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인의 문화 읽기"영화를 본 후 시작되는 것들" - 영화 <자산어보>를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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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지나야 비로소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그 시절, 부모님은, 그 어른, 그 선생님은 왜 그러셨을까. 눈에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이고 이해하지 못했던 마음들을 어슴푸레 짐작하게 되는 것, 나이가 들고 그 자리의 언저리에 서게 되면서 가능하게 된 것들이다. 예수의 십자가 길이 제자들에게 그러했고, 바울의 로마행이 주변의 교인들에게 그러했을 것이다. 영화 '자산어보'의 약전(설경구)의 길 역시 창대(변요한)에게 그러했다.

영화는 정조의 총애를 받던 실학자 손암 정약전이 정치적, 종교적 이유로 유배를 떠나는 것으로 시작된다. "벼슬한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느냐. 버티는 것이야." 정조가 약전에게 당부한 말처럼, 예나 지금이나 세운 뜻을 펼치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부조리한 구조에 저항하며 개혁을 꿈꾸었으나 거대한 현실의 벽에 부딪히며 좌절한 혁명가는 외딴섬에서 드디어 삶을 이어갈만한 가치를 발견한다. 애매한 '사람 공부' 대신, 명징하고도 실질적인 '사물 공부'로 전환하는 것, 곧 '자산어보'의 길이다. '자산어보'란 우리나라 최초의 해양생물 백과사전이다. 완성되기만 한다면 어민들에게 큰 도움을 줄 책이었다. 정조의 승하와 함께 꺾인 줄 알았던 뜻은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정신과 애민(愛民)의 실천으로 다시 세워지기 시작한다. 약전은 동생 정약용이 갔던 '목민심서'의 길, 곧 백성을 잘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양반도, 상놈도 없고 임금도 필요 없는 세상을 꿈꾸며 백성과 '삶을 함께 살고자' 했다.

아래로부터의 실질적 삶의 변화가 백성을 이롭게 할 수 있다고 보는 약전과 달리 상놈이지만 임금의 품에 들어 성리학을 제대로 펼쳐야 백성을 위할 길이 있다고 믿는 창대는 서로 다른 생각과 이념으로 매번 부딪힌다. 마침내 기회를 얻은 창대는 약전의 곁을 떠나려 하는데, 약전은 그런 창대를 만류한다. 이미 가본 길, 그렇기에 자신처럼 창대가 상처받고 꺾여버릴 것을 염려했던 것일까. 시간이 지나 돌아온 창대를 약전은 위로하며 격려한다. "학처럼 사는 것도 좋으나 구정물 흙탕물 다 묻어도 마다하지 않는 '자산' 같은 검은색 무명천으로 사는 것도 뜻있지 않겠느냐." 어쩌면 유배지에 있는 내내 약전 스스로에게 했던 말일지 모르겠다. 다시 자산으로 돌아오고 나서야 창대는 비로소 약전의 그 마음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200년의 간극을 넘어 작금의 시대, 직간접적으로 보고 듣는 여러 일들이 우리를 때로 실망하고 환멸이 나게 하거나 거룩한 분노가 일게 하기도, 공명심이 들게 하기도 한다. 어떤 식이든 바른 뜻을 세상 가운데 펼치겠다는 꿈을 꾸다 좌절해본 이라면, 약전의 이 마음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쉽지 않은 길인지를 알기에 내 사랑하는 사람은 이 아픔을 겪지 않았으면 하는 것을 말이다. 동시에 또 다른 마음도 들 것 같다. 그래도 창대와 같은 너라면 이 암울한 시대의 희망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말이다. 오늘, 약전과 같은 선배들의 마음을 감히 헤아리며, 창대와 같은 후배들의 마음을 가늠해 본다. 그리고 묻게 된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은 목민과 자산 사이 어디여야 하는가. 우리가 있어야 할 곳이 그리스도가 계신 곳이라면, 그리스도는 어디에 계시는가 등등. 영화를 보고 나서 시작되는 질문들이다.

영화 '자산어보'는 영화 '사도', '동주', '박열' 등 과거 역사와 현재의 시대성을 조우시키고 그간 가려져있던 개인들과 관계들을 새로이 조명하는데 능한 이준익 감독의 신작이다. 정약전이 '자산어보' 서문에 "오랜 시간 창대라는 젊은이의 도움을 받아 책을 완성했다"라고 밝힌 대목에서 출발해 많은 부분 상상력을 더했다. 창대와 가거댁(이정은) 등 가공된 인물과 설정들이, 역사적 인물 약전과 영화의 메시지를 보다 선명하게 드러내는데, 흑백의 진한 농담으로 역사의 거센 파고를 맞으며 끝까지 버텨내었던 약전의 길을 결연하고 생동감 넘치게 담아내면서 진한 감동을 준다.



김지혜 목사(솔틴비전센터장·평화나루도서관장)

*이 글은 <한국기독공보>에 실린 글에서 수정·보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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