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쁨의 50일]을 시작하며
부활, 교회, 신앙_1700년 전 역사가 우리에게 답하다
- 제1차 니케아 공의회(325) -

<Michael Damaskivos, First Council of Nicaea, 1591>
2025년은 기독교 역사에 굵직한 기념비가 세워진 지 정확히 1700년이 되는 해입니다. 지금으로부터 까마득한 옛날인 서기 325년, '니케아'(현재 튀르키예의 이즈니크)라는 도시에서 초대교회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이벤트 중 하나인 제1차 니케아 공의회가 열렸습니다. 이 공의회는 로마 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소집했고, 로마제국 전역에서 약 300명이 넘는 기독교 성직자들이 모였는데, 제국 전역의 성직자들이 한자리에 모인 공의회는 기독교 역사상 처음이었습니다. 이 첫 번째 니케아 공의회에서 결정된 내용들은 오늘날 우리가 아는 기독교의 모습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습니다. 마치 아이폰이 처음 세상에 공개된 2007년 1월 9일처럼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시대를 연 '결정적 순간‘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1700년 전 니케아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고, 그게 왜 아직도 중요할까요? 제1차 니케아 공의회의 세 가지 핵심 결정에 주목해 봅시다.
1. 부활절 날짜 정하기: '언제' 함께 축하할까?
예수님의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 중 핵심입니다. 당연히 초대교회부터 부활절은 중요한 절기였는데, 문제는 '언제' 부활절을 지킬 것인지에 대해 각자의 생각이 달랐다는 것입니다. 어떤 교회는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니산월 14일) 날짜에 맞춰 그날이 주일이 아니어도 부활절을 지켰고, 어떤 교회는 유월절이 지난 뒤 첫 번째 '주일'을 부활절로 정했습니다. 예수님이 안식일(금요일 저녁~토요일 저녁)의 다음 날인 주일에 부활하셨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혼란이 생겼습니다. "어? 왜 저 교회는 이번 주가 부활절이라고 하는데, 우리는 다음 주지?" 같은 일이 생겼습니다. 분명히 같은 신앙을 가진 공동체인데 부활절이라는 중요한 절기의 날짜가 다르니 교회의 일체감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제1차 니케아 공의회는 치열한 토론 끝에 '춘분이 지나고 처음 보름달이 뜬 후의 첫 번째 주일'로 부활절 날짜를 통일하기로 했습니다. 뭔가 굉장히 복잡해 보이지만, 핵심은 '모든 교회가 같은 주일'에 부활절을 지키자는 것이었고 오늘날까지도 전 세계 대부분의 교회가 이 기준을 따르고 있습니다. 부활절 날짜 결정은 단순한 합의 이상의 ’선언‘이었습니다. 역사가들은 이 결정이 기독교가 유대교 전통에서 완전히 벗어나 독자적인 정체성을 세우고, 전 세계에 퍼진 교회들이 '하나의 교회'로서 같은 달력으로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다는 점에 큰 의미를 부여합니다.
2. 국가의 교회 개입: 황제의 '도움'일까, '간섭'일까?

<작가미상, 제 1차 공의회의 참석자들이
니케아 신경을 들고 있는 모습을 그린 동방정교회 이콘>
제1차 니케아 공의회가 열릴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였습니다. 그가 등장하기 이전까지 기독교는 박해와 경계의 대상이었지만, 콘스탄티누스 시대에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콘스탄티누스는 왜 공의회를 소집했을까요? 강하고 통일된 로마 제국을 원했던 황제는 제국을 하나로 통합하는 데 기독교가 큰 역할을 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교회가 내부 문제(특히 아레이오스 논쟁)로 분열되는 모습을 보고 ’이거 안 되겠네‘ 싶었고, 교회가 분열되면 제국도 흔들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황제는 모든 성직자를 니케아로 불러 모으고, 회의 비용도 국가에서 지원했으며, 회의 장소에 직접 나와서 개회 연설을 하고 토론 과정에 귀 기울였습니다. 이러한 황제의 모습은 교회가 더 이상 숨어 지내야 하는 비밀집단이 아니라, 황제의 관심과 보호를 받는 로마 제국의 중심 세력이 되었음을 세상에 선포했습니다.
이건 정말 엄청난 변화였습니다. 이제 교회는 박해 걱정 없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황제가 보호하는 교회에 돈과 사람이 모여들면서 교회는 빠르게 성장했습니다. 하지만 어려운 점도 생겼습니다. 국가권력이 교회의 일에 깊숙이 개입하면서 황제의 정치적 계산이나 선택이 교회의 결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즉, 니케아 공의회는 국가와 교회가 얽히고설키는 복잡한 역사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었고, 이 관계는 이후 수백 년간 기독교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3. 삼위일체 교리의 초석: '예수님은 누구신가?'라는 질문에 대답하다

<Andrei Rublev, 삼위일체, 1408>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가장 뜨거웠고, 가장 중요했던 논쟁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알렉산드리아 지역의 주교인 '아레이오스'는 ’’ 예수님은 영원으로부터 오신 분이 아니라 무(無)로부터 만들어진 것‘이며 “아들이 존재하지 않는 때가 있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와 본질이 다르다.’(유사본질, homoiousios)고 주장했는데, 이 말은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레이오스의 주장은 초대교회에 큰 충격이었습니다. 예수님이 피조물이라면, 우리는 왜 그분을 예배하는가? 피조물이 어떻게 죄에 빠진 인류를 구원하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할 수 있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들이 이어졌습니다. 대부분의 초대교회 지도자는 아레이오스의 주장이 성경의 가르침과 사도들로부터 전해져 온 정통신앙을 왜곡한다고 생각했고,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아타나시우스는 아레이오스에 맞서 ‘하나님과 예수님의 본질이 같다.’(동일본질, homoousios)라고 주장하여 예수님의 완전한 신성을 변호했습니다.
제1차 니케아 공의회는 이 문제를 놓고 오랜 시간 논쟁했습니다. 그 결과 공의회에 모인 성직자들은 아레이오스의 주장을 잘못된 가르침(이단)으로 선언하고, 예수 그리스도는 성부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을 가지신 분임을 공식적으로 선포하여 삼위일체 교리의 기초를 놓았습니다.
1700년 전 니케아가 지금 우리에게 말을 걸다
까마득한 과거인 325년에 열렸던 제1차 니케아 공의회는 1700년이 지난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여전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교회의 일치와 올바른 신앙의 중요성을 보여줍니다.
부활절 날짜를 통일하고 하나의 믿음을 고백하는 하나의 신앙고백을 만든 것은, 교회가 세워진 지역은 달라도 모든 그리스도인이 같은 신앙을 고백한다면, 하나의 공동체임을 확인하는 과정이었으며 교회가 중동과 유럽을 넘어 전 세계로 뻗어나갈 수 있는 문을 연 순간이었습니다.
둘째, 세상 속에 세워진 교회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던져줍니다.
교회가 국가의 보호 아래 놓인 것은 축복이며 동시에 도전이었습니다. 교회는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야 하지만, 세상의 힘에 휘둘리지 않고 복음의 진리를 지켜야 한다는 숙제는 니케아 이후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신가라는 질문에 대한 교회의 답입니다.
니케아 공의회는 예수님을 성부 하나님과 동등하신 '성자 하나님'으로 고백하여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지켜냈습니다. 우리는 이 결정 위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고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을 더욱 단단히 붙들 수 있었습니다.
제1차 니케아 공의회는 모든 것을 끝낸 완벽한 회의는 아니었습니다. 공의회가 끝난 뒤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에 대한 갈등은 계속되었고, 교회에는 크고 작은 문제들이 계속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회의를 통해 초기 기독교는 자신들의 신앙을 분명히 하고, 성장하고 있는 교회 공동체의 질서를 세웠으며, 앞으로 교회가 세상 속에서 어떻게 존재할 것인지에 대한 방향을 잡았습니다.
기쁨의 50일은 부활절 이후부터 성령강림절까지 50일의 기간으로, 교회는 부활을 기억하며, 삶으로 드러내며, 축제를 누리는 마음으로 이 시기를 보냈습니다. 지금 우리는 기쁨의 50일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흔들리는 시대에 그리스도인으로 살고 있는 우리에게 1700년 전 니케아 공의회는 우리 신앙의 뿌리가 무엇인지, 지켜야 할 가치는 무엇인지, 바라보아야 할 소망은 무엇인지 가르쳐 주는 든든한 나침반이 되어준다는 점에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게임 체인저’입니다.
글 정일석 연구원(문화선교연구원)
[기쁨의 50일]을 시작하며
부활, 교회, 신앙_1700년 전 역사가 우리에게 답하다
- 제1차 니케아 공의회(325) -
<Michael Damaskivos, First Council of Nicaea, 1591>
2025년은 기독교 역사에 굵직한 기념비가 세워진 지 정확히 1700년이 되는 해입니다. 지금으로부터 까마득한 옛날인 서기 325년, '니케아'(현재 튀르키예의 이즈니크)라는 도시에서 초대교회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이벤트 중 하나인 제1차 니케아 공의회가 열렸습니다. 이 공의회는 로마 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소집했고, 로마제국 전역에서 약 300명이 넘는 기독교 성직자들이 모였는데, 제국 전역의 성직자들이 한자리에 모인 공의회는 기독교 역사상 처음이었습니다. 이 첫 번째 니케아 공의회에서 결정된 내용들은 오늘날 우리가 아는 기독교의 모습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습니다. 마치 아이폰이 처음 세상에 공개된 2007년 1월 9일처럼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시대를 연 '결정적 순간‘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1700년 전 니케아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고, 그게 왜 아직도 중요할까요? 제1차 니케아 공의회의 세 가지 핵심 결정에 주목해 봅시다.
1. 부활절 날짜 정하기: '언제' 함께 축하할까?
예수님의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 중 핵심입니다. 당연히 초대교회부터 부활절은 중요한 절기였는데, 문제는 '언제' 부활절을 지킬 것인지에 대해 각자의 생각이 달랐다는 것입니다. 어떤 교회는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니산월 14일) 날짜에 맞춰 그날이 주일이 아니어도 부활절을 지켰고, 어떤 교회는 유월절이 지난 뒤 첫 번째 '주일'을 부활절로 정했습니다. 예수님이 안식일(금요일 저녁~토요일 저녁)의 다음 날인 주일에 부활하셨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혼란이 생겼습니다. "어? 왜 저 교회는 이번 주가 부활절이라고 하는데, 우리는 다음 주지?" 같은 일이 생겼습니다. 분명히 같은 신앙을 가진 공동체인데 부활절이라는 중요한 절기의 날짜가 다르니 교회의 일체감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제1차 니케아 공의회는 치열한 토론 끝에 '춘분이 지나고 처음 보름달이 뜬 후의 첫 번째 주일'로 부활절 날짜를 통일하기로 했습니다. 뭔가 굉장히 복잡해 보이지만, 핵심은 '모든 교회가 같은 주일'에 부활절을 지키자는 것이었고 오늘날까지도 전 세계 대부분의 교회가 이 기준을 따르고 있습니다. 부활절 날짜 결정은 단순한 합의 이상의 ’선언‘이었습니다. 역사가들은 이 결정이 기독교가 유대교 전통에서 완전히 벗어나 독자적인 정체성을 세우고, 전 세계에 퍼진 교회들이 '하나의 교회'로서 같은 달력으로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다는 점에 큰 의미를 부여합니다.
2. 국가의 교회 개입: 황제의 '도움'일까, '간섭'일까?
<작가미상, 제 1차 공의회의 참석자들이
니케아 신경을 들고 있는 모습을 그린 동방정교회 이콘>
제1차 니케아 공의회가 열릴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였습니다. 그가 등장하기 이전까지 기독교는 박해와 경계의 대상이었지만, 콘스탄티누스 시대에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콘스탄티누스는 왜 공의회를 소집했을까요? 강하고 통일된 로마 제국을 원했던 황제는 제국을 하나로 통합하는 데 기독교가 큰 역할을 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교회가 내부 문제(특히 아레이오스 논쟁)로 분열되는 모습을 보고 ’이거 안 되겠네‘ 싶었고, 교회가 분열되면 제국도 흔들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황제는 모든 성직자를 니케아로 불러 모으고, 회의 비용도 국가에서 지원했으며, 회의 장소에 직접 나와서 개회 연설을 하고 토론 과정에 귀 기울였습니다. 이러한 황제의 모습은 교회가 더 이상 숨어 지내야 하는 비밀집단이 아니라, 황제의 관심과 보호를 받는 로마 제국의 중심 세력이 되었음을 세상에 선포했습니다.
이건 정말 엄청난 변화였습니다. 이제 교회는 박해 걱정 없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황제가 보호하는 교회에 돈과 사람이 모여들면서 교회는 빠르게 성장했습니다. 하지만 어려운 점도 생겼습니다. 국가권력이 교회의 일에 깊숙이 개입하면서 황제의 정치적 계산이나 선택이 교회의 결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즉, 니케아 공의회는 국가와 교회가 얽히고설키는 복잡한 역사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었고, 이 관계는 이후 수백 년간 기독교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3. 삼위일체 교리의 초석: '예수님은 누구신가?'라는 질문에 대답하다
<Andrei Rublev, 삼위일체, 1408>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가장 뜨거웠고, 가장 중요했던 논쟁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알렉산드리아 지역의 주교인 '아레이오스'는 ’’ 예수님은 영원으로부터 오신 분이 아니라 무(無)로부터 만들어진 것‘이며 “아들이 존재하지 않는 때가 있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와 본질이 다르다.’(유사본질, homoiousios)고 주장했는데, 이 말은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레이오스의 주장은 초대교회에 큰 충격이었습니다. 예수님이 피조물이라면, 우리는 왜 그분을 예배하는가? 피조물이 어떻게 죄에 빠진 인류를 구원하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할 수 있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들이 이어졌습니다. 대부분의 초대교회 지도자는 아레이오스의 주장이 성경의 가르침과 사도들로부터 전해져 온 정통신앙을 왜곡한다고 생각했고,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아타나시우스는 아레이오스에 맞서 ‘하나님과 예수님의 본질이 같다.’(동일본질, homoousios)라고 주장하여 예수님의 완전한 신성을 변호했습니다.
제1차 니케아 공의회는 이 문제를 놓고 오랜 시간 논쟁했습니다. 그 결과 공의회에 모인 성직자들은 아레이오스의 주장을 잘못된 가르침(이단)으로 선언하고, 예수 그리스도는 성부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을 가지신 분임을 공식적으로 선포하여 삼위일체 교리의 기초를 놓았습니다.
1700년 전 니케아가 지금 우리에게 말을 걸다
까마득한 과거인 325년에 열렸던 제1차 니케아 공의회는 1700년이 지난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여전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교회의 일치와 올바른 신앙의 중요성을 보여줍니다.
부활절 날짜를 통일하고 하나의 믿음을 고백하는 하나의 신앙고백을 만든 것은, 교회가 세워진 지역은 달라도 모든 그리스도인이 같은 신앙을 고백한다면, 하나의 공동체임을 확인하는 과정이었으며 교회가 중동과 유럽을 넘어 전 세계로 뻗어나갈 수 있는 문을 연 순간이었습니다.
둘째, 세상 속에 세워진 교회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던져줍니다.
교회가 국가의 보호 아래 놓인 것은 축복이며 동시에 도전이었습니다. 교회는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야 하지만, 세상의 힘에 휘둘리지 않고 복음의 진리를 지켜야 한다는 숙제는 니케아 이후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신가라는 질문에 대한 교회의 답입니다.
니케아 공의회는 예수님을 성부 하나님과 동등하신 '성자 하나님'으로 고백하여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지켜냈습니다. 우리는 이 결정 위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고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을 더욱 단단히 붙들 수 있었습니다.
제1차 니케아 공의회는 모든 것을 끝낸 완벽한 회의는 아니었습니다. 공의회가 끝난 뒤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에 대한 갈등은 계속되었고, 교회에는 크고 작은 문제들이 계속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회의를 통해 초기 기독교는 자신들의 신앙을 분명히 하고, 성장하고 있는 교회 공동체의 질서를 세웠으며, 앞으로 교회가 세상 속에서 어떻게 존재할 것인지에 대한 방향을 잡았습니다.
기쁨의 50일은 부활절 이후부터 성령강림절까지 50일의 기간으로, 교회는 부활을 기억하며, 삶으로 드러내며, 축제를 누리는 마음으로 이 시기를 보냈습니다. 지금 우리는 기쁨의 50일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흔들리는 시대에 그리스도인으로 살고 있는 우리에게 1700년 전 니케아 공의회는 우리 신앙의 뿌리가 무엇인지, 지켜야 할 가치는 무엇인지, 바라보아야 할 소망은 무엇인지 가르쳐 주는 든든한 나침반이 되어준다는 점에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게임 체인저’입니다.
글 정일석 연구원(문화선교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