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인의 문화 읽기"이 땅의 모든 나그네들을 위하여" - 드라마 <파친코>를 보고

2022-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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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첫 시작부터 주목을 받던 드라마 <파친코> 시즌 1 최종화가 공개되며 수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안겼다. 이민진 작가의 동명 소설을 기반으로 한 드라마 <파친코>는 죽음의 시대에 여성 화자 선자가 들려주는 디아스포라의 처절한 삶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가족들을 뒤로하고 시대적 사명에 몸을 던진 영웅도 아니요, 용기 있게 폭탄을 투척하거나 자신의 몸을 바쳐 일본에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주인공도 아니다. 가난과 핍박으로 얼룩진 혼돈의 시기에 자신의 가정과 자녀를 지키기 위해 살아남으려 발버둥 쳐온 여성의 서사가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는 이 지독한 역사적 트라우마를 왜 자꾸 이야기해야만 하는가? 역사의 거대 서사로부터 지워지고 소외된 이들이 엉망진창인 자신의 삶을 차마 버리지 못해 끌어안고, 토닥이며 다시 시대를 향해 거침없이 살아나가는 길목에서 드라마 파친코가 들려주는 사랑과 연대의 기독교적 메시지를 보게 된다.


(*아래 문단에 등장하는 줄거리는 시즌 1에서 아직 등장하지 않았으므로, 강력한 스포일러가 될 수 있음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끝나지 않는 나그네의 삶 

일제 강점기, 착취와 가난, 이민, 해방, 한국전쟁 등 끊임없이 역동하는 시대적 죽음의 문턱에서 선자는 낯선 땅 일본에서 형님과 함께 김치를 만들어 팔면서 꿋꿋하게 살아남는다. 그녀의 역사는 늘 순탄하지 않았다. 남편의 이른 죽음, 사랑하는 첫째 아들 노아의 자살이라는 큰 아픔을 지나 현재 그녀는 백발의 노인이 되었고, 둘째 아들 모자수는 큰 파친코 장을 운영한다. 그리고 손자 솔로몬은 미국 뉴욕에서 잘나가는 은행원이다. 역사적 아픔을 뒤로 둔 채, 살아가기 바쁜 선자 가족의 삶은 솔로몬이 뉴욕에서 가져온 ‘임무’로 인해 다시 해결되지 못한 지난한 역사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손자 솔로몬은 성공을 위해 악착같이 일하는 인물이다. 그래서 도쿄 지사의 골칫거리를 해결하기로 하고 승진을 약속 받는다. 그 골칫거리란 일본 지사에 자신의 땅을 팔지 않으려 하는 조선인 할머니를 설득하여 계약을 성사시키는 것이었다. “어차피 다 지난 일이잖아요.” 솔로몬에게 윗세대들의 역사는 단절된 과거의 이야기다. 고생했던 지난날은 잊고 이제 재일교포들도 성공의 기쁨을 누려야 한다며 땅 주인 할머니를 설득하지만 거절당하고, 선자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선자는 손자의 임무를 돕기 위해 나선다.

살기가 급급해 한국 땅 한번을 다시 밟아보지 못한 선자는 선자처럼 비슷한 시기의 재일교포이자 그 한 많은 세월을 한시도 잊지 않고 고이 간직한 땅 주인 할머니를 만난다. 땅 주인 할머니가 대접해준 쌀밥을 한 숟갈 먹으며 바로 한국 쌀임을 알아챈 선자는 한국에서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지어주었던 귀한 쌀밥을 떠올리며, 지난 역사들을 함께 곱씹는다. 선자는 결국 눈물을 터트린다.

땅 주인 할머니는 선자에게, 그리고 그 손자인 솔로몬에게 뜻깊은 반향을 선사한다. 이후 선자는 떠나온 고국을 비로소 다시 밟게 된다. 모든 게 변해버린 부산 영도, 한이 녹아든 바다에서 목놓아 울부짖는 선자의 모습은 수많은 디아스포라들의 마음을 울렸으리라. 땅 계약에 성공하지 못하면 자신의 처지가 곤란해질 것을 알면서도 솔로몬은 결국 계약이 성사되기 바로 직전, 땅 주인 할머니에게 그 땅을 팔지 말라고 이야기한다. 그 극적인 장면에서 단절됐던 슬픔과 한의 역사가 선자의 이야기에서 손자 솔로몬의 이야기로, 나그네의 삶을 살아가는 모두의 이야기로 연결된다.  


나그네를 기억하기 

거대 서사의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며 하나님을 부르는 나그네들의 이야기는 성경의 주된 이야기를 차지한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히브리서 11: 13-14)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음이라” (신명기 10:19)

기독교는 기억의 종교다. 우리는 성서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나그네 되었던, 종살이를 했던 역사를 오늘 우리의 삶에 연결한다. 그러므로 잊지 않고 기억하며 그것을 또 증언한다는 것은 트라우마와 더불어 어떤 연대감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성경은 나그네의 삶에 어떤 평가도 하지 않는다. 소속 없이 늘 고통 속에 살아가야 하는 그들의 이야기는 평가의 대상이 아니라 끌어안아야 할 우리의 이야기가 된다. 그러므로 성경 속에서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은 상벌의 잣대가 되며 또한 심지어 나그네는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되기도 한다.1) 

그러므로 나그네의 역사를 기억한다는 것은 나 홀로 개인의 성공을 향해 달려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나와 얽혀진 수많은 비참한 자들의 이야기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 지점에서 기억은 다시 또 다른 연대의 힘으로, 행동으로 나타난다. 고통은 또다시 잠깐 찬란함으로 변한다. 드라마 속 솔로몬이 선자의 역사를 받아들이며 현재의 자신의 성공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파친코>는 선자의 삶과 목소리를 통해 지워진 이들의 역사 되살리기를 시도함으로써 나그네의 시선으로 역사를 또다시 말하는 것, 별것 아닌 이들의 시선에서 다시 보기를 성공적으로 해낸다. 고통 가운데 있는 아픔을 공감하며 동참하게 한다. 그래서 더욱 <파친코>에서 여성 화자 선자의 기억의 방식은 탁월한 승리의 말하기로 나타나지 않는다. 그 기억은 영웅적 말하기가 아니다. 지독한 삶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다시 증언함으로써 시작된다.

“주님은 우리와 함께 고난을 겪으시네. 주님은 우리와 같은 고통을 겪으시지. 그걸 아는 게 우리에게는 위로가 되는 거야. 우리가 홀로 고통받는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는 게 말일세” (파친코, 책 105쪽)

 

다시 파친코 

<파친코>가 우리에게 전달하려고 하는 메시지는 간단하게 잡히지 않고 매우 복잡하다. 그도 그럴 것이 역사 속에 가려진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사람들, 비오스가 되지 못한 조에들의 이야기가 입체적으로 펼쳐지기 때문이다.2) 선자의 남편인 백이삭 전도사의 숭고한 순교의 이야기에서 파친코의 이야기가 끝나지 않는다. 조국의 자유와 해방에서 끝나지도 않는다. 또한 손자 솔로몬의 미국에서의 성공 스토리로 아름답게 마무리 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들의 삶의 자리는 다시 ‘파친코’다. 

“인생이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불확실성에 기대하는 파친코 게임과 같다고 생각했다. 모든 것이 정해져 있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희망의 여지가 남아있는 게임에 손님들이 빠지는 이유를 모자수는 이해할 수 있었다.”(파친코, 책 95쪽)

파친코(일명 빠찡코) 운영은 물질 추구에 대한 욕망, 폭력성 등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찝찝한 이미지로서 솔로몬에게도 그리고 심지어는 모자수에게도 부끄러운 직업이다. 그렇지만 당시 재일교포들의 삶에서 파친코란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거대한 구조 가운데 생존을 위해 취한 몇 안 되는 선택지 중 하나였다. 그러므로 파친코는 앞이 보이지 않는 깜깜한 현실 속에서 한낱 희망에 자신의 삶을 걸어야만 하는 디아스포라의 삶 그 자체인 것이다. 솔로몬은 자신의 역사를 받아들이고 결국 파친코 사업으로 되돌아온다.

<파친코>는 선자의 가족과 얽힌 수많은 시대적 아픔들을 다양한 인물들을 통해 묘사한다. 가난, 성공에 대한 욕망, 좌절된 꿈, 가족과의 이별, 끝없는 차별과 괴롭힘 속에서의 정체성 혼란. 그런데 드라마 <파친코>가 선자를 통해 들려주는 복잡한 삶의 단면에서 하나의 메시지가 들려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어진 삶을 살아냄으로써 역사를 증언하기’ 선자처럼, 수많은 여성들처럼 꿋꿋하게.
드라마가 끝나기 전 마지막 9분 동안 일본에 사는 재일교포 할머니들의 인터뷰를 통해 살아있는 선자들을 만났다. 할머니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영웅담 같은 희열이 없다. 그저 역사적 아픔을 생생하게 기억하며 그 속에서 자신의 선택하며 걸어온 길을 묵묵히 이야기하는 그들의 삶은 그 자체로 그 어떤 영웅담보다 찬란했다. 찬란한 할머니들의 얼굴 속에서 파친코의 가장 유명해진 구절이 떠오른다,

“역사는 우리를 망쳤을지라도 우리는 아무  상관 없다. History has failed us, but no matter”

 

마치며

미국에 온 지 거의 3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파친코>의 삶이나 <미나리>의 삶에 비교하면 사치스럽게도 편안한 시대에 타지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곳에서 경험한 수많은 아픔들은 유난히 피부에 와닿을 정도로 생생하다. COVID19 상황으로 인해 유난했던 아시안 혐오와 ‘조지 플루이드 사건’ 속에서 이민자들의 나라에서 벌어지는 이민자 차별의 현실을 똑똑히 경험했다. 외국인들은 늘 사각지대에서 사회적 도움을 얻기 힘들고 정치로부터 가장 큰 위협을 받으면서도 정치가를 선택할 권한은 없으며 비자와 운전면허증을 시간에 맞춰 갱신하고 증명하는 삶은 너무 피곤하다. 그러나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나그네적을 기억한 많은 사람들의 도움 덕분이다.

거대한 힘으로 밀어붙여 들어오는 사회적인 폭력들은 늘 작은 우리를 좌절시키고 실망하게 한다. 그러나 이도 저도 되지 못한 벌거벗은 이들의 이야기는 역사적 폭력의 현장을 한순간도 잊지 않은 채로 빗방울처럼 모여 시내가 되어 흐른다. <파친코>는 함부로 그들의 삶을 평가하지 않는다. 죽음 가운데서 겨우겨우 생명을 연명하고 있는 자들의 이야기가 어떻게 생생한 역사를 증언하고, 화해를 일으키고, 정의로 나갈 수 있도록 하는지 그저 들려준다. 그 기억의 힘은 오늘 우리가 나그네의 삶을, 나그네 되신 그리스도의 삶을 우리의 삶으로 연결할 수 있도록 도우며, 그리고 궁극적으로 현재 우리에게 물어오는 질문들 가운데 무슨 선택지를 고를 수 있을지 도울 것이다.  


*각주
1) 겔 22: 29, 31, 마 8:20, 25:35
2) 조르조 아감벤, <호모 사케르>, 장진우 옮김(새물결, 2008), 129쪽  




글쓴이 심수빈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기독교와 문화를 전공하고, 문화선교연구원에서 연구원으로 섬기다가 현재는 미국 버지니아에서 거주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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