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드라마 <참교육>은 공교육과 교사의 권위가 무너졌다는 대중의 불안과 공감대를 전제로 한다. 학생과 보호자의 폭언, 악성 민원 앞에서 교사는 제대로 지도하지 못하고 위축되며, 다른 학생들의 학습권마저 침해된다. 드라마는 이를 바로잡기 위해 ‘교권보호국’이라는 가상의 국가기관을 등장시킨다. 이 드라마에서 논쟁 지점은 교육의 실패를 교육 주체가 아닌 군 출신 감독관의 물리력으로 해결하려 한다는 데 있다. 그리고 많은 시청자가 이에 통쾌함을 느꼈다. 이 지점에서 드라마와 대중은 우리 사회의 질서와 정의의 회복의 방안과 절차를 어떻게 상상하는지 드러낸다.
최근 대중문화에서는 법과 제도가 해결하지 못한 악을 폭력으로 응징하는 서사가 반복된다. 제도가 피해자를 보호하지 못하고, 책임져야 할 사람은 빠져나가며, 문제 해결을 위해 정당한 권위를 발휘하기 어려운 무력한 상황에 놓여있다고 느낀다. <모범택시>, <더 글로리>가 폭력의 피해자들 혹은 대리인의 사적 복수로 카타르시스를 주었다면, <참교육>은 이러한 응징 서사의 연장선에 있다. 폭력적 해결 방식을 공교육과 공권력 안으로 가져온다는 점에서 한층 복잡한 문제를 제기한다. 사람들이 이 드라마에 환호하는 것은 폭력 자체를 옹호해서가 아니라, 말과 제도가 무력해진 현실에서 권력과 결합한 폭력이 가장 빠르게 질서를 회복시키는 수단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간과하지 말아야 할 점은 학교의 문제가 교권 약화를 넘어, 학교와 수업이 많은 학생에게 의미를 제공하지 못하는 현실에 있다. 한국의 교육은 입시라는 중대한 목적을 중심으로 움직인다. 드라마는 이와 같은 현실을 반영하며 부모의 힘이 아이들 사이의 서열로 이어지고, 경쟁에서 밀린 학생에게 수업은 자신의 삶과 무관한 시간이 되고 있음을 고발한다. 또한 일부는 학업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부와 힘, 인정과 소속감을 얻으려 한다. 경쟁에서 앞선 학생들도 성적을 위해 꿈과 건강한 자율성, 배려와 공감, 도덕적 판단과 공동체적 관계 같은 것들을 뒤로 미룬다. 어느 쪽이든 교육의 본래 목적에서 멀어진다. 물론 학교 폭력과 수업 붕괴를 입시 경쟁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학교가 학생들에게 배움의 의미와 공정한 관계가 가능한 장으로 작동하지 못할 때 힘과 서열의 논리가 그 자리를 채울 가능성이 더욱 커진다.
특히 2화에서는 한 학교의 대다수 학생들이 조직폭력배의 눈에 들기 위해 자신을 과시하고 수업을 방해한다. 나화진 감독관(이무열)은 압도적인 힘으로 학생들을 무릎 꿇린 후, 왜 수업에 참여해야 하는지, 그들이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살아가도록 돕는 공간이 학교임을 가르친다. 그런데 왜 그 말을 교사가 아니라 군 출신 감독관이 해야 했을까? 교사와 어른의 말은 더 이상 신뢰받지 못하고, 공평과 규칙의 의미도 사라졌다. 더 강한 사람의 말만 효력을 얻는다. 그 순간, 교육은 설득과 성장의 과정이 아니라 능력과 힘의 서열을 확인하고 복종하는 과정이 된다. 그런데 정말 더 강한 폭력이 폭력을 끝낼 수 있을까?
폭력은 자신보다 약한 폭력을 제압하고 상황을 잠시 통제할 수는 있지만, 사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기는 어렵다. 두려움 때문에 행동을 멈추는 것과 자신의 잘못을 이해하고 책임을 배우는 것은 다르다. 드라마 <참교육>은 오늘날 공교육 현장에서 벌어지는 문제를 고발하고, 시청자들이 바라는 결말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대중의 호응을 얻었다. 그러나 폭력과 강제적 처벌을 학교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효과적이고 효율적 방식으로 제안한다는 점에서는 분명히 문제적이다. 폭력은 복종을 이끌어낼 수는 있지만 교육적 변화까지 만들지는 못한다.
사실 실제 학교 현장은 교사의 수업권과 생활지도 재량권까지 약화되며 문제가 더욱 복잡하다. 학생 인권 확대 자체가 문제는 아니며 학생의 인권은 마땅히 보호받아야 한다. 하지만 인권 보호와 정당한 교육적 지도의 경계를 분명하지 못한 채 교사의 판단과 수업 운영까지도 민원과 분쟁의 대상이 되었다는 데 문제가 있다. 교사의 책임은 있지만 권한은 보장받지 못한다. 드라마는 이처럼 교육의 의미가 사라진 자리에 힘의 논리를 채우고, 더 강한 폭력으로 제압한다.
물론 허구의 환상적 폭력을 현실의 폭력과 동일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대중문화는 현실을 비추는 거울인 동시에 무엇이 정의이며 어떤 해결 방식이 가능한지에 대한 인식과 감각을 형성한다. 폭력적 응징이 해답처럼 반복된다면, 관계와 제도의 변화, 대화와 협력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이 약해질 수 있다. 특히 폭력을 불가피한 비극이 아니라 정의가 실현되는 순간으로서 통쾌하게 소비할 때, 힘이 곧 정의라는 감각이 무의식적으로 강화될 위험이 있다. 더욱이 우리 사회는 권력이 폭력과 손잡고 역사적 비극을 빚어왔던 일들을 목도해왔지 않은가.
기독교는 부정의한 현실을 방치하는 무기력도, 정의라는 이름으로 사람을 파괴하는 응징도 참교육이라 부를 수 없다.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님은 참된 스승이시다. 그분은 사람을 두려움으로 굴복시키지 않으셨다. 잘못을 드러내셨으나 죄인을 낙인찍거나 포기하지도 않으셨다.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 오셨으며(요 10:10), 섬김을 받기보다 섬기며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셨다(막 10:45). 예수님은 사람을 압도하는 힘이 아니라 진실을 말하고 책임을 요구하면서도 회복의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는 권위를 가지셨다.
잘못의 책임을 묻되 사람을 포기하지 않는 것, 교사와 학생 모두의 존엄을 상호 존중하는 것, 교육의 세 주체인 교사와 학생, 학부모의 관계(보다 엄밀히 표현하면, 교육의 주체인 교사-배움과 성장의 주체인 학생-돌봄의 주체인 학부모의 관계)를 건강하게 세우는 것이 필요하다. 교육의 목적은 좋은 대학과 직업에만 있지 않다. 자신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다른 사람의 아픔에 응답하며 공동체 안에서 함께 살아가는 사람으로 자라게 하는 데 있다. 참교육은 우리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잘못에는 책임을 묻되 다시 배우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는 일이다.
김지혜 책임연구원(문화선교연구원, 장신대 객원교수)
* 이 글은 국민일보에 게재된 글을 수정 보완하였습니다.
드라마 <참교육>은 공교육과 교사의 권위가 무너졌다는 대중의 불안과 공감대를 전제로 한다. 학생과 보호자의 폭언, 악성 민원 앞에서 교사는 제대로 지도하지 못하고 위축되며, 다른 학생들의 학습권마저 침해된다. 드라마는 이를 바로잡기 위해 ‘교권보호국’이라는 가상의 국가기관을 등장시킨다. 이 드라마에서 논쟁 지점은 교육의 실패를 교육 주체가 아닌 군 출신 감독관의 물리력으로 해결하려 한다는 데 있다. 그리고 많은 시청자가 이에 통쾌함을 느꼈다. 이 지점에서 드라마와 대중은 우리 사회의 질서와 정의의 회복의 방안과 절차를 어떻게 상상하는지 드러낸다.
최근 대중문화에서는 법과 제도가 해결하지 못한 악을 폭력으로 응징하는 서사가 반복된다. 제도가 피해자를 보호하지 못하고, 책임져야 할 사람은 빠져나가며, 문제 해결을 위해 정당한 권위를 발휘하기 어려운 무력한 상황에 놓여있다고 느낀다. <모범택시>, <더 글로리>가 폭력의 피해자들 혹은 대리인의 사적 복수로 카타르시스를 주었다면, <참교육>은 이러한 응징 서사의 연장선에 있다. 폭력적 해결 방식을 공교육과 공권력 안으로 가져온다는 점에서 한층 복잡한 문제를 제기한다. 사람들이 이 드라마에 환호하는 것은 폭력 자체를 옹호해서가 아니라, 말과 제도가 무력해진 현실에서 권력과 결합한 폭력이 가장 빠르게 질서를 회복시키는 수단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간과하지 말아야 할 점은 학교의 문제가 교권 약화를 넘어, 학교와 수업이 많은 학생에게 의미를 제공하지 못하는 현실에 있다. 한국의 교육은 입시라는 중대한 목적을 중심으로 움직인다. 드라마는 이와 같은 현실을 반영하며 부모의 힘이 아이들 사이의 서열로 이어지고, 경쟁에서 밀린 학생에게 수업은 자신의 삶과 무관한 시간이 되고 있음을 고발한다. 또한 일부는 학업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부와 힘, 인정과 소속감을 얻으려 한다. 경쟁에서 앞선 학생들도 성적을 위해 꿈과 건강한 자율성, 배려와 공감, 도덕적 판단과 공동체적 관계 같은 것들을 뒤로 미룬다. 어느 쪽이든 교육의 본래 목적에서 멀어진다. 물론 학교 폭력과 수업 붕괴를 입시 경쟁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학교가 학생들에게 배움의 의미와 공정한 관계가 가능한 장으로 작동하지 못할 때 힘과 서열의 논리가 그 자리를 채울 가능성이 더욱 커진다.
특히 2화에서는 한 학교의 대다수 학생들이 조직폭력배의 눈에 들기 위해 자신을 과시하고 수업을 방해한다. 나화진 감독관(이무열)은 압도적인 힘으로 학생들을 무릎 꿇린 후, 왜 수업에 참여해야 하는지, 그들이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살아가도록 돕는 공간이 학교임을 가르친다. 그런데 왜 그 말을 교사가 아니라 군 출신 감독관이 해야 했을까? 교사와 어른의 말은 더 이상 신뢰받지 못하고, 공평과 규칙의 의미도 사라졌다. 더 강한 사람의 말만 효력을 얻는다. 그 순간, 교육은 설득과 성장의 과정이 아니라 능력과 힘의 서열을 확인하고 복종하는 과정이 된다. 그런데 정말 더 강한 폭력이 폭력을 끝낼 수 있을까?
폭력은 자신보다 약한 폭력을 제압하고 상황을 잠시 통제할 수는 있지만, 사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기는 어렵다. 두려움 때문에 행동을 멈추는 것과 자신의 잘못을 이해하고 책임을 배우는 것은 다르다. 드라마 <참교육>은 오늘날 공교육 현장에서 벌어지는 문제를 고발하고, 시청자들이 바라는 결말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대중의 호응을 얻었다. 그러나 폭력과 강제적 처벌을 학교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효과적이고 효율적 방식으로 제안한다는 점에서는 분명히 문제적이다. 폭력은 복종을 이끌어낼 수는 있지만 교육적 변화까지 만들지는 못한다.
사실 실제 학교 현장은 교사의 수업권과 생활지도 재량권까지 약화되며 문제가 더욱 복잡하다. 학생 인권 확대 자체가 문제는 아니며 학생의 인권은 마땅히 보호받아야 한다. 하지만 인권 보호와 정당한 교육적 지도의 경계를 분명하지 못한 채 교사의 판단과 수업 운영까지도 민원과 분쟁의 대상이 되었다는 데 문제가 있다. 교사의 책임은 있지만 권한은 보장받지 못한다. 드라마는 이처럼 교육의 의미가 사라진 자리에 힘의 논리를 채우고, 더 강한 폭력으로 제압한다.
물론 허구의 환상적 폭력을 현실의 폭력과 동일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대중문화는 현실을 비추는 거울인 동시에 무엇이 정의이며 어떤 해결 방식이 가능한지에 대한 인식과 감각을 형성한다. 폭력적 응징이 해답처럼 반복된다면, 관계와 제도의 변화, 대화와 협력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이 약해질 수 있다. 특히 폭력을 불가피한 비극이 아니라 정의가 실현되는 순간으로서 통쾌하게 소비할 때, 힘이 곧 정의라는 감각이 무의식적으로 강화될 위험이 있다. 더욱이 우리 사회는 권력이 폭력과 손잡고 역사적 비극을 빚어왔던 일들을 목도해왔지 않은가.
기독교는 부정의한 현실을 방치하는 무기력도, 정의라는 이름으로 사람을 파괴하는 응징도 참교육이라 부를 수 없다.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님은 참된 스승이시다. 그분은 사람을 두려움으로 굴복시키지 않으셨다. 잘못을 드러내셨으나 죄인을 낙인찍거나 포기하지도 않으셨다.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 오셨으며(요 10:10), 섬김을 받기보다 섬기며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셨다(막 10:45). 예수님은 사람을 압도하는 힘이 아니라 진실을 말하고 책임을 요구하면서도 회복의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는 권위를 가지셨다.
잘못의 책임을 묻되 사람을 포기하지 않는 것, 교사와 학생 모두의 존엄을 상호 존중하는 것, 교육의 세 주체인 교사와 학생, 학부모의 관계(보다 엄밀히 표현하면, 교육의 주체인 교사-배움과 성장의 주체인 학생-돌봄의 주체인 학부모의 관계)를 건강하게 세우는 것이 필요하다. 교육의 목적은 좋은 대학과 직업에만 있지 않다. 자신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다른 사람의 아픔에 응답하며 공동체 안에서 함께 살아가는 사람으로 자라게 하는 데 있다. 참교육은 우리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잘못에는 책임을 묻되 다시 배우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는 일이다.
김지혜 책임연구원(문화선교연구원, 장신대 객원교수)
* 이 글은 국민일보에 게재된 글을 수정 보완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