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84번가의 연인 (84 Charing Cross Road, 1987)
시간과 공간을 그대로 담아내는 영화의 속성 때문인지, 우리는 계절에 따라 특정한 영화들을 찾곤 한다. 특히 연말과 연초에는 매서운 바람을 견디기 위해 단단히 여몄던 겉옷과 목에 두른 기다란 목도리를 모두 내려놓고, 소중한 자신만의 공간 안에서 두꺼운 이불을 덮은 채로 따뜻한 차 한 잔이나 달콤한 귤을 먹으며 좋은 영화 한 편을 보고 싶어진다. 계절과 분위기에 알맞은 영화를 감상하는 것은 분명 우리에게 작지 않은 행복을 선사한다.
크리스마스와 흰 눈이 배경인 영화는 아니지만,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따뜻한 겨울의 정서를 느낄 수 있는 영화 한 편을 추천한다. <84번가의 연인>이다.
국내에서는 <84번가의 연인>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되었지만, 원래 제목은 <84 Charing Cross Road>로, 영국 런던에 위치한 번화가 '채링 크로스'의 84번지라는 뜻이다. (이 영화의 원작이 된 동명의 책은 국내에서 『채링크로스 84번지』로 출판되었다.)
편지로 이어진 특별한 우정
뉴욕에 사는 작가 '헬레인 헨프'는 독서광이다. 읽고 싶은 고전이 잔뜩 있는 그녀는 어느 날, 런던 채링 크로스의 84번지에 있는 중고 서점 '마크스 상회'의 광고를 보게 된다. 절판된 책들을 취급한다는 문구에 '헬레인'은 편지 한 통을 써서 그곳으로 발송한다. 고전을 구하고 싶은데 너무 비쌀까 봐 걱정이 된다며 '고전 작품을 즐겨 읽는 가난한 작가'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헬레인'의 편지는 유머와 재치가 가득하다. 찾고 있는 책 목록을 동봉한 '헬레인'의 편지는 일종의 주문서가 되었고, 서점 직원인 '프랭크'는 '헬레인'이 보낸 편지를 읽고 답신을 보내며 두 사람의 교류는 시작된다.
책과 고전을 사랑하는 두 사람은 그 이후로 긴 시간 동안 책을 주문하고, 책을 찾아 발송한다. '헬레인'은 '프랭크'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해 책의 값을 치르기도 하고, 간절히 찾았던 책을 읽을 수 있게 됨에 감사를 표하거나, 또 읽은 뒤 내용에 실망한 책에 대하여는 불평불만을 늘어놓기도 한다. 도통 책이 오지 않을 때도 경쾌하게 쏘아붙인다.
"프랭크씨. 빈둥거리며 시간만 축내시나요? 리 헌트는 어떻게 됐죠? 옥스퍼드 시는요? 불가타역 성경과 존 뉴먼 책은 왜 안 와요? 사순절에 읽으면 딱인데 하나도 안 보내다니!"
솔직하고 재미있는 편지 덕분에, '헬레인'은 '프랭크' 뿐만 아니라, 서점의 다른 직원들에게도 친근한 존재가 된다. (심지어 다른 직원과도 따로 편지를 주고받기도 한다) 편지와 돈과 책만이 오가는 것은 아니다. '헬레인'은 서점에 선물을 보내기도 한다. 전쟁 이후 영국 상황으로 인해 국가 방침의 일환으로 런던은 한 집당 일주일에 고기 50g, 일 인당 한 달에 계란은 한 개만 배급받을 수 있었는데, 그 상황을 알게 된 '헬레인'이 식료품을 보낸 것을 시작으로 '헬레인'은 종종 서점의 다른 직원들의 선물까지 챙겨 보냄으로써 책에 대한 감사를 표한다.
"핸프 양. 드디어 옥스퍼드 시를 구했습니다. 인도지를 사용했고 표지는 푸른 천이며 1905년에 출판됐죠. 책에 서명이 있지만 중고치곤 상태가 좋아요. 가격은 2달러입니다. 벌써 구하셨을까봐 미리 편지를 보냅니다. 그리고 언젠가 뉴먼의 '대학론'을 부탁하셨죠? 초판을 보내드릴까요?"
"프랭크 씨, 당장 보내주세요! 이런 기회를 놓칠 순 없죠. 초판 같은 건 신경 안 쓰지만 '대학론'의 초판이라면!"
뉴욕에 사는 '헬레인'과 런던에 사는 '프랭크'는 이렇게 편지를 통하여 특별한 우정을 쌓는다. '헬레인'은 꼭 런던에 가서 서점 '마스크 상회'를 방문하고 싶다고 말하고 '프랭크'도 '헬레인'을 초대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아 두 사람의 직접적인 만남은 끊임없이 미뤄진다.
겨울에 품는 소망
온기를 찾아 헤매는 계절 겨울. 냉혹한 추위에서 우리를 지켜줄 온기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도 현시대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정신적인 온기를 더 필요로 한다. 이런 시기에 일면식도 없던 두 사람이 편지를 통하여 신뢰를 쌓고, 우정을 나누고, 서로 베풂을 행하는 모습은 더없이 따뜻하게 다가온다. 더 나아가 현 시대를 살아가며 정신적 온기를 이웃에게 나눠주어야 할 그리스도인들에게 꼭 필요한 이야기라 느껴진다.
사실 영화의 원작 『채링크로스 84번지』를 집필한 '헬레인 한프' 작가도, 그녀가 편지를 주고받은 채링 크로스의 서점과 ‘프랭크’도 모두 실존했다. 그 점을 생각할 때면 이웃을 돌아보고 사랑을 베풀 때 우리에게도 그러한 우정이, 또 삶을 풍성히 더해주는 행복이 다가오리라는 소망이 더 강해진다.
이번 겨울, 이 영화를 통해 그 따스함을 함께 느껴보길 권한다. 그들이 사랑하는 책의 목록까지 엿볼 수 있는 점은 덤이다.
글. 주보라 프로그래머 (필름포럼)
영화 84번가의 연인 (84 Charing Cross Road, 1987)
시간과 공간을 그대로 담아내는 영화의 속성 때문인지, 우리는 계절에 따라 특정한 영화들을 찾곤 한다. 특히 연말과 연초에는 매서운 바람을 견디기 위해 단단히 여몄던 겉옷과 목에 두른 기다란 목도리를 모두 내려놓고, 소중한 자신만의 공간 안에서 두꺼운 이불을 덮은 채로 따뜻한 차 한 잔이나 달콤한 귤을 먹으며 좋은 영화 한 편을 보고 싶어진다. 계절과 분위기에 알맞은 영화를 감상하는 것은 분명 우리에게 작지 않은 행복을 선사한다.
크리스마스와 흰 눈이 배경인 영화는 아니지만,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따뜻한 겨울의 정서를 느낄 수 있는 영화 한 편을 추천한다. <84번가의 연인>이다.
국내에서는 <84번가의 연인>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되었지만, 원래 제목은 <84 Charing Cross Road>로, 영국 런던에 위치한 번화가 '채링 크로스'의 84번지라는 뜻이다. (이 영화의 원작이 된 동명의 책은 국내에서 『채링크로스 84번지』로 출판되었다.)
편지로 이어진 특별한 우정
뉴욕에 사는 작가 '헬레인 헨프'는 독서광이다. 읽고 싶은 고전이 잔뜩 있는 그녀는 어느 날, 런던 채링 크로스의 84번지에 있는 중고 서점 '마크스 상회'의 광고를 보게 된다. 절판된 책들을 취급한다는 문구에 '헬레인'은 편지 한 통을 써서 그곳으로 발송한다. 고전을 구하고 싶은데 너무 비쌀까 봐 걱정이 된다며 '고전 작품을 즐겨 읽는 가난한 작가'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헬레인'의 편지는 유머와 재치가 가득하다. 찾고 있는 책 목록을 동봉한 '헬레인'의 편지는 일종의 주문서가 되었고, 서점 직원인 '프랭크'는 '헬레인'이 보낸 편지를 읽고 답신을 보내며 두 사람의 교류는 시작된다.
책과 고전을 사랑하는 두 사람은 그 이후로 긴 시간 동안 책을 주문하고, 책을 찾아 발송한다. '헬레인'은 '프랭크'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해 책의 값을 치르기도 하고, 간절히 찾았던 책을 읽을 수 있게 됨에 감사를 표하거나, 또 읽은 뒤 내용에 실망한 책에 대하여는 불평불만을 늘어놓기도 한다. 도통 책이 오지 않을 때도 경쾌하게 쏘아붙인다.
솔직하고 재미있는 편지 덕분에, '헬레인'은 '프랭크' 뿐만 아니라, 서점의 다른 직원들에게도 친근한 존재가 된다. (심지어 다른 직원과도 따로 편지를 주고받기도 한다) 편지와 돈과 책만이 오가는 것은 아니다. '헬레인'은 서점에 선물을 보내기도 한다. 전쟁 이후 영국 상황으로 인해 국가 방침의 일환으로 런던은 한 집당 일주일에 고기 50g, 일 인당 한 달에 계란은 한 개만 배급받을 수 있었는데, 그 상황을 알게 된 '헬레인'이 식료품을 보낸 것을 시작으로 '헬레인'은 종종 서점의 다른 직원들의 선물까지 챙겨 보냄으로써 책에 대한 감사를 표한다.
뉴욕에 사는 '헬레인'과 런던에 사는 '프랭크'는 이렇게 편지를 통하여 특별한 우정을 쌓는다. '헬레인'은 꼭 런던에 가서 서점 '마스크 상회'를 방문하고 싶다고 말하고 '프랭크'도 '헬레인'을 초대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아 두 사람의 직접적인 만남은 끊임없이 미뤄진다.
겨울에 품는 소망
온기를 찾아 헤매는 계절 겨울. 냉혹한 추위에서 우리를 지켜줄 온기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도 현시대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정신적인 온기를 더 필요로 한다. 이런 시기에 일면식도 없던 두 사람이 편지를 통하여 신뢰를 쌓고, 우정을 나누고, 서로 베풂을 행하는 모습은 더없이 따뜻하게 다가온다. 더 나아가 현 시대를 살아가며 정신적 온기를 이웃에게 나눠주어야 할 그리스도인들에게 꼭 필요한 이야기라 느껴진다.
사실 영화의 원작 『채링크로스 84번지』를 집필한 '헬레인 한프' 작가도, 그녀가 편지를 주고받은 채링 크로스의 서점과 ‘프랭크’도 모두 실존했다. 그 점을 생각할 때면 이웃을 돌아보고 사랑을 베풀 때 우리에게도 그러한 우정이, 또 삶을 풍성히 더해주는 행복이 다가오리라는 소망이 더 강해진다.
이번 겨울, 이 영화를 통해 그 따스함을 함께 느껴보길 권한다. 그들이 사랑하는 책의 목록까지 엿볼 수 있는 점은 덤이다.
글. 주보라 프로그래머 (필름포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