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인의 문화 읽기책<컬쳐 케어>를 읽고: "아름다움 꿈꾸는 그리스도인의 문화적 상상력을 확장하다"

2020-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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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시간 한 공동체를 섬겼다. 처음 그 공동체에 몸담기 시작했을 때는 그곳의 진가를 잘 몰랐다. 몇 년이 흐르며 차츰 그 공동체의 장점이 보이기 시작했다. 떠날 때쯤에는, 그곳에서의 배움을 통해 이전보다 여러모로 성장한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왜 장점이 뒤늦게 보였을까? 내게 큰 도움이 되었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 바로 원리에 해당하는 부분이 건실했기 때문이다. 원리는 처음엔 잘 보이질 않는다. 원리의 결과는 경험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 그래서 처음에는 보이지 않더라도, 시간이 지나며 맺히는 풍성한 열매를 보면 기저에 살아 있는 견실한 원리를 짐작해 볼 수 있다.


기독교 문화와 예술 또한 마찬가지다. 문화와 예술 영역은 대단히 표피적이고 감각적이어서 원리의 중요성이 간과되기 쉽다. 그러다 보니 겉으론 대단해 보여도 내용이 부실한 경우가 많고, 꾸준히 성장해 가며 영향력을 지역과 사회로까지 넓힌 사례는 더욱 찾아보기 힘들다. 외형적 성장에 비해 한국교회의 문화와 예술이 활성화하지 못한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 분야에 대한 기독교적 원리와 전망이 부실한 데 있다. 마코토 후지무라의 <컬처 케어 – 공동의 번영을 위한 아름다움의 비전>(IVP)은 그런 면에서 좋은 길잡이가 되어 줄 책이다.


그리스도인은 현대 문화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우선 본서의 장점은 문화를 향한 저자의 시각이 대단히 통합적이라는 데 있다. 특히 원인 분석에 대한 입장이 그렇다. 저자는 문화를 도구로 보지 않는다. 대신에 이를 생태적 관점에서 보아 '돌봄'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어떻게, 얼마만큼 써먹을까?'가 아니라 '얼마나 아픈가? 건강한가?'를 먼저 묻는다. 그러면서 문화가 오염됐다고 진단한다. 사람들이 예술을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선물로 인식하지 않는 가운데 벌어지는 풍경을 예리한 눈으로 묘사한다. 그리고 예술이 왜 엘리트주의적으로 흐르고, 보통 사람들 대부분의 삶과는 거리가 멀어지게 되었는지를 설명한다.


"두 번의 세계대전의 여파 속에서 예술가들은 문화의 심각한 인간성 상실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는 캔버스와 콘서트홀을 통해 아름다움을 포착하려는 이전의 시도가 얼마나 순진했는지를 드러냈다. (중략) 그와 함께 예술가들은 문화 내에서 교회의 목소리가 약해지면서 발생한 틈을 인식했고, 점점 더 자신들을 기득권에 저항하여 진리를 선포하도록 부름 받은 세속의 선지자와 제사장으로 여기게 되었다." (47~48쪽)


마르셀 뒤샹, 마크 로스코 같은 예술가들은 '진리가 아닌 것'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새로운 진리를 제시하여 관람자들에게 세상에 저항할 수 있는 길을 제공했지만, 결국 이것이 또 다른 방식의 이념적 획일성이 강요되는 결과를 낳았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그렇게 진리에 대한 온전한 추구를 그려 내는 길목이 막히면서 그 자리에 상업주의가 들어서고, 판매를 주요 목표로 여기고 명성과 부를 얻는 거래 수단으로 예술이 전락해 버렸다는 지적이다. 문화 현상에 대한 단편적인 비평 수준에 그치지 않고, 그 이유를 창조주 하나님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 예술의 본래 자리와 역할에 대해 정리하는 저자의 논지가 탁월하다.


드넓은 문화의 들판 위에 선 교회

저자는 교회와 예술의 관계를 설정하는 데도 유기성을 강조한다. 먼저 그동안 교회를 비롯한 많은 이가 '문화 전쟁'(culture war)을 벌임으로 문화적 고립을 자초했다고 언급한다. 경계선 너머에 있는 사람들을 이해하거나 그들과 의미 있게 교류하지 못했으며, 타자들을 경쟁 관계이자 적으로 설정했다는 현실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문화를 쟁취하거나 빼앗기는 영토가 아니라 우리가 돌보아 관리하도록 부름 받은 자원, 곧 우리가 "가꾸어야 할 정원"(54쪽)으로 인식하라고 촉구하며, 문화 전쟁에서 '공동의 삶'(common life)으로 패러다임을 전환하자고 요청한다.


또한 교회라는 '양 우리' 너머에 드넓은 문화의 들판이 있음을 잊지 말라고 도전한다. 외부의 세상과 문화에 대해 문을 단단히 잠그고 '기독교' 형용사가 붙은 것만 선별해서 교회 안으로 들이는 것이 아니라, 문을 열어 위험을 감수하며 "성령께서 우리가 쌓아 놓은 담장 저 너머에서도 활동하고 계"심을(120쪽) 인식하라고 주장한다. 그러면 교회는 진리의 구조를 단순히 지키는 역할에서 그치지 않고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일에서 성령과의 접촉점을 만들어 내야 하며, 교회를 통해 사람들이 아름다움의 창조주를 만날 수 있어야 한다.


경계선에 선 삶의 이력이 빚어낸 균형 감각과 공동체적 관점

또한 본서에는 저자 자신의 삶의 이력에서 비롯된 균형 감각이 돋보인다. 저자는 1960년 미국에서 태어난 일본인이다. 1980년대에는 미국과 일본에서 공부했고, 1990년대에는 일본에서 예술가로 활동했으며, 2000년대에는 미국에서 예술에 관한 정부 정책을 자문했고, 그 후에는 미국의 신학교에서 가르치며 예술 활동을 하고 있다. 동양과 서양의 경험이, 예술가이자 교육자의 경험이, 실천가이자 행정가의 경험이 본서에 잘 어우러져 있다. 아시아와 서구, 학문과 실천, 신앙과 예술의 경계선을 넘나들며, 각 영역에서 비롯된 통찰과 전망이 한데 어우러져 생명력 있는 언어로 다가온다.


저자는 예술가일 뿐 아니라 예술 운동가로서, 예술가 개인에게 문화 돌봄의 모든 책무를 떠넘기지 않는다. 그는 "아름답고 진실하며 선으로 가득한 문화의 장기적 육성을 촉진할 교회와 정책과 공동체가 있어야 한다"(134쪽)고 말하며, 문화 돌봄을 공동체 운동으로 확산시키는 실행 방안을 설명하는 데 책의 상당 부분을 할애한다. 문화 선교 현장에서 사역하는 입장에서, 창조적 자본을 가진 예술가와 사회적 자본을 가진 목사 혹은 공동체 조직가, 그리고 물질적 자본에 접근할 수 있는 경영인이 한데 모인 그룹에서부터 문화 돌봄의 생성적 운동을 시작하라는 저자의 제안에 적극 동의한다. 자본주의라는 환경 속에서 예술의 고유한 소명을 놓지 않되, 다양한 은사와 부르심을 가진 이들의 협업이라는 과제를 풀어내는 데 필요한 로드맵이라 생각된다.


아름다움이라는 본래의 꿈을 꾸도록 도울 한 권의 책

앞으로 기독교 신앙과 문화, 그리고 예술이 만나는 지형은 갈수록 더 예측하기 힘들어질 것이다. 이전 시대에서는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스마트폰과 유튜브를 비롯한 온라인의 위력이 사람들의 문화적 경험의 중심에 설 것이고, 지역적 한계를 넘어선 전 지구적인 문화에 대한 공유는 갈수록 커질 것이다. 본서의 출간이 반가운 까닭은 이러한 급변하는 시류 속에서도 흔들림 없는 성경의 비전, 곧 깨어진 세상 속에서도 성경이 창조의 아름다움이라는 본래의 꿈을 꿀 수 있게 해 준다는 사실을 거듭 확인시켜 주기 때문이다.


책 마지막에 각 장을 정리하며 모임에서 나눌 수 있는 토론 가이드는 본서가 소개하는 창조적 여정의 길에 유익한 질문들로 채워져 있다. 질문 자체가 또 다른 대안을 모색하게 한다. 기독교 문화와 예술이 어디로 가야 하는가에 대한 길을 모색하는 이들에게 여러모로 유익한 책이리라 생각된다. 본서가 제시하는 '공동의 번영'이라는 비전은 미로슬라브 볼프의 <인간의 번영>(IVP)과 통하는 지점이 있어 함께 읽어도 좋겠다.


사적 신앙에 함몰된 교회에 지쳐 교회 바깥에 공감할 수 있는 열린 언어를 찾는 사람들, 문화 선교에 깊이 헌신했지만 길을 잃은 것 같은 현장의 사역자들, 문화 예술을 통해 소명을 이루기 원하는 그리스도인들, 교회 그리고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큰 그림을 보기 원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큰 도움이 되리라 여겨진다. 실로 오랜만에, 사려 깊은 기독교 문화와 예술에 대한 책 한 권이 우리를 찾아왔다.


-성 현 목사 (기독교 예술영화관 필름포럼 대표, 창조의정원교회 담임)

"이 서평은 뉴스앤조이와 IVP 홈페이지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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