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인의 문화 읽기<라자르 선생님> - 상처가 상처를 치유한다

2013-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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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자르 선생님>(필립 팔라르도, 드라마, 12세, 2011, 한국개봉 2013)


상처가 상처를 치유한다


영화 포스터

먼저 영화의 포스터에 주목해보자. 영화의 배경은 캐나다 동부지역에 위치한 궤벡(Quebec) 어느 초등학교 교실이다. 뒷모습의 여자 아이와 한 쪽 무릎을 굽히고 그녀를 안고 있는 남자 선생님 라자르가 보인다. 학교 교실에서 쉽게 볼 수 없는 매우 감격스런 모습이다. 그리고 “나에게 너희들은 희망이란다”는 글이 눈에 들어온다. 라자르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했던 말이다. 영화를 보지 않으면 단지 어린이를 미래의 희망으로 대하는 어른의 시선과 기대를 표현한 것으로 보일 뿐이다.


영화를 보지 않아 그림과 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자세히 알지는 못한다 해도 그림 자체만으로도 매우 감동적인 모습인 것은 분명하다. 교실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궁금해지고 영화 감상을 자극한다. 영화를 보면 포스터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임을 알게 된다. 그 장소는 이전 담임선생님 마틴이 자살을 했던 곳이었다. 끔찍한 사건이 일어난 장소에서 마지막 수업을 마친 선생님과 학생이 서로 포옹을 하고 있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질문, 자살 사건 이후에 교실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영화 이야기 

영화는 학교 마당에서 뛰노는 아이들의 모습과 더불어 시작하나 곧 이어 선생님의 자살 사건에 집중하면서 학교 전체, 곧 학교 선생님과 학생들이 겪을 수밖에 없는 충격과 혼란을 다양하게 조명한다. 먼저 선생님들은 아이들이 사건 현장을 보지 못하도록 막고, 무슨 일인지 의아하게 생각하며 놀란 아이들을 진정시킨다. 급하게 연락받고 온 학부모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커져가는 학부모들의 염려, 그리고 자신들이 부재하는 동안 아이들의 정신적인 충격을 완화할 선생님의 필요성이 절감해지고, 그에 따라 학생 상담을 늘려달라는 요구가 제기된다. 여분의 교실이 없지만 아이들을 위해 새로운 환경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교실 벽을 새로 칠하는 것은 물론이고 고인의 유품을 신속하게 처리한다. 아이들에게 미칠 부정적인 영향을 막기 위해 그리고 아이들이 사건과 선생님에 대한 기억에서 하루빨리 벗어나기만을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한 조치이다. 후임 선생님을 빠른 시기 안에 구하려고 하나 나서는 지원자가 없다.


바로 이런 침울한 분위기로 가득한 때에 알제리 출신의 라자르는 신문에서 구직 광고를 보고 학교로 찾아온다. 교장 선생님은 임시직으로 새로 부임한 라자르 선생님에게 고인에 대한 이야기를 해서도 안 되고, 기억을 떠올릴 수 있는 일들을 해서도 안 된다고 일러준다. 사건을 은폐함으로써 아이들이 충격에서 가급적 빨리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한 영화는 교실 내의 아이들의 모습에 집중한다. 선생님이 왜 자살을 했는지, 그 이유가 궁금해도 더 이상 그 일에 대해 생각하거나 말할 수 없는 환경에서 아이들은 오직 그 사건을 추측과 소문 그리고 부모님 사이에서 오가는 이야기를 통해서만 접할 뿐이다. 서로가 드러내어 말하지 않고 있어도 모두들 선생님과의 관계에서 잊을 수 없는 기억들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그곳에는 평소에 고인을 잘 따르던 학생도 있고, 그렇지 않고 오히려 선생님을 힘들게 했던 학생도 있다. 선생님의 죽음을 두고 학생들 사이에서 감도는 긴장감은 극에 달하고, 심지어 선생님의 자살이 말썽을 피운 아이 때문에 일어났다는 비난도 있어서, 이 때문에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는 일이 거듭해서 일어난다.

 

특별한 효과 없이도 몰입하게 하는 힘이 있을 정도로 감독의 연출능력이 십분 발휘된 작품이다. 게다가 평범한 초등학교에서 일어난 사건을 계기로 캐나다의 이주민 정책과 학교 문제, 학교와 가정의 관계, 학생 인권문제와 인권 조례, 그리고 교사들의 불만 등과 같은 매우 예민한 문제들을 건드려 나가는 방식이 매우 돋보인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도시 퀘벡은 캐나다에서도 매우 높은 자살율을 기록하고 있다고 한다. 감독이 자살을 소재로 삼게 된 이유라고 볼 수 있다.

 

영화의 이해를 위해 먼저 이런 질문을 생각해보자. 비록 교사인 아내를 두었다 해도 정작 본인 스스로는 교사 경험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라자르는 왜 남들이 지원하길 주저하는 임시 교사직을 자원했던 것일까? 

게다가 스스로 상실감으로 힘든 시간들을 보내고 있었던 때였다. 보기에 따라서는 기름을 지고 불에 뛰어드는 경우라고 볼 수도 있다. 영화는 직접적으로 대답하진 않아도 내용을 바탕으로 추론해볼 수 있는 단서를 포진해 놓고 있다. 다시 말해서 알제리에서 일어난 테러로 한꺼번에 아내와 아이를 잃은 라자르는 스스로 교사의 역할을 체험해봄으로써 교사였던 아내를 추억하고 또 그녀를 잃은 상실의 감정을 위로받기 위함이었다. 이렇게 볼 때 비로소 동료 여교사의 적극적인 태도에 라자르가 보였던 시종 어색한 표정을 이해할 수 있다.


둘째, 영화이해를 위해 영화가 집중하고 있는 내용에 천착해 볼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서 아내를 잃은 상실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교사인 아내의 역할을 선택하면서까지 아내에 대한 기억과 추억을 직면하기를 결코 마다하지 않았던 라자르로서 이해하기 힘든 일이 있었다. 자살 사건 때문에 아이들이 겪어야 했던 충격을 대하는 학교의 태도였다. 며칠 동안의 상담으로 아이들이 충격에서 벗어났고 또 그들의 상처가 치유되었다고 믿는 것도 문제이지만, 선생으로서 학교 교실에서 자살을 한 것을 문제 삼기보다 오히려 평소에 선생님을 괴롭힌 한 학생에게만 주목하는 것이나 고인에 대한 이야기를 거론조차 할 수 없게 만드는 분위기도 이해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학생의 말마따나 자살로 충격을 받은 사람은 아이들이 아니라 어른들이었을지도 모른다.


앞의 두 가지 내용을 근거로 생각해볼 때, 영화가 집중하는 것은 상실감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에 있어서 나타나는 차이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셋째, 충격과 상실감에서 회복되는 일이 교사의 자격도 없는 라자르와 만남을 통해 가능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학교의 태도에선 담임선생님을 잃고 깊은 상실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아이들에 대한 배려를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배려라고 해도 오직 학교의 정상적인 기능이 회복되기만을 염려한 결과일 뿐이다. 아이들의 안정은 아이들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학교의 정상화를 위해 그리고 학교에 대한 학부모의 신뢰를 얻기 위해, 학부모의 근심을 덜기 위해 필요했을 뿐이었다. 이에 비해 라자르에게 아이들의 치유는 학교 정상화와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 것일 뿐만 아니라 심지어 우선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죽음과 폭력 그리고 인간관계의 부당함을 이해하는 수업을 통해 아이들이 간접적으로 자신에게 일어난 현실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수업을 통해서 아이들이 자살을 하나의 폭력으로 이해하고 설명하는 장면은 매우 감동적이고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스스로 상실의 경험을 가진 자로서 라자르는 비록 정식 교사가 아니고 또 비록 처음에는 학생과 학부모의 신뢰를 얻을 수 없었지만, 라자르 선생님의 수업에 참여하면서 아이들은 담임선생님의 자살과 관련된 서로의 오해를 풀고 또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주는 변화를 경험할 수 있었다. 물론 아이들이 변화되는 모습을 통해 라자르 역시 가족을 잃은 상실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포스터에 나오는 두 사람의 뜨거운 포옹은 그들이 서로에 대해 어떤 의미 있는 존재이며 또한 과거의 상실감에서 어느 정도 벗어났음을 보여주는 의미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교사의 역할을 통해 아내를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게 해준 라자르에게 아이들은 그야말로 캐나다에서 망명자로서 살아가야만 하는 상황에서 희망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헨리 나우웬이 “상처입은 치유자”에서 말한 바 있듯이, 상처를 경험한 자만이 상처 입은 자를 치유할 수 있는 법이다.

 


영화가 주는 교훈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 “상실의 시대”를 바탕으로 트란 안 홍 감독이 만든 <상실의 시대>가 60년대 일본의 청춘 남녀가 겪는 상실의 아픔을 통해서 시대의 절망감과 아픔 그리고 치유되는 과정을 그렸다면, <라자르 선생님>은 부당한 폭력으로 가족을 잃고 상실의 아픔을 겪는 선생님과 담임선생님을 작별인사도 없이 보내고 상실감에 빠진 아이들이 교실이라는 공간에서 서로를 치유해 가는 모습을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다. 퀘벡에서 자주 접하는 자살 사건을 어린아이의 시각으로 다루는 방식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영화가 주는 교훈과 관련해서 고민하는 가운데 갖게 된 궁금한 점이 있다. 

왜 선생님의 자살이 학교 교실에서 일어나도록 연출되었을까? 

앞서 언급했듯이, 영화는 자살률이 타도시에 비해 특히 높은 캐나다 퀘벡의 상황을 소재로 삼은 것이다. 여기서 장소가 학교였다는 사실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감독은 비록 아이들의 시각으로 학교 내 자살의 문제를 다루고 있지만, 이를 통해 학교제도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감추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학생들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 지나칠 정도로 체벌과 신체접촉을 금하고 있는 학교규칙은 오히려 교사와 학생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선생님을 좌절케 하며 절망하게 만들 뿐임을 고발한다. 

선생님의 자살은 바로 이런 학교 제도와 규칙에 대한 좌절과 절망을 표현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잘못된 제도가 선생님은 물론 학교 자체를 궁지로 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학교가 자살사건을 그토록 은폐하려는 이유는 그녀의 죽음이 학교 제도와 결코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규칙의 부조리함은 아무리 벽 칠을 새로 하고 분위기와 환경을 바꾸어도 감출 수 없는 일이다. 상실감에 젖어 있는 아이들에게 접근하는 라자르의 방식에 부정적으로 반응하는 것은 학교 제도 자체의 허구가 드러날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라자르가 다소 권위회복의 상징행위로서 책상배열을 바꾼 것은 불필요할 정도로 지나친 규칙으로 무너져 내리는 교권을 회복하려는 의지의 표현이다. 영화는 라자르 선생님을 통해 선생님의 권위를 내세워 학생들에게 부당한 대우를 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지나칠 정도로 교권을 위축시키는 제도와 규제 역시 적지 않은 문제임을 꼬집고 있다.


평범한 초등학교의 한 교실에서 일어난 일들을 통해 이토록 다양한 생각들을 읽어낼 수 있도록 연출해낸 감독의 능력에 감탄할 수밖에 없다.

 


교회에 주는 교훈

한국교회 현실과 관련해서 볼 때, <라자르 선생님>에서 얻을 수 있는 의미는 무엇일까? 직접적으로 연관지울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한국교회 현실과 어느 정도 유사한 구조를 갖고 있어서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임에는 분명하다. 비제도권의 라자르와의 관계에서 아이들이 치유되고 회복되는 모습에 착안하여 보면 한국교회의 현실을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한국교회에서 쳇바퀴 돌듯이 반복되면서도 하나의 굴레와 같이 여겨지는 상황을 생각하게 되었다.


한국교회는 다른 어떤 곳보다 사회적인 흐름과 분위기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소명을 감당하고 있다. 문제는 이끌기보다는 이끌리고 있고, 심지어 사로 잡혀 있는 것이다. 그 때문에 교역자는 종종 신학적인 맥락보다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가치를 더 우선시 해야만 하는 딜레마에 직면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는 교역자의 죽음, 다시 말해서 신학적인 의미의 목사는 죽고 기능인 곧, 오직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혹은 정치적인 의미만을 갖는 존재로 전락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발생한다. 이것은 불가피하게 목회자의 타락과 더불어 교회의 변질로 이어진다. 이 때문에 교인은 교역자의 변질 혹은 타락에 충격을 받으며, 이런 현상에 대해 어떤 형태로든 반응을 보이려고 하지만, 교회가 요구하는 권위는 교인들의 움직임을 질서를 어지럽히는 것으로 혹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으로 규정하며 저지한다. 사실 교인들을 혼동으로 몰아간 문제는 교역자 자신의 변화를 전제하기 때문에 교역자 스스로 개혁을 결단하지 않으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교인들의 충격과 상처를 접할 때, 교역자의 역할은 교인의 충격과 상실감을 보듬는 일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단지 교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할 뿐, 정작 교인들의 충격과 상실의 원인을 생각하거나 해결하려고 하지 않는다. 경우에 따라서는 목사의 인간으로서 한계와 신정론을 들먹거리거나 혹은 종말론을 거론하면서 이해를 구하고 고난을 말하고 인내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목회자의 인간론적인 이해는 변명의 구실이 되었고, 신정론과 종말론은 이미 오래 전부터 신앙과 신학의 문제를 회피하는 하나의 수단이 되어 버렸다. 결과적으로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음을 알게 된 교인들은 교회 문제와 관련해서 무력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도대체 이런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한국교회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교인들은 그들의 상처가 치유되고, 부자연스러움에서 벗어나며 또한 참된 복음선포로부터 기쁨의 이유를 접하지 않는 한, 어떤 방식으로든 찾고 기다리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교인은 기독교의 속성상 치유와 해방과 기쁨을 갈망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무엇보다 자신들의 현실을 바르게 이해하도록 하고, 상처를 치유해주며, 부조리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지도자를 원한다.


그럼에도 교회가 바른 지도자를 세우기보다 오히려 교회 기능이 정상적으로 작용하기만을 원하고 교인들의 절박한 요구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교인들은 제도적인 교회, 소위 정통이라는 교회가 아닌 다른 곳에 기웃거릴 수 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현실이기 때문이다. 해방과 치유와 기쁨을 갈구하도록 학습되었기 때문이다. 교회가 그렇게 많고 또 목회자들이 그토록 많은 현실에서 왜 이단들이 활개를 치며 다니는지를 심각하게 고민해봐야 한다. 사람들이 교리에 무지하다고만 말하지 말고 교인들의 요구와 갈급함에 교회가 어떻게 대처했는지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들은 그곳에서 현실이 이해되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을 경험하며, 또 마음의 평화를 누리고 진리에 대한 갈증으로부터 해갈을 느끼기 때문이다.


최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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