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인의 문화 읽기빈 무덤을 향한 성장통: 기독교인을 위한 영화 <나는 예수님이 싫다> 읽기

2025-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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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에게 던지는 도발적인 질문, 그리고 따뜻한 위로

영화 <나는 예수님이 싫다>는 오쿠야마 히로시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자, 기독교인에게는 다소 도발적으로 들릴 수 있는 제목을 가졌다. 그러나 이 영화는 단순히 반항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여정 속에서 우리가 피할 수 없는 가장 근본적인 질문을 천진한 열두 살 아이의 시선으로 던진다. 기도의 응답, 고난의 의미,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고민은 신앙생활의 연차를 불문하고 우리 모두가 가졌을 법한 신앙의 좌절이자, 역설적으로 성숙을 위한 통과 의례이다. 감독의 어린 시절을 모티브로 삼은 이 성장담은, 바로 그 좌절의 순간을 따뜻하고도 진솔하게 담아내며 모든 신앙인에게 깊은 공감과 위로를 건넬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

고전적인 4:3의 화면비와 감독 특유의 감성적인 연출은 영화에 서정적이면서도 아날로그적인 감성을 더해준다. 이는 복잡한 현대 사회에서 잊기 쉬운, 우리 신앙의 첫 시작 – 순수했던 믿음의 순간들을 되돌아보게 하는 힘을 발휘한다. 이 젊은 감독은 이 영화로 스물둘의 나이에 제66회 산세바스티안영화제에서 역대 최연소로 신인감독상을 수상하고, 제29회 스톡홀름국제영화제에서도 최연소로 촬영상을 수상하는 등 세계적인 찬사를 받았다. 영화의 영어 제목은 ‘Jesus’, 신앙인이든 비신앙인이든 상관없이 기도와 신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에 좋은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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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있어?”: 소원을 들어주는 ‘작은 예수님’

기독교인이라면 저마다 신앙을 갖는 계기가 있다. 태어나면서부터 부모님으로부터 기독교 신앙을 물려받게 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우연찮은 계기로 신앙을 접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영화의 주인공 유라는 후자이다.

도쿄에 살던 유라의 가족이 조부모님의 시골 마을에 머물게 되면서 이 영화가 시작된다. 유라의 등교 첫날, 인사를 하고 찬찬히 살펴보니, 교실 한 쪽에 십자가가 있고, 성경책과 찬송가가 놓여있다. 칠판에는 ‘오늘의 말씀’이 적혀있고 매일 수업 시작 전에 기도를 한다. 모두 모이자 예배를 드리러 채플실로 이동해 성경봉독을 하고 말씀을 듣고 주기도문을 외운다. 생전 처음 보는 광경에 유라는 이게 무슨 일인지 낯설기만 하다. 평범한 학교이지만 평범하지 않은 이곳 미션스쿨에서 과연 잘 적응할 수 있을까? 선생님에게 선물로 받은 카드에는 예수님 그림과 함께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란 말씀이 적혀 있다.

유라는 이전까지 해보지 않았던 질문을 하게 된다. 하나님이 진짜 있느냐는 것이다. 할머니는 오히려 유라에게 되묻는다. 유라는 없는 것 같다고 대답했지만 문득, 기도를 해보기로 한다. 아무도 기도하는 법을 알려주지 않았지만 얼핏 몇 번 보았던 기억을 더듬어 무작정 하나님을 부르고, “이 학교에서 친구가 생기게 해”달라는 한 문장의 끝에 “아멘”을 붙이니 그럴싸하다. 그런데 이 서툰 기도가 끝나자마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바로 유라의 눈앞에 ‘작은 예수님’이 나타난 것이다. 이 ‘작은 예수님’은 마치 요술을 부리듯 하늘로 올라가며 사라지더니 정말로 기도가 이루어졌다. 카즈마와 친구가 된 것이다.

 


“뭘 빌어볼까. 뭐든지 되는 건가?”: 거래의 신앙

강림절 초가 하나씩 켜지는 동안 유라의 추억들이 하나둘 쌓이고 기도들도 하나둘 이루어졌다. “친구가 생기게 해”달라거나 “돈 좀 달라”는 소소한 기도들이 이루어지는 에피소드는 신앙생활을 막 시작할 때 혹은 자신만의 신앙을 처음 가지게 되었을 때 경험하게 되는 작은 기쁨들을 떠올리게 한다. 유라와 함께 놀거나 춤을 추는 ‘작은 예수님’은 성육신하셔서 우리의 친구가 되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떠올리게도 한다.

그러나 사실 유라에게 ‘작은 예수님’은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기보다 아이가 예수님에 대해 갖고 있는 지극히 어린아이 수준의 이미지이자 투영이라고 보는 게 적절할 것이다. 이때까지 유라에게 기도는 자신의 바람을 들어주는 도구요, ‘작은 예수님’은 십자가도, 부활도 없이 그저 유라의 곁에서 바람을 이루어주는 알라딘 램프의 요정 지니 같은 존재였을 뿐이다. 이는 종종 우리 안에도 남아있는 ‘기브 앤 테이크’(Give and Take) 식의 거래식 신앙의 단면이기도 하다.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신앙을 이용하려는 순진하지만 미성숙한 믿음 말이다. 모든 것이 마음먹은 대로 이루어지리라는 순수한 확신, 그리고 그 확신이 만들어낸 안정된 신앙의 틀 속에서 유라는 잠시 행복한 유년 시절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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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했는데 소용 없었어요.”: 깨져버린 아이의 세계

그러나 예상하다시피 유라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고난이 닥치고 만다. 카즈마를 잃은 유라의 세상은 이전과 같지 않다. 왜 항상 웃음이 머물던 얼굴에 슬픔이 드리우게 되고, 항상 함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사람은 왜 곁을 떠나야만 하는가? 자신에게만 일어나는 특별한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카즈마의 기도가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서, 때로 질투를 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카즈마를 잃기를 바란 것은 아니었다. 사고가 난 후, 항상 웃던 카즈마의 어머니는 웃음을 잃었고, 같은 반의 누군가는 더 이상 기도를 하지 않았으며, 유라는 자신만의 ‘작은 예수님’ 이미지를 깨뜨렸다.

영화 <나는 예수님이 싫다>의 카피, “왜 간절한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는 거에요?”는 신앙인이라면 한 번쯤 가져봤을 만한 질문이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로 기도를 시작하고, 예배를 마칠 때마다 “하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며 주기도문을 반복하지만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 살아가는 내 뜻과 다를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완전히 납득하기란 누구에게나 어렵다. 모든 소원에 바라는 방식대로 응답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모든 응답이 'yes'가 아니라는 것은 때로 너무도 절망스럽게 만들고 실망이 너무 커서 다시는 마음을 열지 못하게 만들기도 한다. 무력감에 기도조차 하지 못할 때도 있다. 간절한 기도제목일수록 더욱 그렇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시련과 고난에 눈 감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시련 앞에서 어떻게 반응하는가”이다.(폴 투르니에, 『고통보다 깊은』, 84쪽) 성숙한 신앙은 이 질문 앞에서 시작된다.

 


삶의 균열을 넘어서: 십자가와 빈 무덤의 시선

세상에는 기도에 거절 받은 이들이 너무도 많다. 예수님조차 거절 받으셨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히 5:7)” 하나님 아버지에게 드렸지만 이루어지지 않았다. 평안하게 그 밤을 보냈던 다른 제자들은 십자가 앞에서 흩어졌지만, 기도로 씨름했던 예수님만이 그 길을 묵묵히 걸어가셨다.

오래된 시골집, 할아버지가 창호지에 구멍을 내었던 것처럼 유라도 창호지 문에 다시 구멍을 낸다. 그 구멍을 통해 세상을 바라본다. 문이야 언제고 새 창호지로 덧씌우면 그만이지만, 마음에 난 구멍은 쉽사리 메워지지 않는다. 니콜라스 월터스토프는 아들을 잃은 후 겪은 비통함과 고통을 책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습니다』(좋은씨앗, 2003)에 담았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한다.

 

“이 세상에 구멍이 하나 뚫렸다. 그가 있었던 그 자리에는 이제 아무것도 없다. … 오직 구멍 하나가 남았다. 다시는 채워지지 못할 허공, 빈자리만 남았다.”(56-57쪽)

 

정돈되고 안정된 삶의 자리에 빈 구멍이 늘어난다는 것은 어른이 되어간다는 것이다. 항상 웃을 수만은 없고 항상 반듯할 수만도 없는 불안정한 세계로 들어선다는 것, 그때까지 머무르던 자기 안의 세계를 깨뜨리고 다른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구멍을 가지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옆구리에도 상처가 남았다. 창으로 찔러 피와 물을 쏟아낸 자리이다.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싶다면 손을 내밀어 옆구리에 넣어보라고 말씀하셨다.

 

“그 상처는 그분이 누구신지를 말해준다.”(월터스토프)

 

성장한다는 것은 나를 위해 춤추는 ‘작은 예수님’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의 ‘빈 무덤’의 자리를 알아가는 것이다. 빈 무덤은 예수님이 마치 알라딘의 ‘지니’같은 우리의 소원 성취 도구가 아니라, 죽음까지 이기신 생명의 주인이심을 증언한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세상의 모든 빈 구멍을 통해 역설적으로 부활 소망을 바라보게 된다. 먼 훗날 다시 만나 축구할 날을 기약하는 유라의 마지막 시선처럼 말이다.

이 영화는 한 어린 아이의 유년 시절 성장기를 신앙의 성장과 함께 다루고 있다. 처음 기독교 신앙을 접하고, 자신의 틀 안에 갇혀있는 하나님 이미지를 ‘깨뜨리며’ 성숙의 지경으로 나아가는 한 아이의 신앙의 성장 여정이다. 비록 복음주의 신앙 영화가 아니라 그러한 감동과 은혜를 기대하는 이에게는 당황스러울 수도 있지만, 생각거리를 던지는 의미 있고 귀여운 영화이다.

76분, 반짝거리는 추억 같은 유라의 유년시절 성장기는 여기서 끝이 난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 여정은 그 구멍을 통해 비로소 시작된다. 그렇게 우리는 어른이 되고, 그렇게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된다.

 

 


김지혜 책임연구원(문화선교연구원, 장신대(Ph.D., 기독교와문화))

디자인과 신학을 전공했다. 하나님 나라의 관점으로 문화를 읽고 교회와 세상 간에 다리를 놓고자 한다.
지은 책으로 『하나님 나라를 품은 공동체』, 『세상의 선물이 되는 교회』(공저, 크리쿰북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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