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말에 구원받는다는 것> | 아라이 유키 지음 | ㅁ(미음) | 2023
まとまらない言葉を生きる
말의 무게, 말의 가치, 말의 의미 있는 역할을 다시금 기대하게 만드는 책, <말에 구원받는다는 것>을 소개합니다.
사회와 문학을 탐구하는 연구자의 날카로운 통찰과 함께, 인간을 향한 따뜻함이 깃든 글들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사람을 세우고 영혼을 북돋아주기를 소망하는 모든 이들에게 이 책을 권합니다.
―
말의 홍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눈뜨자마자 맞이하는 스마트폰에서, 유튜브와 인터넷 뉴스, SNS 속에서, 그리고 아직은 살아있는 종이책과 신문 속에서 우리는 수많은 말들을 마주하며 살아갑니다. 많아지고, 다양해지고, 폭넓어지고, 다채로워졌습니다. 하지만 그와 함께, 가벼워졌습니다. 너무 쉽게 너무 많은 의미뭉치들을 접하다보니, 그 중요성은 더 약해지는 것 같습니다.
‘말이 무너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니, 말이 스스로 무너질리 없으니 ‘말이 파괴되고 있다’고 하는 편이 정확할 것이다.
일본의 문학 연구가 아라이 유키는 <말에 구원받는다는 것>에서 요즘의 모습을 위와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가 보기에 현재 ‘언어들의 사회’는 단순히 가벼워진 것이 아니라 무너지며 파괴되고 있습니다. 인간 삶에 긍정적 역할을 하는 말의 기본적 의미가 퇴색되고, 상처와 고통을 끼치는 말들의 사회적 존재감이 매우 커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이러한 ‘말의 파괴 현상’에 맞서고자 합니다.
책임의 ‘층’
책은 아픔과 고통 가운데 피어난 고귀한 말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최근 우리 사회도 많은 사건·사고를 겪고 있는데요. 많은 귀한 생명들이 다치고 고통받으며, 심지어는 이 땅에서의 삶을 마치기도 합니다. 슬프고 답답하고 황망한 상황 가운데, 우리는 나름의 권한과 책임을 맡은 사람들에게 기대를 가져보기도 합니다. 대표자로서 무언가 말해주기를, 무언가 응답해주기를 말입니다.
안타깝게도, 우리의 기대와 다른 말들도 많습니다. 자기만을 변호하는 말, 아파하는 자들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말, 희망과 연대의 기대는커녕 체념과 각자도생의 삶을 찾게 만드는 수많은 말들이 뉴스와 여러 미디어를 통해서 쏟아져 나오는 느낌입니다. 답답하고 때로는 분노할 노릇입니다. 책임과 권한이 많은 자들의 적절한 응답을 기대하지만,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닌가 봅니다. 하지만, 몇몇 사람 탓만 한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닙니다.
인간을 ‘생산성’으로 평가하는 현대 사회의 존재 양식에도 있다.
나 자신도 넓은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
겹겹이 쌓인 ‘책임의 층’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있다.
어느 한 ‘층’에 대해 생각했다고 해서 다른 ‘책임’을 면할 수는 없다.
…원래 한 사람 몫으로 생각할 수 있는 ‘층’은 그다지 넓지 않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함께 생각할 사람의 수를 늘릴 필요가 있다.
아라이 유키는 일본에서 발생했던 미나마타병 사건에 대해 다루며, 책임의 ‘층’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물론, 가장 큰 책임은 수은을 무단으로 방류한 회사와 공장에게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책임은 일본이라는 사회문화에도 있고, 그러한 문화를 만들어가는 현대 사회에도 있고, 그 사회를 구성하고 지지하며 살아가는 사회구성원들에게도 있다는 것입니다. 책임의 층위는 분명 다르겠지만, 남의 일이라 생각하며 무관심해도 되는 사람은 없다는 말이지요.
‘사회적 책임’이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요즘은 교회 역시 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사회 속에서 책임 있는 공동체가 되려고 노력하며 공공성을 기르기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비통하고 애통한 수많은 사건들 속에서, 교회는 나름의 책임의 층을 받아들이고 이에 응답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교회는 여전히 우리 사회와 구성원들의 가치와 사상을 만들어가는 중요한 공동체 중 하나입니다. 생명과 안전, 평화와 화해, 공존과 연대의 가치를 새롭게 생각하고 사회와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책임 있는 교회로 계속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래봅니다.
격려를 포기하지 않기
교회는 격려와 위로를 지향하는 공동체입니다. 물론 부족함과 미숙함이 있지만, 그 지향점은 변함이 없습니다. 산다는 것 자체가 참으로 퍽퍽한 요즘 세상에서, 특히 격려의 말은 우리 삶을 지탱할 수 있는 중요한 기반이 됩니다. 하지만, 격려라는 것이 항상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리고 정말로 힘든 상황에 처한 이들에게는, 격려의 말 자체도 꺼낼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끔찍한 일이 일어났을 때 “말은 무력하다”고들 한다. 무슨 말을 해도 “허울 좋은 말”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동일본 대지진 후에도 “문학 따위는 쓸모가 없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이러쿵저러쿵 늘어놓지 말고 자원봉사를 하든 지원 물자를 보내든 몸을 움직여야 한다”고들 했다.
나 자신도 ‘말을 다루는 일’을 하는 것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러나 야마시타 씨의 말은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말로 남을 격려하기를 포기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전해준다. 소중한 사람을 지탱하기 위해서는 역시 말이 필요하다고 가르쳐준다.
사회적 맥락과 흐름 속에서 말들의 의미와 역할을 고찰해온 아라이 유키는 ‘격려’라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그렇지만 결코 포기할 수는 없는 것임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격려의 말은 손에 쉽게 잡히지 않습니다. 특히 상대방이 겪고 있는 고통과 어려움이 크면 클수록, 그 앞에서 입을 떼는 것 자체가 어렵고 적절한 말을 찾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포기할 수도 없습니다.
많이 ‘있는 말’은 눈에 띄므로 금세 눈치채기 쉽다. 반면 ‘없는 말’은 찾아내기 어렵다. 애당초 ‘없는’ 것이니 당연히 눈치채기 어려운 것이다.
하지만 그런 ‘없는’ 것을 상상하는 힘도 필요하다.
‘없는 말’은 매번 모색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격려하는 말’을 계속 궁리하려고 한다. 차근차근 꾸준히 찾아나가려고 한다.
말을 포기하지 않기
기독교인들은 누구보다도 말의 가치를 인정하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말씀의 종교’라는 별명이 괜히 붙은 것이 아니지요. 하나님의 말씀을 중시하기 위한 다양한 영성훈련의 전통을 가지고 있고, 그 말씀을 무겁게 여기며 삶으로 따르고자 애쓰는 것이 우리 신앙의 기본 바탕입니다. 특히, 설교자들은 더더욱 말의 무게를 믿는 사람들인데요. 어찌 보면 의미뭉치들만 가득한 설교의 시간이지만, 말로 가득한 그 시간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하고, 인간 존재의 변화를 꿈꾸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 기독교인들입니다.
<말에 구원받는다는 것>은 말의 의미와 가치가 퇴색되어가고, 삶을 풍성하고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말의 역할을 찾기 어려운 현 시대를 바라보며 쓰여진 책입니다. 말과 사회를 붙잡고 연구해온 문학 연구가 아라이 유키는 때론 날카로운 통찰로, 때론 가슴 뛰는 따뜻함과 인간다움으로 이 책을 채우고 있습니다. 책을 통해 우리는 말의 역할을 여전히 기대해볼 수 있고, 사람과 사회를 살리는 말은 어떤 모습인지를 다시금 그려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도, 그럼에도 이 책을 쓰고자 하는 이유는 ‘파괴된 말’에 맞서고 싶고, 말의 힘을 믿고 싶기 때문이다.
잃어서는 안 될 말의 존엄이 여기에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글. 김용준
<말에 구원받는다는 것> | 아라이 유키 지음 | ㅁ(미음) | 2023
まとまらない言葉を生きる
말의 무게, 말의 가치, 말의 의미 있는 역할을 다시금 기대하게 만드는 책, <말에 구원받는다는 것>을 소개합니다.
사회와 문학을 탐구하는 연구자의 날카로운 통찰과 함께, 인간을 향한 따뜻함이 깃든 글들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사람을 세우고 영혼을 북돋아주기를 소망하는 모든 이들에게 이 책을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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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의 홍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눈뜨자마자 맞이하는 스마트폰에서, 유튜브와 인터넷 뉴스, SNS 속에서, 그리고 아직은 살아있는 종이책과 신문 속에서 우리는 수많은 말들을 마주하며 살아갑니다. 많아지고, 다양해지고, 폭넓어지고, 다채로워졌습니다. 하지만 그와 함께, 가벼워졌습니다. 너무 쉽게 너무 많은 의미뭉치들을 접하다보니, 그 중요성은 더 약해지는 것 같습니다.
일본의 문학 연구가 아라이 유키는 <말에 구원받는다는 것>에서 요즘의 모습을 위와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가 보기에 현재 ‘언어들의 사회’는 단순히 가벼워진 것이 아니라 무너지며 파괴되고 있습니다. 인간 삶에 긍정적 역할을 하는 말의 기본적 의미가 퇴색되고, 상처와 고통을 끼치는 말들의 사회적 존재감이 매우 커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이러한 ‘말의 파괴 현상’에 맞서고자 합니다.
책임의 ‘층’
책은 아픔과 고통 가운데 피어난 고귀한 말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최근 우리 사회도 많은 사건·사고를 겪고 있는데요. 많은 귀한 생명들이 다치고 고통받으며, 심지어는 이 땅에서의 삶을 마치기도 합니다. 슬프고 답답하고 황망한 상황 가운데, 우리는 나름의 권한과 책임을 맡은 사람들에게 기대를 가져보기도 합니다. 대표자로서 무언가 말해주기를, 무언가 응답해주기를 말입니다.
안타깝게도, 우리의 기대와 다른 말들도 많습니다. 자기만을 변호하는 말, 아파하는 자들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말, 희망과 연대의 기대는커녕 체념과 각자도생의 삶을 찾게 만드는 수많은 말들이 뉴스와 여러 미디어를 통해서 쏟아져 나오는 느낌입니다. 답답하고 때로는 분노할 노릇입니다. 책임과 권한이 많은 자들의 적절한 응답을 기대하지만,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닌가 봅니다. 하지만, 몇몇 사람 탓만 한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닙니다.
아라이 유키는 일본에서 발생했던 미나마타병 사건에 대해 다루며, 책임의 ‘층’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물론, 가장 큰 책임은 수은을 무단으로 방류한 회사와 공장에게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책임은 일본이라는 사회문화에도 있고, 그러한 문화를 만들어가는 현대 사회에도 있고, 그 사회를 구성하고 지지하며 살아가는 사회구성원들에게도 있다는 것입니다. 책임의 층위는 분명 다르겠지만, 남의 일이라 생각하며 무관심해도 되는 사람은 없다는 말이지요.
‘사회적 책임’이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요즘은 교회 역시 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사회 속에서 책임 있는 공동체가 되려고 노력하며 공공성을 기르기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비통하고 애통한 수많은 사건들 속에서, 교회는 나름의 책임의 층을 받아들이고 이에 응답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교회는 여전히 우리 사회와 구성원들의 가치와 사상을 만들어가는 중요한 공동체 중 하나입니다. 생명과 안전, 평화와 화해, 공존과 연대의 가치를 새롭게 생각하고 사회와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책임 있는 교회로 계속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래봅니다.
격려를 포기하지 않기
교회는 격려와 위로를 지향하는 공동체입니다. 물론 부족함과 미숙함이 있지만, 그 지향점은 변함이 없습니다. 산다는 것 자체가 참으로 퍽퍽한 요즘 세상에서, 특히 격려의 말은 우리 삶을 지탱할 수 있는 중요한 기반이 됩니다. 하지만, 격려라는 것이 항상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리고 정말로 힘든 상황에 처한 이들에게는, 격려의 말 자체도 꺼낼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사회적 맥락과 흐름 속에서 말들의 의미와 역할을 고찰해온 아라이 유키는 ‘격려’라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그렇지만 결코 포기할 수는 없는 것임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격려의 말은 손에 쉽게 잡히지 않습니다. 특히 상대방이 겪고 있는 고통과 어려움이 크면 클수록, 그 앞에서 입을 떼는 것 자체가 어렵고 적절한 말을 찾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포기할 수도 없습니다.
말을 포기하지 않기
기독교인들은 누구보다도 말의 가치를 인정하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말씀의 종교’라는 별명이 괜히 붙은 것이 아니지요. 하나님의 말씀을 중시하기 위한 다양한 영성훈련의 전통을 가지고 있고, 그 말씀을 무겁게 여기며 삶으로 따르고자 애쓰는 것이 우리 신앙의 기본 바탕입니다. 특히, 설교자들은 더더욱 말의 무게를 믿는 사람들인데요. 어찌 보면 의미뭉치들만 가득한 설교의 시간이지만, 말로 가득한 그 시간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하고, 인간 존재의 변화를 꿈꾸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 기독교인들입니다.
<말에 구원받는다는 것>은 말의 의미와 가치가 퇴색되어가고, 삶을 풍성하고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말의 역할을 찾기 어려운 현 시대를 바라보며 쓰여진 책입니다. 말과 사회를 붙잡고 연구해온 문학 연구가 아라이 유키는 때론 날카로운 통찰로, 때론 가슴 뛰는 따뜻함과 인간다움으로 이 책을 채우고 있습니다. 책을 통해 우리는 말의 역할을 여전히 기대해볼 수 있고, 사람과 사회를 살리는 말은 어떤 모습인지를 다시금 그려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도, 그럼에도 이 책을 쓰고자 하는 이유는 ‘파괴된 말’에 맞서고 싶고, 말의 힘을 믿고 싶기 때문이다.
잃어서는 안 될 말의 존엄이 여기에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글. 김용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