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교회사로 읽는 기독교 문화 2] 교회를 세우고, 마을을 새롭게 하다 - 한국교회 수련회의 시작, 사경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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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세우고, 마을을 새롭게 하다

한국교회 수련회의 시작, 사경회

이미지 출처: ChatGPT를 통한 생성 이미지 (ⓒ OpenAI)


여러분은 ‘사경회’라는 말을 들어보셨나요? 먼 옛날의 역사적 사건 같지만, 사경회는 한국교회의 부흥과 성장에 밑거름이 되었던 말씀 공부와 경건 훈련을 위한 모임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부흥회나 집회와 비슷하면서도, 분명히 다른 특징을 가진 특별한 모임이었습니다.

오늘은 『교회사로 읽는 기독교 문화』 시리즈 두 번째로 많은 모임과 활동을 준비하는 7월을 앞두고 한국교회의 아름다운 전통인 사경회가 무엇이며,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인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말씀에 목마른 사람들이 모이다.

사경회(査經會)란 말 그대로 '성경을 깊이 공부하는 모임'입니다. 한국교회에서 사경회가 처음 시작된 것은 19세기 말, 선교 초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888년, 언더우드 선교사는 한국인 사역자들을 집에 모아놓고 성경의 내용을 집중적으로 가르쳤는데, 이것이 사경회의 시작이었습니다. 선교사의 집에서 시작된 작은 모임으로 출발한 사경회가 한국교회 전체에 깊이 뿌리를 내린 데에는 네비우스 선교 정책의 영향이 있었습니다.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선교사 존 네비우스는 1890년에 안식년을 맞아 귀국하면서 조선에 와서 선교사들에게 자립(自立), 자전(自傳), 자치(自治)로 대표되는 선교 방법을 소개했습니다. 이때 함께 제시된 열 가지 선교 원칙 중 여섯 번째가 바로 사경회에 관한 것이었는데, 네비어우스 선교사는 ‘모든 신자는 지역 지도자(영수)와 순회 사역자(조사)의 지도 아래 조직적으로 성경을 공부해야 하며, 영수와 조사들도 성경 연구 모임을 통해 체계적으로 성경을 공부해야 한다.’라고 명시하여 성경 연구 모임, 즉 사경회를 강조했습니다. 이 원칙은 선교 초기부터 한국교회에 사경회가 중요한 활동으로 자리잡는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초창기의 사경회는 주로 교회 지도자급인 영수(평신도 지도자)나 조사(목회보조)들을 훈련하기 위한 모임이었으며, 짧게는 몇 주에서 길게는 몇 달 동안 합숙하면서 성경과 신학을 배웠습니다. 여기에 1890년대 초반부터는 일반 성도들도 참여하면서 사경회 문화는 전국 교회로 퍼져 나갔습니다.

마포삼열과 평양여자사경회. ⓒ한국교회사연구소

 

사경회의 교육과 운영

사경회에서는 무엇을 어떻게 했을까요? 당연히 ‘성경 공부와 경건 훈련’이 중심이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사경회에서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 각 권의 내용을 체계적으로 배우면서 당시 사람들이 실생활에서 필요로 했던 실용적 지식도 함께 배웠습니다.

 

사경회의 교육 과정은 매우 다양했습니다. 4복음서, 예수의 생애, 바울서신, 교리문답, 주기도문, 십계명, 사도신경 등의 주요 과목이 있었고, 주일학교 교육, 교회 경영, 기도, 개인 전도, 상담, 회의를 위한 실천적인 과목이 있었습니다. 특히 여성들이 모이는 여전도회 사경회에서는 아동교육, 건강위생, 새 생활운동 등 실생활에서 필요한 지식을 배우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사경회가 단순한 신앙교육을 넘어 근대화의 흐름 속에서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실용적인 지식을 전달하는 종합적인 교육활동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사경회의 하루 일과도 단순한 성경공부로만 구성되지 않았습니다.

보통 새벽 5시에 새벽기도회로 하루를 시작했고, 오전 9시부터 각자 반별 소그룹으로 성경 공부가 진행되었습니다. 점심 식사 후에는 반을 나누어 일반상식 과목을 다루었으며, 이후에는 흩어져 해당 지역의 집들을 방문하여 전도했습니다. 저녁에는 선교사나 부흥 강사가 인도하는 저녁 집회에 참석했습니다.

 

사경회 참가자들의 말씀에 대한 열정은 놀라웠습니다.

수백 리 떨어진 곳에서 몇 주치 쌀과 옷보따리를 직접 지고 걸어서 참석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1901년 평양에서 열린 한 여성 사경회 참석자들은 60~120km 떨어진 함경도 삭주나 의주 등에서 각자 먹을 쌀자루를 들고 찾아왔고, 이듬해 같은 장소에서 열린 남자 사경회에는 황해도, 서울, 심지어 전라도 목포, 무안 등 전국 각지에서 400명에 가까운 사람이 모였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말씀을 향한 성도들의 열망은 컸습니다.

1932년 평양 연합 사경회


사경회, 기독교문화 형성의 출발선

사경회는 단순히 교회 내부에서 그리스도인을 대상으로 진행하는 종교적인 모임이라는 한계를 넘어 한국 사회 속에 기독교문화를 형성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1. 근대 교육과 계몽의 장

사경회는 한국 사회의 근대화 과정에서 교육기관의 역할을 했습니다. 성경을 읽고 배우고 싶다는 사람들의 열망은 자연스럽게 교육에 대한 열정으로 이어졌고, 사경회는 그 열정의 중심에서 한글교육과 성경보급에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특히 사경회에서 다룬 건강위생법이나 아동교육 같은 과목들은 당시 사람들에게 필요했던 실용적인 지식이었기에 사경회를 통해 사람들에게 보급된 지식은 각자의 가정과 마을에 전해져서 한국 사회가 그 뿌리부터 변화되고, 사람들의 삶이 나아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2. 평신도가 중심이 된 교회 부흥의 엔진

특히 사경회는 평신도들이 중심이 된 신앙 운동이었습니다. 성도들은 특정한 목회자나 강사에게 의존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모여서 말씀을 배우고 전도했습니다. 모여서, 말씀을 배우고, 새로운 지식을 얻고, 전도한 사경회는 한국교회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강력한 엔진의 역할을 했습니다.

한국교회 성장의 출발점으로 평가되는 1903년 원산 대부흥은 하디 선교사가 인도하는 사경회 겸 기도회 중에 시작되었고, 1907년 평양 대부흥은 평안남도 남성 도(道)사경회 기간에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보면 한국교회 부흥의 역사에서 사경회가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있습니다.

평양의 여성사경회 ⓒ 한국기독공보



오늘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

한국교회에서 전통적인 사경회는 점차 희미해졌습니다. 1920년대 이후로는 이전만큼 활발하게 열리지 않았고, 저녁 설교 중심의 부흥회 형태가 일반화되었지만, 사경회가 남긴 정신은 오늘날 한국교회와 성도에도 여전히 유효하며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먼저, 사경회는 수많은 프로그램과 즐길 것이 넘치는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성경으로 돌아가자’라고 외칩니다. 화려한 프로그램이나 감정적인 열광이 아니라, 성경 한 권 한 권을 차분히 읽고 묵상하며, 그 말씀을 삶에 적용하기 위해 함께 고민하고, 격려하는 시간의 가치와 그 고민을 나누며, 함께 걸어가는 신앙 공동체의 소중함을 발견하게 합니다.

또한, 사경회는 교회가 세상과 어떻게 만나야 하는지에 대한 오래되었지만 여전히 새로운 모델을 제시합니다. 신앙 지식과 기독교적인 내용만 머무르지 않고, 당시 사회와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새로운 지식까지 적극적으로 다룬 사경회의 모습은 오늘날의 교회가 복음과 기독교적인 가치를 지키면서도 사회가 필요로하고, 교회에 요청하는 것이 무엇인지 관심을 가지고 열린 마음으로 함께 걸어갈 것을 요청합니다. 그점에서 사경회는 한국 교회가 사회 속에 새로운 기독교적 문화를 만들어내고자 고민하고 실천했던 출발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교회의 7월은 여름성경학교, 수련회, 단기선교 등의 다양한 모임과 활동을 준비하는 1년 중 가장 바쁜 시기입니다. 한국교회 믿음의 선배들이 새로워짐의 열정을 품고 모였던 사경회를 기억하며 그 정신을 우리의 시간 속에 되새겨보는 여름이길 바래봅니다.

 


글. 정일석 연구원(문화선교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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