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인의 문화 읽기한 사람이 '사치'를 부리자 생기는 일 - 윤여정 배우의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수상에 부쳐

2021-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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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조어 중에 '파이어 족'이라는 것이 있다. 최근 재테크 붐과 함께 회자되는 말인데, 경제적 자립을 통해 조기은퇴하려는 사람들(Financial Independence, Retire Early의 약자)을 의미한다. 불안정한 고용 현실과 불안한 미래, 직장 스트레스 속에서 원치 않는 일이나 관계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은 바람이 담겨 있는 트렌드로 보인다. 실제 가능성 여부는 차치하고라도 노동이 경시되는 것이 아닌가 하고 비판적으로 바라볼 지점도 있다. 그런데 여기서 지향점이 이른바 '놀고먹는 것'이 아니라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사는 것이라면 어떨까?

지금이야 '미나리'의 순자 역을 계기로 세계적인 이목을 받고 있지만, 한때 윤여정 배우도 대중에게 비선호도 1위에 선정되고 오랜 시간 경력단절을 겪었을 만큼 삶의 부침이 심했던 적이 있다. 김기영 감독의 작품 '화녀', 그것도 주연으로 영화 데뷔를 하면서 혜성 같이 등장했던 이가 10여년 만에 생계를 위해 밑바닥부터 시작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보다 훨씬 이혼에 엄격했던 시절에 두 아이를 길러야 하는 가장으로서, 윤 배우는 절실한 심정으로 마치 성경을 보듯 대본을 보며 무슨 역할이든 닥치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출처: 유튜브 <채널A> 한 장면

그래서일까. 생계형 배우로 살던 윤 배우는 예순이 되고서 인생의 '사치'를 부리겠다 마음먹는다. 돈과 상관없이 좋아하는 감독, 하고 싶은 작가와 작업을 하겠다는 것이다. 그렇게 선택한 영화들이 '죽여주는 여자', '찬실이는 복도 많지', 그리고 '미나리' 같은 것들이다. 하나같이 저예산 영화들이고, 출연료는커녕 사비를 털어 넣은 적도 있다. '미나리'는 촬영 전에 주변에서 만류도 했는데, 한여름, 미국 외진 시골마을, 편히 쉴 개인공간도 없는 열악한 제작환경에서 노년의 몸이 과연 버텨낼 수 있을까 하는 염려에서였다. 이 영화들은 현재 한국과 세계 영화계에서 작품성을 인정받고 윤 배우에게 많은 트로피를 안겨준 작품들이 되었다.


윤 배우의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수상 후, 한 지인이 sns에 소회를 밝혔다. "최근 몇 년 간 읽고 듣고 본 것 중 지금 내 삶에 가장 큰 자극을 준 사건"이라고 말이다. 최근 예능을 통해 드러난 윤 배우의 패션 감각과 위트 있고 솔직하면서도 인생의 지혜가 담긴 어록 등에 청년들이 열광했는데, 30~40대 경력단절 여성들은 "엄마가 열심히 일한 결과"라는 수상소감에 자신들도 해낼 수 있다는 용기를 얻었다. 50대 이상 중장년층은 일흔 다섯의 배우가 다시 맞은 전성기를 지켜보며, 제2의 인생에 대한 희망을 열고 있다. 끊임없이 도전하고 열심히 일하는 한 사람의 '사치스러운 선택'이 끼친 영향이다.


윤 배우의 행보를 통해 소비나 생존이 아니라 생산의 관점에서 일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좋은 일이란 생계의 수단이기도 하지만 필연 이상의 것, 자아실현과 사회적 기여를 할 수 있는 기회도 포함되어야 한다. 한나 아렌트는 근대 이래 '노동'(labor)이 먹고 사는 문제에 사람을 종속시키고, 자유로운 존재로서의 인간됨을 잃어버리게 한다고 비판한다. 아마 전쟁 같은 하루하루를 보내며 조기은퇴를 꿈꾸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이야기 아닐까. 인간으로서 스스로 존엄을 지켜낼 수 있는 선택지가 없는 상황으로부터 벗어나, 일을 통해 자신의 능력과 신념을 표현하고 의미부여할 수 있는 '사치'가 인간 정신의 활력과 창조성의 산물을 일궈내며 우리 사회를 얼마나 풍요롭게 하는지 윤 배우의 사례에서 이미 확인한 것처럼 말이다.

'미나리'에서 벼랑 끝에 내몰린 듯 절박한 상황에 놓인 모니카(한예리)는 순자를 만나 안도감에 와락 끌어안고 눈물을 내비친다. 순자가 함께하는 것만으로 삶의 선택지가 늘어나고 가족은 여유와 웃음, 안정을 찾아간다. 순자가 모니카에게 숨구멍 같은 존재가 되었던 것처럼, 교회가 '사치'를 부려서 치열하고 팍팍한 일상에 지친 이들에게 작은 '사치'의 여지를 열어줄 수 있다면 좋겠다. 한숨 돌리고 마음 추스를 여유를 주는 너른 품, 실패해도 괜찮다는 응원과 격려, 무엇이든 시작하도록 돕는 손길 같은 것 말이다. 주의 은혜가 우리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모두 '사치'가 필요하다.


김지혜 목사/솔틴비전센터장·평화나루도서관장

*이 글은 <한국기독공보>에 실린 글을 동시게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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