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인의 문화 읽기영화 <벌새>, 세상은 참 신기하고 아름답다

2019-09-30
조회수 2217




벌새 House of Hummingbird, 2019년 개봉. 김보라 감독


영화 ‘벌새’는 알 수 없는 거대한 세계와 마주한 14살 은희의 가장 보편적인 이야기이다. 독립영화로서는 이례적으로 10만 명을 이미 넘어섰고, 세계영화제 25관왕(9월 29일 마친 아테네영화제에서 최우수각본상을 타면서 26관왕이 되었다 - 편집자 주)이라는 타이틀이 주는 궁금함과, 평단의 호평, 한국 문화의 쏠림현상도 있었겠지만, 영화 <벌새>는 우리가 살아온 90년대를 살아온 평범한 소녀의 이야기를 보편적인 ‘나’의 이야기로 치환시키며 관객들의 뜨거운 호응을 받고 있다. 영화를 본 후 집단 상담을 받은 듯, 관객들은 나이를 불문하고 자기 안의 이상하고도 예민한 ‘은희’를 마주하며 이야기를 쏟아내곤 한다. 90년대를 보낸 세대들의 이야기를 넘어 가장 보편적인 존재들의 ‘오늘’을 위로하고 발돋움하도록 응원하는 또 하나의 이야기로 영화 <벌새>는 그렇게 경험되고 있는 듯하다. 


감독이 말하듯, 영화는 81년생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와 기억, 상처와 트라우마를 담아내고 있다. 1994년, 서울 대치동에 살며 상가 떡 가게를 꾸려나가는 우리네 평범한 가정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영화는 당시 한국사회가 내장한 분위기를 무심한 듯 묘사해낸다. 평범한 가부장적인 분위기 속에서 아들을 ‘서울대’에 보내는 것이 유일한 희망인 1남 2녀의 평범한 가정. 여자동생이라는 이유로 무시당하기도 하며, 남자친구를 사귀면 날라리로 불리기도 하고, 여자가 바른 말을 해도 ‘드세고’ ‘기가 세다’며 그렇게 길들여지던 시절, 벌새처럼 작고 가녀린 은희는 분주한 날개 짓으로 그렇게 어른을 꿈꾼다. 하지만 소녀가 마주하는 세상은 때론 차갑고 냉정하며 불안하기만 하다. 믿었던 친한 친구에게 배신을 당하기도 하고, 남자친구와의 풋풋했던 사랑마저도 보이지 않는 계층의 벽에 맥없이 끝이 나고, 대개가 그렇듯, 각자의 일상에 갇혀있는 가족들은 결코 14살 소녀의 감성과 꿈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타인들처럼 아득하게 자리한다.     


‘영지’라는 새로운 세상을 만나다 (스포일러 있음)


그런 은희의 세계에 불현듯 나타난 존재가 바로 한문 학원 선생님 ‘영지’이다. 영지의 등장은 소녀의 세계에 균열을 일으켜 은희의 세상이 전기를 맞이할 것임을 암시한다. 사소하지만 가벼울 수 없는 소녀의 희망, 두려움, 혼란과 좌절을 응시해주고 토닥이며 동행해주는 영지 선생님. 기성의 질서에 편입되지 않은 자유로운 영혼 영지의 슬픈 듯, 굳센 마음이 혼자라고 느끼던 은희의 밤에 온기를 지펴주며 영지는 진짜 ‘어른’이 되어가는 길을 보여준다.    


영화 후반부에 전개되는 성수대교 붕괴와 영지의 죽음은 경쟁과 성장 패러다임으로 대표되던 시대의 종말과 함께, 영지가 남긴 온기로 살아갈 은희의 날들을 예견하듯 교차한다. 그리고 “다만 나쁜 일들이 닥치면서도 기쁜 일들이 함께 한다는 것. 우리는 늘 누군가를 만나 무언가를 나눈다는 것. 세상은 참 신기하고 아름답다”는 영지 선생님의 마지막 내레이션은 평범한 소녀의 일상을 찬란한 순간으로 바꾸어주고, 오늘을 살아가는 평범하고도 보편적인 ‘은희’들의 삶을 살아갈 이유가 있는 충분하고 충만한 것으로 비추어준다.


영화는 무엇인가를 가르치려 들지 않는 이 시대 탈계몽의 미덕으로, 보는 이들의 공감을 도리어 이끌어낸다. 지나왔고 헤쳐왔던 시대의 기억과 공기들을 소환하며 여전히 오늘을 살아가야 할 나를 응원하는 영화 <벌새>는 우리 시대를 해석하고 동행해줄 진짜 어른은 누구인가를 묻는 듯하다. 또한 우리 자신이 그런 어른이 되어주고 새로운 세상이길 희망하는 듯하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일상을 ‘믿음’으로 굳세게 살아낸다는 것, 교회가 상처를 치유하고 이웃을 환대하며 세상의 빛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다시 묻게 되는 오늘, 영화 <벌새>는 신앙의 존재방식을 다시 돌아보게 하는 것은 아닐까? 



백광훈 목사

문화선교연구원의 원장으로 섬기고 있다. ‘소통과 변혁’, ‘신앙과 문화’, ‘은혜와 생명’이라는 키워드로 한국교회 문화선교의 대안과 비전을 모색하고 있다. 사회 문화적인 이슈들에 대한 창조적인 기독교문화적 해석과 실천 가능성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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