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장준환 감독, 액션, 스릴러, 청소년관람불가, 2013)
우리 안에 있는 괴물
<화이>는 오랜 침묵 끝에 모습을 드러낸 장준환 감독의 작품이어서 흥행과 상관없이 도드라져 보인다. <지구를 구하라>에서 보여준 독특한 연출에서 깊은 인상을 받은 터라 더욱 관심이 갔다. 예상했던 대로 이번 영화 역시 이야기가 좀 특이하다. 표면적으로는 한 범죄 집단이 어떻게 생겨나고 또 무너지는지 그 스토리를 전해주는 것처럼 보이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다시 말해, 이야기 안에 숨어 있는 구조적인 장치들 때문에 다양한 생각을 하게 되는데, 크게 두 가지 방향에서 생각해볼 수 있다. 하나는 두 주인공 캐릭터를 중심으로 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괴물’ 이미지를 매개로 독해하는 것이다.
먼저 캐릭터를 중심으로 살펴보자.
가장 큰 궁금증을 유발하는 부분은 두 명의 캐릭터인데, 하나는 범죄 조직의 지도자 석태(김윤석 분)이고 다른 하나는 화이이다. 석태는 아동 유괴를 통해 얻으려는 목적을 성취하지 못한 상태에서, 나중에 화근이 될 수도 있는 아이를 살해하지 않고 살려둔다. 게다가 ‘화이(여진구 분)’라는 이름까지 붙여주고 아들로서 양육하고 또 조직원의 일원으로 키운다. 마침내는 범죄에 화이를 동원하다가 오히려 조직 전체가 와해되는 원인을 제공한 것도 그였다. 조직의 책임자로서 조직을 해체시킨 장본인이 된 것이다.
도대체 그는 무엇을 염두에 둔 캐릭터일까? 유괴된 아이로서 조직의 아들로 양육된 화이는 또 누구인 것일까?
화이는 범죄 조직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고, 음악을 즐겨 들으며, 학교에 다닌 적은 없어도 교복을 즐겨 입고, 여학생 앞에서 제대로 말을 못하는 순진한 면모를 갖고 있는 청소년이다. 게다가 아버지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지는 아들로서 화이는 아버지의 요구를 받을 때마다 괴물 환영에 시달린다. 그리고 마침내는 아버지를 포함해서 자기 주변의 모든 것들을 제거하는 강인한 모습을 보여준다. 화이, 그는 과연 누구인 것일까?
영화 이해는 적어도 두 캐릭터에 대한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는 쉽게 풀어지지 않는다. 화이에게 석태는 살아남기 위해 아들을 강하게 키우는 엄격한 아버지다. 화이 주변에 아빠로 불리는 사람들은 화이의 삶에 필요한 각종 기술들을 전수한다. 마침내 화이가 자신이 누구이고 또 그동안 속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아빠라 불리는 사람들을 죽이는 모습에서는 일종의 성장 영화의 단면이 보이기도 한다. 왜냐하면 석태를 포함해서 다른 아빠들이 사회에서 작용하는 각종 규범 체계들을 비유한다고 본다면, 결국 자기만의 독립된 삶을 살기 위해선 자신을 둘러싼 규범 체계들을 극복해야만 한다고 말하는 듯이 보이기 때문이다.
영화 이해의 단서로 생각할 수 있는 또 다른 것은 괴물 이미지다.
화이는 어려서 유괴되어 자신이 유괴되었는지 조차도 기억하지 못한다. 괴물 같은 조직원들에 의해 하나의 괴물로 키워졌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화이에게 가장 두려운 대상은 그의 눈에 수시로 보이는 괴물이다. 뛰어난 능력을 갖고 있으면서도 제대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도 괴물 환상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괴물은 석태에게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어린 시절 고아원에서 생활할 때 그는 괴물 환상 때문에 매우 힘들어 했다. 괴물의 정체는 자신의 현실에서 불필요할 뿐만 아니라 불가능한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희망이었다. 왜 희망이 석태에게 괴물로 작용하게 되었는지 영화는 침묵한다. 알 수 있는 것은 오직 결코 변하지 않는 석태의 현실에서 직시하지도 또 대면할 수도 없는 착한 세상에 대한 희망은 오히려 고통의 원인이었다는 사실일 뿐이다. 기도해도 현실을 결코 변화시키지 못하는 괴물에 압도되어 제대로 살아갈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자기에게 천사같이 대해주는 이사장 아들에게 잔인한 일을 행함으로써 자신에게 불필요한 희망을 품게 했던 대상을 제거한다. 스스로 괴물이 되기를 선택함으로 자유로워진 것이다.
화이 역시 동일한 환영에 시달린다. 혈연관계는 없었기에 사회적인 유전자를 생각나게 하는데, 아버지와 다른 점은 스스로가 괴물이 되기를 선택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게 되었을 때, 자기의 진정한 부모가 누구인지 알게 되었을 때, 그리고 자신이 행한 일이 어떤 것인지를 깨닫게 되었을 때, 화이는 괴물에 맞설 용기를 갖게 되고, 마침내 괴물을 자기 안에 받아들임으로써 괴물들과 맞서 싸워 물리칠 수 있게 된 것이다.
영화는 이런 두 개의 이미지를 씨실과 날실로 삼아 만들어졌다.
감독은 괴물 이미지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괴물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봉준호 감독의 영화 <괴물>은 우리를 힘으로 압도하는 거대한 시스템으로 생존을 위해서는 물론이고 빼앗긴 것을 되찾기 위해서라도 우리가 맞서 싸우지 않으면 안 될 존재였다. <화이>의 괴물 역시 마찬가지다. 괴물은 우리 안과 밖에 있는 무엇으로 우리가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바로 찾기 위해 극복해야 할 벽이며 장애물이다. 알을 깨고 나오려는 모든 새들이 겪을 밖에 없는 고통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이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또 대처하느냐에 따라 이후의 삶은 전혀 달라진다. 아버지와 화이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누구는 그 괴물에 맞서 싸우는 가운데 스스로 괴물이라는 정체성을 얻지만, 누구는 그 괴물에 맞서 싸울 수 있기 위해 먼저 자신이 누구인지를 회복함으로써 괴물을 자기 안으로 받아들이고, 그럼으로써 괴물을 이겨낼 힘을 얻을 수 있게 된다.
영화를 통해 장준환 감독은 우리 안의 괴물을 화두로 던지고 있다. 괴물이 무엇에 의해 또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말하고 있는데, 봉준호 감독이 국가간의 관계를 생각했다면, 장준환 감독은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염두에 두고 있다. 우리 안의 괴물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그것에 대한 바른 대처 방안은 무엇인지를 강조한다.
이 영화를 감상하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두 개의 방향을 생각해보게 된다.
하나는 괴물이 등장하게 만드는 사회이고, 또 다른 하나는 우리 안의 괴물이다.
먼저 우리 안에 있는 괴물은 무엇인가?
그것은 욕망이다. 생명나무의 실과가 아닌 선악과를 선택하게 만든 욕망. 신이 되고 싶고, 내 생각과 가치관에 따라 살기를 원하는 욕망, 이것이 바로 우리가 맞서 싸워야 할 괴물이다. 이것은 아무런 변화의 능력이 없는 헛된 희망만을 불러일으킬 뿐이며, 체제 유지를 위한 이데올로기로 작용해 희망하는 사람들을 오히려 힘들게 만들 뿐이다. 결국 우리 스스로를 괴물로 만드는 주범이다. 기독교가 이런 거짓된 희망을 주지 않기 위해선 희망하는 대로 삶을 살아야 한다.
희망은 하나님의 약속에 따른 것이라 우리는 단지 기대만 할 수 있을 뿐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성취할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할 일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희망하는 대로 살려고 노력할 때 하나님이 약속을 성취하시는 분임을 우리가 발견하고 또 볼 수 있게 된다. 변화의 능력이 없는 희망은 무지개를 좇는 것과 같아서 우리로 탈진하게 만들 뿐이다. 결국 우리 안의 사악한 괴물을 깨우는 계기가 된다.
우리는 괴물이 되기를 스스로 선택함으로써 욕망의 화신이 되어서도 안 되고, 또한 필요에 이끌려 욕망을 우리 안에 받아들여서도 안 된다. 욕망을 간과해서도 안 되며, 우리 안의 괴물은 믿음을 통해 직면하고 직시하는 가운데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깨끗이 씻음을 받아야만 한다.
최성수
<화이>(장준환 감독, 액션, 스릴러, 청소년관람불가, 2013)
우리 안에 있는 괴물
<화이>는 오랜 침묵 끝에 모습을 드러낸 장준환 감독의 작품이어서 흥행과 상관없이 도드라져 보인다. <지구를 구하라>에서 보여준 독특한 연출에서 깊은 인상을 받은 터라 더욱 관심이 갔다. 예상했던 대로 이번 영화 역시 이야기가 좀 특이하다. 표면적으로는 한 범죄 집단이 어떻게 생겨나고 또 무너지는지 그 스토리를 전해주는 것처럼 보이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다시 말해, 이야기 안에 숨어 있는 구조적인 장치들 때문에 다양한 생각을 하게 되는데, 크게 두 가지 방향에서 생각해볼 수 있다. 하나는 두 주인공 캐릭터를 중심으로 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괴물’ 이미지를 매개로 독해하는 것이다.
먼저 캐릭터를 중심으로 살펴보자.
가장 큰 궁금증을 유발하는 부분은 두 명의 캐릭터인데, 하나는 범죄 조직의 지도자 석태(김윤석 분)이고 다른 하나는 화이이다. 석태는 아동 유괴를 통해 얻으려는 목적을 성취하지 못한 상태에서, 나중에 화근이 될 수도 있는 아이를 살해하지 않고 살려둔다. 게다가 ‘화이(여진구 분)’라는 이름까지 붙여주고 아들로서 양육하고 또 조직원의 일원으로 키운다. 마침내는 범죄에 화이를 동원하다가 오히려 조직 전체가 와해되는 원인을 제공한 것도 그였다. 조직의 책임자로서 조직을 해체시킨 장본인이 된 것이다.
도대체 그는 무엇을 염두에 둔 캐릭터일까? 유괴된 아이로서 조직의 아들로 양육된 화이는 또 누구인 것일까?
화이는 범죄 조직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고, 음악을 즐겨 들으며, 학교에 다닌 적은 없어도 교복을 즐겨 입고, 여학생 앞에서 제대로 말을 못하는 순진한 면모를 갖고 있는 청소년이다. 게다가 아버지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지는 아들로서 화이는 아버지의 요구를 받을 때마다 괴물 환영에 시달린다. 그리고 마침내는 아버지를 포함해서 자기 주변의 모든 것들을 제거하는 강인한 모습을 보여준다. 화이, 그는 과연 누구인 것일까?
영화 이해는 적어도 두 캐릭터에 대한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는 쉽게 풀어지지 않는다. 화이에게 석태는 살아남기 위해 아들을 강하게 키우는 엄격한 아버지다. 화이 주변에 아빠로 불리는 사람들은 화이의 삶에 필요한 각종 기술들을 전수한다. 마침내 화이가 자신이 누구이고 또 그동안 속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아빠라 불리는 사람들을 죽이는 모습에서는 일종의 성장 영화의 단면이 보이기도 한다. 왜냐하면 석태를 포함해서 다른 아빠들이 사회에서 작용하는 각종 규범 체계들을 비유한다고 본다면, 결국 자기만의 독립된 삶을 살기 위해선 자신을 둘러싼 규범 체계들을 극복해야만 한다고 말하는 듯이 보이기 때문이다.
영화 이해의 단서로 생각할 수 있는 또 다른 것은 괴물 이미지다.
화이는 어려서 유괴되어 자신이 유괴되었는지 조차도 기억하지 못한다. 괴물 같은 조직원들에 의해 하나의 괴물로 키워졌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화이에게 가장 두려운 대상은 그의 눈에 수시로 보이는 괴물이다. 뛰어난 능력을 갖고 있으면서도 제대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도 괴물 환상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괴물은 석태에게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어린 시절 고아원에서 생활할 때 그는 괴물 환상 때문에 매우 힘들어 했다. 괴물의 정체는 자신의 현실에서 불필요할 뿐만 아니라 불가능한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희망이었다. 왜 희망이 석태에게 괴물로 작용하게 되었는지 영화는 침묵한다. 알 수 있는 것은 오직 결코 변하지 않는 석태의 현실에서 직시하지도 또 대면할 수도 없는 착한 세상에 대한 희망은 오히려 고통의 원인이었다는 사실일 뿐이다. 기도해도 현실을 결코 변화시키지 못하는 괴물에 압도되어 제대로 살아갈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자기에게 천사같이 대해주는 이사장 아들에게 잔인한 일을 행함으로써 자신에게 불필요한 희망을 품게 했던 대상을 제거한다. 스스로 괴물이 되기를 선택함으로 자유로워진 것이다.
화이 역시 동일한 환영에 시달린다. 혈연관계는 없었기에 사회적인 유전자를 생각나게 하는데, 아버지와 다른 점은 스스로가 괴물이 되기를 선택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게 되었을 때, 자기의 진정한 부모가 누구인지 알게 되었을 때, 그리고 자신이 행한 일이 어떤 것인지를 깨닫게 되었을 때, 화이는 괴물에 맞설 용기를 갖게 되고, 마침내 괴물을 자기 안에 받아들임으로써 괴물들과 맞서 싸워 물리칠 수 있게 된 것이다.
영화는 이런 두 개의 이미지를 씨실과 날실로 삼아 만들어졌다.
감독은 괴물 이미지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괴물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봉준호 감독의 영화 <괴물>은 우리를 힘으로 압도하는 거대한 시스템으로 생존을 위해서는 물론이고 빼앗긴 것을 되찾기 위해서라도 우리가 맞서 싸우지 않으면 안 될 존재였다. <화이>의 괴물 역시 마찬가지다. 괴물은 우리 안과 밖에 있는 무엇으로 우리가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바로 찾기 위해 극복해야 할 벽이며 장애물이다. 알을 깨고 나오려는 모든 새들이 겪을 밖에 없는 고통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이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또 대처하느냐에 따라 이후의 삶은 전혀 달라진다. 아버지와 화이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누구는 그 괴물에 맞서 싸우는 가운데 스스로 괴물이라는 정체성을 얻지만, 누구는 그 괴물에 맞서 싸울 수 있기 위해 먼저 자신이 누구인지를 회복함으로써 괴물을 자기 안으로 받아들이고, 그럼으로써 괴물을 이겨낼 힘을 얻을 수 있게 된다.
영화를 통해 장준환 감독은 우리 안의 괴물을 화두로 던지고 있다. 괴물이 무엇에 의해 또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말하고 있는데, 봉준호 감독이 국가간의 관계를 생각했다면, 장준환 감독은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염두에 두고 있다. 우리 안의 괴물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그것에 대한 바른 대처 방안은 무엇인지를 강조한다.
이 영화를 감상하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두 개의 방향을 생각해보게 된다.
하나는 괴물이 등장하게 만드는 사회이고, 또 다른 하나는 우리 안의 괴물이다.
먼저 우리 안에 있는 괴물은 무엇인가?
그것은 욕망이다. 생명나무의 실과가 아닌 선악과를 선택하게 만든 욕망. 신이 되고 싶고, 내 생각과 가치관에 따라 살기를 원하는 욕망, 이것이 바로 우리가 맞서 싸워야 할 괴물이다. 이것은 아무런 변화의 능력이 없는 헛된 희망만을 불러일으킬 뿐이며, 체제 유지를 위한 이데올로기로 작용해 희망하는 사람들을 오히려 힘들게 만들 뿐이다. 결국 우리 스스로를 괴물로 만드는 주범이다. 기독교가 이런 거짓된 희망을 주지 않기 위해선 희망하는 대로 삶을 살아야 한다.
희망은 하나님의 약속에 따른 것이라 우리는 단지 기대만 할 수 있을 뿐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성취할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할 일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희망하는 대로 살려고 노력할 때 하나님이 약속을 성취하시는 분임을 우리가 발견하고 또 볼 수 있게 된다. 변화의 능력이 없는 희망은 무지개를 좇는 것과 같아서 우리로 탈진하게 만들 뿐이다. 결국 우리 안의 사악한 괴물을 깨우는 계기가 된다.
우리는 괴물이 되기를 스스로 선택함으로써 욕망의 화신이 되어서도 안 되고, 또한 필요에 이끌려 욕망을 우리 안에 받아들여서도 안 된다. 욕망을 간과해서도 안 되며, 우리 안의 괴물은 믿음을 통해 직면하고 직시하는 가운데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깨끗이 씻음을 받아야만 한다.
최성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