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TT리뷰 [오트밀]넷플릭스 <블랙미러> - "디지털 신인류 시대에서 교회의 미래 비춰보기"

2022-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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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로피 디스크’와 MS-DOS. 필자가 초등학생 때만 해도 컴퓨터 학원을 가는 것은 아주 특별한 일이었다. 클라우드 서버에 데이터를 저장하고, 블루투스가 옛것이 되고 있는 요즘. 코딩(coding)1) 수업은 받아도 컴퓨터를 배우기 위해 더 이상 학원에 가진 않는다. 초등학생 때부터 지금까지 손에 쥐고 살아온 기계들은 과연 몇 개나 될까. 구체적으로 세어 본 적은 없었지만, 삐삐를 시작해서 PCS, 컬러64폴리, 300만 화소 카메라폰, 햅틱폰을 지나 스마트 폰까지 족히 20여 가지가 넘는다. 당시를 떠올려보면 분명 내 손에 최신 휴대폰과 플레이어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나와 다른 새로운 제품들을 가진 친구들을 몹시 부러워했다.

 

< 사진출처 : 컴퓨터/역사 나무위키 >


디지털 일상을 살면서 ‘기계마다 들어간 기술은 무엇인지, 누가 개발을 하는지, 기술이 누구에게 보급되고 있는지’는 궁금해하지 않았다. 다만 새로 나온 제품이 이전보다 얼마나 예쁜지, 같은 제품군 중에서 어떤 모델이 월등한 기능을 가지고 있는지만 비교할 뿐이었다. 최신 디지털 기계를 소유했다는 것은 어제보다 조금 더 나은 삶을 살고 있다는, 일종의 자기 위로와도 같았다. 이렇게 ‘만족을 담보하는 소비’가 기술 발달에 영향을 주고, 한 사회의 산업과 문화를 변화시킬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4차 산업시대2)의 ‘디지털 기술의 발전’은 단순히 소비자의 만족에 멈춰 있지 않았고 인간이 끝없이 욕망하는 편의와 새로움에 부응했다. 날로 업그레이드되는 디지털 일상이 분명 매번 눈부신 혜택만을 주지 않고 있음을 알고 있지만 기독교인으로 살아가는데에 특별히 불편함을 느낀다거나 디지털과 기술에 대한 기독교 윤리적 질문을 진지하게 교회에서 배우지 못했다. 


이처럼 첨단 과학기술이 인류의 역사 한가운데에 들어와 있는 가까운 미래를 상상한 드라마 시리즈가 있다. 넷플릭스에 드라마 <블랙미러>는 현대인들이 손에서 뗄 수 없는 '스마트폰'과 스마트폰을 한참 보고 있다가 종료하면 검은 화면에 비추이는 '인간의 얼굴'을 모티브로 삼는다. 다시 말해, 스마트폰은 인간에게 깊게 들어온 ‘디지털 기술’이며, 그 기술을 만들고 보급했지만 결국 윤리적 딜레마에 빠지는 ‘인간’의 이야기이다. <블랙미러>처럼 인공지능과 디지털 발전을 소재로 하는 <이어즈 앤 이어즈>, <레디플레이어원>, <휴먼즈> 같은 영화와 드라마들은 대부분 디스토피아적 분위기를 중심으로 끌어간다. 기술 세계를 표현할 때 브레이크 없이 지나치게 미화되고 낙관적인 전개야 말로 비현실적이기 때문이다. <블랙미러>는 과거 허무맹랑하고 기상천외하다고 여겨지는 SF공상 과학 만화 같은 느낌보다 오히려 "당신이 이러한 상황을 마주한다면 과연 어떠한 선택과 책임을 다 할 것인가?"와 같은 진지한 생각을 마주하게 한다. 미래 기술이 가지고 있는 신선함이나 예측불가함에 놀라움을 보여준다기 보다 강력한 부스터를 장착한 기술이 인간을 비극적 상황 앞으로 정신없이 끌고 갈수 있음을 짚는다. 그래서 근 미래에 우리에게 이러한 충격적인 일이 충분히 일어날 수 있다는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 사진출처 : Netflix >


이렇게 네 차례 산업혁명을 통과하며 대중문화에서 기술에 대한 양면성을 다각도로 보여주는 동안 기독교 신학계는 기술문제에 무관심했고 지식도 깊지 않았다. 신학 안에서도 여러 갈래의 태도들이 있었지만 근대를 넘어 현대에까지 넘어오는 세계의 발전 앞에서 신학은 대부분 소극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리스도인들이 당면한 현재, ‘디지털 현실’을 위해 함께 질문하고 답하기에는 빈약했다. 이렇게 대답 없는 침묵이 길어지는 사이 기술을 통한 사회의 양극화는 극명해졌고, 빅데이터 안에는 차별이나 편견이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많은 윤리학자들이 이야기하는 것은 빅데이터와 인공지능이 가지는 문제는 사실 그동안 인간들이 축적해온 윤리적 문제들을 제거하지 못한다면 기술에서도 제거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또한 많은 기업들은 기술이 상품화가 되기 위해서라면 통과 의례나 책임회피를 위해 입맛에 맞게 윤리를 변형하게 되었다. 이러한 윤리의 논쟁과 사회 안에서의 제기되는 무수한 윤리적 문제들을 단순한 교리나 기독교 전통으로 대답하기는 어려워졌다.


< 사진출처 : Netflix >


현재 많은 윤리 논쟁을 가지고 있는 ‘인공지능’만 보더라도 자율주행 자동차의 사고 책임 소재, 인공지능의 의료 진단에 따른 책임 소재, 빅데이터 사용에 따른 동의와 공익 목적의 활용과 조작 가능성, 섹스 로봇 상품화의 문제 미래의 섹슈얼리티와 여성성의 상품화, 인공지능 살상 무기체계 문제, 기술 생태계에 들어오지 못하는 계층의 소외 등의 문제가 산적해 있다. 이렇게 너무나 방대하고 무궁한 인류의 범위를 디지털이라는 기술이 감싸면서 발생되는 신인류의 삶은 한 가지로 규정될 수 없다. 그것들이 가지고 있는 복잡한 질문들에 대해 신앙과 신학의 이름으로만 환원되지도 않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서 결국 기독교가 얻는 것은 게토화 되고 고립된 평가뿐이다. 따라서 그러한 문제들 앞에서 신학의 태도는 넓은 수용성을 갖춘 대화의 자세가 필요하다. 삶의 번영과 편의를 위해 고도로 발달된 디지털 신인류에게 우리의 신관은 더욱 새로워져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한계 내 이성에 가둬둘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과거에서부터 예측되어온 익숙한 하나님만을 추구했다면 4차 산업시대에는 우리가 경험하지 못했던 크고 깊은 하나님을 발견하게 될 중대한 신학적 전환의 시대로 오히려 살아갈 수 있다.




<블랙미러>는 옴니버스 형식으로 다양한 주제를 던진다. 최첨단 물리학, 디지털, 생물학이 왜곡된 인간의 욕망과 맞잡게 되면서 비참한 일들과 그 결과의 몫이 시청자들에게 있는 것처럼 연출되기도 한다. 인공지능과 인간의 욕망이 어떻게 결합하고 공존하느냐에 따라 미래 기술 지형도는 바뀔 것이다. 인공지능이 인간과 같이 사고하고 욕망하기 시작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창조한 그들을 인격체로 존중해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인간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진 사물로서만 대해야 하는 것일까? 발전이 가지는 양면성 무엇을 볼 것인가?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 <블랙미러>는 아직 명백하지는 않지만 문제의 징후를 예측하여 문제 상황을 제기하는 방식으로 2022년을 사는 우리에게 ‘불편한 상상’이 현실로 성큼 다가왔음을 알린다.

 

클라우스 슈밥이 지적한 대로 아직 4차 산업에 대해 전천후로 이끌어갈 리더가 부족한 것처럼 기독교 교계 역시 미래에 대한 적절한 대비와 새로운 환경에 대한 변화를 다루는 리더가 필요하다.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미래의 더 나은 세계를 만들기 위해 기독교 신앙은 디지털 윤리 교육과 과학철학과 열린 대화가 가능한 리더십이 절실히 필요하다. 자기 정체성에 대한 막연함도 문제이지만 다른 타 학문의 지향점에 대한 막연한 지식은 복음의 가치를 한 사회에 전달하기 위해서 방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교회는 변증의 역사를 가지고 있고 변증을 하려면 시대와 문화에 대한 숙고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곳에서 기독교 신앙의 존재의 의미를 꺼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신학은 하나님의 뜻과 인간의 존엄을 위해 비판을 받으며 새롭게 단장되어야 한다.

 

< 사진출처 : Watcha >


신학은 인간의 발전과 함께 해왔다. 그럼에도 한계에 대해 고착화된 신학이 주는 과오를 풀어내기 위해서는 ‘인공지능’과 ‘기술과학’이 인류를 파괴할 위험이라고 단정 짓는 칸막이식 사고방식을 버리는 것이 좋다. 마치 기독교를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기독교를 단 한 문장으로만 설명하면 듣는 상대방에게 수많은 오류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듯이 우리가 현재 마주한 과학 기술, 인공지능 기술들을 엄격히 구분하거나 정교한 예측으로 몰아가는 것은 무리가 있다. 신기술들은 계속 개발될 것이고 인간의 한계를 더 많이 빠르게 해결해 주길 원하는 사람들은 점점 더 많아질 것이다. 기업이나 국가도 이익을 위해 훨씬 더 혁신적인 인공지능 개발을 도모하면서 혁신할 것이다. 따라서 신앙인으로 인간과 인공지능의 관계, 둘 사이의 역할과 힘의 균형을 고민하면서 나아가야 한다. 우리와 가까이 있는 기술은 결과에서만 잠시 윤리적인 것이 아니라 모든 과정에서부터 윤리적 원칙과 공동의 협력의 구조를 가지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디지털 기술과 인공지능에 관한 윤리를 학문적으로, 신학적으로 완전하게 정립하려는 것은 무리수 일 수 있다. 다만 미래 세계에 일어날 법한 윤리적 문제를 치열하게 고민한다는 것은 곧 현재의 삶에 누락된 인간의 의미를 미래와 연결시키는 소중한 작업이다. 복잡하고 뛰어난 발전을 하는 인공지능의 지향점은 빅데이터를 기반으로 완벽하고 단일적인 균질의 세계를 향해 뻗어간다. 그러나 자유의지의 세계는 항상 답이 동일하지 않은 세계를 창조하는데에 그 특별함이 있다. 성도들에게 코로나19가 2년 넘게 지속되는 상황에서 기술의 창조와 생명의 혼란 속에서 전통적인 신앙의 축이 흔들리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물질의 생동성이 세계의 기초라는 믿음을 가지고 만물을 풍성하게 하는 인간의 사명을 반성하는 시간으로 삼는다면 지성적 신앙인으로의 전환을 꾀하는 동시에 새로운 돌파 지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글. 장해림 연구원 (문화선교연구원)

 


<각주>

1) 코딩(coding) :  컴퓨터용 언어로써 프로그램을 만들거나 기계들이 작동되는 과정에  필요하다. 

2) 클라우스 슈밥(Klaus Schwab), 클라우스 슈밥의 제4차 산업 혁명, 31,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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