비해, 비레는 권징을 교회의 표지에 포함할 정도로 권징을 중시했습니다. 그는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선포하는 것만큼이나, 성도들의 삶을 감독하고 죄를 범한 자들을 치리하여 교회의 거룩함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당시 로잔을 통치하던 베른 시의회가 이 권징의 권한을 교회가 아닌 시의회가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베른은 교회의 권징을 통한 거룩함의 회복보다 자신들이 강제로 점령한 보 지역의 안정을 우선시했기에 교회가 국가의 통제를 받지 않는 것을 경계했으며, 자기 영토에서 제네바의 칼뱅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비레는 단호했습니다. 그는 교회가 국가의 세속 통치를 인정하고 순종해야 하지만, 국가가 교회의 영적 권위를 무시하고, 권징의 권한을 인정하지 않으며, 성만찬 참여 자격까지 결정하는 것은 결코 용인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권징은 단순히 범죄자를 처벌하는 행위가 아니라, 공동체의 신앙을 지키고 죄 지은 자의 회개를 이끌어내는 목회적 돌봄의 행위였기 때문입니다. 결국 교회의 독립적인 권징권 확립을 둘러싼 베른과의 오랜 갈등은, 비레가 23년간 헌신했던 로잔에서 추방되는 결정적 원인이 되었습니다.

<비레가 목회한 로잔 대성당>
저항, 당연하지만 신중하게
베른과의 갈등은 비레가 폭군에 대한 저항권 문제를 고민하게 했습니다. 학자들은 비레가 저항권을 인정했지만, 매우 신중한 입장이었다고 평가합니다. 비레는 기본적으로 통치자의 권위가 하나님에게서 왔기에 순종해야 한다고 보았지만, 통치자가 하나님의 법에 명백히 어긋나는 명령을 내릴 때는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했지만, 무분별한 폭력 저항에는 분명하게 반대했습니다. 그는 먼저 소극적 저항, 즉 부당한 명령에 불복종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하며, 보다 적극적인 저항이 필요하다면, 개인이나 무질서한 군중이 아니라 의회나 귀족과 같은 '하급 행정관'에 의해 질서 있게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비레의 저항권 사상은 기본적으로 칼뱅의 견해와 유사하지만, 로잔에서 경험한 23년의 갈등을 통해 보다 현실적이고 구체적으로 저항권 개념을 발전시켰으며, 이후 프랑스 종교전쟁을 겪으며 무력을 사용한 적극적인 저항권 사상으로 발전하게 되는 위그노의 저항권 사상으로 이어지는 사상적 다리를 놓았습니다.
온건함 속에 담긴 강직함
피에르 비레는 모두가 인정할 만큼 온화하고 평화로운 성품을 지녔으며, 자신을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할 만큼 평화를 중요하게 생각했지만, 결코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은 강직한 개혁가였습니다. 그는 목회자이자 종교개혁자로서 교회의 개혁과 성도들의 삶의 변화를 위해 헌신하며 교회와 국가의 건강한 관계를 끊임없이 모색했습니다. 특히 그가 목숨처럼 지키려 했던 교회의 영적 권위에 대한 강조는 오늘날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합니다.
비레는 베른의 지나친 간섭에 맞서 교회의 독립성을 지키려 했던 투쟁을 통해, 정교분리의 원칙이 단순히 국가가 교회에 개입하지 않는 것을 넘어, 교회가 자신의 정체성과 거룩함을 지키고 세속 권력에 예속되지 않으려는 끊임없는 노력 속에서 획득되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교회가 세속적 영향력을 추구하며 정치권력과의 타협하지 않고, 말씀과 권징을 통해 자신을 정화하고 영적 권위를 세울 때 비로소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수 있다고 외친 피에르 비레의 외침과 최선을 다해 살아간 삶은 500여 년이 지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깊은 울림을 줍니다.

< 피에르 비레의 탄생 41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로잔에 세워진 분수대>
글. 정일석 연구원(문화선교연구원, 장신대(역사신학 Ph.D cand))
들어가는 말
스위스 종교개혁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우리는 종종 장 칼뱅이나 울리히 츠빙글리와 같은 인물들의 이름에 익숙합니다. 하지만 칼뱅이 오기 전, 제네바의 초기 종교개혁을 주도했고, 스위스 보 지역(Pay de Vaud)의 종교개혁을 이끌면서 스위스 종교개혁과 개혁교회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역할을 담당한 중요하지만, 낯선 인물이 있습니다. 그 이름은 피에르 비레(Pierre Viret, 1511-1571)입니다. 비레는 온화한 성품과 뛰어난 설득력으로 '스위스 종교개혁의 미소'라 불리며, 기욤 파렐, 장 칼뱅과 더불어 스위스 종교개혁의 엘리트 삼총사로 불렸지만, 역사의 격랑 속에서 그가 남긴 흔적이 흐려지면서 낯선 종교개혁자가 되었지만, 그의 사상, 특히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대한 통찰은 절대 가볍지 않았습니다.
제네바와 로잔, 프랑스 남부까지 아우른 개혁의 여정
비레의 생애는 16세기 유럽의 종교적 격변기를 그대로 관통합니다. 1511년 스위스 오르브(Orbe)에서 태어난 그는 파리에서 인문주의와 종교개혁 사상을 접한 뒤, 고향으로 돌아와 기욤 파렐과 함께 고향과 스위스의 복음화를 위해 헌신합니다. 그의 활동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파예른에서는 수도사들에게 칼로 공격당했고, 제네바에서는 로마가톨릭 세력의 음모로 독이 든 수프를 먹고 사경을 헤매기도 했습니다. 이때 얻은 육체의 상처는 평생 그를 괴롭혔지만, 그는 이 상처를 ‘간증과 사역의 흔적’으로 고백하며 복음 사역을 이어 갔습니다.
비레의 탁월한 설교와 토론 능력은 많은 이들을 종교개혁의 편으로 이끌었으며, 특히 1536년 로잔 논쟁에서의 활약은 그를 보 지역 개혁의 중심인물로 각인시켰습니다. 로잔의 담임목사가 된 비레는 보 지역과 스위스 종교개혁을 위해 헌신했으며, 제네바에서 칼뱅이 시의회와의 갈등으로 추방되자 임시로 목회하며 칼뱅의 귀환을 준비했습니다. 비레가 주도하여 세운 로잔 아카데미는 스위스 개혁교회의 중요한 목회자 양성기관으로 수많은 지식인이 훈련받았습니다.
하지만 교회의 독립성, 특히 권징과 치리의 권한을 둘러싼 베른 시의회와의 갈등이 격화되면서 그의 로잔 사역은 큰 시련을 맞게 됩니다. 비레는 교회의 영적 권위를 강조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교회가 독립적으로 권징과 치리를 행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반면, 베른 시의회는 교회는 국가의 지시에 따라야 하며, 권징과 치리 역시 국가의 통제에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23년 동안의 갈등 끝에, 비레는 1559년 베른 시의회에 의해 보 지역에서 추방되어 동료들과 함께 로잔을 떠나 제네바로 향했으며, 이후 건강상의 이유로 프랑스 남부로 넘어가 님, 몽펠리에, 리옹에서 목회한 뒤, 프랑스에서도 추방된 뒤에는 잔 달브레 여왕이 통치하는 나바라 왕국으로 가서 생애 말년까지 목회하며 프랑스 개혁교회를 위해 헌신했습니다.
<비레가 목회한 도시 로잔, photo by REGIS COLOMBO>
영적 권위와 세속 권위 사이의 조화와 긴장
피에르 비레 사상의 핵심은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대한 깊은 고찰에 있습니다. 비레는 교회와 국가를 하나님이 세우신 두 개의 독립적인 기관으로 이해하며, 각자는 고유한 영역과 역할을 가진다고 보았으며, 모든 통치의 궁극적 권위가 인간이 아닌 하나님께 있음을 분명히 합니다.
비레에 의하면, 교회는 '영적 통치'를 담당하며 말씀 선포와 성례 집행을 통해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고 신앙을 돌보는 일에 집중하고, 국가는국 물리적인 영역의 '세속적 통치'를 책임집니다. 시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사회 질서를 유지하며, 악을 징벌해야 합니다. 비레는 이 두 기관이 서로의 영역을 존중하며 협력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도 교회의 독립성과 영적 순수성을 강조했으며, 이를 위한 핵심적인 제도로 권징(勸懲), 즉 교회의 치리를 강조했습니다.
교회의 영적 검, 권징
비레에게 권징은 교회가 세속 권력과 구별되는 가장 중요한 표지였습니다. 권징을 중요하게 보면서도 교회의 표지에는 포함하지 않았던 칼뱅에 비해, 비레는 권징을 교회의 표지에 포함할 정도로 권징을 중시했습니다. 그는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선포하는 것만큼이나, 성도들의 삶을 감독하고 죄를 범한 자들을 치리하여 교회의 거룩함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당시 로잔을 통치하던 베른 시의회가 이 권징의 권한을 교회가 아닌 시의회가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베른은 교회의 권징을 통한 거룩함의 회복보다 자신들이 강제로 점령한 보 지역의 안정을 우선시했기에 교회가 국가의 통제를 받지 않는 것을 경계했으며, 자기 영토에서 제네바의 칼뱅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비레는 단호했습니다. 그는 교회가 국가의 세속 통치를 인정하고 순종해야 하지만, 국가가 교회의 영적 권위를 무시하고, 권징의 권한을 인정하지 않으며, 성만찬 참여 자격까지 결정하는 것은 결코 용인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권징은 단순히 범죄자를 처벌하는 행위가 아니라, 공동체의 신앙을 지키고 죄 지은 자의 회개를 이끌어내는 목회적 돌봄의 행위였기 때문입니다. 결국 교회의 독립적인 권징권 확립을 둘러싼 베른과의 오랜 갈등은, 비레가 23년간 헌신했던 로잔에서 추방되는 결정적 원인이 되었습니다.
<비레가 목회한 로잔 대성당>
저항, 당연하지만 신중하게
베른과의 갈등은 비레가 폭군에 대한 저항권 문제를 고민하게 했습니다. 학자들은 비레가 저항권을 인정했지만, 매우 신중한 입장이었다고 평가합니다. 비레는 기본적으로 통치자의 권위가 하나님에게서 왔기에 순종해야 한다고 보았지만, 통치자가 하나님의 법에 명백히 어긋나는 명령을 내릴 때는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했지만, 무분별한 폭력 저항에는 분명하게 반대했습니다. 그는 먼저 소극적 저항, 즉 부당한 명령에 불복종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하며, 보다 적극적인 저항이 필요하다면, 개인이나 무질서한 군중이 아니라 의회나 귀족과 같은 '하급 행정관'에 의해 질서 있게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비레의 저항권 사상은 기본적으로 칼뱅의 견해와 유사하지만, 로잔에서 경험한 23년의 갈등을 통해 보다 현실적이고 구체적으로 저항권 개념을 발전시켰으며, 이후 프랑스 종교전쟁을 겪으며 무력을 사용한 적극적인 저항권 사상으로 발전하게 되는 위그노의 저항권 사상으로 이어지는 사상적 다리를 놓았습니다.
온건함 속에 담긴 강직함
피에르 비레는 모두가 인정할 만큼 온화하고 평화로운 성품을 지녔으며, 자신을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할 만큼 평화를 중요하게 생각했지만, 결코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은 강직한 개혁가였습니다. 그는 목회자이자 종교개혁자로서 교회의 개혁과 성도들의 삶의 변화를 위해 헌신하며 교회와 국가의 건강한 관계를 끊임없이 모색했습니다. 특히 그가 목숨처럼 지키려 했던 교회의 영적 권위에 대한 강조는 오늘날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합니다.
비레는 베른의 지나친 간섭에 맞서 교회의 독립성을 지키려 했던 투쟁을 통해, 정교분리의 원칙이 단순히 국가가 교회에 개입하지 않는 것을 넘어, 교회가 자신의 정체성과 거룩함을 지키고 세속 권력에 예속되지 않으려는 끊임없는 노력 속에서 획득되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교회가 세속적 영향력을 추구하며 정치권력과의 타협하지 않고, 말씀과 권징을 통해 자신을 정화하고 영적 권위를 세울 때 비로소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수 있다고 외친 피에르 비레의 외침과 최선을 다해 살아간 삶은 500여 년이 지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깊은 울림을 줍니다.
< 피에르 비레의 탄생 41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로잔에 세워진 분수대>
글. 정일석 연구원(문화선교연구원, 장신대(역사신학 Ph.D c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