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025년 넷플릭스에서 개봉한 영화 <프랑켄슈타인>의 스포일러가 담겨있습니다.
제가 부탁했습니까? 창조주여, 흙으로 빚어 나를 인간으로 만들어 달라고?
제가 애원했습니까, 어둠에서 끌어 올려 달라고?
- 존 밀턴 『실낙원』
『프랑켄슈타인』 책을 처음 열면 독자를 사로잡는 제사(題辭)다. 저자인 메리 셸리는 실낙원의 한 구절을 첫머리에 배치하여, 『프랑켄슈타인』이 담고 있는 사유의 깊이감을 한눈에 제시했다.
그렇다. 인간은 끊임없이 존재의 이유를 고찰하며 자기 연민에 빠지곤 한다. 그만큼 세상을 살아가는 일이 쉽지 않기 때문일 테다. 참혹한 세계를 살아내는 일은 분명 고되다. 그렇기에 어디론가 책임을 돌려서라도(창조주에게 울부짖는 방식으로라도)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을 타개하고 싶은 간절함은 바꿔 말하면 끈질긴 생의 의지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은 ‘크리처 장인’으로 불린다. 그가 작업한 수많은 영화에서 직접 창조한 피조물의 면면을 보고 있자면 기괴하면서도 처연한 아름다움들이 전해진다. <셰이프 오브 워터 : 사랑의 모양>의 ‘어인’과 <기예르모 델 토로의 피노키오>의 ‘피노키오’를 그려낼 때는 그가 창조해 낸 크리처에 ‘순수성’까지 덧입혀지는데, 이런 방식은 이번 <프랑켄슈타인>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영화 <프랑켄슈타인> 스틸 컷, 빅터와 괴물
창조주 빅터 프랑켄슈타인과 그의 피조물
빅터 프랑켄슈타인이 시체로부터 한 조각씩 직접 기워 만들어낸 괴물은 크리처답게 기괴하지만, 갓 태어난 아이의 모습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완성된 몸을 가지고 있어서인지 ‘마마’나 ‘파파’보다 자신을 만든 창조주의 이름, ‘빅터’를 먼저 성대에 담았다. 그러나 더 이상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이 지점에서 빅터는 조금 모순적인 태도를 보이는데, 몇 주를 참지 못하고 곧장 자신이 창조한 괴물의 폐기를 결정한다. 괴물을 만들어내는데 들어간 시간과 재정을 생각하면, 그리고 빅터의 이름을 부를 때의 그 벅찬 감정을 생각한다면, 이제 막 기능하기 시작하는 괴물의 폐기를 쉽게 결정하지는 못하는 것이 일반적인 사고 과정이다. 그런데 빅터는 신의 영역에 침범했다는 불안감 때문이었을까, 혹은 막상 자신이 창조한 괴물의 형상이 아름답지 않다고 여긴 것이었을까, 이내 급진적인 결정을 내리고 만다.
비극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죽지 않는 몸을 가진 괴물은 자신을 연민하여 스스로 죽을 수도 없었다. 자신을 마주하는 많은 인간들은 놀라서 공격을 해댄다.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벌써 수도 없이 죽었을 테지만, 목숨은 여전히 붙어있다. 그나마 자신을 품어준 사람은 눈이 먼 노인뿐이었다. 그에게 글도 말도 제대로 배웠고, 생의 온기를 느꼈다. 그런데 괴물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노인은 늑대의 습격을 받았고, 괴물이 도착했을 땐 손 쓸 수 없는 상황이었다. 때마침 도착한 노인의 가족들은 그 자리에 있던 괴물을 살인자로 오인한다. 이제 괴물은 갈 곳이 없다. 마음을 붙일 존재도 없다. 결국 괴물은 빅터를 찾아가 자신과 같은 존재를 하나 더 만들어달라고 간청하지만 거절당하고, 그 과정에서 괴물을 유일하게 이해하는 듯싶었던 엘리자베스1)마저 죽고 만다. 이제 괴물은 온전히 혼자가 되었다.
여기까지는 원작과 비슷하게 흘러간다. 이후 빅터와 괴물의 북극 추격전 끝에 죽은 빅터를 안고 완벽하게 혼자가 되는 것이 메리 셸리가 쓴 원작의 내용이다. 그런데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은 여기서 변주를 가미해 자신만의 엔딩을 써 내려간다.
1) 엘리자베스는 빅터의 후원자 하인리히의 조카이며 동생 윌리엄의 약혼녀이다. 실험에 성공하고 엘리자베스와 동생이 빅터를 찾아왔을 때 두 사람 모두 괴물과 만난 적이 있다. 엘리자베스는 괴물에게 ‘빅터’라는 단어 외에 자신의 이름 ‘엘리자베스’를 가르쳤지만, 빅터는 이를 알지 못했다.

영화 <프랑켄슈타인> 스틸 컷, 괴물과 엘리자베스
용서의 힘
빅터 프랑켄슈타인과 괴물은 북극 탐험선에서 조우한다. 괴물의 이야기를 전부 들은 빅터는 자신의 숨을 거두기 전 괴물과 마지막 대화를 나눈다.
괴물
당신의 시간은 다했어, 창조자.
사그라들겠지. 모든 건 그저 한 순간이야.
내 탄생, 내 슬픔, 당신의 상실.
난 벌을 받지도, 용서받지도 않겠지.
내가 품었던 희망도, 분노도, 다 무의미해.
날 데려온 밀물이, 썰물이 되어 당신을 데려가네.
나만 덩그러니 남기고.
빅터
용서해다오. 내 아들아.
그리고 마음이 내킨다면,
스스로 용서하고 네 존재를 받아들여.
죽음이 허락되지 않는다면, 이걸 생각해라. 아들아.
살아 있는 동안에 네게 주어진 길은 살아가는 것뿐이라는 걸.
살아라.
그리고서 빅터는 아버지가 준 무의미한 이름을 괴물에게 마지막으로 한 번만 불러달라고 요청한다. 괴물에게 처음 자각이 생기고서 세상의 전부였던, 그 이름을 불렀을 때처럼 말이다. 괴물은 그 요청을 받아들여 그의 이름을 부르고서, 이내 그를 용서한다.
실낙원의 구절로 애통해하는 괴물은 죽지 못해 살아가는 모든 이들을 대변한다. 그의 생은 분노와 살인, 무의미로 점철되었고, 잿빛으로 뒤덮여 있었지만, 이내 반짝이고 마는 것은 ‘용서’가 그를 관통했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모든 쇼트가 아름답지만, 가장 빛나는 지점은 여기에 있다.
우리는 누군가를 용서하고 있을까. 나를 용서해 주었을까. 참혹한 세상을, 죄로 가득한 인간을 이미 용서하신 이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용서가 나의 삶에 얼마큼 현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일까. 소통과 사랑, 용서를 전면에 내걸어야 할 교회는 배타성에 복무하고 있으며, 공동체의 울타리를 높게 세우고 있지는 않은가.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괴물의 형상처럼 누덕누덕 기워진, 불완전한 것들이 모여 빛을 낸다면, 그만큼 아름다운 것이 또 있을까. 교회는 불완전한 이들의 모임이어야 한다. 이미 용서받지 못할 존재들을 용서하고 사랑으로 품으신 그리스도의 은혜가 필요한 자들로 가득해야 한다. 실낙원의 문구를 울부짖는 모두가 사실은 용납된 존재임을, 사랑받는 존재임을 깨닫는 곳이 교회여야 한다. 부디 교회 공동체가 소외된 이들이 기꺼이 찾아와 안식을 누릴 수 있는 곳이 되어주기를. 갈 곳을 잃고, 죽지 못해 사는 모든 ‘괴물’들이 안식을 찾아 날아드는 교회가 되어가기를. 교회를 이루는 모든 이들이 시편의 고백을 행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시편 118편 17절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여호와께서 하시는 일을 선포하리로다
김유민 연구원(문화선교연구원, 한양대(대중문화 석사, 국문과 박사과정))
언뜻 희망이 없어 보이는 세상에서
'소망'을 동경(憧憬)하는 사람.
* 2025년 넷플릭스에서 개봉한 영화 <프랑켄슈타인>의 스포일러가 담겨있습니다.
『프랑켄슈타인』 책을 처음 열면 독자를 사로잡는 제사(題辭)다. 저자인 메리 셸리는 실낙원의 한 구절을 첫머리에 배치하여, 『프랑켄슈타인』이 담고 있는 사유의 깊이감을 한눈에 제시했다.
그렇다. 인간은 끊임없이 존재의 이유를 고찰하며 자기 연민에 빠지곤 한다. 그만큼 세상을 살아가는 일이 쉽지 않기 때문일 테다. 참혹한 세계를 살아내는 일은 분명 고되다. 그렇기에 어디론가 책임을 돌려서라도(창조주에게 울부짖는 방식으로라도)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을 타개하고 싶은 간절함은 바꿔 말하면 끈질긴 생의 의지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은 ‘크리처 장인’으로 불린다. 그가 작업한 수많은 영화에서 직접 창조한 피조물의 면면을 보고 있자면 기괴하면서도 처연한 아름다움들이 전해진다. <셰이프 오브 워터 : 사랑의 모양>의 ‘어인’과 <기예르모 델 토로의 피노키오>의 ‘피노키오’를 그려낼 때는 그가 창조해 낸 크리처에 ‘순수성’까지 덧입혀지는데, 이런 방식은 이번 <프랑켄슈타인>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영화 <프랑켄슈타인> 스틸 컷, 빅터와 괴물
창조주 빅터 프랑켄슈타인과 그의 피조물
빅터 프랑켄슈타인이 시체로부터 한 조각씩 직접 기워 만들어낸 괴물은 크리처답게 기괴하지만, 갓 태어난 아이의 모습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완성된 몸을 가지고 있어서인지 ‘마마’나 ‘파파’보다 자신을 만든 창조주의 이름, ‘빅터’를 먼저 성대에 담았다. 그러나 더 이상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이 지점에서 빅터는 조금 모순적인 태도를 보이는데, 몇 주를 참지 못하고 곧장 자신이 창조한 괴물의 폐기를 결정한다. 괴물을 만들어내는데 들어간 시간과 재정을 생각하면, 그리고 빅터의 이름을 부를 때의 그 벅찬 감정을 생각한다면, 이제 막 기능하기 시작하는 괴물의 폐기를 쉽게 결정하지는 못하는 것이 일반적인 사고 과정이다. 그런데 빅터는 신의 영역에 침범했다는 불안감 때문이었을까, 혹은 막상 자신이 창조한 괴물의 형상이 아름답지 않다고 여긴 것이었을까, 이내 급진적인 결정을 내리고 만다.
비극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죽지 않는 몸을 가진 괴물은 자신을 연민하여 스스로 죽을 수도 없었다. 자신을 마주하는 많은 인간들은 놀라서 공격을 해댄다.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벌써 수도 없이 죽었을 테지만, 목숨은 여전히 붙어있다. 그나마 자신을 품어준 사람은 눈이 먼 노인뿐이었다. 그에게 글도 말도 제대로 배웠고, 생의 온기를 느꼈다. 그런데 괴물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노인은 늑대의 습격을 받았고, 괴물이 도착했을 땐 손 쓸 수 없는 상황이었다. 때마침 도착한 노인의 가족들은 그 자리에 있던 괴물을 살인자로 오인한다. 이제 괴물은 갈 곳이 없다. 마음을 붙일 존재도 없다. 결국 괴물은 빅터를 찾아가 자신과 같은 존재를 하나 더 만들어달라고 간청하지만 거절당하고, 그 과정에서 괴물을 유일하게 이해하는 듯싶었던 엘리자베스1)마저 죽고 만다. 이제 괴물은 온전히 혼자가 되었다.
여기까지는 원작과 비슷하게 흘러간다. 이후 빅터와 괴물의 북극 추격전 끝에 죽은 빅터를 안고 완벽하게 혼자가 되는 것이 메리 셸리가 쓴 원작의 내용이다. 그런데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은 여기서 변주를 가미해 자신만의 엔딩을 써 내려간다.
1) 엘리자베스는 빅터의 후원자 하인리히의 조카이며 동생 윌리엄의 약혼녀이다. 실험에 성공하고 엘리자베스와 동생이 빅터를 찾아왔을 때 두 사람 모두 괴물과 만난 적이 있다. 엘리자베스는 괴물에게 ‘빅터’라는 단어 외에 자신의 이름 ‘엘리자베스’를 가르쳤지만, 빅터는 이를 알지 못했다.
영화 <프랑켄슈타인> 스틸 컷, 괴물과 엘리자베스
용서의 힘
빅터 프랑켄슈타인과 괴물은 북극 탐험선에서 조우한다. 괴물의 이야기를 전부 들은 빅터는 자신의 숨을 거두기 전 괴물과 마지막 대화를 나눈다.
그리고서 빅터는 아버지가 준 무의미한 이름을 괴물에게 마지막으로 한 번만 불러달라고 요청한다. 괴물에게 처음 자각이 생기고서 세상의 전부였던, 그 이름을 불렀을 때처럼 말이다. 괴물은 그 요청을 받아들여 그의 이름을 부르고서, 이내 그를 용서한다.
실낙원의 구절로 애통해하는 괴물은 죽지 못해 살아가는 모든 이들을 대변한다. 그의 생은 분노와 살인, 무의미로 점철되었고, 잿빛으로 뒤덮여 있었지만, 이내 반짝이고 마는 것은 ‘용서’가 그를 관통했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모든 쇼트가 아름답지만, 가장 빛나는 지점은 여기에 있다.
우리는 누군가를 용서하고 있을까. 나를 용서해 주었을까. 참혹한 세상을, 죄로 가득한 인간을 이미 용서하신 이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용서가 나의 삶에 얼마큼 현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일까. 소통과 사랑, 용서를 전면에 내걸어야 할 교회는 배타성에 복무하고 있으며, 공동체의 울타리를 높게 세우고 있지는 않은가.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괴물의 형상처럼 누덕누덕 기워진, 불완전한 것들이 모여 빛을 낸다면, 그만큼 아름다운 것이 또 있을까. 교회는 불완전한 이들의 모임이어야 한다. 이미 용서받지 못할 존재들을 용서하고 사랑으로 품으신 그리스도의 은혜가 필요한 자들로 가득해야 한다. 실낙원의 문구를 울부짖는 모두가 사실은 용납된 존재임을, 사랑받는 존재임을 깨닫는 곳이 교회여야 한다. 부디 교회 공동체가 소외된 이들이 기꺼이 찾아와 안식을 누릴 수 있는 곳이 되어주기를. 갈 곳을 잃고, 죽지 못해 사는 모든 ‘괴물’들이 안식을 찾아 날아드는 교회가 되어가기를. 교회를 이루는 모든 이들이 시편의 고백을 행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김유민 연구원(문화선교연구원, 한양대(대중문화 석사, 국문과 박사과정))
언뜻 희망이 없어 보이는 세상에서
'소망'을 동경(憧憬)하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