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인의 문화 읽기영화 <위키드> - "마법이 아닌 마음으로 바꿀 세상"

2024-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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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즈의 마법사 서쪽마녀 이야기

‘위키드’는 유명한 판타지 동화 ‘오즈의 마법사’ 이야기가 펼쳐지기 전의 사건을 상상하고 창작하여 쓴 미국의 프리퀄 소설이자 팬픽이다. 이 작품은 서구 사회를 비판하기 위해 기존 ‘오즈의 마법사’가 가진 메시지를 비튼 2차 창작물로, 도로시와 친구들을 괴롭히고 결국 죽임 당했던 빌런 ‘서쪽마녀’의 이야기를 재구성한 내용이다. 이는 곧 뮤지컬로 제작되어 전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끌게 됐고, 지난 11월 말엔 영화로 제작된 <위키드>가 개봉하여 국내에서는 130만 명(2024/12/5 기준)이라는 관객을 동원하기도 했다.

 

영화 <위키드>는 원작의 전체적인 내용과 메시지를 따라가면서도, 설정이나 분위기가 꽤 다르다. 가장 큰 차이점으로는 피폐할 정도로 염세적이고 시니컬한 분위기의 원작과는 다르게, 경쾌하고 밝으며 때로는 희망적인 메시지까지 담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배우들의 연기력과 춤, 노래, 연출 무엇 하나 빠지는 게 없었다.(모든 노래가 연기와 함께 라이브로 펼쳐졌다는 것도 믿기지 않을 정도다.) 그러면서도 그 안에는 정확하고 예리하게 기존 서구사회의 이분법과 분리주의에 대한 비판을 놓치지 않고 잘 담아냈다.(실제 소설 ‘위키드’의 작가는 제2차 세계대전과 파시즘, 종교문제, 차별과 편견에 대한 사회 비판을 담았다고 밝힌 바 있다.)

 

#보이는 대로 판단하는 세상

파트 1 격인 이번 영화 <위키드>는 겉으로는 우정과 사랑(삼각관계)을 포함한 주인공의 성장서사를 그렸으나, 관객들로 하여금 온갖 편견과 차별, 그리고 정치적 선동의 문제점들을 느끼도록 해준다. 영화는 ‘서쪽마녀’인 ‘엘파바(신시아 에리보)’가 오즈 마을 사람들을 괴롭혀왔던 악인임을 시사하는 멘트로 시작하고, 오즈민들이 착한 마녀 ‘글린다(아리아나 그란데)’와 함께 서쪽마녀의 죽음을 축하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오즈민들의 노랫말이 꽤 잔인하고 매정하게 느껴진다. 경쾌한 선율과 춤사위랑은 퍽 이질감이 느껴질 정도다. 겉으로는 선해 보이는 모습 안으로, 마음껏 타자를 오해하고 몰아가며 소외시키는 대중의 모습을 보여주는 듯하는 장면이다. 심지어 서쪽마녀를 형상화한 조형물을 불에 태우면서 축제를 벌이는 장면은, 마치 과거 중세시대 때 사람을 쉽게 몰아가고 죽였던 ‘마녀사냥’의 한 현장을 방불케 한다. 

글린다는 엘파바와 처음 만났던 대학 시절, 그리고 상처가 가득했던 엘파바의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엘파바는 남들과 다른 초록색 피부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와 친구들로부터 지독한 차별을 받았다. 그는 어느샌가 초록색 자체를 별로인 색으로 인식할 만큼 자신을 향한 세상의 차별과 편견에 익숙해져 버린다. 하지만 그에게는 사람들에게 부러움과 인정을 살 수 있는 유일한 무기인 ‘마법’이라는 잠재적 능력을 갖고 있다. 중력을 거스르는 마법이다.

외모와 집안 등 모든 면에서 남들보다 우월한 글린다는 기숙사를 함께 사용하게 된 엘파바를 여타 다른 사람들처럼 무시하고 따돌리려 한다.(사실은 글린다에게도 말 못 할 열등감이 있고, 엘파바에 대한 부러움의 감정이 숨겨져 있었다.) 하지만 어떤 계기로 인해, 엘파바의 따뜻한 마음을 느끼게 되고 친구가 되고 싶어 한다. 무도회장에서 엘파바가 보여준 특이하고 이상한 춤사위는 누가 봐도 별로였다. 하지만 글린다가 엘파바에게 다가가 두 손등을 맞대고, 그 이상한 춤을 천천히 따라 출 때, 그 춤은 더 이상 특이하지도 이상하지도 않게 느껴진다. 사람은 누구나 처음부터 상대방에게 매력적일 순 없다. 또 누구나 상대방을 쉽게 이해하기도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서로가 두 손을 맞대고 천천히 서로가 가진 생각과 마음을 읽으려 노력하다 보면, 마음을 교류하고 서로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초록색과 핑크색은 아무리 봐도 잘 어울리지 않는다. 엘파바와 글린다 역시 달라도 너무 다르다. 둘이 친구가 된 이후에도, 관객들은 언제 둘 사이가 대립하고 틀어질지도 모른다는 긴장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신념의 차이와 질투의 감정, 우정과 연대라는 아슬아슬함 속에서 둘은 계속 함께 간다. 이분법적으로 쉽게 해석하기 어려운 관계인 것이다. 실제 사람 간의 관계도 그렇지 않은가. 서로 같아지고 닮아져서 친구로 지내는 게 아니라, 다름 가운데 어울릴 줄 아는 법을 터득하기 때문에 가까이 지낼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영화 중반부에 다다를 때쯤, 보이는 대로 영화 속 세상을 그리고 캐릭터들을 판단할 수 없다는 걸 깨닫게 된다.

 

#능력이 아닌 마음으로 바꾸는 세상

<위키드> 속 세상은, 지각이 있고 말을 할 줄 아는 동물과 인간이 한 사회 안에서 살아왔다는 전제가 있다. 엘파바가 다니는 대학 교수인 ‘딜라몬드(염소)’ 박사는 인간과 동등한 권리를 가진 소수의 말하는 동물로, 어떤 정치적 이유로 동물들이 인간사회에서 차별받고 쫓겨나고 있는 현실을 비판한다. 대놓고 사회에서 만연해진 동물차별을 염려하던 그는 다른 동물들과 함께 밀회를 열어, 세상을 올바르게 돌려놓고자 노력한다. 우연찮게 이 모임을 엿듣고 알게 된 엘파바의 마음속에는 불의한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정의감의 씨앗이 심기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정부의 탄압으로 인해 대학 강단에서 강의하던 딜라몬드 교수가 학생들 앞에서 ‘가축’처럼 붙잡혀 나가게 된다. 이를 본 엘파바는 큰 충격을 받고, 다른 학생들과는 다르게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된다’는 분노의 싹을 틔우게 된다. 

<오즈의 마법사는 평범한 인간이었지만, 마법사인척 가면 뒤에 숨어서 오즈민들을 조종했다>

아직은 잠재적 능력인 마법을 부릴 수 없는 엘파바는, 평소 자신의 꿈이자 목표였던 ‘오즈의 마법사’를 만나기 위해 에메랄드 시티로 떠난다. 하지만 그는 진짜 마법의 능력을 가진 마법사가 아닌, 그저 가짜 가면 뒤에 숨어서 대중을 선동하며 정치질을 하는 사기꾼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심지어 그는 현재 벌어지고 있는 동물 탄압의 주동자였다. 오즈민들을 하나로 화합시키기 위해 ‘공공의 적’을 만들어 오직 자신만을 신뢰하고 사랑하게 만들려는 음모였던 것이다. 엘파바는 자신에게 잠재되어 있던 마법 능력을 깨우치거나, 혹은 오즈의 마법사가 해결해 주면 이 부당한 사회 문제들이 해결될 것이라고 믿었었다. 하지만 기대했던 그 마법이 지금의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현실을 깨닫고 각성하게 된다. 마음 안에 심었던 정의감의 씨앗, 부당함을 향한 분노의 싹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강한 열망의 열매로 피어나게 된 것이다. 엘파바는 그렇게 세상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은 마법의 능력이 아닌, 자신의 마음 안에 있었음을 깨닫고 오즈의 마법사와 맞서 싸우겠다 다짐한다.

각성한 엘파바는 드디어 자기 힘으로 마법을 다스릴 줄 알게 됐고, 드디어 모든 중력을 거슬러 하늘 위로 뜰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중력을 거스른다는 것은, 단순히 날 수 있게 되는 것만 의미하지 않는다. 어린 시절부터 겪어왔던 차별과 상처, 대중의 편견과 시선들, 앞으로 거대한 힘들과 맞서 싸워야 한다는 두려움까지. 그 모든 억눌려온 감정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킬 수 있게 되자, 마침내 엘파바는 자유롭게 날 수 있게 된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사람

영화 속 오즈민들은 오즈의 마법사만을 맹신하고 그가 선동하는 정치와 사회 분위기에 쉽게 휩쓸린다. 즉 보이는 대로 믿고, 보이는 것으로만 판단하는 대중의 모습을 띤다. 어쩌면,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세속사회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겉모습으로 쉽게 편견을 갖고, 음모와 오해를 검증하지 않은 채 판단하는 잘못을 일삼는다. 끌려가던 딜라몬드 교수는 마지막까지 학생들에게 “보이는 게 다가 아니야!”라고 소리친다. 소외와 폭력이 만연해진 사회 분위기 속에서, 그 안에 담긴 진짜 의도와 죄성을 파악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염소 딜라몬드 교수>

<위키드>는 ‘마법이 존재하는’ 오즈 도시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주된 키워드는 마법 자체가 아니다. 엘파바 역시 보이는 능력의 마법을 찾아다녔지만, 후에는 보이지 않는 마음속 선한 동기에 집중하게 된다. 물론 후에 펼쳐질 위키드 후반부 이야기나 ‘오즈의 마법사’ 내용대로 라면, 엘파바는 결국 여러 고통과 상처 우여곡절을 거쳐 사악한 서쪽마녀가 된다. 그렇기에 그가 가진 동기나 행동들이 완전한 선이라고 말할 순 없다. 작품 자체가 인간을 완전한 선과 악의 기준으로 바라볼 수 없음을 내포하고 있듯이 말이다. 하지만 이 사회가 보는 견해대로 쉽게 끌려가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선한 동기를 갖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조금씩 세상을 바꿔나갈 수 있다.

 

우리 기독교인들도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때로는 외롭고 힘든 싸움을 하기도 한다. 부정의한 곳에 하나님의 공의가 임하기를 기도하면서 말이다. 이 땅에서 완전한 성화를 이루지 못하고, 선과 악의 입체적인 모습을 가지고 살아가지만 예수를 지향하며 하나님 나라를 꿈꾼다. 하나님 나라는 누군가 이뤄주기를 위탁하는 것도 아니요, 능력 있는 교회나 목회자를 통해서 이뤄지기를 기대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 나라는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사람들이 그 마음 안에서 하나님의 정의를 꿈꾸고, 이웃(타자)을 위해 살아가려는 겨자씨 같은 노력으로 확장되는 곳이다.



글. 임주은 (문화선교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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