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렌드분석 [요즘뜨는것들]이찬혁,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

2025-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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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부터 힙합은 안 멋져’

힙합이 유행을 넘어 지난한 답습을 반복하던 시절, ‘어느새부터 힙합은 안 멋’지다는 파격적 라인을 힙합 서바이벌 프로그램 <쇼미더머니 10>에서 짓궂게 외치던 이가 있었다. ‘악동뮤지션’ 출신 이찬혁이 ‘머드 더 스튜던트’를 도왔던 그때의 무대는 4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쇼츠나 커뮤니티에서 회자된다. 뒤이어 그는 ‘쇼미더머니가 세상을 망치는 중이야’라며 대놓고 10년 차 장수 프로그램 자체를 디스했는데, 언뜻 건방지게 들릴 수도 있는 이 말은 사실 대중음악 씬 내부에서의 자기 인식에 가깝다. 


머드 더 스튜던트의 곡 '불협화음'을 피처링하는 이찬혁.   출처 엠넷

확실히 2010년대 한국 가요계는 힙합의 확장기였다. 무대에서 래퍼들은 자의식과 서사를 풀어내며 젊은 세대의 ‘쿨함’, ‘저항’, ‘자아’ 등의 개념을 대변했다. 그러나 이 붐을 만들어낸 쇼미더머니는 TV 쇼 본연의 목적대로 ‘힙합의 정신’보다는 대중의 입맛에 맞게 자본력을 가미한 ‘무대’에 집중하며 본래 힙합이 가진 의미들은 뒷전에 두던 중이었다. 이 때 그가 던진 한마디, “안 멋져”는 단순한 비난이 아니라, 유행의 기계로 전락해 버린 문화에 대한 거리두기다. 그러면서도 그 이야기를 풀어내는 장르는 힙합이었으니, 이 얼마나 기개 있는 외침이란 말인가. 



유튜브 개인 채널에 올라온 영상(좌), 전시 기획 포스터(우)   출처. 이찬혁 유튜브, CH art Label 인스타

예술, 신앙. 그저 하고 싶은 대로

그랬던 그가 유튜브에 개인 채널을 열어 영상을 올리거나, 자신만의 톡특한 전시회를 기획하는 등 일종의 기행을 보이기를 수차례. 본격적으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당시 이찬혁은 ‘GD를 따라 한다’, ‘Zion.T랑 똑같이 노래한다’ 같은 코멘트를 듣던 중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찬혁은 22년 10월 솔로 1집 <ERROR>를 발매했고, 이 앨범은 23년 3월 20회 한국대중음악상 최우수 팝 음반에 선정된다. 악동뮤지션, AKMU의 색채에서 벗어나 진짜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이 앨범은 그로부터 1년 8개월이 지난 24년 11월, 청룡영화상 시상식에서 다시 재조명되었다. 


아니, 이찬혁이 재조명되었다고 해야겠다. <ERROR>의 첫 번째 트랙, ‘목격담’의 가사로 포문을 열며 연주한 ‘파노라마’는 퍼포먼스 그 자체로 강렬했다. 들고 있던 샴페인 잔의 내용물이 다 쏟아지도록, ‘이렇게 죽을 순 없어. 버킷리스트 다해 봐야 해’라며 세상을 있는 그대로 최선을 다해 향유할 것처럼 신나게 몸을 흔드는 모습은 일면 숭고하기까지 했다. 그리스도인들의 가슴이 웅장해지는 장면은 ‘파노라마’ 직후에 등장한다.

“할렐루야 꿈의 왕국에 입성한 아들을 위해

  할렐루야 함께 일어나 춤을 추고 뛰며 찬양해”


영화제 시상식 무대에서 이찬혁은 공간에 충만히 울려 퍼지는 찬양 곡조와 함께 뒤편에 준비된 ‘ERROR’라고 적힌 관 속으로 즐겁게, 기꺼이 들어간다. 어떤 설명 같은 것이 없더라도, 그는 천국으로 향하고 있다, 는 맥락을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찬양이 울리는 가운데 'ERROR'라고 적힌 관 속에 들어가는 이찬혁.    출처 KBS 유튜브



신앙 언어의 장벽을 넘어서

여기서 포인트는 그가 무대를, 특히 무대 언어를 꾸려가는 방식이다. 이미 악동뮤지션을 통해 충분히 대중과 소통했던 이찬혁은 대중성에 있어 프로 중에 프로다. 이제 그는 자신만의 걸음을 보다 자신있게 걷고 있었다. 한편, 그는 선교사 자녀로서의 정체성이 생애 전반에 걸쳐 있었을 것이다. 공개적으로 신앙의 이야기를 많이 꺼내놓지는 않았던 그가 청룡영화제에서 예술성을 담아 풀어낸 언어는 단순히 ‘기독교 언어’에 갇혀있지 않았다. 대중이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교회적 언어를 넘어서, 자유로운 예술의 영역에 있었다. 그래서인지 대중은 그의 무대를 거북하게 여기지 않고 그가 전달하는 이야기를 각자의 방식대로 받아들였다.


유튜브에 달린 댓글 몇 개만 살펴보자.

kjh**** 한 모금의 샴페인도 흘리기 싫은 삶에 잔이 모두 비워지도록 추는 춤이란

cut**** 그는 지디가 아니었다. 찬혁이었다.

****q2f 관은 하나의 문일 뿐이네요. 뒤로 눕는 게 아니라, 앞으로 걸어 들어가네요... 또 다른 세상을 향해


신앙 언어에 관해, 이전 지면에서 언급했던 김지혜 책임연구원의 말을 상기해 보면, ‘문제는 그 언어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절대화하고 소통 가능성을 닫아버리는 태도’다.1) 전문적으로 대중과 소통하는 프로 아티스트가 대중문화예술의 장인 영화 시상식 무대에서 자신만의 언어로 퍼포먼스를 꾸린 시점에 이미 신앙 언어가 가진 배타성은 사라진다. 대중은 무리 없이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음악으로 건넨 서사에 대한 각자의 해석들을 자유롭게 소통할 수 있었다.

1) 문화선교연구원 웹진, 김지혜 책임연구원, ‘기독교인을 위한 공공신학적 미디어 리터러시: 신앙 언어의 정체성과 문화적 상상력 사이에서’ 
'미디어 리터러시' 원문 보러가기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

그런 그가 솔로 2집 <EROS>로 또 한 번 세상을 뒤집었다. 이번엔 열린음악회다. 상대적으로 높은 연령대의 시청자층을 가진 열린음악회의 무대에서 보여준 퍼포먼스는 다시 한번 청룡 때의 화제성을 불러일으켰다. ‘비비드라라러브’와 ‘멸종위기사랑’ 두 곡으로 꾸린 무대 위엔 이찬혁 말고도 이목을 끄는 이들이 있다. 코러스와 댄서들이다. 블랙 가스펠 장르를 차용해서 코러스를 강조했고, 뮤지컬 배우로 꾸려진 댄서들은 춤뿐만 아니라 가사도 최선을 다해 외쳐댄다. 


열린음악회에서 '멸종위기사랑'을 부르는 이찬혁, 그의 코러스와 댄서들.   출처  KBS 유튜브


흥미롭게 꾸려진 무대에서 그가 외치는 메시지는 잃어버린 ‘사랑’에 관한 것이다. 대놓고 할렐루야를 외치던 지난 무대보다는 신앙 언어가 절제되어 있지만, 인류가 잃어가는 사랑을 꼬집어 블랙 가스펠의 형태로 외치는 선율에는 말하고자 하는 바가 더 무겁게 얹혀있었다. 코러스가 신나게 외치는 “Revive it Somehow(어떻게든 되살려주세요)”는 어딘가 처절하다. 희망이 없는 세상에서 소망을 갖고자 하는 몸부림이랄까. 사랑이 멸종 위기에 처했다는 외침에 얹어진 경쾌한 멜로디와 호탕한 퍼포먼스에는 허무함 속에서도 주체성을 잃지 않고 최선을 다해 세상을 누리겠다는 당찬 포부까지도 엿보인다.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는 이찬혁의 몸짓과 외침에 경의를 표한다. SF 소설가 할란 엘리슨도, 애니메이션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작가 안노2)도 어쩌면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는 일이 그토록 참혹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더욱 이찬혁의 걸음이 소중하다. 그가 하나님의 선교에 얼마큼 몸을 싣고 있는가 생각해 보면, 스스로 얼마나 인지하고 있느냐와 관계없이 그 누구보다 최전선에 있는 것일 테다. 


2)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친 짐승>은 SF 작가 할란 엘리슨의 단편집이다. 주로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이다. 애니메이션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TV 시리즈 마지막화의 제목도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혹은 ‘나’로 읽히기도 한다)을 외친 짐승’이다. 아마도 이 작품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에반게리온 역시 디스토피아적 작품으로 유명하다. 

2001년 일본에서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라는 제목의 소설이 발간되기도 했다. 할란 엘리슨의 영향인지, 에반게리온의 영향인지는 불분명하다. 내용은 전혀 다른 로맨스 소설이다. 이를 기반으로 영화와 드라마 등이 만들어지기도 했고, 한국의 영화 ‘파랑주의보’의 원작이기도 하다.



김유민 연구원(문화선교연구원, 한양대(대중문화 석사, 국문과 박사과정))

불완전한 편린이 모여 빛을 낸다면, 그만큼 완전한 것이 또 있을까.
언뜻 희망이 없어 보이는 세상에서 '소망'을 동경(憧憬)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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