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봉 당일, 겨우 취소표를 구했다. 세 번째 줄 중앙에서 조금 오른쪽. 자리가 썩 탐탁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어쩌겠는가. 그 놀란의 신작이고, 전부 아이맥스(IMAX)로 촬영했다고 하니 별 수 없었다. 그렇게 세 시간을 보내고 크레딧 타이틀이 뜰 때, 동행자와 나는 뻐근해진 목을 비틀며 최선을 다해 박수를 보냈다. 오디세우스의 활시위를 당기는 사운드가 한동안 귓가에 맴돌았다. 그렇게 영화에 감탄하는 한편, 어딘가 묘한 잔여가 남아있었다. 나중에 복기해 보니, 한 사람이 이 거대한 작업을 끝까지 밀어붙였다는 사실에 이질감을 느꼈던 것 같다. 수천 명의 스태프와 배우, 수년의 시간과 막대한 비용이 들어간 작품에서 감독 한 사람의 의지는 어디까지 관철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의지는 어떻게 다른 사람들의 능력을 끌어내는 힘이 될까.
크리스토퍼 놀란의 리더십
크리스토퍼 놀란의 리더십은 이미 유명하다. 그는 컴퓨터 그래픽을 최소한으로 사용하려는 원칙을 세우고, 그 원칙을 지키기 위해 촬영 현장의 세부를 집요하게 설계한다. 거대한 세트를 실제로 짓고, 실제 폭발과 실제 공간을 활용하며, 관객이 화면 안에서 느끼는 물리적 감각을 포기하지 않는다. 겉으로 보면 사소해 보이는 선택까지 통제함으로써, 스태프들이 하나의 큰 그림 아래 더 자유로울 수 있도록 이끄는 것이다. 좋은 리더는 모든 일을 직접 하기보다, 결과가 만들어지는 조건을 설계하는 사람이다. 놀란은 자신의 기준을 낮추지 않지만, 그 기준을 실현하는 방법을 혼자 독점하지도 않는다. 촬영감독, 미술감독, 특수효과팀, 배우는 각자의 전문성으로 그 기준에 응답한다. 리더의 통제는 팀원의 자율성이 발휘될 수 있는 높은 난도의 과제를 제시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크리스토퍼 놀란 인터뷰. 출처 tvn
물론 이런 리더십은 불편한 면도 갖고 있다. 한 사람의 기준이 지나치게 강하면 현장은 쉽게 소진된다. 작은 디테일까지 감독의 뜻에 맞춰야 한다면, 하다못해 휴대폰의 사용 시간이나, 화장실을 가는 시간까지 통제되는 환경이라면, 구성원은 자신의 판단보다 리더의 의중을 먼저 살피게 될 수 있다. 따라서 놀란의 사례를 그대로 이상화할 수는 없다. 높은 기준이 사람을 성장시키는 순간과, 사람을 소모시키는 순간은 아주 가까이 붙어 있기 때문이다.
그 경계에서 중요한 것은 리더가 무엇을 책임지는가이다. 놀란이 통제하려는 부분은 사람의 인격이나 사생활이 아니다. 작품의 방향과 작업의 조건, 다시 말해 뚜렷한 하나의 ‘길’을 제시하는 것이다. 각각의 전문성을 하나의 목적 아래 연결한다. 리더십의 핵심은 서로 다른 사람들이 같은 질문을 바라보게 하는 데 있다.
오디세우스의 죄의식
놀란이 탁월한 리더십으로 만들어낸 <오디세이>의 중심에는 전쟁에서 승리한 영웅의 영광보다, 긴 방황 끝에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인간의 문제가 놓여 있다. 오디세우스는 지혜롭고 용감한 인물이지만, 그의 여정은 능력만으로 통과할 수 있는 행로가 아니다. 선택의 결과를 감당하고, 상실을 통과하고, 자신이 떠나온 자리로 다시 돌아가야 하는 여정이다. 그리고 그 여정 중에 오디세우스는 ‘제우스의 법’1)을 깨뜨린 자로서의 죄의식을 짊어진다.
1) 제우스의 법 : 크세니아(Xenia). 이방인, 나그네, 여행자에게 신분이나 목적을 묻기 전에 음식과 숙소를 제공하고 안전을 지켜주어야 하는 절대적인 불문율. 오디세우스가 제안한 트로이의 목마는 이 법의 사각지대를 철저히 공략한 병법이었다.
그렇다. 오디세우스는 자신의 지혜를 사용해 10년을 끌던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당시 통용되던 절대적 기준을 무너뜨리는 과오를 범했다. 그리고 또 다른 10년의 귀향길 내내 스스로는 깨닫지 못한 채 범죄자 집단으로 악명을 날렸다. 그렇게 당도한 칼립소의 거처에서 과거를 다 잊었다가, 끝내 기억을 되찾고 이타카로 돌아간다.

칼립소의 거처에서 배회하는 오디세우스
리더는 책임지는 사람이다. 성과와 명성, 조직의 성장만 좇다 보면 리더는 자신이 누구를 위해 이 일을 시작했는지 잊기 쉽다. 목적을 말하던 사람이 어느 순간 자신의 영향력 자체를 목적처럼 여기게 된다. 놀란은 <오펜하이머>에서 결과를 감당해야 하는 리더의 죄의식을 보여주었다면, <오디세이>에서는 그 죄의식과 상실을 지나 다시 관계의 자리로 돌아가는 리더를 생각하게 한다. 리더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이 틀릴 수 있음을 인정하고, 떠나온 사람들의 얼굴을 기억하고, 돌아온 뒤에도 모든 것이 예전과 같지 않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태도다.
한국 교회에 필요한 리더십
세 시간짜리 거대한 질문은 한국교회의 리더십을 돌아보게 한다. 한국교회는 빠르게 성장한 경험과 큰 조직을 운영해 온 경험을 갖고 있다. 많은 교회가 건물을 세우고, 프로그램을 만들고, 사람을 모으는 데 상당한 역량을 발휘해 왔다. 하지만 이같은 성장은 한국교회를 칼립소의 거처에 머물게 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낳고 말았다.
교회의 리더십이란 사람들을 어떤 길로 이끌고, 그 길에서 서로를 어떻게 돌보게 하는지에 관한 것이다. 교회는 공동의 목표를 효율적으로 달성하려고 모인 조직과 다르다. 서로 다른 삶의 자리에서 온 사람들이 한 몸을 이루고, 하나님을 향한 방향을 함께 배워가는 공동체다. 교회의 리더는 앞에서 명령하는 사람이 아닌, 공동체가 함께 걷도록 섬기는 사람이다. 놀란의 현장에서 높은 기준이 작업의 방향을 결정지었다면, 교회에서는 복음이 그 기준의 중심에 놓여야 한다. 복음을 말하는 리더 개인의 취향과 판단이 곧 하나님의 뜻으로 굳어지는 순간, 공동체의 분별은 약해진다. 리더 한 사람의 판단으로 모든 역할과 목소리를 덮어버리면, 공동체 안에 주어진 은사의 다양성도 함께 사라진다. 섭리 안에 창조된 공동체 구성원들이 가진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해야 한다. 그 형상들 안에 진정한 그리스도적 방향성이 담겨 있다.
무엇보다 우리에게는 책임지는 태도가 필요하다. 지금의 한국교회는 한국 사회에서 어떤 위치에 놓여있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법, 그러니까 소외된 자들을 진정으로 환대하고 그들과 연대하는 역할을 잘 감당하고 있는 것이 맞는가.
오디세우스가 죄의식을 짊어지고 이타카로 복귀했을 때, 비로소 ‘무너진 제우스의 법’ 이후의 생존 방식에 대한 고민을 시작할 수 있었다. 책임은 자신의 판단이 낳은 결과를 외면하지 않는 데서 시작된다. 이제 한국교회는 성공과 성장의 달콤한 망각, 즉 '칼립소의 거처'에서 빠져나와 이 서늘한 질문 앞에 서야 한다. 오디세우스가 잃어버린 시간과 자신이 짊어져야 할 죄의식을 온전히 끌어안고 이타카로 귀환했듯, 교회의 리더십 역시 지난날의 영광과 과오를 모두 짊어지고 교회 본연의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결국 교회의 리더십이란 사람들을 야망으로 끌고 가는 힘이 아니라, 실패를 인정하는 겸손함으로 가장 낮은 자들의 손을 잡고 그리스도가 걸어가신 환대의 길을 끝까지 걸어내는 막중한 책임이다. 그 좁고 험난한 귀환의 여정을 함께 걷는 것, 그것이 세 시간짜리 거대한 서사가 지금의 우리에게 남긴 진짜 과제일 것이다.
김유민 연구원 (문화선교연구원, 한양대(대중문화 석사, 국문과 박사과정))
언뜻 희망이 없어 보이는 세상에서 '소망'을 동경(憧憬)하는 사람.
개봉 당일, 겨우 취소표를 구했다. 세 번째 줄 중앙에서 조금 오른쪽. 자리가 썩 탐탁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어쩌겠는가. 그 놀란의 신작이고, 전부 아이맥스(IMAX)로 촬영했다고 하니 별 수 없었다. 그렇게 세 시간을 보내고 크레딧 타이틀이 뜰 때, 동행자와 나는 뻐근해진 목을 비틀며 최선을 다해 박수를 보냈다. 오디세우스의 활시위를 당기는 사운드가 한동안 귓가에 맴돌았다. 그렇게 영화에 감탄하는 한편, 어딘가 묘한 잔여가 남아있었다. 나중에 복기해 보니, 한 사람이 이 거대한 작업을 끝까지 밀어붙였다는 사실에 이질감을 느꼈던 것 같다. 수천 명의 스태프와 배우, 수년의 시간과 막대한 비용이 들어간 작품에서 감독 한 사람의 의지는 어디까지 관철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의지는 어떻게 다른 사람들의 능력을 끌어내는 힘이 될까.
크리스토퍼 놀란의 리더십
크리스토퍼 놀란의 리더십은 이미 유명하다. 그는 컴퓨터 그래픽을 최소한으로 사용하려는 원칙을 세우고, 그 원칙을 지키기 위해 촬영 현장의 세부를 집요하게 설계한다. 거대한 세트를 실제로 짓고, 실제 폭발과 실제 공간을 활용하며, 관객이 화면 안에서 느끼는 물리적 감각을 포기하지 않는다. 겉으로 보면 사소해 보이는 선택까지 통제함으로써, 스태프들이 하나의 큰 그림 아래 더 자유로울 수 있도록 이끄는 것이다. 좋은 리더는 모든 일을 직접 하기보다, 결과가 만들어지는 조건을 설계하는 사람이다. 놀란은 자신의 기준을 낮추지 않지만, 그 기준을 실현하는 방법을 혼자 독점하지도 않는다. 촬영감독, 미술감독, 특수효과팀, 배우는 각자의 전문성으로 그 기준에 응답한다. 리더의 통제는 팀원의 자율성이 발휘될 수 있는 높은 난도의 과제를 제시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크리스토퍼 놀란 인터뷰. 출처 tvn
물론 이런 리더십은 불편한 면도 갖고 있다. 한 사람의 기준이 지나치게 강하면 현장은 쉽게 소진된다. 작은 디테일까지 감독의 뜻에 맞춰야 한다면, 하다못해 휴대폰의 사용 시간이나, 화장실을 가는 시간까지 통제되는 환경이라면, 구성원은 자신의 판단보다 리더의 의중을 먼저 살피게 될 수 있다. 따라서 놀란의 사례를 그대로 이상화할 수는 없다. 높은 기준이 사람을 성장시키는 순간과, 사람을 소모시키는 순간은 아주 가까이 붙어 있기 때문이다.
그 경계에서 중요한 것은 리더가 무엇을 책임지는가이다. 놀란이 통제하려는 부분은 사람의 인격이나 사생활이 아니다. 작품의 방향과 작업의 조건, 다시 말해 뚜렷한 하나의 ‘길’을 제시하는 것이다. 각각의 전문성을 하나의 목적 아래 연결한다. 리더십의 핵심은 서로 다른 사람들이 같은 질문을 바라보게 하는 데 있다.
오디세우스의 죄의식
놀란이 탁월한 리더십으로 만들어낸 <오디세이>의 중심에는 전쟁에서 승리한 영웅의 영광보다, 긴 방황 끝에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인간의 문제가 놓여 있다. 오디세우스는 지혜롭고 용감한 인물이지만, 그의 여정은 능력만으로 통과할 수 있는 행로가 아니다. 선택의 결과를 감당하고, 상실을 통과하고, 자신이 떠나온 자리로 다시 돌아가야 하는 여정이다. 그리고 그 여정 중에 오디세우스는 ‘제우스의 법’1)을 깨뜨린 자로서의 죄의식을 짊어진다.
1) 제우스의 법 : 크세니아(Xenia). 이방인, 나그네, 여행자에게 신분이나 목적을 묻기 전에 음식과 숙소를 제공하고 안전을 지켜주어야 하는 절대적인 불문율. 오디세우스가 제안한 트로이의 목마는 이 법의 사각지대를 철저히 공략한 병법이었다.
그렇다. 오디세우스는 자신의 지혜를 사용해 10년을 끌던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당시 통용되던 절대적 기준을 무너뜨리는 과오를 범했다. 그리고 또 다른 10년의 귀향길 내내 스스로는 깨닫지 못한 채 범죄자 집단으로 악명을 날렸다. 그렇게 당도한 칼립소의 거처에서 과거를 다 잊었다가, 끝내 기억을 되찾고 이타카로 돌아간다.
칼립소의 거처에서 배회하는 오디세우스
리더는 책임지는 사람이다. 성과와 명성, 조직의 성장만 좇다 보면 리더는 자신이 누구를 위해 이 일을 시작했는지 잊기 쉽다. 목적을 말하던 사람이 어느 순간 자신의 영향력 자체를 목적처럼 여기게 된다. 놀란은 <오펜하이머>에서 결과를 감당해야 하는 리더의 죄의식을 보여주었다면, <오디세이>에서는 그 죄의식과 상실을 지나 다시 관계의 자리로 돌아가는 리더를 생각하게 한다. 리더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이 틀릴 수 있음을 인정하고, 떠나온 사람들의 얼굴을 기억하고, 돌아온 뒤에도 모든 것이 예전과 같지 않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태도다.
한국 교회에 필요한 리더십
세 시간짜리 거대한 질문은 한국교회의 리더십을 돌아보게 한다. 한국교회는 빠르게 성장한 경험과 큰 조직을 운영해 온 경험을 갖고 있다. 많은 교회가 건물을 세우고, 프로그램을 만들고, 사람을 모으는 데 상당한 역량을 발휘해 왔다. 하지만 이같은 성장은 한국교회를 칼립소의 거처에 머물게 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낳고 말았다.
교회의 리더십이란 사람들을 어떤 길로 이끌고, 그 길에서 서로를 어떻게 돌보게 하는지에 관한 것이다. 교회는 공동의 목표를 효율적으로 달성하려고 모인 조직과 다르다. 서로 다른 삶의 자리에서 온 사람들이 한 몸을 이루고, 하나님을 향한 방향을 함께 배워가는 공동체다. 교회의 리더는 앞에서 명령하는 사람이 아닌, 공동체가 함께 걷도록 섬기는 사람이다. 놀란의 현장에서 높은 기준이 작업의 방향을 결정지었다면, 교회에서는 복음이 그 기준의 중심에 놓여야 한다. 복음을 말하는 리더 개인의 취향과 판단이 곧 하나님의 뜻으로 굳어지는 순간, 공동체의 분별은 약해진다. 리더 한 사람의 판단으로 모든 역할과 목소리를 덮어버리면, 공동체 안에 주어진 은사의 다양성도 함께 사라진다. 섭리 안에 창조된 공동체 구성원들이 가진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해야 한다. 그 형상들 안에 진정한 그리스도적 방향성이 담겨 있다.
무엇보다 우리에게는 책임지는 태도가 필요하다. 지금의 한국교회는 한국 사회에서 어떤 위치에 놓여있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법, 그러니까 소외된 자들을 진정으로 환대하고 그들과 연대하는 역할을 잘 감당하고 있는 것이 맞는가.
오디세우스가 죄의식을 짊어지고 이타카로 복귀했을 때, 비로소 ‘무너진 제우스의 법’ 이후의 생존 방식에 대한 고민을 시작할 수 있었다. 책임은 자신의 판단이 낳은 결과를 외면하지 않는 데서 시작된다. 이제 한국교회는 성공과 성장의 달콤한 망각, 즉 '칼립소의 거처'에서 빠져나와 이 서늘한 질문 앞에 서야 한다. 오디세우스가 잃어버린 시간과 자신이 짊어져야 할 죄의식을 온전히 끌어안고 이타카로 귀환했듯, 교회의 리더십 역시 지난날의 영광과 과오를 모두 짊어지고 교회 본연의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결국 교회의 리더십이란 사람들을 야망으로 끌고 가는 힘이 아니라, 실패를 인정하는 겸손함으로 가장 낮은 자들의 손을 잡고 그리스도가 걸어가신 환대의 길을 끝까지 걸어내는 막중한 책임이다. 그 좁고 험난한 귀환의 여정을 함께 걷는 것, 그것이 세 시간짜리 거대한 서사가 지금의 우리에게 남긴 진짜 과제일 것이다.
김유민 연구원 (문화선교연구원, 한양대(대중문화 석사, 국문과 박사과정))
언뜻 희망이 없어 보이는 세상에서 '소망'을 동경(憧憬)하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