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인의 문화 읽기[문학 속 성경]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 행복한 도시

2019-09-26
조회수 1175


상상은 기억에서 비롯된다. 가인은 동생 아벨을 죽인 기억 때문에, 누군가에 의해 살해될 수도 있을 거라 상상했다. 끔찍한 상상 때문에 가인은 두려웠고, 두려움을 극복하기위해 성을 쌓았다. 두려움의 크기만큼 성벽은 두꺼웠을 것이다. 성벽의 두께만큼 가인의 얼굴도 두꺼웠을까, 가인과 가인의 후예들은 잘 살았다. 살인자 가인과 잘 살았던 그 후손들의 약력이다.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창4:17~22) 

가인이 쌓은 성을 기반으로 가인의 후예들은 가축을 키웠고 수금과 퉁소를 발명하기도 했고 청동기 철기 문화를 열기도 했다. 가인과 가인의 후예들은 성벽 속에서 문화를 창달하고 문명을 세우며 잘 살았다. 가인이 쌓은 성은 이렇게 “행복한 도시”가 되었다. 


도시에서 사람들은 행복하다. 사람들은 도시에서 살아야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도시엔 “아름다운 풍광도 없고, 식물도 없고, 영혼도 없”지만, 행복하기 위해 도시에 살아야 한다고들 생각한다. 성벽 속에 유배되어 안전하다고 여겼을 가인처럼, 가인의 후예들은 문명과 문화로 쌓아올린 도시의 성벽 안에서 행복하다.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194×년 알제리 해안에 있는 프랑스 도청 소재지 “오랑”이라는 “행복한 도시”에 페스트라는 전염병이 돌았다. 페스트로 사람들이 죽어나갔고, 전염병이 다른 도시로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 도시의 문은 닫혔고 길도 막혔다. 편지 왕래마저 금지되어 도시 밖 사람들과 말도 끊겼다. 페스트를 통해 도시 안에 사람들은 철저히 유배되었다. 도시 전체가 넘을 수 없는 가시울타리에 갇힌 듯, 시민 모두가 다 위리안치 되었다. 


"행복한 도시"에 페스트가 돌면서 사람들은 마침내 죽음을 기억하게 되었다. 어제 만난 사람이 오늘 죽기도 하고, 오늘 함께 식탁에 앉았던 가족이 내일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자 비로소 죽음이 기억났고 어떻게 죽어야할지 상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죽음에 대한 상상은 부질없었다. 페스트 때문에 상상한대로 죽을 수 없었다. 가족의 위로를 받으며, 가족에게 마지막 말을 남기며, 손 잡아주며, 눈물 닦기를 권하며 맞이하는 죽음을 상상할 수 없었다. 페스트로 확진 받는 순간 격리되어야 했고 격리를 거부하면 경찰에 체포되듯 격리되었다. 


페스트가 돌기 전에도 늘 죽음은 있었고, 수많은 사람들은 도시 속 어딘가에 격리되어 유배당한 채 죽음을 맞았다. 가인이 시작한 "행복한 도시"에선 이미 격리와 유배가 일상이었다. 

"이 곳에서 이루어지는 중요한 사업들, 보잘것없는 환경, 순식간에 사라져버리는 석양, 쾌락의 특성 등을 고려해보면, 모든 점에서 좋은 건강 상태가 요구된다. 이곳에서 환자는 아주 고독하다. 시민들이 한 명도 빠짐없이 전화로 아니면 카페에 앉아 어음과 선하증권, 할인에 대해 이야기하는 순간, 더위에 달궈져 탁탁 소리를 내며 튀는 수많은 벽들 뒤에서 궁지에 몰려 죽어가는 사람을 생각해보라. 그러면 이처럼 메마른 고장에서 죽음을 맞이할 때, 그 죽음이 아무리 현대적일지라도 거기에는 뭔가 불편한 것이 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죽음에 뭔가 불편한 게 있다. 아무리 현대적일지라도 도시에선 뭔가 불편한 게 있다. 페스트 때문에 격리되고, 페스트 때문에 도시 바깥세상으로부터 유배당하는 게 아니라, 도시는 이미 격리와 유배로 감염되어 있었다. 전염을 막기 위해 격리되고 유배당하는 것이 페스트의 현상이라면, 가인이 성을 쌓을 때부터 페스트는 도시에서 사라진 적이 없다. "심오한 의미에서 페스트가 사실은 유배와 이별"이라면 전염병 페스트가 돌기 전에 도시는 이미 유배와 이별이라는 페스트가 펴져있었다. 가인이 스스로를 유배시키며 도시를 세웠을 때 이미 페스트는 성벽의 돌덩이 사이사이에 스며있었던 것이다.


오랑에 페스트가 창궐했던 194×년은 2차 세계대전 전후다. 2차 세계대전은 1939년 9월 1일부터 1945년 9월 2일까지 치러진 인류 역사상 가장 참혹한 전쟁이었다. 전사자는 2천5백만 명, 민간인도 3천만 명이 희생됐다고 한다. 지금 역사 시험을 보듯 죽은 사람의 수를 어림하는 것 자체가 범죄다. 전쟁은 끝나고 나서도 여전히 악인 것이다. 악으로서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아 고통으로 남아있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고통이 여전하고, 징용 노동자들의 억울함은 풀리지 않았다. 일본은 일본대로 원폭피해자들의 고통이 크다. 전쟁을 일으키지 않으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국가, 전쟁을 통해 이익을 꾀하려는 국가, 전쟁을 통해 전리품을 챙겨야하는 국가와 그 국가를 구성하는 사람들은 도시에 유배되어 살고 있다. 가인이 품었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바이러스는 누군가를 죽여야 하는 살의라는 변종바이러스가 되었다. 카뮈는 이 변종바이러스를 중세 시대에 유럽 인구의 절반을 죽게 했던 페스트라 부른 것이다. 


끝나지 않는 고통으로 남은 전쟁은 살아남은 자들에게 마땅히 슬퍼할 의무를 지운다. 윤동주는 슬퍼하는 자에게 "저히가 영원히 슬플 것"이라고 강복한다. 전쟁의 현실이든, 페스트라는 소설 속 설정이든, 사람들이 유배되고 격리당하며 이별해야 하는 도시에 산다면, 마땅히 영원히 슬퍼하는 게 사람의 몫이다. 슬퍼해야 사람이다. 


슬픔 중에라도 페스트에 취약하지 않는 나라를 상상할 수 있을까. 상상은 기억에서 비롯된다. 옛날 에덴에 있었다는 참 좋은 세상, 사람들이 스스로 지혜롭다 여기지 않고 선과 악을 가르지 않았던 참 좋은 세상을 기억한다면, 페스트 따위 없는 나라를 상상할 수 있을 거다. 카뮈는 페스트가 없는, 성벽 사이에 페스트가 잠복하지 않는 나라를 진정한 조국이라 부르며 그 나라를 상상한다. 

"그들 모두에게 진정한 조국은 그 숨막히는 도시의 벽 너머에 있었다. 진정한 조국은 언덕 위의 향기로운 덤불 속에, 바닷속에, 자유로운 고장들과 사랑의 무게 속에 있었다. 그들은 그 밖의 모든 것에 대해서는 혐오감을 느끼고 등을 돌린 채 그 조국을 향해, 행복을 향해 다시 돌아가고 싶었던 것이다."

"보시기에 심히 좋았"던 참 좋은 세상을 기억하고 상상하는 이유다. 다시 돌아가고 싶은 것이다.



글/김영준

민들레교회 목사다. 소설을 좋아해서 학생일 땐 시험 전날에도 밤새워 소설을 읽는 일탈을 반복하곤 했다. 그림을 찾아보긴 하는데 게을러서 미술관을 직접 가기보다 책에 인쇄된 그림을 읽곤 한다. 민들레교회는 임대아파트에서, 공구상가에서, 다른 교회 예배당에서 모였고, 지금은 '민들레와달팽이'라는 카페에서 모인다. 김포에 산다.



0 0
2020년 이전 칼럼을 보고 싶다면?

한국교회의 문화선교를 돕고 변화하는 문화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방향을 제언하는 다양한 콘텐츠를 온라인에서 나눕니다.

문화매거진 <오늘>

살아있는 감성과 예술적 영성을 통해 아름다운 삶의 문화를 꽃피워가는 문화매거진 <오늘>(2002~2014)입니다.

시대를 읽고 교회의 미래를 열어갑니다

뉴스레터 구독

개인정보 수집 및 이용

뉴스레터 발송을 위한 최소한의 개인정보를 수집하고 이용합니다. 수집된 정보는 발송 외 다른 목적으로 이용되지 않으며, 서비스가 종료되거나 구독을 해지할 경우 즉시 파기됩니다.

광고성 정보 수신

제휴 콘텐츠 정보 등의 광고성 정보를 수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