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TT리뷰 [오트밀]OTT영화 <승리호>_ 무엇과 싸울 것인가.

2021-02-25
조회수 2660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 <승리호>가 개봉한 후, 다양한 평가들이 쏟아져 나왔고 나는 이 영화를 즐기지 못한 편에 속했다. 영화에 좋은 점수를 주지 못한 이들이 거의 공통적으로 비판하는 내용에 나 또한 동의하는데, 이 영화는 한 남자의 과거사로부터 온 고독과 방황을 담은 신파물로 읽을 때 지루해지고, 스타워즈나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처럼 히어로물로 읽을 땐 서사가 부실하다. 그래비티나 인터스텔라처럼 실감과 비실감을 넘나드는 스페이스 오페라로 읽기엔 (영화관에서 3D로 관람했을 땐 어떨지 모르겠지만) 아쉽게도 만화영화 같은 느낌을 지우기 어렵고 디스토피아 이미지를 통해서 현실에 대한 비판과 경고의 메시지를 발견하기에 이 영화는 다소 진부하다.

 

그러니 이 글에서는 이 영화의 서사나 이미지가 아니라, 내게 흥미로움을 안겨준 다른 어떤 것에 대해 말하려고 한다. <승리호>에는 차이가 있다. 기존에 우주를 배경으로 한 SF영화의 주인공들이 우주탐사 박사(그래비티), NASA의 파일럿(인터스텔라, 마션)였던 것과는 달리, 승리호의 주인공들은 우주쓰레기를 청소하는 청소선의 노동자들이다. 이것은 이전의 스페이스 오페라 장르에서도 볼 수 없는 설정인데, 기사단의 아들이 주인공인 스타워즈, 우주 자경단이 주인공인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등을 보면 승리호의 경우는 특별하다. 외계행성을 주 무대로 한 영화들을 제외하면 우주영화의 대부분은 지구인의 우주탐험을 소재로 전개되었다. 즉, 우주를 연구하고, 탐사하며 무한한 우주에 맞서는 똑똑하고 멋진 인간의 투지와 사투가 극의 주된 내용이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승리호의 선원들은 과거는 몰라도, 현재는 내세울 것 없이 생활유지를 위해 돈을 벌어야 하는 ‘찌질한’ 노동자들이다.



2092년 사막화된 지구를 벗어나 우주를 떠도는 승리호의 주인공들은 쓰레기 천지인 우주에서 ‘돈을 위해 일’한다. 우주선이 더 빨리 움직이도록 삽질을 하고, 우주선 표면을 떼우고, 쌀과 토마토를 팔아 돈을 얻고 무엇보다 돈이 되는 쓰레기를 줍기 위해 일한다. 우주는 이들의 일터이자, 삶의 현장이다. 승리호의 주인공들이 일을 하며 무심하게 내뱉는 독백들은 이 영화의 의도와 원리를 보게 한다. 

“수리하고 벌금내느라 또 빚지고, 빚이 빚을 낳고...” 

“가난이 죈지, 죄를 지어 가난한 건지...” 

“왠지 나만 일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드네”

2021년의 나와 우리의 현실과 상념들을 그대로 되뇌는 주인공들에게 관객은 묘한 동질감을 느낀다. 사막화 된 지구와 우주 공간을 삭제하더라도 무관할 만큼 승리호는 현실의 ‘일하는 우리’를 담고 그린다. 승리호 속 세계를 작동시키는 것은 바로 ‘노동’인 것이다.

 

출퇴근 길에 나처럼, 우리 부모님처럼, 직장과 거처를 향해 잰걸음을 하고 있는 이들을 바라볼 때면 가슴이 시큰하고 뭉근해진다. 저들도 노동의 현장에서 삶의 치열함을 살아내고 있구나 하는 동질감과 애잔함, 자기연민이 뒤섞인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이다. 우리는 노동을 산다. 하루를 살아내기 위해 시린 손을 녹여가며 새벽같이 일터로 나가고, 가족을 살리고 빚을 갚아내려고 쉴 새없이 노동한다. 그래서 ‘1100만명의 비정규직사회’, ‘화물노동자의 안전권’, ‘청소노동자의 인권’은 나의 일이 되고, 내 자매, 형제, 친구의 이야기가 되고, 우리의 사건이 된다. 감흥을 주지 못하는 부실한 영화의 요소들 가운데에서도 <승리호>를 감동적으로 보았다고 말하는 이들이 느낀 그 ‘무엇’은 이러한 동질감에서 비롯된다.



물론 영화에 납득할 수 없는 지점이 있다. 특히 몇몇 캐릭터를 단편적으로 설명하는 영화의 태도에 아쉬움이 컸는데, 관객으로서 가장 당혹감을 느끼며 바라볼 수 밖에 없었던 인물은 영화의 유일한 빌런인 ‘제임스 설리반’이다. 그에 대해 영화가 알려주는 단서는 그가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해에 태어나서 전쟁 중에 가족의 죽음을 목격했다는 것. 그 때, 반드시 더 좋은 세상을 만들겠다고 다짐했다는 것. 그리고 화성에 새로운 유토피아를 만든 장본인이라는 것뿐이다. 그의 행동을 추동하는 것은 그가 경멸하는 인간의 욕망, 야만성과 모순성 그리고 이것들로 점철된 희망 없는 지구다. 그러나 정작 그가 보여주는 모습은 가장 야만적이고 ‘좋은 세상’이라는 욕망을 향해 치달아 있는데 영화는 이러한 비논리성을 설명하지 않은 채 설리반 자체를 평면적인 악으로 묘사한다. 그리곤 영화의 후반부에 이런 불균형한 맥락의 최정점을 찍듯, 설리반의 허무한 죽음이 등장하는데 그 장면 앞에서 나는 ‘갑작스럽게’ 심정적 자유를 얻었다. 말하자면 위에서 언급한 악인의 어색한 자리와 어딘가 단절된 스토리를 ‘문제적’으로 바라보던 시선이 악인의 죽음과 동시에 힘을 잃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승리호의 악인은 누구여도 상관없다는, 영화의 한계를 무릅쓴 의도로 여겨졌는데 그것과 조우한 순간 내 당혹감은 단념 혹은 자유로 변했다.




노동의 현장에서, 노동자는 그들의 터전을 쥐고 있는 이들과 정서적으로 관계 맺지 않는다. 우리가 관계하는 것은 나처럼 ‘한 줌도 안 되는 돈을 위해 목숨을 걸고’ 일하고 있는 동료들이고, 내가 아니면 생을 이어갈 수 없는 내 가족이지, 삶의 터전을 위협하는 알지 못하는 그 누군가가 아니다. 그러니까, UTS라는 어떤 거대한 영향력 아래에 있는 승리호 혹은 우리의 투쟁 대상은 ‘논리적 타당성과 서사를 가진 한 개인’이 아니라 우리를 위협하는 어떤 욕망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다. 그 욕망은 설리반 스스로 더럽다고 여긴 자기 중심의 욕망, 야만성과 모순성이다. 영화는 극의 초반 소개되는 ‘인류 중에서 가장 부자이고 고령이며, UTS 창업주, 우주 낙원의 창조자, 인류의 구원자’인 제임스 설리반의 행위에 대한 진위보다, 보잘 것 없는 승리호의 너와 나에게로 추의 중심을 옮겨놓는다. 그리고 그 추의 중심은 딸을 잃은 슬픔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태호가 꽃님이를 향해 하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았던 ‘웃고, 떠들고, 그림 그려주는 것’이 된다. 


(설명되지 않는)거대한 욕망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는 보통사람들의 권리 중심에, 웃음과 대화와 아름다움이 있다는 사실을 영화는 지속적으로 상기시키는 것이다. 죽어가는 생명에 숨을 불어넣는 한 어린 아이를 통해 웃음, 대화, 아름다움 같은 보통의 것들이 회복되고, 그것이 결국 승리호를 살리고, 지구를 살렸다. 삶의 혹독함과 환희, 투쟁과 자유, 위대함과 사소함, 삶과 죽음의 간극에 <승리호>가 있다. 우리가 싸워 이겨야 할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무얼 지켜내려 사는 것일까.



피부이식에 성공해 이제 인간의 모습이 된 업동이가 우주 속에서 긴머리를 흩날리며 읽고 있던 릴케의 시집 『삶과 노래』에 실린 시 한 편, <사람들은 모두 자기 자신에게서>를 나누고 싶다.


사람들은 모두 자기 자신에게서 달아나려 합니다.

박해받으면 갇혀 있는 감옥에서 풀려나려는 듯이

 

그러나 이 세상은 하나의 위대한 기적입니다.

나는 느낍니다. 여기에는 모든 삶이 살고 있다고.

 

그러나 대체 누가 사는 것이겠습니까?

 

연주되지 아니한 선율이 하아프 속에 깃들여 있듯이 저녁 어스름 속에 숨어 있는 것들이겠습니까.

물 위에 불어 오는 바람이겠습니까,

신호를 주고받는 나뭇가지겠습니까,

 

향기를 풍기는 꽃송이겠습니까,

늙어가는 긴 가로수 길이겠습니까,

 

오고가는 따뜻한 동물들이겠습니까,

갑자기 떠오르는 새들이겠습니까.

 

대체 누가 사는 것이겠습니까, 

신이여, 당신입니까- 이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정수인 전도사 (문화선교연구원 기획간사)


OTT, meal

시공간의 제약 없이, 어떤 단말기에서도 동영상 스트리밍이 가능한 구독 서비스가 대세가 되면서 OTT서비스의 핵심인 ‘콘텐츠’에 대한 관심과 수요는 지속적으로 높아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넷플릭스 추천영화’, ‘왓챠 시리즈 소개’, ‘OTT 숨은 띵작 추천’ 등의 추천 혹은 안내 콘텐츠를 유튜브나 인터넷 검색엔진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걸 보면 그 관심과 인기를 실감할 수 있죠. 한국 드라마인 스위트홈(넷플릭스), 영국드라마 이어즈앤이어즈(왓챠), 미국드라마 체르노빌(왓챠) 등 해당 플랫폼에서만 볼 수 있는 다국적 드라마들을 비롯해, 넷플릭스 개봉작인 로마, 옥자, 아이리시맨, 결혼이야기 등 유명감독들의 완성도 높은 영화들도 OTT를 통해 소개되고 있습니다. 동시에, 기독인으로서 OTT 플랫폼에서 화제가 되는 콘텐츠들을 어떻게 읽어낼 수 있을지, ‘시선’에 대한 고민이 여기저기에서 들려옵니다. 

문화선교연구원에서는 <오트밀, OTTmeal>이라는 코너를 통해 볼 만한 콘텐츠로 꼽히는 영화, 드라마들을 비판적이지만 애정어린 시각으로, 건강하고 솔직하게 읽어 내보려 합니다. 씹을수록 고소하고, 건강에 좋은 오트밀처럼 말이죠. ^^  



2 0
2020년 이전 칼럼을 보고 싶다면?

한국교회의 문화선교를 돕고 변화하는 문화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방향을 제언하는 다양한 콘텐츠를 온라인에서 나눕니다.

문화매거진 <오늘>

살아있는 감성과 예술적 영성을 통해 아름다운 삶의 문화를 꽃피워가는 문화매거진 <오늘>(2002~2014)입니다.

시대를 읽고 교회의 미래를 열어갑니다

뉴스레터 구독

개인정보 수집 및 이용

뉴스레터 발송을 위한 최소한의 개인정보를 수집하고 이용합니다. 수집된 정보는 발송 외 다른 목적으로 이용되지 않으며, 서비스가 종료되거나 구독을 해지할 경우 즉시 파기됩니다.

광고성 정보 수신

제휴 콘텐츠 정보 등의 광고성 정보를 수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