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TT리뷰 [오트밀]넷플릭스 <버드박스> 속 단절과 연결에 대하여 : "살아남는 건 사는게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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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절 : 연결되지 못하는 사람들

미술 작업을 하는 멜러리(산드라 블록)는 외부와 단절된 삶을 사는 여자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시끄러운 일들도, 일찍이 자신을 돌보지 않았던 부모님의 안부도 그녀의 관심 밖이다. 종일 집에 갇혀 동생 제시카 외엔 누구도 만나지 않고 줄곧 그림만 그린다. 임신해 배는 불렀지만, 아기의 아빠는 떠났고, 이제 멜론 만하게 자라 모른 척할 수 없는 태아는 그럼에도 무시하고 싶은 존재다. 5년 전 맬러리와 동생이 등장하는 플래시백의 첫 장면은 자기 삶에 대한 맬러리의 태도와 그녀가 놓여진 세계를 추측하게 한다. 자신이 작업하고 있는 그림을 동생과 함께 바라보며, 그녀는 말한다. “어떻게 생각해? 사람들이 함께 모여 있는데, 모두 아주 외로워. 외로움은 부수적인 거야. 연결되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얘기야.” 그림은 곧 그녀 자신의 이야기이고, 그녀는 어디에도 연결되고 싶지 않은(혹은 연결되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정체를 알 수 없지만 사람을 죽게 만드는 ‘그것’과 ‘그것으로부터의 생존’이 영화의 주된 줄거리가 되기 이전. 주인공 맬러리가 놓인 세계는 폐쇄성과 단절로 표상된다. 맬러리는 자신 안에 ‘갇혀’ 자신을 ‘감추고’ 바깥과 ‘끊겨있는’ 상태다.


# 연결 : 자신을 열어내는 시작

그런 그녀가 태아 상태를 진찰받기 위해 동생과 함께 병원에 갔다가 맬러리의 눈앞에서 동생이 차도에 뛰어드는 것을 보는데, 이 시점을 시작으로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자살을 하게 되는 원인불명의 사태가 이어진다. 다행히, 맬러리는 누군가의 도움으로 몇몇 생존자들이 숨어있는 한 저택에 들어가게 되는데, 그곳에서 사람들은 ‘그것’을 보지 않기 위해 문을 걸어 잠그고, 창문을 가리고, 눈가리개를 한다. 이는 바깥의 참혹하고 공포스러운 사태와의 단절이며, 이 단절은 생존을 돕는다. 그러나, 주인공 맬러리에게 이 상황은 단절임과 동시에, 엄밀히 말하면 외부로의 연결이다. 살아남은 이들과 함께하는 생존을 위한 사투는 불안과 긴장의 연속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타자를 향해 그녀 자신을 열어내는 개방이다. 영화는 그녀가 피난처가 된 저택에서 몇몇 이들(올림피아, 더글라스, 톰)을 통해 관계적 채워짐을 경험하는 장면을 비추는데, 올림피아와는 ‘애틋함과 안타까움’을, 톰과는 ‘애정’을, 더글라스와는 ‘즐거움과 안정’과 같은 감정을 공유한다.

무엇보다, 올림피아와 함께하는 출산의 시간은 묘한 연대의 느낌을 가져다준다. 너무도 다른 가정환경에서 자라온 두 여성이 재난의 순간에 서로를 의지하고 고통을 견디며 아기를 낳는 장면은 무언가 뭉클한 마음을 머금게 한다. 맬러리가 출산 후 바로 죽음을 맞게 된 올림피아의 딸을 자신이 낳은 아들과 함께 키워낼 수 있었던 건, 폐쇄와 단절로부터 타자와의 연결 그리고 연대로 옮겨진 그녀의 변화된 세계 때문이지 않았을까.


# 생존을 위한 단절 : 살아남는 건 사는 게 아니야

한편, 올림피아가 들여보낸 정신이상자로 인해 피신처의 사람들 대부분이 죽고 맬러리와 톰 그리고 갓난아이들만이 생존한다. 영화는 그 이후의, 5년간의 시간을 생략하는데, 5년 후의 이들을 모습에 의아한 지점이 있다. 먼저, 다섯 살이나 된 두 아이에게는 이름이 없는데, 맬러리의 아들은 ‘boy(이하 ‘보이’)’로, 올림피아의 딸은 ‘girl(이하 ‘걸’)’로 불린다. 그리고 어쩌면 당연히, 부모로 기능하는 두 성인은 아이들에게 엄마나 아빠로 명명되지 않는데 아이들은 맬러리와 톰의 이름을 그대로 부른다. 

그리고 이 현상은 맬러리의 불안에서 기인한다는 사실을 영화는 어떤 대화 장면을 통해 명징히 보여주는데, 그 장면은 영화가 보여주지 않는 5년의 시간 동안 외부를 향한 열림 같은 건 또다시 차단된 듯, 그녀가 오로지 네 사람의 ‘생존’만을 위해 몰두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아이들에게 아름다운 나무와 꽃, 하늘과 구름, 호숫가와 친구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아이들의 상상을 돕는 톰. 그런 톰이 미덥지 않아, 맬러리는 톰의 이야기를 끊고 그를 다그친다. “나무에 올라갈 수도, 꽃을 볼 수도, 새로운 친구를 만들 수 없잖아. 왜 그런 걸 믿게 해? 그러면 살아남지 못하잖아” 그녀에게 외부는 관계 맺을 대상이 아니다. 가리고, 모른 채 하고, 없는 듯 살아야 할 세계. 이러한 세상 속에서 가까스로 생존해있는 자신들조차 ‘가족’이란 관계성을 가져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으리라. 그녀에겐 이름도, 가족이란 의미도 중요치 않다. 오로지 네 사람이 ‘생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맬러리의 분노에 대한 톰의 대답은 의미심장하다. “살아남는 건 사는 게 아니야. 인생은 보이는 게 다가 아니야.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꿈꾸는 게 인생이야. 이룰 수 없을지 몰라도 꿈꿀 수 있도록 해줘야 해. 언제고 아이들을 잃게 된다는 걸 알면서도 사랑해야 하는 거라고. 아이들은 꿈꾸고 사랑받고 희망을 품을 자격이 있어. 엄마를 가질 자격이 있다고!!” 톰의 대답은 극 초반, 저택에서 맬러리에게 풀어놓은 톰의 마음을 상기시킨다. 이라크 파견이 끝나갈 무렵 한 마을에 주둔했을 때의 이야기를 하며 톰은 눈물을 흘린다. 전쟁이 한창인데 난리 속에서도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준 아버지를 아침마다 안전하게 지켰던 일을 기억하며 그들의 안전을 희망하고 기도하면서.

톰은 시종일관 열린 세계를 표상하며, 반대쪽에 있는 맬러리를 자기 쪽으로 잡아당기는 역할을 한다. 그는 재앙 속에서도 믿음과 희망을 말하고, 연약한 존재의 권리와 사랑의 의무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이다.


# 새로운 연결 : 보이는 것 너머- 존재와의 연결

영화에서 내 마음과 가장 세게 부딪힌 장면은 바로 톰이 죽은 후, 재앙으로부터 안전한 한 공동체에 들어가기 전, 급류 속에서 세 사람- 맬러리와 걸, 보이-이 함께하는 장면이다. 맬러리는 두 아이에게 말한다. 나는 노를 저어야 하니, 너희 둘 중 하나가 안대를 벗고 급류가 어떻게 흐르는지 봐줘야 한다고. 이것은 두 아이 중 한 아이는 죽어야 한다는 가정을 담은 주문인 것을 맬러리도, 두 아이도, 그리고 관객도 알고 있다. 대체 누가 그 역할을 맡게 될지 조마조마하게 두 아이를 주시하고 있을 때 맬러리의 친아들인 ‘보이’가 내가 보겠다며 손을 든다. 맬러리는 그건 내가 결정한다며 아들의 말을 무시하는데, 올리비아의 말이 끝나고 카메라는 몇 초간 ‘걸’의 미묘한 표정을 클로즈업시킨다. 그리고 걸이 말한다. ‘내가 할게요’ 그 순간, 올리비아와 톰을 떠올린 맬러리는 모두 보지 않기로(모두 죽거나, 모두 살기로) 결정한다. 나는 이 짧은 장면에서, 보이와 걸의 지난 시간과 그 아이들의 아름다움을 본다. 그 존귀함을 그제야 보고 뉘우친 맬러리의 깨달음을 본다. 다수가 살기 위해 누군가가 죽어야 한다는 엄밀한 생존 논리로만 사태를 해결하려 했던 맬러리는 그 유명한 솔로몬의 판결의 핵심이 ‘생명의 가치’였듯이, ‘걸’의 눈 속에서 자신의 아들 ‘보이’와 ‘같은 무게’의 고귀한 생명을 발견하고 그녀와 진심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마침내 급류를 헤치고 그들은 ‘그것’이 닿을 수 없는 낙원과 같은 공동체에 도달하는데, 그곳은 다름 아닌 시각장애인학교다. 눈으로 세상을 보지 않던 이들의 공동체. 보이지 않는 것을 느끼고 이해하는 이들의 공간이다. 새들이 지저귀고 평화로운 웃음소리가 스며든 말 그대로 낙원과 같은 이곳에서 맬러리는 그동안 작은 박스에 데리고 다녔던 새들을 ‘친구들과 함께 있으라고’ 놓아주고 두 아이에게는 이름을 붙여준다. ‘걸’에겐 맬러리에게 가장 다정했던 사람이자 걸의 친모 ‘올림피아’의 이름을, ‘보이’에게는 자신을 열린 세계로 끌어준 사랑했던 ‘톰’의 이름을 준다. 이름을 짓는 것은 존재를 존재되게 하는 시작이 된다. 인간은 이름 짓기를 통해 세계를 이해하고 구성해가기 때문이다. 맬러리는 자기의 세계를 활짝 열어젖혀 두 아이의 존재를 ‘엄마’로서 받아들인다. 이제, 맬러리는 ‘생존만을 위한 단절과 고립’의 토대에서 ‘보이는 것 너머를 보는 상상력과 존재와의 연결’의 자리로 옮겨졌다. 그것은 의지나 다짐, 포부와 같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나로 향한 시선을 들어 일상과 세계, 타자를 바라보게 되는 소박하고 잔잔한 갱신의 순간이다.


# 이어내는 사람들 : 그리스도인

코로나라는 재난 상황을 차치하고서라도,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에 포획된 우리는 생존을 위해 고립과 단절을 선택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생존 앞에서, 믿음과 상상, 희망이나 사랑, 나눔과 같은 건 어리석은 것이 되어버렸다. 그러니까, 맬러리는 우리의 또 다른 얼굴 다름 아니다. 그러나, 다행히 냉소로 스스로를 단절시켰던 맬러리는 올리비아의 다정함을 통해, 더글라스의 보호를 통해, 특별히 톰의 사랑과 두 아이의 생명의 고귀함을 통해 자신을 열어내고 타자와 연결된다. ‘연결’은 그리스도인의 문법과 같은 것이다. 창조 신앙과 더불어, 예수와 연결되어 한 몸을 이루는 그리스도인(고전 6:17)은 하나님과 피조세계를 잇고, 피조세계와 사람을 잇고, 사람과 사람을 이어내는 사람들이다. 고립을 관계성으로, 단절을 연결로, 생존을 생명으로, 보이는 것에 머무는 시선을 보이는 것 너머로 옮겨내야 할 의무가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나는 고립되어 있는가? 연결되어 있는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진다. 살아남지 말고, 살려내자고, 살자고, 외쳐본다. 톰의 절규가 가슴에 맴돈다.


“믿어야 해. 살아남는 건 사는 게 아니야. 인생은 보이는 게 다가 아니야.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꿈꾸는 게 인생이야. 이룰 수 없을지 몰라도 꿈꿀 수 있도록 해줘야 해. 아이들은 꿈꾸고 사랑받고 희망을 품을 자격이 있어. 엄마를 가질 자격이 있다고”



글. 정수인 객원연구원 (문화선교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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