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인의 문화 읽기넷플릭스 드라마 <지옥>을 보고 - "죽음을 말하는 종교적 방식에 대한 비판적 성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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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의 스포일러가 있을 수도 있으니 원치 않으시는 분들께서는 드라마를 시청하시고 읽어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모든 사람은 죄로 인해 죽는다?

모든 사람은 죽는다. 보편적인 사실이라도 만일 왜 그러한지를 물으면, 대답은 수십 갈래로 갈라진다. 크게 보아 초월자의 뜻에 따른 것으로 보는 이가 있는가 하면, 생물학적 한계를 가진 인간이 경험하는 우연한 사건으로 보는 사람이 있다. 적지 않은 다툼이 있으나 죽음에 관한 자각이 사람으로 어느 정도 의미 있는 삶을 살도록 한다는 건 부정할 수 없다. 이에 사람들은 교육을 통해 죽음을 의식하게 한다. 보통 ‘죽음 교육’이라고 하는데, 이건 “스크루지 효과(Scrooge Effect)”에 따라 자기 죽음의 사실을 알고도 인생을 헛되이 사는 사람이 없다는 전제에서 하는 일이다. 이기적인 삶을 사느냐 아니면 이타적인 삶을 사느냐는 죽음에 대한 각성과 감응의 정도에 달려 있다는 주장이다.


정말 그럴까? 사실 이걸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죽음의 구체적 시기를 알고 있지 않은 이상 앞으로 죽을 것이라는 사실이 태도 변화에 미치는 영향은 예상과 달리 그렇게 크지 않다. 왜냐하면 사람은 설령 언젠가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도 발달한 과학과 의료기술이 보장하는 평균 기대 수명이 있기에 그 시기가 임박할 때까지는 죽음을 망각하며 살기 때문이다.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사실이 누군가에게는 두려움과 불안의 이유가 되어도, 누군가에는 오히려 심리적 안정감을 준다.


죽음의 시기를 알지 못하는 한 스크루지 효과는 거듭 정체되고 지연된다. 그래서 의미 있게 살기를 원하거나 세상이 정의로워지기를 원하는 사람은 죽음 교육을 통해 종말 의식을 일깨우기도 한다. 이건 스크루지 효과를 기대한 결과이나, 엄밀히 말해서 스크루지 이야기를 오해한 결과이다. 스크루지 효과를 말하면서 사람들이 간과하는 사실 하나는 스크루지가 가까운 시기에 죽는다는 고지를 받은 것 외에 살아온 삶에 대한 책임을 묻는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암묵적 메시지이다. 그의 태도를 바꾸게 한 건 그가 꿈속에서나마 자기 죽음을 본 것이라도, 사실 이것보다 더 크게 작용한 건 죽음이 자기가 살아온 삶에 대한 심판이라는 깨달음에서 오는 두려움이었다. 달리 말해서 죽는다는 사실에 대한 생생한 자각과 감응 이상으로 심판이라는 초월적 행위에 대한 믿음과 두려움을 전제할 때만이 죽음 의식은 삶의 태도와 생각에 변화를 줄 수 있다.


연상호 감독의 <지옥>은 ‘사람은 죄로 인해 죽는다’라는 사실과 연결된 신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이용하여 자기 신념을 실현하고 또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과 이에 대립각을 세우며 인간의 자율성을 믿고 살면서 종교적 폭력과 허구를 폭로하는 사람과의 좌충우돌의 이야기이다. 죽음을 말하는 종교적(기독교적이라 단정할 수 없는 건 기독교에서 말하는 내용과 일치하면서도 다른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방식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면서 휴머니즘을 강조한다.

 


영화 이야기: 종교는 죽음 경영인가?(*글의 성격상 스포일러 있음)

<지옥>이 전제하는 세계관을 염두에 두고 영화의 내용을 일별해보자. 영화는 크게 두 부분으로 구분된다. 1-3회와 4-6회는 인물은 물론 내용까지도 달라진다. 전반부가 정진수(유아인 분)의 활동과 죽음까지 다루었고 주로 고지와 시연의 과정을 보여주면서 그가 창설한 ‘새진리회’가 세간의 주목을 받는 과정을 다루었다면, 후반부는 인간의 자율성을 확보하고 새진리회의 허구를 폭로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집단의 활약을 다룬다.

<출처: Netflix Facebook>

과거 20년 후 죽어서 지옥에 갈 것이라는 천사의 ‘고지’를 받았던 정진수는 극도의 공포감에 사로잡혀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왜 종교의 문을 두드리지 않았을까? 종교를 불신하였기 때문일 수 있고 또 종교가 제시하는 해결책이 자기가 살아온 길만큼 철저하지 못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은 아닐지 싶다. 여하튼 초월적 현상을 경험한 후 그는 선을 행하지 않을 수 없고 죄를 지어서는 안 되는 삶을 반강제로 끌려가다시피 살아간다. 자기 공적(功績)으로 죽음의 고지에 변화가 있을 것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는 고지를 받은 후 공포감을 느끼며 선하고 정의로운 삶을 살려고 노력했던 자신을 돌아보면서 이 모든 것을 ‘신의 의도’로 해석한다. 신의 의도를 믿은 그는, 만일 다른 사람들도 자기와 같이 죽음의 구체적인 시기를 알고 또 지옥으로 가는 죽음의 사건을 경험한다면, 사회는 더 선해지고 더 정의로워질 것이라 예상한다. 물론 자신이 그동안 겪었던 공포를 다른 이들도 똑같이 느낄 수 있게 해 주기 위해 신의 의도이자 경고인 것처럼 믿게 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그래서 그는 신의 의도를 세상에 알리기 위해 스스로 예언자로 나서고 ‘새진리회’를 창설한다. 그는 사람들이 더 정의로운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 죽음의 고지를 받은 사람과 그들이 실제로 죽는 사건을 ‘시연’하는 영상을 보여줌으로써 경고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박정자라는 여인의 시연 과정을 전국적으로 방영하는 극적인 효과를 통해 대중의 폭발적인 지지를 받는다.


사실 죽음은 각종 이해관계의 충돌로 사람으로선 쉽게 풀 수 없는 문제를 일으킨다. 예컨대 죄를 지은 자를 체포하여 심판대 앞에 세우는 형사 진경훈(양익준 분)의 경우에서와 같이 아내를 살해한 범인과 그 범인을 살해한 딸에 대한 태도에서 보이는 이중성이라는 딜레마에 빠뜨릴 수도 있다. 그러나 정진수는 어떤 죽음이든 죽음을 신의 의도와 개입으로 이해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여전히 이유를 알지 못한 채 맞는 자기 죽음의 시연을 은폐하는데, 이는 사람들이 신의 의도를 의심함으로 교리가 흔들리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현실은 정진수의 기대와는 달랐다. 한편으로는 정의로운 삶을 실천하는 사람이 늘기보다는 예언자 정진수에 대한 우상화가 이루어지고, 특히 2대 교주 김정칠(이동희 분)이 등장한 이후로 새진리회는 사람들을 두려움과 불안과 공포를 더 강하게 조장하면서 그리고 신의 뜻에 따른 죽음에 의미를 부여하는 권한을 독점하여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길 갈망하는 사람을 위한 종교로 각인하는 활동을 통해 온갖 권력과 부를 누리는 종교 집단으로 급변했다. 죽음의 공포와 두려움을 이용하여 사회를 선하고 정의롭게 하려는 의도는 사라지고 오직 사람들의 불안과 두려움을 이용하여 이득을 취하는 죽음 경영자가 된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새진리회의 지지를 받으며 활동하는 화살촉은 ‘신의 뜻’ 혹은 ‘정의’를 앞세워 심판 곧 죽음을 고지받은 사람의 가족까지도 죄인으로 몰아 린치를 가함으로써 공포감을 사회적으로 확산하고 증폭하는데 열을 올린다.


영화 마지막 부분에서는 지금껏 새진리회가 주장한 교리에 맞지 않는 죽음의 고지가 나타남으로써 두 단체의 존재와 활동을 의심케 하는 매우 의미 있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런데 여기서 죽음을 고지받은 자 대신 다른 이가 희생을 통해 죽음을 맞이하며 결말을 맺는다. 이로써 감독은 죽음을 말하는 일이 두려움과 공포를 자아내는 것도 아니고 또 인간의 권리를 쟁취하기 위함도 아님을 역설한다. 오히려 죽음 곧 지옥에서 구원하는 힘은 오직 희생적 사랑뿐임을 시연한 것이다.



죽음을 말하는 적합한 방식은 구원을 희망하기

영화에서 죽음은 지옥행을 결정하는 심판이다. 죄로 인해 죽는다는 사실과 초월자의 심판 행위를 전제하는 세계관이며, 이건 모든 죽음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기독교 믿음에서 유래한다. 기독교 진리가 <지옥>의 세계관을 지탱하는 듯이 보인다.

모든 죽음은 죄로 인한 것이기에 죽음이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계시하는 지표로 이해되는 건 당연하다. 그러므로 죽는다는 사실은 심판을 실행한 결과이며 죄인임을 확인하는 사건이다. 지옥에서 어떤 일을 겪게 되는지 영화는 침묵하고 있음에도 사람들은 죽음의 공포로 두려움에 떤다. 시기와 방법이 알려진 죽음 자체가 두려운 것이지 죽음 이후의 영벌이 두려운 건 아닌 듯이 보인다. 아마도 대중문화의 지옥 이미지를 전제했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회자하는 기독교 종말론과 비교할 때 관객은 많은 점에서 일치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영화는 특히 고지를 통해 죽음의 시기를 알 수 있다는 것과 죽음으로써 지옥행 심판이 집행되는 것이라는 메시지를 덧붙였는데, 바로 이 지점에서 문제가 생긴다. 기독교가 말하는 것과 많이 다르기 때문이다. 성경에 따르면, 사람은 죽음(종말)의 시기를 알지 못하며, 또 죽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입증된 하나님의 사랑과 실행된 하나님의 용서로 인해 이미 용서받은 죽음이기에 심판의 의미보다 새로운 생명으로 옮겨가는 통과의례의 의미가 더 강하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죽은 자를 두고 ‘잠잔다’라고 표현하였다. 물론 믿음 안에서 죽은 자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 사실은 비록 모든 인간은 죄인이고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심판 의미의 죽음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있음을 시사한다. 죽음을 심판으로만 이해하여 사는 동안 선하고 의롭게 살도록 할 목적으로 죽음을 말하는 것은 율법적 종교의 특징이며 기독교 복음에 합당하지 않다. 그러므로 기독교가 죽음을 말하는 목적은 더는 두려움을 이용해 의미 있는 삶을 살도록 하기보다 희망의 이유를 제시하여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생명을 살도록 돕는 데 있다.


새진리회의 죽음 시연과 전시는 기독교 종말론의 이미지를 차용하지만 오히려 이것과 반대의 면을 부각한다. 곧 죄인으로서의 죽음을 극적으로 묘사함으로써 사람들의 두려움을 불러일으켜 정의롭고 선한 삶을 살도록 영향을 미치려는 것이다. 교회에서 종말론이라는 이름으로 왜곡된 가르침을 전하는 이가 없지 않기에 기독교인이라면 아마도 이 부분과 관련해서 새진리회를 심각하게 변형된 현실의 기독교를 폭로하려는 메타포로 이해할 것 같다.

한편, 죽음의 시연은 죽음이 개인의 사안이 아니라 공적 사건이 될 때 나타나는 더 큰 효과를 전면에 부각한다. 죽음을 공론의 장에 전시함으로써 살아있는 자에게 훨씬 더 큰 경각심을 줄 수 있다는 기대감에서 비롯한다. 이것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억하고 기념하고 또 개인의 사안이 아니라 공적 사건으로 확대하려는 기독교의 노력과 중첩한다. 다른 것이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전시하는 건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과 용서를 말하기 위한 것인데 비해 새진리회의 죽음 전시(시연)는 타락한 종교에서 볼 수 있는 죽음 경영의 한 방법일 뿐이라는 것이다.


참고로 인도 영화 <피케이: 별에서 온 얼간이>(라지쿠마르 히라니, 2014)는 인간이 삶에서 경험하는 각종 불안과 두려움을 경영하는 방식으로 온갖 특권을 누리며 치부하는 종교를 전시한다. 이로써 삶을 경영하는 주체로서 잘못된 종교 권력을 비판했다면, <지옥>은 죽음을 경영하는 주체로서 변형된 종교 권력을 폭로한다.




글. 최성수 신학박사
영화와 영성 신앙의 관계를 고민하며 글을 기고하고 있다.
현재는 미디에이터연구소 소장으로 섬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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