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은퇴작으로 많은 관심을 모았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개봉 후에 호불호 논란에 휩싸였다. 신카이 마코토(‘스즈메의 문단속’ 감독) 같은 업계인들은 ‘압도적이고 굉장한 작품’이라고 평하기도 했고, 많은 관객들은 ‘난해하다’, ‘아이들은 데려 오면 이해 못 할 거 같다’라는 혹평을 내놓기도 한다.
하지만 필자는 개인적으로 엄청난 작품이라고 느껴졌다. 미야자키 하야오라는 한 시대를 상징하는 감독의 작품세계가 미적으로 아름답게 오롯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한평생을 진지하게 예술의 길을 탐구해 온 한 인간이 정직하게 맞닥뜨리는 영성적 질문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스포일러 포함)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 모순 그 자체인, 인간
미야자키 감독을 상징하는 소년 주인공 ‘마히토’는 돌을 집어 자신의 머리를 자해한다. 피가 철철 흐르고 흉터가 남을 정도의 꽤나 강한 충격이었는데, 사실 이 장면이 나에게도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감독의 전작들에는 항상 소년, 소녀가 등장하는데 그들은 밝고 올바르며 긍정적이다. 자해하는 캐릭터는 상상을 할 수조차 없다.
물론 소년 마히토의 삶은 꽤나 암울하다. 투병 중에 화재로 엄마는 일찍 세상을 떠났다. 아빠는 야속하게도 얼마지 않아 엄마의 여동생을 아내로 맞아들인다. 아빠는 전쟁 당시 군수물자공장을 운영하여 부유한 삶을 일구어냈는데, 아버지 사업을 따라 시골로 전학 온 마히토는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한다.
마히토의 자해는 그 괴롭힘을 당한 날 이루어지는데, 아마도 자신을 괴롭힌 아이들에게 더 큰 죄를 뒤집어 씌움과 동시에 불만투성이였던 가정생활에 대한 비겁한 복수의 방식이 아니었을까 싶다.
영화의 후반부까지 마히토 이마에 난 흉터는 뚜렷하게 함께 한다. 감독은 마히토가 ‘악의’라는 것을 갖고 있는 존재라는 것을 시각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클라이맥스 장면에서 마히토는 그러한 죄책감에 정면으로 부닥친다.
세상을 거의 떠받치고 있는 듯한 영적인 존재인 ‘큰할아버지’는 마히토에게 선한 돌을 주며 ‘악의’ 없는 자유로운 세상을 만들어 달라고 한다. 하지만 마히토는 자신의 흉터를 보여주면서 이 상처는 자신이 만든 악의의 상징이며 자신은 돌을 만질 수 없다면서 원래 세계로 돌아가겠다고 한다.
하지만 이미 옳은 일을 위해 갖은 모험을 하고 성장을 해낸 마히토에게 큰할아버지는 말한다.
‘너만의 탑을 쌓아 가거라. 풍요롭고 평화로우며 아름다운 세계를 만들거라’
그렇다. 마히토는 분명 내면에 ‘악의’를 품었던 존재이기도 하지만, 세상의 평화에 기여할 수 있는 무한한 잠재력을 지닌 희망의 존재이기도 하다. 인간은 그렇게 모순적인 존재이다. 기독교신학적으로 따지면 원죄의 뿌리를 지니고 있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아름다운 존재이다.
감독은 자신의 아버지에게서 인간의 모순성을 보았다고 한다. 어린 나이였지만, ‘왜 전쟁은 나쁜 것인데 그것을 도우면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느냐’고 아버지에게 따진 적이 있다고 한다. 아버지는 아들의 말을 일축해 버렸지만, 나중에 안 사실인데, 그 시절에 전쟁으로 어려운 사정이 있던 이들을 아버지가 많이 도왔다는 것이다.
감독 자신의 삶에도 그러한 모순이 묻어난다. (여전히 논란이 조금 있기는 하지만) 그의 작품들에는 반전(反戰) 메시지가 많이 담겨 있다. 하지만 어린 시절 보았던 아빠의 군수공장에서 제작되던 항공기 부품이(이번 작품에서도 콕피트-비행기 조종석 유리가 집에 쌓여 있는 장면이 나온다) 어린 그의 마음에는 그 기계들을 향한 설렘을 불러일으켰다는 것이다. 그것을 반영하듯 그의 작품에는 하늘을 나는 멋진 기체들이 꼭 등장하며 그것을 배경으로 한 액션씬이 꽤 큰 축을 이룬다. 너무나 모순적인 말이지만, 전쟁을 반대하지만 전투씬은 신난다. (여기서 필자의 어린 날 일화가 생각난다. 6.25 기념 반공포스터 그리기 대회가 있었는데, 선생님이 내 그림을 보고 웃으시며 이렇게 말했다. ‘제목은 “나는 전쟁이 싫어요”인데 낙하산에서 뛰어내리는 군인은 웃고 있네?’ 반공포스터를 그리라니까 제목은 그렇게 지었지만, 초1남자아이에게 비행기낙하장면은 매우 신나는 일이었던 것)
<바람이 분다(2013년도 작)에 나온 비행기장면. 전쟁을 미화한 거 아니냐는 논쟁에 휩싸이기도 했다>
감독은 평생 자문했을지 모른다. ‘나는 전쟁으로 부유해진 가문에서 편하게 자랐다. 전쟁은 분명 악한 것인데... 나의 작품은 위선적인가. 나는 전쟁의 반사이익을 누린 위선자인가’, ‘일본 역시 그러한가’ 마히토의 이마에 난 ‘악의’의 흔적은 평생을 따라다닌 그의 자책을 상징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러한 과거를 부정하거나 변명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되 거기에 매몰되지 않고 평화와 생명을 향해 나아가겠다는 의지가 이 작품에는 담겨 있었다.
타자란 어떤 존재인가 -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친구
이 작품을 맡은 프로듀서이자 감독의 45년 지기 친구인 스즈키 토시오 PD는 인터뷰에서 ‘미야자키 감독이 이번 영화를 만들며 생각한 중요한 주제는, 인간이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친구를 발견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포스터에도 등장하는 ‘왜가리’ 캐릭터는 처음부터 끝까지 마히토의 여정에 함께 한다. 그런데 이 왜가리는 참 묘한 존재이다. 처음에는 매우 상서롭고 큰 능력을 가진 존재인 양 등장하는데, 어느 순간 못생긴 땅딸보 아저씨의 모습으로 바뀐다. 솔직히 따지자면 마히토가 여정을 마치는데 큰 도움을 준 것도 없다. 하지만 분명 그가 없었다면 완주하지 못했을 것이다.
<처음 등장할 때는 상서롭고 고고한 한 마리의 왜가리였던 그가 어느 순간 못생기고 말만 많은 아저씨로 변해있다>
결국 친구란 그런 것이 아닐까. 그리 잘나지 않아도, 따지고 보면 별로 도움 된 것 없는 거 같아도, 늘 옆에 있었던 동료. 그가 있었기에 오늘의 내가 여기 있는 그런 존재.
마히토의 기막힌 여정 중에 도움을 준 이들은 꽤나 많다. 아버지의 저택을 지키는 일곱 할머니 중 한 명인 ‘키리코’는 이 세계(異世界)에서 젊은 여장부로서 나타나 배를 태워 바다를 건너게 해 준다. 결정적으로 여정의 핵심을 함께 한 소녀 ‘히미’는 놀랍게도 일찍 세상을 떠난 엄마였다. 안타깝게도 화재로 세상을 떠났는데, 이 세계에서 그 소녀 엄마는 불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초능력을 가진 매우 쾌활한 아이였다.
마히토가 들어가게 된 이 세계는 삶과 죽음이 혼재해 있는 곳이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곳이다. 마치 양자중첩처럼.(양자의 영역에서는 존재와 비존재가 중첩된 상태로 동시에 존재한다는 법칙. 이를 받아들이기 힘들어한 어떤 이들은 ‘그렇다면 상자 속에 고양이가 살아있으면서 죽어있다는 말이냐?’며 슈뢰딩거의 고양이 패러독스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하지만 우주의 모든 물질은 분명 그렇게 존재와 비존재가 중첩되어 있는 양자로 구성되어 있다.)
그곳은 죽은 자와 산자, 그리고 앞으로 살게 될 자까지 함께 존재하는 의식 저 너머의 공간이다. 거기서 마히토는 젊은 모습의 할머니, 엄마 등을 만나 친구가 되고 함께 모험을 겪어낸 것이다.
우리는 죽으면 어디로 가고 어떤 존재가 되는 것일까? 과학만능주의자, 유물론자들의 말처럼 인간 역시 단백질 기계에 불과하고 죽으면 그냥 모든 것이 끝일까? 80을 넘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도 이런 부분을 생각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그리고 먼저 간 이들에 대한 의미도 점점 커지지 않았을까. 그러한 그리움과 성찰들을 담아 판타지에 녹여내지 않았을까.
여기서 나는 가톨릭에서는 친숙한 개념인 ‘성인의 통공(Communio Sanctorum)’이 떠올랐다. 한국의 개신교에서는 혹시나 우상숭배로 이어질까 싶어 죽은 자들에 대한 의미부여를 극도로 조심하는 편이다. 하지만 가톨릭에서는 성도의 교제의 범위를 죽은 자들에게까지 넓힌다. 거의 모든 날들이 저마다 주관하는 ‘성인’(Saint)이 있으며 그들을 통해 기도한다. 개신교의 시선에서는 ‘왜 죽은 자들에게 그렇게 기도를 하나, 일개 사람일 뿐인데’라며 의아해할 수 있으나, 죽은 자들 역시 하나님 안에 한 가족이며 과거의 사람들과도 성도의 교제를 이어간다는 시각으로 보면 새로운 관점이 열릴 수 있다.
이 작품에 나타난 이 세계는 바로 그러한 곳이다. 거기서는 나의 엄마도 어떤 면에선 동등한 존재이다. 소년과 소녀로 만나 서로 웃으며 말할 수 있고 함께 뛰어놀 수 있고 포옹할 수 있다.
<그곳에서는 소녀인 엄마와 소년 마히토는 손을 잡고 모험을 함께 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마히토의 엄마(소녀의 모습을 한) 히미가 자신의 시간대로 통하는 문을 열며,
“너를 낳으러 갈 거야, 불에 타더라도”
라고 외치는 모습은 정말 특별한 감동을 주었다.
감독이 말하는 ‘친구’는 단지 좁은 의미의 ‘또래’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시대를 뛰어넘어, 심지어 생과 사를 넘어, 과거와 현재를 이으며 존재와 존재가 서로 연결되고 서로를 보듬으며 한 발씩 나아갈 수 있다는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재미있는 포인트는 미야자키 감독이 실제로 자신의 인생 친구들을 이 작품의 캐릭터로 녹여내었다는 사실이다. 극 중 지혜로운 설계자였던 큰할아버지는 감독을 애니메이션업계로 이끌었던 멘토이자 동료였던 '타카타하 이사오'를 모델로 하고 있다. 왜가리는 수십 년 지기 PD '스즈키 토시오'라고 직접 말한 바 있고, 키리코 할머니 역시 수십 년을 함께 한 채색 감독이라는 말이 있다. 감독은 자신의 작품세계에 함께 한 진짜 친구들을 이 판타지 세계에 녹여낸 것이다. 마히토가 그 친구들의 도움으로 여정을 잘 마무리했듯이, 그 역시 친구를 만났기에 그 모든 일들을 해낼 수 있었다는 고백처럼.
<2013년 타계한 일본 애니메이션의 거장 타카타하 이사오(폼포코 너구리 대작전, 추억은 방울방울 등). 미야자키 감독과는 특별한 인연이었다>
<타카타하 이사오를 모티브로 한 큰할아버지. 지혜로운 현자이자 이 모든 것을 시작한 조상으로서 존재>
그럼 우리는 이제 친구들과 무엇을 할 것인가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감독은 후계자문제로 꽤 오래 고심해 왔다. 아들도 시도해 봤고 다른 후계자에게도 작품을 맡겨 봤으나 미야자키를 대신할 사람은 누구도 없었다. 그래서 은퇴를 몇 번이나 번복한 후, 이번에는 ‘진짜’ 마지막이라며 이 작품을 내놓게 되었다.
작품의 결말에서는 이러한 감독의 걱정스러운 마음에 이제 나름의 평화가 찾아왔다는 걸 보여준다. 선의로 가득 찬 13개의 돌을 발견하여 잘 세움으로써 세계의 균형을 유지해 온 큰할아버지. 13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총작품수를 상징한다. 큰할아버지는 마히토에게 ‘이제는 너의 차례’라고 말한다. 마히토는 여전히 자신이 없지만 큰할아버지는 ‘무엇이 되었든 너만의 작품을 만들어 보라’고 말한다. 원래 마히토는 감독의 분신이지만, 이 장면에서 감독은 큰할아버지의 위치가 된다. 그리고 후대의 사람들에게 자신의 13 작품과 같은 ‘세상의 균형을 세워 줄 돌’을 만들어 보라고 말한다. 너희들만의 방식으로.
큰할아버지는 마히토에게 "자신의 세계가 끝나간다"며 이런 메시지를 남긴다.
"너만의 탑을 쌓아 가거라. 풍요롭고 평화로우며 아름다운 세계를 만들거라."
이제 선택은 마히토가 대표하는 다음 세대에게 달렸다. 앵무새들 무리처럼 타인을 잡아먹고 아무런 성찰 없이 전체주의적으로 끌려 다니는 존재로 살아갈 것인가. 또는 자신도 어쩔 수 없게 되어 버렸다며 힘없는 생명을 잡아먹는 펠리컨 무리 같이 고인 물로 근근이 살아갈 것인가.
나아가며
앞서 언급한 대로 호불호가 갈릴 수 있는 영화이다. 줄거리가 선형적으로 전개되지 않고 이미지에 중심을 두고 비선형적으로, 또 카오스적으로 산재해 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중간에 잠깐 졸았다. 그럼에도 영화가 끝나고 나서는 감동에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이렇게 모순된 존재라니) 하지만 이 영화의 성격을 말해주는 것도 같다. 중간에 잠깐 졸아도 작품전체가 압도적으로 전해주는 이미지와 깊은 성찰들을 감지하는 데는 문제가 없다. 그만큼 직관적으로 받아들이는 일장춘몽, 나비의 꿈같은 판타지 작품이라는 말이다.
재미있는 것은 미야자키 감독 자신도 이 작품에 대해 ‘아직 내가 모르는 부분이 많다’고 말했다는 사실이다. 혹자는 이 영화가 설교 같다고 말했다는데, 분명 정제된 답으로 결론을 제공하는 쪽은 아니다. 오히려 감독이 평생을 걸쳐 몸소 경험한 영성적 질문들을 성찰해 보는 쪽에 가깝다. ‘인간은 악한 존재인가’, ‘타자(他者)의 의미는 무엇인가’, ‘앞서간 세대와 연결된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삶과 죽음, 과거와 현재는 어떻게 이어지는가’, ‘왜 세상에는 악한 다수가 만연한가’ ‘그럼에도 평화와 아름다움을 희망할 수 있는가’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바로 이 영화에 가장 잘 맞는 제목이며, 오늘 우리에게 적실한 질문이다.
글쓴이 이재윤 / 블로그 <창조와 연대 Creation & Solidarity>
성신여대 앞 '나니아의 옷장'(옷장 문을 열면 새로운 세계를 만난다!)이라는
작은 문화공간을 운영하며, 같은 장소의 '주님의 숲 교회' 목사로 살아가고 있다.
Art, Tech, Sprituality 세 개의 키워드로 다양한 활동을 해오고 있다.
최근에는 노년을 대비한 취미로 전자음악 만드는 일에 푹 빠져 있다.
최근에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은퇴작으로 많은 관심을 모았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개봉 후에 호불호 논란에 휩싸였다. 신카이 마코토(‘스즈메의 문단속’ 감독) 같은 업계인들은 ‘압도적이고 굉장한 작품’이라고 평하기도 했고, 많은 관객들은 ‘난해하다’, ‘아이들은 데려 오면 이해 못 할 거 같다’라는 혹평을 내놓기도 한다.
하지만 필자는 개인적으로 엄청난 작품이라고 느껴졌다. 미야자키 하야오라는 한 시대를 상징하는 감독의 작품세계가 미적으로 아름답게 오롯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한평생을 진지하게 예술의 길을 탐구해 온 한 인간이 정직하게 맞닥뜨리는 영성적 질문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스포일러 포함)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 모순 그 자체인, 인간
미야자키 감독을 상징하는 소년 주인공 ‘마히토’는 돌을 집어 자신의 머리를 자해한다. 피가 철철 흐르고 흉터가 남을 정도의 꽤나 강한 충격이었는데, 사실 이 장면이 나에게도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감독의 전작들에는 항상 소년, 소녀가 등장하는데 그들은 밝고 올바르며 긍정적이다. 자해하는 캐릭터는 상상을 할 수조차 없다.
물론 소년 마히토의 삶은 꽤나 암울하다. 투병 중에 화재로 엄마는 일찍 세상을 떠났다. 아빠는 야속하게도 얼마지 않아 엄마의 여동생을 아내로 맞아들인다. 아빠는 전쟁 당시 군수물자공장을 운영하여 부유한 삶을 일구어냈는데, 아버지 사업을 따라 시골로 전학 온 마히토는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한다.
마히토의 자해는 그 괴롭힘을 당한 날 이루어지는데, 아마도 자신을 괴롭힌 아이들에게 더 큰 죄를 뒤집어 씌움과 동시에 불만투성이였던 가정생활에 대한 비겁한 복수의 방식이 아니었을까 싶다.
영화의 후반부까지 마히토 이마에 난 흉터는 뚜렷하게 함께 한다. 감독은 마히토가 ‘악의’라는 것을 갖고 있는 존재라는 것을 시각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클라이맥스 장면에서 마히토는 그러한 죄책감에 정면으로 부닥친다.
세상을 거의 떠받치고 있는 듯한 영적인 존재인 ‘큰할아버지’는 마히토에게 선한 돌을 주며 ‘악의’ 없는 자유로운 세상을 만들어 달라고 한다. 하지만 마히토는 자신의 흉터를 보여주면서 이 상처는 자신이 만든 악의의 상징이며 자신은 돌을 만질 수 없다면서 원래 세계로 돌아가겠다고 한다.
하지만 이미 옳은 일을 위해 갖은 모험을 하고 성장을 해낸 마히토에게 큰할아버지는 말한다.
그렇다. 마히토는 분명 내면에 ‘악의’를 품었던 존재이기도 하지만, 세상의 평화에 기여할 수 있는 무한한 잠재력을 지닌 희망의 존재이기도 하다. 인간은 그렇게 모순적인 존재이다. 기독교신학적으로 따지면 원죄의 뿌리를 지니고 있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아름다운 존재이다.
감독은 자신의 아버지에게서 인간의 모순성을 보았다고 한다. 어린 나이였지만, ‘왜 전쟁은 나쁜 것인데 그것을 도우면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느냐’고 아버지에게 따진 적이 있다고 한다. 아버지는 아들의 말을 일축해 버렸지만, 나중에 안 사실인데, 그 시절에 전쟁으로 어려운 사정이 있던 이들을 아버지가 많이 도왔다는 것이다.
감독 자신의 삶에도 그러한 모순이 묻어난다. (여전히 논란이 조금 있기는 하지만) 그의 작품들에는 반전(反戰) 메시지가 많이 담겨 있다. 하지만 어린 시절 보았던 아빠의 군수공장에서 제작되던 항공기 부품이(이번 작품에서도 콕피트-비행기 조종석 유리가 집에 쌓여 있는 장면이 나온다) 어린 그의 마음에는 그 기계들을 향한 설렘을 불러일으켰다는 것이다. 그것을 반영하듯 그의 작품에는 하늘을 나는 멋진 기체들이 꼭 등장하며 그것을 배경으로 한 액션씬이 꽤 큰 축을 이룬다. 너무나 모순적인 말이지만, 전쟁을 반대하지만 전투씬은 신난다. (여기서 필자의 어린 날 일화가 생각난다. 6.25 기념 반공포스터 그리기 대회가 있었는데, 선생님이 내 그림을 보고 웃으시며 이렇게 말했다. ‘제목은 “나는 전쟁이 싫어요”인데 낙하산에서 뛰어내리는 군인은 웃고 있네?’ 반공포스터를 그리라니까 제목은 그렇게 지었지만, 초1남자아이에게 비행기낙하장면은 매우 신나는 일이었던 것)
<바람이 분다(2013년도 작)에 나온 비행기장면. 전쟁을 미화한 거 아니냐는 논쟁에 휩싸이기도 했다>
감독은 평생 자문했을지 모른다. ‘나는 전쟁으로 부유해진 가문에서 편하게 자랐다. 전쟁은 분명 악한 것인데... 나의 작품은 위선적인가. 나는 전쟁의 반사이익을 누린 위선자인가’, ‘일본 역시 그러한가’ 마히토의 이마에 난 ‘악의’의 흔적은 평생을 따라다닌 그의 자책을 상징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러한 과거를 부정하거나 변명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되 거기에 매몰되지 않고 평화와 생명을 향해 나아가겠다는 의지가 이 작품에는 담겨 있었다.
타자란 어떤 존재인가 -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친구
이 작품을 맡은 프로듀서이자 감독의 45년 지기 친구인 스즈키 토시오 PD는 인터뷰에서 ‘미야자키 감독이 이번 영화를 만들며 생각한 중요한 주제는, 인간이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친구를 발견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포스터에도 등장하는 ‘왜가리’ 캐릭터는 처음부터 끝까지 마히토의 여정에 함께 한다. 그런데 이 왜가리는 참 묘한 존재이다. 처음에는 매우 상서롭고 큰 능력을 가진 존재인 양 등장하는데, 어느 순간 못생긴 땅딸보 아저씨의 모습으로 바뀐다. 솔직히 따지자면 마히토가 여정을 마치는데 큰 도움을 준 것도 없다. 하지만 분명 그가 없었다면 완주하지 못했을 것이다.
<처음 등장할 때는 상서롭고 고고한 한 마리의 왜가리였던 그가 어느 순간 못생기고 말만 많은 아저씨로 변해있다>
결국 친구란 그런 것이 아닐까. 그리 잘나지 않아도, 따지고 보면 별로 도움 된 것 없는 거 같아도, 늘 옆에 있었던 동료. 그가 있었기에 오늘의 내가 여기 있는 그런 존재.
마히토의 기막힌 여정 중에 도움을 준 이들은 꽤나 많다. 아버지의 저택을 지키는 일곱 할머니 중 한 명인 ‘키리코’는 이 세계(異世界)에서 젊은 여장부로서 나타나 배를 태워 바다를 건너게 해 준다. 결정적으로 여정의 핵심을 함께 한 소녀 ‘히미’는 놀랍게도 일찍 세상을 떠난 엄마였다. 안타깝게도 화재로 세상을 떠났는데, 이 세계에서 그 소녀 엄마는 불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초능력을 가진 매우 쾌활한 아이였다.
마히토가 들어가게 된 이 세계는 삶과 죽음이 혼재해 있는 곳이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곳이다. 마치 양자중첩처럼.(양자의 영역에서는 존재와 비존재가 중첩된 상태로 동시에 존재한다는 법칙. 이를 받아들이기 힘들어한 어떤 이들은 ‘그렇다면 상자 속에 고양이가 살아있으면서 죽어있다는 말이냐?’며 슈뢰딩거의 고양이 패러독스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하지만 우주의 모든 물질은 분명 그렇게 존재와 비존재가 중첩되어 있는 양자로 구성되어 있다.)
그곳은 죽은 자와 산자, 그리고 앞으로 살게 될 자까지 함께 존재하는 의식 저 너머의 공간이다. 거기서 마히토는 젊은 모습의 할머니, 엄마 등을 만나 친구가 되고 함께 모험을 겪어낸 것이다.
우리는 죽으면 어디로 가고 어떤 존재가 되는 것일까? 과학만능주의자, 유물론자들의 말처럼 인간 역시 단백질 기계에 불과하고 죽으면 그냥 모든 것이 끝일까? 80을 넘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도 이런 부분을 생각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그리고 먼저 간 이들에 대한 의미도 점점 커지지 않았을까. 그러한 그리움과 성찰들을 담아 판타지에 녹여내지 않았을까.
여기서 나는 가톨릭에서는 친숙한 개념인 ‘성인의 통공(Communio Sanctorum)’이 떠올랐다. 한국의 개신교에서는 혹시나 우상숭배로 이어질까 싶어 죽은 자들에 대한 의미부여를 극도로 조심하는 편이다. 하지만 가톨릭에서는 성도의 교제의 범위를 죽은 자들에게까지 넓힌다. 거의 모든 날들이 저마다 주관하는 ‘성인’(Saint)이 있으며 그들을 통해 기도한다. 개신교의 시선에서는 ‘왜 죽은 자들에게 그렇게 기도를 하나, 일개 사람일 뿐인데’라며 의아해할 수 있으나, 죽은 자들 역시 하나님 안에 한 가족이며 과거의 사람들과도 성도의 교제를 이어간다는 시각으로 보면 새로운 관점이 열릴 수 있다.
이 작품에 나타난 이 세계는 바로 그러한 곳이다. 거기서는 나의 엄마도 어떤 면에선 동등한 존재이다. 소년과 소녀로 만나 서로 웃으며 말할 수 있고 함께 뛰어놀 수 있고 포옹할 수 있다.
<그곳에서는 소녀인 엄마와 소년 마히토는 손을 잡고 모험을 함께 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마히토의 엄마(소녀의 모습을 한) 히미가 자신의 시간대로 통하는 문을 열며,
라고 외치는 모습은 정말 특별한 감동을 주었다.
감독이 말하는 ‘친구’는 단지 좁은 의미의 ‘또래’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시대를 뛰어넘어, 심지어 생과 사를 넘어, 과거와 현재를 이으며 존재와 존재가 서로 연결되고 서로를 보듬으며 한 발씩 나아갈 수 있다는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재미있는 포인트는 미야자키 감독이 실제로 자신의 인생 친구들을 이 작품의 캐릭터로 녹여내었다는 사실이다. 극 중 지혜로운 설계자였던 큰할아버지는 감독을 애니메이션업계로 이끌었던 멘토이자 동료였던 '타카타하 이사오'를 모델로 하고 있다. 왜가리는 수십 년 지기 PD '스즈키 토시오'라고 직접 말한 바 있고, 키리코 할머니 역시 수십 년을 함께 한 채색 감독이라는 말이 있다. 감독은 자신의 작품세계에 함께 한 진짜 친구들을 이 판타지 세계에 녹여낸 것이다. 마히토가 그 친구들의 도움으로 여정을 잘 마무리했듯이, 그 역시 친구를 만났기에 그 모든 일들을 해낼 수 있었다는 고백처럼.
<2013년 타계한 일본 애니메이션의 거장 타카타하 이사오(폼포코 너구리 대작전, 추억은 방울방울 등). 미야자키 감독과는 특별한 인연이었다>
<타카타하 이사오를 모티브로 한 큰할아버지. 지혜로운 현자이자 이 모든 것을 시작한 조상으로서 존재>
그럼 우리는 이제 친구들과 무엇을 할 것인가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감독은 후계자문제로 꽤 오래 고심해 왔다. 아들도 시도해 봤고 다른 후계자에게도 작품을 맡겨 봤으나 미야자키를 대신할 사람은 누구도 없었다. 그래서 은퇴를 몇 번이나 번복한 후, 이번에는 ‘진짜’ 마지막이라며 이 작품을 내놓게 되었다.
작품의 결말에서는 이러한 감독의 걱정스러운 마음에 이제 나름의 평화가 찾아왔다는 걸 보여준다. 선의로 가득 찬 13개의 돌을 발견하여 잘 세움으로써 세계의 균형을 유지해 온 큰할아버지. 13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총작품수를 상징한다. 큰할아버지는 마히토에게 ‘이제는 너의 차례’라고 말한다. 마히토는 여전히 자신이 없지만 큰할아버지는 ‘무엇이 되었든 너만의 작품을 만들어 보라’고 말한다. 원래 마히토는 감독의 분신이지만, 이 장면에서 감독은 큰할아버지의 위치가 된다. 그리고 후대의 사람들에게 자신의 13 작품과 같은 ‘세상의 균형을 세워 줄 돌’을 만들어 보라고 말한다. 너희들만의 방식으로.
큰할아버지는 마히토에게 "자신의 세계가 끝나간다"며 이런 메시지를 남긴다.
이제 선택은 마히토가 대표하는 다음 세대에게 달렸다. 앵무새들 무리처럼 타인을 잡아먹고 아무런 성찰 없이 전체주의적으로 끌려 다니는 존재로 살아갈 것인가. 또는 자신도 어쩔 수 없게 되어 버렸다며 힘없는 생명을 잡아먹는 펠리컨 무리 같이 고인 물로 근근이 살아갈 것인가.
나아가며
앞서 언급한 대로 호불호가 갈릴 수 있는 영화이다. 줄거리가 선형적으로 전개되지 않고 이미지에 중심을 두고 비선형적으로, 또 카오스적으로 산재해 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중간에 잠깐 졸았다. 그럼에도 영화가 끝나고 나서는 감동에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이렇게 모순된 존재라니) 하지만 이 영화의 성격을 말해주는 것도 같다. 중간에 잠깐 졸아도 작품전체가 압도적으로 전해주는 이미지와 깊은 성찰들을 감지하는 데는 문제가 없다. 그만큼 직관적으로 받아들이는 일장춘몽, 나비의 꿈같은 판타지 작품이라는 말이다.
재미있는 것은 미야자키 감독 자신도 이 작품에 대해 ‘아직 내가 모르는 부분이 많다’고 말했다는 사실이다. 혹자는 이 영화가 설교 같다고 말했다는데, 분명 정제된 답으로 결론을 제공하는 쪽은 아니다. 오히려 감독이 평생을 걸쳐 몸소 경험한 영성적 질문들을 성찰해 보는 쪽에 가깝다. ‘인간은 악한 존재인가’, ‘타자(他者)의 의미는 무엇인가’, ‘앞서간 세대와 연결된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삶과 죽음, 과거와 현재는 어떻게 이어지는가’, ‘왜 세상에는 악한 다수가 만연한가’ ‘그럼에도 평화와 아름다움을 희망할 수 있는가’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바로 이 영화에 가장 잘 맞는 제목이며, 오늘 우리에게 적실한 질문이다.
글쓴이 이재윤 / 블로그 <창조와 연대 Creation & Solidarity>
성신여대 앞 '나니아의 옷장'(옷장 문을 열면 새로운 세계를 만난다!)이라는
작은 문화공간을 운영하며, 같은 장소의 '주님의 숲 교회' 목사로 살아가고 있다.
Art, Tech, Sprituality 세 개의 키워드로 다양한 활동을 해오고 있다.
최근에는 노년을 대비한 취미로 전자음악 만드는 일에 푹 빠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