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인의 문화 읽기기독교 영화를 혁신한 <킹 오브 킹스>

2025-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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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들과 함께 장성호 감독의 <킹 오브 킹스>(2025)를 봤다. 나는 이 애니메이션을 보고 큰 감동을 받았고 내가 지금까지 본 최고의 기독교 영화 중의 한 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나와 같이 영화를 봤던 크리스천 지인들의 반응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킹 오브 킹스>가 나만큼 훌륭하게 다가오지 않았던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이 글을 쓰기로 했다. 내가 왜 <킹 오브 킹스>를 훌륭하다고 생각했는지에 나와 함께 영화를 보았던 지인들에게 자세하게 설명해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최근에 출간된 내 책인 '극장에는 항상 상훈이 형이 있다'에서도 밝혔지만 내 삶에서 영화와 기독교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그동안 내 나름으로는 수천 편의 영화를 보면서 영화와 기독교의 관계에 대한 고민을 멈출 수 없었다. <킹 오브 킹스>는 기존의 기독교 영화를 혁신함으로써 그동안 내가 고민해 온 문제에 대해 하나의 답을 제시한 작품이다. 지금부터 <킹 오브 킹스>가 어떤 측면에서 기독교 영화를 혁신했다고 보는지에 대해 내 생각을 밝혀보고자 한다.



기존의 기독교 영화 한계를 뛰어넘는 미학

장성호 감독은 인터뷰에서 <킹 오브 킹스>를 만들게 된 동기에 대해 신앙이 없는 자녀들에게 예수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가 평소에 사람들 앞에서 전도하는 것을 어려워하기 때문에 애니메이션을 통해 전도하고 싶었다고 밝혔다. 장성호의 인터뷰에 따르면 <킹 오브 킹스>가 자녀들에게 예수의 생애를 이야기하는 찰스 디킨스의 소설을 토대로 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선택이다. 장성호 본인이 찰스 디킨스가 되어서 그의 자녀들에게 예수의 생애를 이야기하는 식으로 영화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녀들에게 예수의 생애를 전달한다고 한다면 장성호는 당연히 자녀들이 예수의 생애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따라서 <킹 오브 킹스>에서 장성호가 찰스 디킨스와 그의 아들인 월터가 마치 예수가 살던 이스라엘에 있는 것처럼 장면을 연출하고 있는 것 또한 자연스러운 흐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장성호가 단지 그의 자녀들에게 어떻게 효과적으로 예수의 생애를 전달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가운데 동원한 연출 기법들이 결과적으로는 기독교 영화를 혁신하는 결과를 낳았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장성호가 <킹 오브 킹스>에서 관객에게 예수의 생애를 생생하게 전달하기 위해 동원한 기법들은 일반적으로 기독교적 세계관과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 계열의 영화들에서 활용하는 것들이었다.


언뜻 보기에 찰스 디킨스가 월터에게 친절하게 예수의 생애를 전달한다는 내용만 따라가다가 보면 내가 지적한 부분이 마치 당연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나는 바로 이 지점이 <킹 오브 킹스>의 뛰어난 면이라고 본다. 기독교인이 거부감 없이 그 기법들을 수용할 수 있는 서사 구조를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평소에 기독교 영화 창작자들이 메시지만을 전달하는 데 급급한 나머지 그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영화적인 상상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데 반하여 <킹 오브 킹스>는 어쩌면 장성호 자신도 정확하게 인지하지 못한 채로 기존의 기독교 영화의 한계를 뛰어넘는 미학을 선보인 것이다. 그리고 비기독교인으로서도 단순한 관찰자가 아니라 본인이 직접 예수의 생애를 보고 느끼는 것과 같은 체험을 한다는 것은 기존의 기독교 영화가 주지 못했던 신선한 형식으로 다가올 수 있다. <킹 오브 킹스>를 아동용 애니메이션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이의 눈높이에서 만들어진 작품이라는 점 때문에 나는 이 영화가 성인을 대상으로 제작되는 기독교 영화보다 한계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성경에는 아이와 같지 않다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구절이 나온다. 그것은 성경의 진리는 아이들도 무리 없이 이해하는 데 부족함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실제로 기독교의 핵심인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아이도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내용이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라고 했을 때 성경에서 인간에게 요구하는 것은 결코 복잡한 것이 아니다. 믿는다는 건 그냥 단순히 믿는다는 행위에 불과하다. 마르틴 루터가 로마서를 읽다가 깨달은 진리도 바로 이것이다. 신학적으로 깊이 있게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탐구할 수도 있겠지만 성경의 핵심 진리는 아이도 충분히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인 게 사실이다. 그렇게 본다면 <킹 오브 킹스>는 아동용 애니메이션이지만 한편으로 전 세대에 기독교의 진리를 전달하는 애니메이션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럼, 이제 장성호가 구체적으로 이 영화에서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영화에서 사용되는 기법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킹 오브 킹스> 속 모더니즘 기법

<킹 오브 킹스>가 기존의 기독교 영화가 사용하지 않았던 세련된 기법들을 사용하는 데 있어서 뛰어난 기술력을 바탕으로 매우 완성도가 높은 이미지들을 만들어냈다는 점은 반드시 언급해야 할 것이다. 지금과 같은 완성도를 갖지 않았다면 영화를 보다가 편집이 매끄럽지 않아서 관객의 몰입감이 떨어지거나, 느린 전개로 인해 속도감이 떨어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 영화가 자유자재로 시공간을 넘나들면서 찰스 디킨스와 월터가 현실의 런던과 과거의 이스라엘을 오가는 것처럼 연출할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실사 영화였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따라서 <킹 오브 킹스>는 애니메이션의 장점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성공적인 작품을 만든 사례로 볼 수 있다.


이러한 내용을 전제로 영화의 오프닝부터 살펴보기로 하겠다. 이 영화는 찰스 디킨스가 무대에서 '크리스마스 캐럴'의 한 장면을 구연하고 있는 것으로 시작한다. 스크루지가 자신의 묘지에 찾아가 묘비에 적힌 그의 이름을 보는 장면이 나오고 장면 위로 찰스 디킨스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때 스크루지의 팔동작이 보이는 순간 화면이 컷 되면서 방금 스크루지와 똑같은 제스처의 찰스 디킨스의 모습이 나타난다. 그리고 곧이어 무대 뒤에서 나는 소리 때문에 갑자기 '크리스마스 캐럴'의 구연은 중단된다. 이 장면은 이 영화가 멀티 내러티브 구조로 되어 있다는 근거로 제시될 수 있다. 찰스 디킨스는 이 장면 이후로 월터 앞에서 예수의 생애를 구연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본다면 이 영화에서 찰스 디킨스는 스토리텔러이다. 이 영화 속에서는 그가 '크리스마스 캐럴'과 예수의 생애에 관해 이야기하지만, 만약 영화가 더 이어졌다면 그는 다른 이야기를 구연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킹 오브 킹스>에서 예수의 생애는 수많은 이야기 중에 선택된 하나의 이야기이다. 이 영화에서 찰스 디킨스는 신약에서 예수의 생애를 이야기하는 도중에 유월절의 유래에 관한 이야기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넌 이야기, 아담과 하와가 뱀에 의해 타락한 이야기를 곁들여 월터에게 전달한다.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비선형적으로 이야기가 중첩된다. 이렇게 본다면 이 영화를 어느 정도까지는 '이야기'에 관한 영화라고 볼 수 있다. 찰스 디킨스가 말하는 대로 영화의 서사가 진행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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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적으로 완성도 높은 영화 <더 폴 : 오디어스와 환상의 문>

흥미롭게도 <킹 오브 킹스>는 이 지점에서 타셈 싱의 <더 폴>(2006)과도 만날 수 있다. <더 폴>은 병실에 있는 로이가 소녀 알렉산드리아에게 환상적인 이야기를 들려주는 식으로 전개된다. 로이가 알렉산드리아에게 들려주는 이야기가 실제로 화면 속에서 펼쳐지며 영화가 진행되는 것이다. 극 중 로이에 의해 이야기가 만들어지기 때문에, 로이가 이야기를 중단하면 영화는 다시 이야기의 세계에서 빠져나와 현실로 돌아온다. 알렉산드리아가 갑자기 개입하면서 이야기가 중단되기도 한다. 놀랍게도 <킹 오브 킹스>에는 <더 폴>과 동일한 장면이 있다. 찰스 디킨스가 월터에게 예수의 생애에 대해 본격적으로 이야기하기 시작하는데 갑자기 월터가 이야기를 중단시키는 것이다. 이 장면에서 화면이 예수가 살던 시대로 갔다가 갑자기 런던으로 돌아온다. 이 장면은 <킹 오브 킹스>와 <더 폴>이 완전히 일치한다. 기존의 기독교 영화에서는 이런 장면을 보기 힘들었다. 일반적으로 기독교 영화는 목적론적 서사로 전개되면서 결말에서는 메시지를 전달해야 한다는 강박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더 폴>은 그런 강박으로부터 자유로운 작품이다. 로이와 알렉산드리아가 함께 만드는 이야기가 최종적으로, 어디로 귀결되는지 아무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진행되는 가운데 또 다른 가지를 칠 수도 있고 결말이 수정될 수도 있고 서사 자체가 열려있는 것이다.


반면에 기독교의 진리는 명확하므로 보통의 기독교 영화가 그런 목적론적 서사의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는 건 충분히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런데 <킹 오브 킹스>의 경우에는 목적론적 서사로 귀결되는 건 맞지만 서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장성호는 서사적 유희를 도입한 것이다. 이 영화가 위에서 얘기한 대로 성경의 이야기를 비선형적으로 펼치는 방식 또한 이야기의 차원에서 보자면 유희로 받아들여질 수 있고 일정 부분 멀티 내러티브 영화가 갖고 있는 특징을 활용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예수의 생애를 왜곡하지 않는 선에서 이야기의 속성을 밝힌 것이고 이것이 관객에게 신선하게 다가올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서사적 유희가 도입됨으로써 일반적인 액자 구조는 파괴된다. 일반적으로 액자 구조의 형식을 갖는 경우에 극중극의 이야기에 서술자가 개입하지 않는다. 서술자는 외부에 있는 채로, 객관적으로 서사가 전개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더 폴>이나 <킹 오브 킹스>는 전형적인 액자 구조의 작품이 아니다. 두 작품 모두 같은 방식은 아닐지라도 서술자가 이야기에 개입해서 관객이 그 이야기를 체험하도록 유도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킹 오브 킹스>에서 액자 구조의 파괴가 바로 이 영화가 기독교 영화를 혁신하는 미학의 핵심이며 다음 문단에서 이와 관련된 주장을 이어가도록 하겠다. 



체험적인 영화를 지향하는 형식

<킹 오브 킹스>는 찰스 디킨스가 월터에게 예수의 생애를 본격적으로 이야기하기 시작할 때부터 찰스 디킨스와 월터가 예수가 살던 시대와 현재의 런던을 넘나드는 것처럼 연출된다. 그렇게 됨으로써 찰스 디킨스와 월터와 동일시된 관객은 마치 예수가 살던 시대로 본인이 이동한 것 같은 체험을 하면서 영화를 보게 된다. 이러한 연출은 현실과 이야기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현실과 이야기가 분리되어 있을 경우라면 화면에서 예수가 살던 시대의 인물들만 등장해야 할 텐데 영화 속에서는 분명히 그 인물들과 찰스 디킨스와 월터가 함께 있는 것처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식은 일반적인 기독교 영화에서 허용되지 않았다. 영화가 하나의 세계로 온전히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영화는 관객에게 지금 보고 있는 것이 영화임을 숨겨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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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십계. 홍해가 갈라지는 장면

가령 세실 B. 드밀의 <십계>(1956)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인 홍해가 갈라지는 시퀀스를 예로 들어보자. 홍해가 갈라지는 장면은 엄연히 따지면 시각 효과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그 장면을 보고 있는 관객은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이 하나님에 의한 것임을 믿어야 한다. 그래야지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기적으로 이집트인들로부터 구해낸다는 출애굽의 서사가 성립하기 때문이다. 만약 홍해가 갈라져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고 있는데 갑자기 이스라엘 백성 한 명이 카메라를 보면서 "이거 전부 시각 효과인 거 아시죠?'라고 말을 한다면 그 장면의 기적은 그 의미를 완전히 잃어버리게 된다. 이를테면 <킹 오브 킹스>에서 찰스 디킨스와 월터가 예수가 살던 시대에 등장하고 심지어 오병이어의 기적에 실제로 동참하고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월터가 예수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보여주는 것은 홍해의 기적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카메라를 보고 말하는 것과 같이 지금 관객이 보고 있는 것이 하나의 이야기이고 현실이 아니라는 것을 영화가 스스로 드러내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이와 같은 영화의 자기 반영성은 영화사적으로 봤을 때 모더니즘 영화에서 드러나는 특징이다.


잉마르 베리만의 <산딸기>(1957)에서 베리만은 주인공인 이삭이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에서 과거의 이삭이 아닌 현재의 이삭이 과거를 방문한 것처럼 연출한다. 노년의 이삭은 집에 들어가서 과거에 그가 사랑했던 사라와 그의 가족들이 모여있는 식탁을 바라보는데 과거의 인물 중 누구도 이삭이 그 장소에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다. 우디 앨런의 <애니 홀>(1977)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을 관객에게 얘기하고 있던 앨비는 그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에 교실에서 어린 시절의 그와 만난다. 어린 앨비가 교실 앞에서 선생님과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현재의 앨비는 어린 앨비의 자리에 앉아서 옆에 있는 학생에게 말을 건다. 페데리코 펠리니의 <8과 2분의 1>(1963)에서는 주인공인 영화감독 귀도가 현실과 환상을 오가며 과거나 환상 속에서 본인을 바라보고 만나는 것처럼 연출된다. <킹 오브 킹스>는 바로 이러한 모더니즘 기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것이다. 그런데 <킹 오브 킹스>에서는 이 기법이 영화가 현실이 아님을 드러낸다기보다 예수의 생애를 관객이 더욱 생생하게 체험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 놀랍고 흥미로운 지점이다. 이 영화가 북미에서 <기생충>의 흥행 기록을 깰 만큼 관객의 공감을 끌어내는 데 있어서 예수가 살던 시대에 관객이 실제로 존재하면서 참여하는 것 같은 형식을 도입한 것이 큰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인다. 실로 스토리텔링의 승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체험적인 영화를 지향하는 형식은 영화의 뒤에서 기독교의 핵심 진리와 결합하면서 큰 울림을 자아낸다. 이제 그 부분에 대해서 말해보기로 하겠다. 



기독교 진리를 관객에게 전달하는 탁월한 영화 미학적 전략

<킹 오브 킹스>는 2시간이 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예수의 생애를 매우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이야기하는 화자는 이야기를 길게 할 수도 있고 짧게 할 수도 있다. 찰스 디킨스가 화자로서 개입하는 형식으로 진행되는 이 영화가 속도감을 가질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영화를 3시간짜리로 만들어서 성경에서 나오는 예수의 생애를 최대한 많이 그려내는 것도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3시간 동안 관객을 붙들어둔다는 것은 쉬운 문제가 아니고 핵심 진리가 빠지지 않은 채 잘 전달되기만 한다면 오히려 짧은 러닝타임은 큰 힘을 발휘할 수도 있다. 따라서 이 영화에서 예수의 생애가 얼마나 자세하게 묘사되었는가에 대한 아쉬움은 접어두기로 하자. <킹 오브 킹스>는 예수의 생애 중 핵심적인 사건들을 카메라의 권능에 힘입어 관객이 매우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도록 하는 데에 성공한다. 카메라의 권능이라고 표현한 것은 이 영화가 다양한 앵글과 숏의 사이즈와 카메라의 움직임을 활용하여 관객을 예수의 사역에 탁월하게 참여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가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는 장면, 베드로가 그물이 터질 정도로 물고기를 잡는 장면, 베드로가 예수와 함께 물 위를 걷는 장면, 오병이어의 기적 장면, 예수에 의해 귀신이 사람으로부터 쫓겨 나가고 돼지 떼로 옮겨가서 돼지 떼가 바다로 떨어져서 몰살하는 장면 등을 통해 영화적 스펙터클을 창출하는 순간들은 마치 그 일들이 관객의 눈앞에서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전달된다. 이 생생함의 강도가 앞서 얘기한 대로 찰스 디킨스와 월터가 그 현장에 있는 것처럼 연출되었기 때문에 더욱 높은 것은 물론이다. 이때 적절한 시선 쇼트와 시점 쇼트의 사용은 관객의 몰입을 강화한다.


 이 영화에서 가장 압도적인 감동을 자아내는 순간은 예수와 월터의 관계를 탁월하게 그려내는 데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이것은 자연스럽게 기독교의 핵심 진리와 연결된다. 일반적으로 한 사람이 기독교의 진리를 믿게 되는 과정은 다음과 같다. 아담과 하와가 뱀으로 둔갑한 사탄에 의해 죄를 지었고, 그로 인해 하나님과 인간은 단절되었다. 그런 가운데 구약 시대부터 줄곧 예언되었던 예수가 이스라엘에서 태어나고 예수가 인류가 지은 모든 죄를 영원히 대속함으로써 구속 사역을 완성한다. 이 구속 사역을 믿는 사람은 구원받는다. 성경을 읽으면 이 내용을 전부 알게 된다. 처음에 한 사람은 관찰자의 관점에서 성경을 읽기 시작한다. 그런데 성경을 읽어감에 따라 점점 예수의 구속 사역이 자신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는 예수가 그를 위해서 죽었다는 사실을 믿게 되고 그로 인해 구원받는다. 기독교의 진리를 믿는 사람의 관점에서 서술해 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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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발자취를 현장에서 목격하는 월터

<킹 오브 킹스>는 탁월하게 영화 언어를 사용하면서 방금 언급한 이 과정을 이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이 실제로 체험하게 만든다. 현실에서 관객이 기독교의 진리를 믿을 것인가 말 것인가는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의 문제이기도 한데 이 영화 속에서도 장성호는 관객이 이 진리를 믿으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관객으로 하여금 기독교의 진리를 믿게 되는 사람의 입장이 되어 보는 것을 체험케 할 뿐이다. 월터는 찰스 디킨스가 말하는 예수의 생애를 따라오면서 예수의 탄생부터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려서 죽는 순간까지 모든 과정을 현장에서 직접 목격한다. 즉 월터는 예수의 생애를 전부 목격한 관찰자이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가 매달린 십자가를 바라보던 월터의 눈 속으로 카메라가 들어간다. 이러한 카메라의 움직임은 월터가 그동안 예수의 생애를 통해 목격했던 일들을 스스로 능동적으로 해석하기 시작했음을 뜻한다. 이때부터 장성호는 1인칭 시점 쇼트를 탁월하게 활용해서 월터의 입장에서 관객이 예수를 바라보도록 만든다. 월터는 각각 예수가 치유한 소경, 앉은뱅이, 나사로의 위치에서 예수를 정면으로 바라보게 된다. 이를 통해 월터는 그동안 예수가 수많은 사람을 치유한 이적 행위가 사실은 그와 무관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한다. 예수의 치유 행위는 단순히 병이 낫는 것을 넘어 인류의 죄 문제를 해결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성경에서 문둥병은 죄를 상징하는 병이기에, 예수에 의해 문둥병이 낫는다는 것은 예수에 의해 죄사함을 받는다는 것을 뜻한다. 월터 역시 아담으로부터 내려오는 죄를 안고 태어나기 때문에 월터가 구원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필요하다. 예수를 바라보는 시점 샷을 통해 월터가 여러 인물의 입장이 되어 본 뒤에 갑자기 화면은 물 위를 걷다가 바닷속으로 빠진 베드로를 보여주는 장면으로 전환된다. 이때 월터는 시점 샷을 통해 베드로의 입장에서 예수를 보게 되는데, 방심한 탓으로 인해 바다 밑으로 가라앉고 있는 베드로를 구하려고 뻗은 예수의 손을 바라보게 된다. 그리고 월터가 손을 뻗어서 예수의 손을 잡는 순간 갑자기 예수와 월터의 위치가 서서히 뒤바뀌기 시작한다. 바다 위쪽에 있던 예수가 월터가 있던 자리로 이동하고 월터가 예수가 있던 자리로 옮겨가는 것이다. 그렇게 됨으로써 예수는 바다 밑으로 가라앉는 상태가 되지만 월터는 바다 위로 점점 떠오르는 상태가 된다. 이러한 일련의 몽타주를 통해 기독교에서 말하는 대속의 의미가 짧은 순간 동안 단번에 매우 탁월하게 시각화된다. 


곧바로 이어서 부활한 예수가 무덤에서 나와 그의 앞에 서 있는 월터의 뺨을 만지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로써 대속의 의미는 완성된다. 이 장면은 예수의 부활을 의심해서 예수의 육체를 직접 만져보았던 도마의 모습과 연결할 수 있다. 도마가 촉각을 통해 예수의 부활을 확신하게 된 것처럼 월터 또한 예수가 자신의 뺨을 만지는 촉각을 통해 부활의 증인이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월터는 찰스 디킨스로부터 예수의 생애에 대해 다 들은 후 동생들에게 그 얘기를 전하는 사람이 된다) 이렇게 영화 내내 관찰자의 위치에 머물던 월터가 예수가 자신을 위해 죽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사건의 관찰자에서 사건의 당사자로 그의 정체성이 변하는 것이며 이렇게 됨으로써 월터는 예수의 희생을 통해 구원받는 것이다. 찰스 디킨스가 월터에게 말하는 이야기 속의 주인공인 예수가 이야기 밖의 현실 속 인물인 월터의 뺨을 만지는 것은 이야기와 현실의 경계가 무너졌음을 뜻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야기 속 인물이 현실 속 인물의 뺨을 만진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시간상으로 본다면 과거 예수가 살던 시대와 월터가 살고 있는 극 중 현재의 런던 그리고 더 나아가서 보자면 미래에 해당하는 <킹 오브 킹스>를 보고 있는 관객이 살고 있는 현재라는 세 가지 시간의 경계가 무너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를 통해 장성호는 예수의 대속과 부활은 결코 과거의 사람들에게만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며 찰스 디킨스가 살던 시대를 넘어 현재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에게도 해당하는 크로노스적이 아닌 카이로스적인 사건임을 강력하게 관객에게 전달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관객을 예수의 사역에 직접 참여시키는 미학적인 전략은 완벽하게 기독교의 진리를 관객에게 전달하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킹 오브 킹스>가 기존의 기독교 영화를 혁신시킨 점이다. 



고양이 윌라의 활용과 기독교 영화가 지향해야할 지점

장성호는 <킹 오브 킹스>에서 월터의 고양이 윌라를 주요 캐릭터로 등장시킨다. 영화의 초반에 찰스 디킨스가 '크리스마스 캐럴'을 구연하고 있을 때부터 윌라는 말썽을 부리고 심지어 예수가 살던 시대에까지 동행한 윌라는 갑자기 사라져서 찰스 디킨스와 월터가 그를 찾는 소동을 일으키기까지 한다. 나는 윌라의 활용이 효과적이었다고 생각한다. 윌라와 관련된 소동은 영화적 재미를 만드는 동시에 윌라를 찾는 에피소드를 잃어버린 양의 비유와 연결 짓게 만듦으로써 극 중 서브플롯 기능까지 담당하게 되기 때문이다. 요컨대 윌라는 기독교의 복음과는 별반 상관이 없는 캐릭터이지만 관객을 극에 몰입하게 만드는 사랑스러운 존재로 활약하면서 영화적 요소로서 제 역할을 다한다. <킹 오브 킹스>가 단순히 교조적인 작품으로 다가가지 않도록 만드는 것도 일정 부분 윌라 때문이다. 

1be0135f46284.jpg영화 내내 월터와 함께하는 고양이 윌라


기독교 영화를 만들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간과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바로 이 지점이다. 기독교 영화라면 기독교보다 '영화'에 방점이 찍히는 것이 맞다고 본다. 기독교 연극이라고 하더라도 당연히 연극에 방점이 찍혀야 옳다. 기독교는 기본적으로 전제로 깔리는 것이라고 한다면 각 예술의 속성을 제대로 구현해야 비로소 그 예술로 창작하는 것이 의미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내가 볼 때 많은 기독교 영화는 이 점을 간과하고 있다. 기독교적 메시지를 전달하기 이전에 그것이 얼마나 영화적으로 구현되는 것인가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한 흔적이 보이는 작품이 매우 적다는 것이다. <킹 오브 킹스>는 기독교 영화로서 훌륭하기 이전에 '영화'로서 훌륭하다. 내가 <킹 오브 킹스>에 대한 분석을 통해 강조하고 싶은 게 바로 이것이다. 장성호가 그것을 의식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지만 내가 위에서 서술했듯이 <킹 오브 킹스>에서 그는 기독교적 세계관에서 경계하고 있는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 기법까지 기독교적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 적극 끌어들였다. <킹 오브 킹스>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어떤 미학이 되었든지 간에 그 미학을 어떤 식으로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미학은 기독교 예술가에게 유용할 수도 있는 것이다.


앞으로 <킹 오브 킹스>와 같이 보다 열린 시선으로 상상력을 통해 영화 형식을 고민하는 기독교 영화들이 많이 만들어지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그럴 때 <킹 오브 킹스>의 성과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오히려 대중들과 더 가깝게 소통할 수 있는 길도 열릴 수 있을 것이다. 설교하는 A, B, C, D 목사가 있다고 가정한다면 현재의 기독교 영화는 오로지 A 목사의 설교만 옳다는 식이다. 절대 그렇지 않다. B, C, D 목사의 설교도 각자만의 방식으로 성도들에게 진리를 전하고 감동을 줄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열린 시선을 통한 상상력의 위력은 이미 오래전부터 기독교 예술가들을 통해 입증되었다. '반지의 제왕'을 쓴 톨킨이나 '나니아 연대기'를 쓴 C.S.루이스와의 비교를 통해 우리는 현재 만들어지고 있는 기독교 영화들이 얼마나 폐쇄적인지 쉽게 알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과거의 영화들로부터 우리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과거에 제작된 할리우드 대작 성서 영화들을 한번 떠올려보라. 그 영화들이 관객들을 사로잡았던 것은 무엇보다도 영화적으로 훌륭한 작품들이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으로부터 최고의 기독교 영화로 손꼽히는 윌리엄 와일러의 <벤허>(1959)에서 유다 벤허(찰톤 헤스톤)와 메살라(스티븐 보이드)가 맞붙는 박진감이 넘치는 전차 경주 장면은 매우 유명하다. 비기독교인이라면 일단 이 전차 경주 장면의 스펙터클에 매혹되고 감탄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기독교인의 관점에서 이 장면은 신의 편에 서 있는 유다 벤허와 인간의 편에 서 있는 메살라와의 대결로 볼 수 있다. 이 전차 경주에서 결국 벤허가 승리한다. 이것은 이후에 벤허의 가문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으로 구원받으리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이 장면을 영화 언어의 관점에서 살펴보자. 영화는 활동사진으로 운동성을 잘 표현할 수 있는 예술이다. 따라서 뛰어난 편집에 의한 전차 경주 장면의 운동성은 영화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다. 전차 경주 장면에서 벤허와 메살라가 서로 대화를 주고받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운동성을 통해 신과 인간의 대결이 탁월하게 구현되는 것이다. 관객은 그냥 스펙터클을 즐겼을 뿐인데 이를 통해 비언어적으로 신과 인간의 대결이 관객에게 자연스럽게 전달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기독교 영화가 지향해야 할 영화적인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킹 오브 킹스>와 함께 <벤허>의 전차 경주 장면을 기억해 주기를 바라며 이 글을 마친다.



한상훈 평론가 
(전 서울국제사랑영화제 프로그램 팀장, 책 <극장에는 항상 상훈이 형이 있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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