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이란의 최대 종교 도시인 ‘마슈하드(Mashhad)’에서 밤마다 여자들이 죽어나가는 연쇄살인 사건이 발생했다. 피해자들에게서 한 가지 공통점이 발견됐는데, 모두가 자신이 두르고 있던 ‘차도르’에 목이 졸려 살해된 후, 머리부터 발끝까지 차도르에 감싸인 채 길가에 버려져 있었다는 점이다. 이 모습이 마치 거미가 거미줄을 이용해 죽인 모습과 비슷하다고 해서, 당시 이 사건은 ‘거미 살인’이라 불렸다. 살인 사건에 이름이 붙여지고, 지역 여성들이 두려워 밖에 나가지도 못하고, 16명의 희생자가 나올 때까지 정부와 수사기관들은 피의자를 특정하지도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살인 사건의 피의자가, 전혀 살인을 저지를 것 같지 않은 평범한 시민, 건실한 가장, 독실한 신자여서 쉽게 찾을 수 없었던 걸까? 혹은 살인 사건의 피해자들이 당시 사회에서 보기에 죽어도 마땅한 아깝지 않은 목숨으로 여겨져 수사를 제대로 하지 않았던 걸까? 이 사건의 범인은, 과거 이란-이라크 전에 참전했던 ‘참전용사’이면서, 가부장제적 사회 속에서 가정을 부양하던 평범한 ‘가장’, 그리고 신을 사랑하고 율법에 열심인 독실한 ‘종교인’이었다. 그리고 이 사건의 피해자들은 성매매를 통해 겨우 밥벌이를 하며 살던 극빈층 성 노동 여성들이었다.
사건 발생 후, 1년이나 지나 연쇄살인범인 ‘사이드 하네이’가 체포됐다. 그런 그는 언론에 대고 당당하게 말했다.
(하네드 사네이, 1962~2002)
“매춘부들은 바퀴벌레보다도 쓸모없는 존재다. 급기야 나는 하루에 한 명씩 죽이지 않으면 밤잠을 이룰 수 없을 정도로 증오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발언에 많은 시민들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동요는 상상 이외의 것이었다. 하네이의 가족, 마슈하드 시민들이 ‘하네이’를 영웅으로 추대하기 시작한 것이다. 황당하지만 이 모든 이야기는 23년 전에 실제로 일어났던 실화 사건이다. 그리고 이 실화 사건을 기반으로 제작된 영화가 2023년 2월, <성스러운 거미>라는 이름으로 국내에 개봉했다.
신의 이름으로
이란의 옛 수도였던 ‘마슈하드’는 ‘이맘 레자’라는 큰 성지가 있기에 ‘최대 종교 도시’라고 불린다. 전쟁에 참전했음에도 불구하고 신을 위해 ‘순교’ 하지 못하고 살아 돌아온 자신을 자책하던 ‘하네이’는 이 성지를 더욱 거룩하고 순결하게 만들기 위해 심판자로 나서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그는 밤마다 성지 주변에서 성매매를 하기 위해 서성이는 여성들을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가 살해한다. 그는 살인을 저지를 때, 마치 죽어야 마땅한 죄명을 말하듯 여성들을 향해 ‘창녀’라는 비난을 쏟아낸다. 소위 우리가 생각하는 연쇄살인범들은 “사이코패스가 될 만한 어린 시절의 경험이나 충격”이 있을 법 하지만, 하네이는 ‘신의 이름으로’ 그 일들을 저질렀다는 것이 매우 충격적이다. 경찰에 체포된 후 법정에서 변호사가 그의 죄를 ‘정신적 불안으로 인한 우발적 살인’으로 몰고 가려고 하자, 하네이는 “나는 미치지도 않았고, 죄를 짓지도 않았다”라고 주장한다. 그는 정말 자신이 신을 위해 사명을 받아서 하는 행동이라고 느낀 것이다. 심지어 그를 옹호하는 가족들과 영웅화하는 시민들을 보고 있노라면, 왜곡된 종교적 신념은 어떤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님을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실화 사건을 다룬 영화를 더욱 심각하고 무겁게 직면해야만 한다.
감독은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통해, 이러한 사건은 언제나 어디서나 되풀이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자신의 아버지를 영웅으로 믿은 하네이의 아들은 기자 앞에서, 아버지가 한 살인 행각을 매우 자랑스러워하며 재연해 나간다. 그리고 그 재연을 위해서 자신의 여동생을 불러 바닥에 누인다. 이는 폭력적인 종교 신념과 여성 혐오적 시선의 대상이 언젠간 자신의 어머니가 될 수도, 아내가 될 수도, 누이가 될 수도 있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하긴, 크게 놀랄 일도 아닌 것은, 무슬림권 국가에서는 지금도 ‘명예 살인’이라는 명목으로 자기 손으로 가족들을 죽이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지 않은가.
하네이 그리고 유영철
하네이가 대단한 종교적 신념과 사명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 같으나, 사실 하네이에게서 ‘종교’라는 한 꺼풀만 벗기면 그는 유영철과 다름없는 살인마가 된다. 그런데 이를 역설적으로 보면, 유영철에게도 ‘종교’라는 한 꺼풀만 입히면 하네이(종교적 영웅)처럼 여겨질 수도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상상은 우리로 하여금 소름 돋게 만든다. 하네이는 신을 위해 한 일이라고 하지만, 사실 그는 진즉에 마음속에서 신을 죽이고 직접 신이 돼버렸다. 사실상 유영철의 일기나 인터뷰를 보더라도, 그가 얼마나 자신을 신격화했으며 부유층 노인과 여성을 죽이는 행위 자체를 ‘사명’으로 생각했었는지 모른다.
“이 일로 인해 부유층들은 더욱 각성했으면 좋겠고, 여자들은 함부로 몸을 놀리는 일이 없었으면 한다.”
하지만 당시 우리 한국 사회는 그의 이 발언을 아무도 수용해주지 않았다는 것이 다행이라고 봐야 할까.
한 개인이 갖는 왜곡된 종교적 신념은 절대 혼자 강해질 리 없다. 그 사람이 속한 사회와 종교가 힘을 더해줘야만 강해진다. 즉, 그 사회에서 작동하는 가부장제적 시스템과, 그 종교에서 작동하는 여성혐오적 시선들이 함께 역동할 때 ‘하네이’라는 인물이 만들어진다. 그가 입에 담는 말들, 주로 ‘부정함’, ‘창녀’, ‘정화’, ‘심판’이라는 표현들은 그가 속한 사회와 종교에서 세뇌시켜 준 것이나 다름없다.
영화의 메시지는 곧 ‘라히미’의 삶이다
영화 속에서, 뜨뜻미지근하게 진행되는 수사과정에 의심을 품으며, 자신이 직접 살인 사건의 실마리를 풀고자 범인을 잡기 위해 나서는 사람이 있다. 그의 이름은 ‘라히미’고 이 사건을 취재하기 위해 마슈하드 지역을 찾은 ‘저널리스트’이다. 사실 이 영화의 주된 서사는 ‘하네이’가 벌인 살인사건이 아닌, ‘라히미’가 겪는 삶이다. 그는 당시 사회에서 ‘미혼 여성 기자’라는 이유만으로 하루에도 몇 번씩 저급한 편견들과 부딪히며 살아낸다.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마치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킨 인물인 마냥 취급받고, 가만히 있어도 남성을 유혹하는 존재로 점철된다. 그런데, 실화를 다루고 있는 영화에서 유일하게 ‘허구’로 창작된 인물이 바로 이 ‘라히미’다. 감독 ‘알리 아바시’는 영화의 메시지를 더욱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허구의 캐릭터를 창조했다고 전했다. (그렇다고 라히미가 완전히 허구인물은 아니다. 실제 하네이의 인터뷰를 하고, 재판 과정에 참여한 유일한 여성 저널리스트의 이름이 ‘라히미’였는데, 감독은 그에게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그런데 라히미는, 피해자들의 유가족도 아니고, 경찰도 아닌 한낱 기자일 뿐인데 왜 본인이 직접 수사 과정에 나선 것일까? 살해위협의 두려움을 무릅쓰고 왜 직접 ‘미끼’가 된 것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라히미는 죽은 여성들, 그리고 죽어가는 여성들을 단순히 ‘창녀’로 보지 않았다. 존엄한 인간, 자녀를 먹여 살리기 위해 애쓰는 어머니, 가난의 그늘 속에서 발버둥 치는 가엾은 이웃으로 바라봤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살해된 여성들과 자신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게 웬 말인가? 가방끈이 긴 저널리스트와 성매매를 하는 여성들과 어찌 같다고 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안타깝게도, 영화 속에서, 당시 그 사회의 남성들은 살해된 여상들과 저널리스트 라히미를 별반 다르지 않게 대한다. 수사를 해나가는 경찰 간부는 라히미에게 성적으로 접근하려 하고, 이를 거부당하자, “너도 죽은 창녀들과 다름없는 여자다”라는 식의 말을 내뱉는다. 결국 영화는 여성혐오라는 시선 안에서 일어나는 종교적 폭력, 사회적 폭력을 다루고자 하는 것이다. 실제로 성지를 더럽히고 있는 자는 누구인가? 사회를 망치고 있는 죄인은 누구인가? 이 영화는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고민해볼 수 있도록 만들어 준다. 23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폭력은 여전히 일어나고 있다. 중동 국가들 중에서도 근본주의적인 신앙과 그 안에서 만들어지는 왜곡된 여성혐오 시선으로 인해 죽어가는 여성들이 꽤 많이 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신이 되려는 사람들
이 영화의 내용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와는 아예 무관한 내용일까? 그랬다면 이 영화가 전 세계에서, 그리고 국내에서 이 정도로 관심받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라히미’ 역을 맡았던 ‘자흐라 에브라히미’는 이란 최초로 칸 여우주연상을 받았고, BBC가 뽑은 ‘올해의 여성 100인’에 선정되기도 했다. 또한 국내 관람객들 사이에서도 꽤 많은 리뷰가 쏟아지며 좋은 평가를 내리는 추세다. 영화 속 내용이 오늘날 우리가 속한 사회와 종교의 이야기와도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극단주의적 신앙은 비단 이슬람교도에만 해당되는 문제가 아니다. 잘못된 신 형상에 따른 왜곡된 신앙심, 극단주의적인 사고로 인한 반생명주의적이면서도 과격한 행동들은 우리의 신앙생활 안에서도 드물지 않게 나타나고 있다.
하나님을 잘못 믿은 나머지, 자신이 곧 하나님이 되어버린 자들. 마치 이 시대의 예언자가 된 것 마냥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조차도 속여버리는 확고한 신념 때문에 타인들까지 회유하고 선동한다. 한 걸음만 밖에서 바라보면 비상식적인 것들이지만, ‘신의 이름’이라는 힘 하나만으로 쉬이 사람들을 착각과 두려움 속에 가둬 버리는 것이다. 신을 믿는 종교라면 그 어떤 곳이든 <성스러운 거미> 이야기에서 자유로울 순 없다. 이성주의와 과학이 최고조로 발달하는 미래 그 어딘가에 가 있더라도, 왜곡된 종교 신념으로 인한 폭력은 계속해서 존재할 것이다. 인간이 죄인인 이상, 극단주의적인 신앙 행동은 시대에 맞게 계속해서 발전해 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온 땅의 생명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신앙인들로 하여금 조금의 반생명적인 태도도 허용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사회적으로는 종교의 율법과 전통으로 일어나는 모든 폭력과 차별에 대해 반대해야 할 것이며, 개인적으로는 내 중심에 주인이 되는 존재가 누구인지를 늘 생각하고 경계하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성스러운 거미 |2023.02.08|범죄|덴마크, 독일, 스웨덴, 프랑스|118분
왜 ‘성스러운’ 거미인가?
2000년, 이란의 최대 종교 도시인 ‘마슈하드(Mashhad)’에서 밤마다 여자들이 죽어나가는 연쇄살인 사건이 발생했다. 피해자들에게서 한 가지 공통점이 발견됐는데, 모두가 자신이 두르고 있던 ‘차도르’에 목이 졸려 살해된 후, 머리부터 발끝까지 차도르에 감싸인 채 길가에 버려져 있었다는 점이다. 이 모습이 마치 거미가 거미줄을 이용해 죽인 모습과 비슷하다고 해서, 당시 이 사건은 ‘거미 살인’이라 불렸다. 살인 사건에 이름이 붙여지고, 지역 여성들이 두려워 밖에 나가지도 못하고, 16명의 희생자가 나올 때까지 정부와 수사기관들은 피의자를 특정하지도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살인 사건의 피의자가, 전혀 살인을 저지를 것 같지 않은 평범한 시민, 건실한 가장, 독실한 신자여서 쉽게 찾을 수 없었던 걸까? 혹은 살인 사건의 피해자들이 당시 사회에서 보기에 죽어도 마땅한 아깝지 않은 목숨으로 여겨져 수사를 제대로 하지 않았던 걸까? 이 사건의 범인은, 과거 이란-이라크 전에 참전했던 ‘참전용사’이면서, 가부장제적 사회 속에서 가정을 부양하던 평범한 ‘가장’, 그리고 신을 사랑하고 율법에 열심인 독실한 ‘종교인’이었다. 그리고 이 사건의 피해자들은 성매매를 통해 겨우 밥벌이를 하며 살던 극빈층 성 노동 여성들이었다.
사건 발생 후, 1년이나 지나 연쇄살인범인 ‘사이드 하네이’가 체포됐다. 그런 그는 언론에 대고 당당하게 말했다.
(하네드 사네이, 1962~2002)
그리고 이 발언에 많은 시민들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동요는 상상 이외의 것이었다. 하네이의 가족, 마슈하드 시민들이 ‘하네이’를 영웅으로 추대하기 시작한 것이다. 황당하지만 이 모든 이야기는 23년 전에 실제로 일어났던 실화 사건이다. 그리고 이 실화 사건을 기반으로 제작된 영화가 2023년 2월, <성스러운 거미>라는 이름으로 국내에 개봉했다.
신의 이름으로
이란의 옛 수도였던 ‘마슈하드’는 ‘이맘 레자’라는 큰 성지가 있기에 ‘최대 종교 도시’라고 불린다. 전쟁에 참전했음에도 불구하고 신을 위해 ‘순교’ 하지 못하고 살아 돌아온 자신을 자책하던 ‘하네이’는 이 성지를 더욱 거룩하고 순결하게 만들기 위해 심판자로 나서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그는 밤마다 성지 주변에서 성매매를 하기 위해 서성이는 여성들을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가 살해한다. 그는 살인을 저지를 때, 마치 죽어야 마땅한 죄명을 말하듯 여성들을 향해 ‘창녀’라는 비난을 쏟아낸다. 소위 우리가 생각하는 연쇄살인범들은 “사이코패스가 될 만한 어린 시절의 경험이나 충격”이 있을 법 하지만, 하네이는 ‘신의 이름으로’ 그 일들을 저질렀다는 것이 매우 충격적이다. 경찰에 체포된 후 법정에서 변호사가 그의 죄를 ‘정신적 불안으로 인한 우발적 살인’으로 몰고 가려고 하자, 하네이는 “나는 미치지도 않았고, 죄를 짓지도 않았다”라고 주장한다. 그는 정말 자신이 신을 위해 사명을 받아서 하는 행동이라고 느낀 것이다. 심지어 그를 옹호하는 가족들과 영웅화하는 시민들을 보고 있노라면, 왜곡된 종교적 신념은 어떤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님을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실화 사건을 다룬 영화를 더욱 심각하고 무겁게 직면해야만 한다.
감독은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통해, 이러한 사건은 언제나 어디서나 되풀이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자신의 아버지를 영웅으로 믿은 하네이의 아들은 기자 앞에서, 아버지가 한 살인 행각을 매우 자랑스러워하며 재연해 나간다. 그리고 그 재연을 위해서 자신의 여동생을 불러 바닥에 누인다. 이는 폭력적인 종교 신념과 여성 혐오적 시선의 대상이 언젠간 자신의 어머니가 될 수도, 아내가 될 수도, 누이가 될 수도 있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하긴, 크게 놀랄 일도 아닌 것은, 무슬림권 국가에서는 지금도 ‘명예 살인’이라는 명목으로 자기 손으로 가족들을 죽이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지 않은가.
하네이 그리고 유영철
하네이가 대단한 종교적 신념과 사명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 같으나, 사실 하네이에게서 ‘종교’라는 한 꺼풀만 벗기면 그는 유영철과 다름없는 살인마가 된다. 그런데 이를 역설적으로 보면, 유영철에게도 ‘종교’라는 한 꺼풀만 입히면 하네이(종교적 영웅)처럼 여겨질 수도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상상은 우리로 하여금 소름 돋게 만든다. 하네이는 신을 위해 한 일이라고 하지만, 사실 그는 진즉에 마음속에서 신을 죽이고 직접 신이 돼버렸다. 사실상 유영철의 일기나 인터뷰를 보더라도, 그가 얼마나 자신을 신격화했으며 부유층 노인과 여성을 죽이는 행위 자체를 ‘사명’으로 생각했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당시 우리 한국 사회는 그의 이 발언을 아무도 수용해주지 않았다는 것이 다행이라고 봐야 할까.
한 개인이 갖는 왜곡된 종교적 신념은 절대 혼자 강해질 리 없다. 그 사람이 속한 사회와 종교가 힘을 더해줘야만 강해진다. 즉, 그 사회에서 작동하는 가부장제적 시스템과, 그 종교에서 작동하는 여성혐오적 시선들이 함께 역동할 때 ‘하네이’라는 인물이 만들어진다. 그가 입에 담는 말들, 주로 ‘부정함’, ‘창녀’, ‘정화’, ‘심판’이라는 표현들은 그가 속한 사회와 종교에서 세뇌시켜 준 것이나 다름없다.
영화의 메시지는 곧 ‘라히미’의 삶이다
영화 속에서, 뜨뜻미지근하게 진행되는 수사과정에 의심을 품으며, 자신이 직접 살인 사건의 실마리를 풀고자 범인을 잡기 위해 나서는 사람이 있다. 그의 이름은 ‘라히미’고 이 사건을 취재하기 위해 마슈하드 지역을 찾은 ‘저널리스트’이다. 사실 이 영화의 주된 서사는 ‘하네이’가 벌인 살인사건이 아닌, ‘라히미’가 겪는 삶이다. 그는 당시 사회에서 ‘미혼 여성 기자’라는 이유만으로 하루에도 몇 번씩 저급한 편견들과 부딪히며 살아낸다.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마치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킨 인물인 마냥 취급받고, 가만히 있어도 남성을 유혹하는 존재로 점철된다. 그런데, 실화를 다루고 있는 영화에서 유일하게 ‘허구’로 창작된 인물이 바로 이 ‘라히미’다. 감독 ‘알리 아바시’는 영화의 메시지를 더욱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허구의 캐릭터를 창조했다고 전했다. (그렇다고 라히미가 완전히 허구인물은 아니다. 실제 하네이의 인터뷰를 하고, 재판 과정에 참여한 유일한 여성 저널리스트의 이름이 ‘라히미’였는데, 감독은 그에게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그런데 라히미는, 피해자들의 유가족도 아니고, 경찰도 아닌 한낱 기자일 뿐인데 왜 본인이 직접 수사 과정에 나선 것일까? 살해위협의 두려움을 무릅쓰고 왜 직접 ‘미끼’가 된 것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라히미는 죽은 여성들, 그리고 죽어가는 여성들을 단순히 ‘창녀’로 보지 않았다. 존엄한 인간, 자녀를 먹여 살리기 위해 애쓰는 어머니, 가난의 그늘 속에서 발버둥 치는 가엾은 이웃으로 바라봤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살해된 여성들과 자신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게 웬 말인가? 가방끈이 긴 저널리스트와 성매매를 하는 여성들과 어찌 같다고 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안타깝게도, 영화 속에서, 당시 그 사회의 남성들은 살해된 여상들과 저널리스트 라히미를 별반 다르지 않게 대한다. 수사를 해나가는 경찰 간부는 라히미에게 성적으로 접근하려 하고, 이를 거부당하자, “너도 죽은 창녀들과 다름없는 여자다”라는 식의 말을 내뱉는다. 결국 영화는 여성혐오라는 시선 안에서 일어나는 종교적 폭력, 사회적 폭력을 다루고자 하는 것이다. 실제로 성지를 더럽히고 있는 자는 누구인가? 사회를 망치고 있는 죄인은 누구인가? 이 영화는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고민해볼 수 있도록 만들어 준다. 23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폭력은 여전히 일어나고 있다. 중동 국가들 중에서도 근본주의적인 신앙과 그 안에서 만들어지는 왜곡된 여성혐오 시선으로 인해 죽어가는 여성들이 꽤 많이 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신이 되려는 사람들
이 영화의 내용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와는 아예 무관한 내용일까? 그랬다면 이 영화가 전 세계에서, 그리고 국내에서 이 정도로 관심받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라히미’ 역을 맡았던 ‘자흐라 에브라히미’는 이란 최초로 칸 여우주연상을 받았고, BBC가 뽑은 ‘올해의 여성 100인’에 선정되기도 했다. 또한 국내 관람객들 사이에서도 꽤 많은 리뷰가 쏟아지며 좋은 평가를 내리는 추세다. 영화 속 내용이 오늘날 우리가 속한 사회와 종교의 이야기와도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극단주의적 신앙은 비단 이슬람교도에만 해당되는 문제가 아니다. 잘못된 신 형상에 따른 왜곡된 신앙심, 극단주의적인 사고로 인한 반생명주의적이면서도 과격한 행동들은 우리의 신앙생활 안에서도 드물지 않게 나타나고 있다.
하나님을 잘못 믿은 나머지, 자신이 곧 하나님이 되어버린 자들. 마치 이 시대의 예언자가 된 것 마냥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조차도 속여버리는 확고한 신념 때문에 타인들까지 회유하고 선동한다. 한 걸음만 밖에서 바라보면 비상식적인 것들이지만, ‘신의 이름’이라는 힘 하나만으로 쉬이 사람들을 착각과 두려움 속에 가둬 버리는 것이다. 신을 믿는 종교라면 그 어떤 곳이든 <성스러운 거미> 이야기에서 자유로울 순 없다. 이성주의와 과학이 최고조로 발달하는 미래 그 어딘가에 가 있더라도, 왜곡된 종교 신념으로 인한 폭력은 계속해서 존재할 것이다. 인간이 죄인인 이상, 극단주의적인 신앙 행동은 시대에 맞게 계속해서 발전해 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온 땅의 생명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신앙인들로 하여금 조금의 반생명적인 태도도 허용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사회적으로는 종교의 율법과 전통으로 일어나는 모든 폭력과 차별에 대해 반대해야 할 것이며, 개인적으로는 내 중심에 주인이 되는 존재가 누구인지를 늘 생각하고 경계하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글. 임주은
*영화 <성스러운 거미>는 현재 영화관 <필름포럼>에서 절찬리 상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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