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인의 문화 읽기교수와 미치광이가 만났을 때 - 영화 <프로페서 앤 매드맨>을 보고

2021-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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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 깁슨이 돌아왔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2004)에서 그리스도의 수난을 극적으로 묘사하며 종교영화사의 한 획을 그었던 그가 이번에 선택한 영화는 '프로페서 앤 매드맨'이다.

 

'프로페서 앤 매드맨'은 오늘날 영미권에서 가장 권위 있는 사전으로 꼽히며, 1857년부터 1928년까지 70여 년의 제작 과정 끝에 출간된 옥스퍼드 영어사전 초판의 탄생 비화를 다루고 있다. 원작은 저널리스트 사이먼 윈체스터의 책 '교수와 광인'(1998)이다. 옥스퍼드 사전 편찬에 큰 공헌을 했으나 정신이상자라는 이유로 이름이 지워져버린 윌리엄 마이너(숀 펜)의 존재를 생생하게 재현한 논픽션이다. 멜 깁슨은 책의 내용을 기반으로 드라마를 위한 약간의 각색과 미술, 의상, 건축, 의술 등 역사적 고증을 통해 시대극으로서의 완성도를 높였다. 그는 수십 년 전부터 이 내용을 영화화하고 싶었다고 하는데, 과연 제작자로서 '프로페서 앤 매드맨'에서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영화는 옥스퍼드 사전 편찬에 평생을 바친 두 사람의 이야기를 다룬다. 한 사람은 옥스퍼드 사전의 책임편집자 제임스 머리 교수(멜 깁슨)이다. 19세기 빅토리아 시대, 영국이 세계 곳곳에 식민지를 점령하면서 영어가 세계적으로 통용되었고 언어로서의 영어 연구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시작된 옥스퍼드 사전은 다른 사전들과 달리 "한 어휘가 태어나 성장하고 사라지는 어휘의 일생을 보여주는 역사"(책 '교수와 광인' 중)를 다룬다는 점에서 독보적이다. 기존의 사전들이 식자층의 어휘와 평민층의 어휘를 구분 짓고 편집자가 자의로 선별한 단어만 사전에 수록했지만 옥스퍼드 사전은 서민들의 친근한 일상적 용례나 전치사까지 포함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머리 교수는 이 거대한 프로젝트를 끌고 가기 위해 자원봉사 대상을 학위가 있는 계층에서 영국, 미국을 비롯해 식민지 전역의 영어 사용자로 확대시킨다.

 

영화가 조명하는 또 다른 한 사람은 사전 제작에 자원봉사로 합류하게 된 천재적 인물 윌리엄 마이너 박사이다. 마이너 박사는 정신 이상으로 살인을 저지르고, 이성이 광기를 타자화하는 전형적 판옵티콘적 수용소에서 일상으로부터 격리와 통제를 당하던 중이었다. 나날이 살해 위협의 망상과 불안이 심해지던 어느 날, 증세가 호전되는 양상을 보인다. '의학적 이성'이나 '통치적 이성'이 아니라 옥스퍼드 사전 편찬의 자원봉사가 계기였다. 의미 있는 일을 함으로써 사회의 일원으로 용납되는 경험을 통해 말이다.

 


뛰어난 언어학자이나 학위가 없다는 이유로 학계에서 견제 받던 비주류 학자 머리 교수는 천재적이나 비정상적 존재로 여겨지던 마이너 박사와 다른 듯 닮아있다. 교수와 정신질환자 간에 느껴지는 거리감은 천재성과 광기만큼 별 차이가 나지 않을 수 있다. 영화는 '교수'와 '광인', 엘리트와 민중 계층, 기품 있는 언어와 상스러운 언어, 학위가 있는 이와 그렇지 않은 이와 같이 사회에서 이분법적으로 나누고 구분 짓던 경계들을 허물어버린다. 때로 여러 선택지 가운데 하나를 선택함으로써 치러야 하는 대가들이 분명 존재하지만, 이윽고 모든 것을 뛰어넘는 방향으로 전개된다. 곧 "모든 이에게 기회를 줘야 한다"는 믿음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책을 만들고자 했으며, 사회적으로 배제되고 혐오의 대상이던 정신질환자와 친구가 되었던 제임스 머리 교수의 이야기, 그리고 윌리엄 마이너 박사와 피해자의 유가족 엘리자의 이야기 곳곳에 기독교 복음이 녹아있다. 감독이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가 많다보니 집중력이 흐트러지는 부분도 있지만, 사전 편찬이라는 위대한 과업에 대한 열정, 죄에 대한 깊은 참회와 용서, 한 존재에 대한 우정과 헌신, 사랑의 관계가 영혼의 자유와 회복으로 이어지는 강렬하고도 감동 깊은 드라마를 선사한다.

 

 

김지혜 목사/솔틴비전센터장·평화나루도서관장

*이 글은 <한국기독공보>에 실린 글에서 수정·보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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