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영화 <세계의 주인>에 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누군가의 아픔에 공감해 본 적이 있는가.
언젠가 힘들어하는 후배에게 위로랍시고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난 네가 대체 왜 힘들어하는지 모르겠어. 너처럼 능력 있고, 똑똑하고, 멋진 사람은 내 주변에 정말 드물어. 스스로를 믿고 한 걸음씩 걸어내다 보면 충분히 괜찮아질 거야.” 후배는 전혀 위로가 되지 않은 표정이었다. 떨떠름해하는 후배를 계속 다독여보았지만, 나아질 기미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언젠가부터 그 후배와의 연락이 끊어졌다. 어째서일까, 나는 최선을 다해 위로했고, 곁에 있어 주고 싶었는데. 내 진심은 왜 받아들여지지 않았을까. 스스로의 낮은 자존감과 은근한 질투가 뒤섞인 채, 쿨함을 표방하여 두서없이 배설한 저 말이, 결국 상대방의 감정과 상황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폭력적인 표현이었음을 깨달은 것은 조금 나중의 일이다.
주인의 세계
영화의 주인공 주인이가 사는 동네에 성폭력 범죄자가 복귀를 앞두고 있다. 범죄자의 출소와 더불어 그의 ‘동네 복귀’에 따른 ‘반대 서명’ 운동이 주인이의 같은 반 친구 수호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었다. 수호는 주인이에게도 서명을 부탁하는데, 주인이는 거절한다. 서명지에 설명이랍시고 적힌 ‘씻지 못할 상처’, ‘평생 트라우마’, ‘영혼이 파괴된다’와 같은 표현들이 무척 거슬린다.
평소 주인이는 밝은 성격이다. 친구들과도 잘 지내고 농담도 잘하며 분위기를 주도하는 소위 ‘인싸’다. 그런 주인이의 평범한 일상에서 분노의 트리거는 잘 없는 듯했는데, 유독 ‘서명 운동’에는 화를 잘 참지 못한다. 특히 성폭력 피해자가 트라우마 속에서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지 못할 것이라는, 당해보지 않은 이들의 신경쓰는 듯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은 무심한 글귀는 도저히 견딜 수 없다.
주인이는 성폭력 피해자다. 아버지의 동생이 그 가해자다. 영화 내에서 주인이가 유일하게 분노를 폭발시키는 세차장 신을 보고 있자면, 그 아픔이, 그 참혹함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영화 전체에서 한 3분여 남짓, 엄마에게 다른 아이들은 그렇게 잘 돌보면서 어떻게 나는 그 일을 당하도록 내버려 둘 수 있었냐고, 어떻게 엄마가 모를 수 있냐고, 대체 왜 그렇게 오랫동안 방치했냐고 울부짖는 주인이의 마음은 여전히 상처투성이다.

나의 세계, 그곳의 주인
그러나 주인이는 그 상처들을 끌어안은 채, 최선을 다해 자신의 일상을 지킨다. 태권도도 열심히 다니고, 봉사활동도 한다. ‘사랑’하기 위해서 무던히도 애쓴다. 영화의 오프닝 쇼트가 주인이와 남자 친구의 격렬한 키스신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주인이의 과거가 사랑을 시도할 때마다 트리거로 작동하며 관계가 깊어지지 못하도록 자꾸만 막아서지만, 그래도 주인이는 최선을 다하고 싶다. 내가 속한 일상의 주체는 결국 나니까. 최선을 다해 그 일상을 지키고 싶다.
그러나 평범한 일상을 위협하는 크고 작은 일들은 또 얼마나 많이 일어나는가. 수호의 조심성 없는 단어 선택이, 키스하는 도중에 몸을 더듬는 남자 친구의 손이, 나의 경험을 함부로 판단하는 익명의 쪽지가 주인이의 일상을 침범한다. 태권도장에 가서 샌드백을 열심히 발로 찬다. 봉사활동에 가서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과 최선을 다해 연대한다. 그런데 주인이가 남자친구를 데려갔더니 이번에는 미도 언니의 트리거가 발동했다. 참 지켜내기 힘든 무탈한 일상이다.
그래도 주인이의 주변에는 좋은 사람들이 많이 있다. 엄마, 동생, 미도 언니, 태권도장 사범님, 학교 친구들 모두 주인이를 지탱해 주는 중요한 존재다. 물론 사람인지라 저마다의 무너지는 지점들이 있지만, 그래도 평범해지고자 애쓰는 일상 속에서 서로 의지하며 연대한다.
영화 <세계의 주인>은 직접적인 고통을 전시하지도, 그 고통을 함부로 위로하지도 않는다. 평범하게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가는 일상이야말로 가장 큰 축복이자 위로임을 섬세하게 제안한다. 그렇게 내가 속한 세계의 주체로 우뚝 서고자 하는 ‘주인’이를 깊은 사유를 거쳐 조심스럽고도 평범하게 응원하도록 시청자들을 이끌어준다.

이 세계의 모든 주인이들의 ‘일상’을 위하여
인간으로서 겪지 말아야 할 일들이 참 많지만, 그것을 겪지 않고서 온전한 유토피아를 살아낸 인간은 감히 말하건대 인류 역사를 통틀어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크고 작은 불합리들부터 괴롭힘, 폭력, 전쟁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거대한 악의 흐름 속에서 고군분투하며 살아간다.
그렇기에 ‘일상’은 참 소중한 것이다. 신이 허락한 피조세계의 아름다움을 기꺼이 누리고, 좋은 사람들과 함께 평범한 공동체를 꾸리며 살아가는 것은 그나마 악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나’와 ‘너’를 지키는 최선의 방법이다.
『욕쟁이 예수』의 저자 박총 목사는 그의 한 강의에서 ‘일상’을 잘 살아내는 것이야말로 하나님 앞에 드리는 훌륭한 예배라 말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피조세계를 마음껏 ‘향유’하고, 우리 생을 이어갈 수 있는 축복의 ‘노동’을 묵묵히 감당하며, 주어진 것들에 ‘자족’하고, 내가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낮은 곳에서 ‘연대’하는 일상을 살아낼 때, 그 어떤 예배보다 훌륭하고 멋진 예배를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영화 <세계의 주인>은 완벽하진 않지만, 충분히 훌륭한 일상의 예배가 곳곳에 편재한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이 영화의 홍보 방식이다. 스포일러 주의를 전면에 내세웠는데, 정작 트리거 워닝이 되지 않아서 마음이 어려울 수 있는 이들을 신경 쓰지 못했다. 왓챠피디아의 한 리뷰에서는 ‘아이러니하게도 이 영화 자체가 ‘수호’의 역할을 한다. ‘주인’이 아니고 말이다.’라고 평가한다. 그렇게 섬세하려고 노력했던 이 영화는 결국 홍보 방식으로 인해, 성폭력 피해에 무지한 ‘수호’의 자리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그러나 그 아쉬움을 차치한다면, 충분히 의미 있는 영화다. 부디 이 세계의 모든 ‘주인’이들이 평범한 일상을 살아낼 수 있기를. 그들과 함께 연대하고자 하는 모든 이들이 함부로 판단하거나 명명하지 않기를. 폭력적일 수 있는 위로를 함부로 남발하지 않고, 그렇게 보다 조금 더 괜찮은 ‘연대’로 나아갈 수 있기를 소망한다.

* 이 글은 『새가정』 26년 1월호에 게재된 글을 재게재한 것입니다.
김유민 연구원(문화선교연구원, 한양대(대중문화 석사, 국문과 박사과정))
불완전한 편린이 모여 빛을 낸다면, 그만큼 완전한 것이 또 있을까.
언뜻 희망이 없어 보이는 세상에서 '소망'을 동경(憧憬)하는 사람.
* 영화 <세계의 주인>에 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누군가의 아픔에 공감해 본 적이 있는가.
언젠가 힘들어하는 후배에게 위로랍시고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난 네가 대체 왜 힘들어하는지 모르겠어. 너처럼 능력 있고, 똑똑하고, 멋진 사람은 내 주변에 정말 드물어. 스스로를 믿고 한 걸음씩 걸어내다 보면 충분히 괜찮아질 거야.” 후배는 전혀 위로가 되지 않은 표정이었다. 떨떠름해하는 후배를 계속 다독여보았지만, 나아질 기미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언젠가부터 그 후배와의 연락이 끊어졌다. 어째서일까, 나는 최선을 다해 위로했고, 곁에 있어 주고 싶었는데. 내 진심은 왜 받아들여지지 않았을까. 스스로의 낮은 자존감과 은근한 질투가 뒤섞인 채, 쿨함을 표방하여 두서없이 배설한 저 말이, 결국 상대방의 감정과 상황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폭력적인 표현이었음을 깨달은 것은 조금 나중의 일이다.
주인의 세계
영화의 주인공 주인이가 사는 동네에 성폭력 범죄자가 복귀를 앞두고 있다. 범죄자의 출소와 더불어 그의 ‘동네 복귀’에 따른 ‘반대 서명’ 운동이 주인이의 같은 반 친구 수호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었다. 수호는 주인이에게도 서명을 부탁하는데, 주인이는 거절한다. 서명지에 설명이랍시고 적힌 ‘씻지 못할 상처’, ‘평생 트라우마’, ‘영혼이 파괴된다’와 같은 표현들이 무척 거슬린다.
평소 주인이는 밝은 성격이다. 친구들과도 잘 지내고 농담도 잘하며 분위기를 주도하는 소위 ‘인싸’다. 그런 주인이의 평범한 일상에서 분노의 트리거는 잘 없는 듯했는데, 유독 ‘서명 운동’에는 화를 잘 참지 못한다. 특히 성폭력 피해자가 트라우마 속에서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지 못할 것이라는, 당해보지 않은 이들의 신경쓰는 듯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은 무심한 글귀는 도저히 견딜 수 없다.
주인이는 성폭력 피해자다. 아버지의 동생이 그 가해자다. 영화 내에서 주인이가 유일하게 분노를 폭발시키는 세차장 신을 보고 있자면, 그 아픔이, 그 참혹함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영화 전체에서 한 3분여 남짓, 엄마에게 다른 아이들은 그렇게 잘 돌보면서 어떻게 나는 그 일을 당하도록 내버려 둘 수 있었냐고, 어떻게 엄마가 모를 수 있냐고, 대체 왜 그렇게 오랫동안 방치했냐고 울부짖는 주인이의 마음은 여전히 상처투성이다.

나의 세계, 그곳의 주인
그러나 주인이는 그 상처들을 끌어안은 채, 최선을 다해 자신의 일상을 지킨다. 태권도도 열심히 다니고, 봉사활동도 한다. ‘사랑’하기 위해서 무던히도 애쓴다. 영화의 오프닝 쇼트가 주인이와 남자 친구의 격렬한 키스신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주인이의 과거가 사랑을 시도할 때마다 트리거로 작동하며 관계가 깊어지지 못하도록 자꾸만 막아서지만, 그래도 주인이는 최선을 다하고 싶다. 내가 속한 일상의 주체는 결국 나니까. 최선을 다해 그 일상을 지키고 싶다.
그러나 평범한 일상을 위협하는 크고 작은 일들은 또 얼마나 많이 일어나는가. 수호의 조심성 없는 단어 선택이, 키스하는 도중에 몸을 더듬는 남자 친구의 손이, 나의 경험을 함부로 판단하는 익명의 쪽지가 주인이의 일상을 침범한다. 태권도장에 가서 샌드백을 열심히 발로 찬다. 봉사활동에 가서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과 최선을 다해 연대한다. 그런데 주인이가 남자친구를 데려갔더니 이번에는 미도 언니의 트리거가 발동했다. 참 지켜내기 힘든 무탈한 일상이다.
그래도 주인이의 주변에는 좋은 사람들이 많이 있다. 엄마, 동생, 미도 언니, 태권도장 사범님, 학교 친구들 모두 주인이를 지탱해 주는 중요한 존재다. 물론 사람인지라 저마다의 무너지는 지점들이 있지만, 그래도 평범해지고자 애쓰는 일상 속에서 서로 의지하며 연대한다.
영화 <세계의 주인>은 직접적인 고통을 전시하지도, 그 고통을 함부로 위로하지도 않는다. 평범하게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가는 일상이야말로 가장 큰 축복이자 위로임을 섬세하게 제안한다. 그렇게 내가 속한 세계의 주체로 우뚝 서고자 하는 ‘주인’이를 깊은 사유를 거쳐 조심스럽고도 평범하게 응원하도록 시청자들을 이끌어준다.
이 세계의 모든 주인이들의 ‘일상’을 위하여
인간으로서 겪지 말아야 할 일들이 참 많지만, 그것을 겪지 않고서 온전한 유토피아를 살아낸 인간은 감히 말하건대 인류 역사를 통틀어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크고 작은 불합리들부터 괴롭힘, 폭력, 전쟁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거대한 악의 흐름 속에서 고군분투하며 살아간다.
그렇기에 ‘일상’은 참 소중한 것이다. 신이 허락한 피조세계의 아름다움을 기꺼이 누리고, 좋은 사람들과 함께 평범한 공동체를 꾸리며 살아가는 것은 그나마 악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나’와 ‘너’를 지키는 최선의 방법이다.
『욕쟁이 예수』의 저자 박총 목사는 그의 한 강의에서 ‘일상’을 잘 살아내는 것이야말로 하나님 앞에 드리는 훌륭한 예배라 말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피조세계를 마음껏 ‘향유’하고, 우리 생을 이어갈 수 있는 축복의 ‘노동’을 묵묵히 감당하며, 주어진 것들에 ‘자족’하고, 내가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낮은 곳에서 ‘연대’하는 일상을 살아낼 때, 그 어떤 예배보다 훌륭하고 멋진 예배를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영화 <세계의 주인>은 완벽하진 않지만, 충분히 훌륭한 일상의 예배가 곳곳에 편재한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이 영화의 홍보 방식이다. 스포일러 주의를 전면에 내세웠는데, 정작 트리거 워닝이 되지 않아서 마음이 어려울 수 있는 이들을 신경 쓰지 못했다. 왓챠피디아의 한 리뷰에서는 ‘아이러니하게도 이 영화 자체가 ‘수호’의 역할을 한다. ‘주인’이 아니고 말이다.’라고 평가한다. 그렇게 섬세하려고 노력했던 이 영화는 결국 홍보 방식으로 인해, 성폭력 피해에 무지한 ‘수호’의 자리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그러나 그 아쉬움을 차치한다면, 충분히 의미 있는 영화다. 부디 이 세계의 모든 ‘주인’이들이 평범한 일상을 살아낼 수 있기를. 그들과 함께 연대하고자 하는 모든 이들이 함부로 판단하거나 명명하지 않기를. 폭력적일 수 있는 위로를 함부로 남발하지 않고, 그렇게 보다 조금 더 괜찮은 ‘연대’로 나아갈 수 있기를 소망한다.

* 이 글은 『새가정』 26년 1월호에 게재된 글을 재게재한 것입니다.
김유민 연구원(문화선교연구원, 한양대(대중문화 석사, 국문과 박사과정))
불완전한 편린이 모여 빛을 낸다면, 그만큼 완전한 것이 또 있을까.
언뜻 희망이 없어 보이는 세상에서 '소망'을 동경(憧憬)하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