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인의 문화 읽기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 - 무지개 너머엔, 더 나은 세상이 있는 걸까?

2025-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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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탠저린>, <아노라> 등을 감독한 션 베이커의 2018년 작 <플로리다 프로젝트>가 지난 5월 재개봉했다. 파스텔 톤의 아름다운 화면과, 처연한 실존 사이의 간극을 다룬 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 재개봉을 맞이하여, 그저 그런 개봉기보다는 좀 더 깊이 있게 이 영화를 톺아보고자 한다.

* <플로리다 프로젝트>는 현재 필름포럼에서 상영 중입니다.



1. 플로리다 프로젝트

일단, ‘플로리다 프로젝트’는 어떤 프로젝트인가. 거기서부터 시작해야겠다. ‘플로리다 프로젝트’는 디즈니가 1965년, 디즈니의 테마파크를 건설하기 위해서 플로리다 주 올랜도 일대의 부동산 매입 계획을 칭하는 말이었다. 그리고 이를 겨냥하여 화려한 외관의 모텔들이 세워진다. 캘리포니아의 디즈니랜드 주변이 지저분한 싸구려 모텔과 어지러운 광고판으로 뒤덮였던 것과는 다르게 예쁘고 아기자기한 형태의 관광객을 위한 숙박 시설들이 들어선다. 

한편,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플로리다 주는 지역 홈리스들에게 보조금을 지원하는 정책을 펼친다. 이 정책 또한 ‘플로리다 프로젝트’라고 불리는데, 도시 전체가 디즈니피케이션화 되어버린 올랜도 일대에는 보조금을 지원 받는 홈리스가 살 곳이라곤 테마파크에 발맞추어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모텔촌이 전부다. 2017년 개봉한 션 베이커 감독의 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는 이러한 빈곤으로부터 출발한다.


2. 디즈니랜드와 매직 캐슬, 그 안의 아이들

 영화 처음에 등장하는 아이들이 사는 곳은 ‘매직 캐슬’이다. 이웃 모텔에는 ‘퓨처 랜드’라는 간판이 세워져 있다. 아이들은 꿈같은 이름, 지독한 현실의 괴리와 모순 사이에서 살아간다. 영화의 프레임은 이를 극적인 형태로 담아내며 부각시킨다. 

대표적으로는 공간과 인물의 크기 대비가 있다. 테마파크 주변에는 동화 같은 형태의 가게들이 큼직하게 들어서 있다. 아이들을 위한 동화의 나라를 구축하기 위해 많은 자본을 들여서 디즈니랜드가 구축한 건물들이다. 정작 이런 동화적인 건축물들 사이를 활보하는 아이들은 디즈니랜드가 의도하지 않았을 삶을 살아가고 있다. 카메라는 아이스크림 가게, 기념품 가게를 지나는 아이들을 롱쇼트와 익스트림 롱쇼트 사이의 구도로 잡아낸다. 정지해 있는 카메라가 큰 캐릭터로 조형된 건물을 풀샷으로 잡고 있으면 조그마한 아이들이 그 앞을 지나가는 방식이다. 아이들이 지나갈 때마다 쇼트가 바뀌긴 하지만, 아이들을 직접 따라다니지는 않는다. 이 같은 구도적 대비를 통해 부와 빈을 응시한다. 

색채도 비슷한 형태로 활용된다. 아이들이 살고 있는 ‘매직 캐슬’은 보라색 파스텔톤으로 칠해져 있다. 이 영화의 인트로는 매직 캐슬의 보라색 외벽 앞에 앉아 있는 두 명의 아이를 비추며 시작한다. 동화적 공간에 앉아 있는 것 같은 아이들은 어딘가 꼬질꼬질하다. 땀에 절어 변색된 속옷 상의, 빨지 않아 얼룩진 셔츠, 감지 않아 떡진 머리를 한 아이들은 이웃 모텔인 ‘퓨쳐 랜드’에 새 차가 들어왔다는 소식에 신나서 달려 나가고, 남겨진 보라색 벽을 그대로 비춘 채, 신나는 음악과 함께 영화의 타이틀이 올라간다. 타이틀과 크레딧의 폰트는 어딘가 고상하고 동화적인 느낌이 가득하다. ‘마법의 성’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한 모텔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을 쨍한 색감 속에 꾀죄죄하게 등장시킴으로써 앞으로 이 영화가 어떤 내용을 보여줄 것인가 짐작하게 한다.

계속 이어지는 오프닝 시퀀스에서 마냥 귀여울 것 같은 이 아이들이 어떤 존재인지 명확하게 각인시킨다. 아이들은 이웃 모텔인 ‘퓨쳐 랜드’에 세워진 새 차 보닛과 앞 유리에 침을 뱉는다. 유리창과 보닛을 점수판쯤으로 생각하고 아이들이 할 수 있는 ‘놀이’를 하고 있다. 남의 차에 침을 뱉는 비윤리적 행위와 일면 순수한 ‘놀이’ 사이의 극명한 모순이 대비를 이룬다. 이윽고 차의 주인이 나와서 이 행위를 꾸짖자 아이들은 상스러운 욕설을 내뱉는다. 디즈니가 만든 영화라면 결코 담기지 않을 단어들이지만, 디즈니랜드 근처 ‘매직 캐슬’에 사는 이 아이들은 여과 없이 어른을 향해 거친 욕을 뱉어낸다. 관리실에 들어가 매직 캐슬 모텔의 전원을 내리는 일도 윤리와 비윤리를 떠나 아이들에게는 단지 놀이일 뿐이다.  


3. 해일리와 무니

브루클린 프린스가 연기를 맡은 여섯 살짜리 아이 무니와 친구들은 시종일관 순수하고 해맑다. 동시에 남의 차에 침을 뱉고 욕도 하며, 심지어는 아무도 살지 않는 콘도에 불을 지르기도 하는 고약한 친구들이기도 하다. 아이들의 이 같은 극단적 모습은 부모의 양육으로부터 많은 부분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무니의 순수하고도 이악스러운 행태는 미혼모인 해일리의 그것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해일리는 고작 여섯 살밖에 되지 않은 무니를 방임한다. 부모로서 아이를 감당하려면 돈이 필요하지만, 해일리는 돈을 버는 일에 관심이 없어 보인다. 주에 30시간 정도는 정식 노동을 감당해야 보조금이 나오는데, 해일리는 아무도 자신을 써주지 않는다는 불평을 늘어놓는다. 해일리의 친구 애쉴리가 식당에서 일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사실 해일리는 그저 자기 마음대로 살고자 하는 욕망에 충실할 따름이다. 무니가 보는 앞에서 보조금을 지급하는 공무원에게 욕설을 섞은 불평을 내뱉는 모습이나, 일하러 간 애쉴리의 아이 스쿠티까지 맡아서 돌보는 와중에도 아이들을 통제하지 못해 관리실 전원을 차단하게 내버려 두는 모습들은 해일리가 얼마나 무책임한 인물인지 여과 없이 보여준다. 

해일리의 양육의 형태는 이런 무책임한 선에서 그치지 않는다. 당장 집세를 내기 위해서 몸을 파는 선택을 한다. 해일리는 무니에게 자신이 속옷만 걸친 사진을 촬영하게 하는데, 마치 놀이처럼 이루어진 이 행동은 사실 몸을 파는 사이트에 자신을 전시하기 위함이다. 이후 해일리는 종종 무니를 화장실에 두고서 목욕이라는 명목하에 혼자 놀게 둔다. 무니는 욕실에서 혼자 다 놀고 나면 해일리는 어디서 났는지 모를 집세를 내고, 아이에게 맛있는 것을 사주기도 한다. 후에 매매 사실을 무니에게 들키기까지 하는데(눈치를 챘는지와는 별개로), 사실상 해일리는 방임의 수준을 넘어선 학대의 형태로 무니를 키우고 있다고 할 수 있다.



4. 복지정책의 맹점과 본질적 사랑에 대한 고민

그런데 해일리와 무니의 결코 건강해보이지 않는 이 관계에서 관객들의 마음을 무너뜨리는 지점은 따로 있다. 누군가의 신고로 해일리를 무니에게서 떨어뜨리려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미혼모인 해일리가 아이를 키울 자격이 안 된다며 무니를 해일리로부터 격리시키려 한다. 비탄스러운 것은 무니와 해일리 사이에 이미 끈끈한 사랑의 연대가 형성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일단 무니는 분명 엄마인 해일리를 사랑한다. 아버지 없이 오직 해일리에게서만 모든 애착을 형성해 온 무니는 자신의 비윤리적인 행위들을 꾸짖지 않고 품어준 엄마가 사랑스럽지 않을 리 없다. 과연 해일리는 무니를 위해 최선을 다했는가 묻는다면 의문스러운 지점이 많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무니를 자신의 삶에서 내보낸 적이 없다. 집세가 밀리고 아이가 사고를 쳐도 해일리에겐 역시 가족이라고는 무니뿐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서로 간에 애착이 형성된 두 사람을 떼어놓으려는 장면에서 복지 정책의 맹점이 발견된다.

간과해서는 안되는 사실 중 하나는 해일리 또한 방치된 아이가 자란 청소년쯤 되는 여성이라는 사실이다. 해일리가 불같은 사랑을 했든, 몸을 팔았든 간에 어떤 식으로든 태어난 아이의 아버지는 이 영화에서 눈 씻고 찾아봐도 발견할 수 없다. 사회적으로 충분한 보호를 받으며 윤리와 책임을 배웠어야 할 시기에 그러지 못했고, 그 와중에 영화에는 등장하지 않는 신원미상의 남성과 맺은 관계로 인해 져야할 책임과 의무가 그녀에게 지워졌다. 그런데 사회는 그런 그녀에게 책임을 묻는다. 보편적인 상황이라면 당연히 해일리를 비난하겠지만, 션 베이커 감독은 관객에게 이를 허용하지 않는다. 해일리와 무니의 애착 관계 정면으로 비춤으로써 다시금 관객에게 질문한다. “진짜 ‘사랑’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5. 바비, 부끄럼

바비는 이 영화가 응시하고자 하는 방향을 어느 정도 대변한다. 이 캐릭터는 기본적으로 선량하다. 이 영화를 보는 보편 다수의 관객이 그렇듯 해일리와 무니를 측은히 여긴다. 그런데 어떤 부분에서는 그들의 빈곤을 안타까워하고 어떤 면에서는 그들에게 애정을 갖는 듯하기도 하지만,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의 책임은 다해야만 한다. 예를 들어 해일리에게서 집세를 꼬박꼬박 받아내고 더위에 지친 무니를 아이스크림 좀 흘렸다고 밖으로 쫓아내는 고약한 관리인이기도 한 것이다. 

바비가 관리인의 위치에서 해일리와 무니를 바라보게 설정한 것은 함부로 그들을 동정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들만큼은 아니지만 역시 낡은 모텔을 관리하는 관리인으로서 재정도 넉넉하지 못하고, 그렇다고 해일리와 무니보다 더 건강한 가정을 꾸려가고 있는 것도 아니다. 계속 관찰자처럼 비춰지는 바비가 자신의 아들과 냉장고를 나르는 장면을 보면 그의 가정 또한 결코 순탄치 않음을 알 수 있다. 바비는 자신의 아내와 관계가 좋지 못하다. 아들은 먼 길을 달려와 잔업을 도와 돈을 받는다는 핑계로 둘 사이를 회복시키기 위해 노력하지만, 바비는 아내와 관계를 회복할 마음이 전혀 없다. 아들은 이런 바비의 모습에 실망하고 더 이상 바비를 찾아오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계속 관찰자로서 관객에게 동화되어 그 시선을 쫓게 했던 바비의 이 같은 현실적인 모습은 혹여 분별없이 동정할 관객의 모습을 돌아보게 하기 위함일 것이다. 이 영화에서 거의 유일하게 바비만이 인지도 높은 배우인 ‘윌렘 대포’가 그 역할을 맡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결국 바비는 무기력하게 해일리와 무니 가정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해일리와 무니를 떼어놓으려는 장면에서도 바비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무니가 겁에 질려 자신을 엄마와 분리시키려는 이들로부터 도망칠 때에도 바비는 그저 바라만 보고 있다. 바비의 무기력함은 고스란히 관객에게도 전달된다. 우리 또한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청소년인 해일리를 어떻게 하면 어엿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성장시킬 수 있을지, 무니를 위한 최선의 선택은 무엇일지 도무지 알 수 없다. 보편 다수의 관객은 그들을 동정할 선량함을 가지고 있지만, 과연 우리에게는 그들을 지킬 만한 해결책이 있을까. 바비처럼 나의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며 나의 세상을 감당하기도 버거워하는 와중에 나는 저들을 애초에 똑바로 바라보려 했을까. 

바비라는 캐릭터와 영화의 프레임은 종국에 이르러 관객에게 ‘부끄럼’을 선사한다. 이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들은 대부분 사회적 빈곤의 멍에를 짊어진 동시에 그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션 베이커 감독은 이 영화를 현재의 참담한 시대 광경을 비추는 거울로 삼는다. 현재 미국 사회가 어떤 모습인지, 그 안에서 발버둥 치는 빈곤의 모습은 어떤지를 선명하게 보여주기 위해 애쓴다. 그리고 관객은 이런 감독의 노력을 통해 세상을 응시하며 자신과 상황을 반추하여 미움, 가엾음, 그리움의 감정적 변화를 직면함으로써 이 영화에서 세상의 참혹함을 마주하고 세상을 향한 분노와 그들을 향한 동정, 더 나은 세상을 향한 그리움의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무니와 해일리가 보여주는 사랑은 우리의 그것을 자극한다. 이제 관객은 이때껏 해일리에게 향했던 속상함과 분노를 사회로 향할 수 있는 밑바탕을 마련했다. 바비로부터 비롯된 부끄럼과 해일리 모녀를 향한 연민을 승화시킬 일이 남아있다.



6. 무지개 너머의 결말, 남겨진 부끄러움.

영화 초반에 카메라는 계속 아이들을 거대한 세계 속 작은 형태로 찍었다. 아름답고 동화적인 나라에서 그저 지나가는 행인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그러나 마지막 장면에 다다르면 이제 화려한 건물이나 아름다운 풍경에는 관심이 없고, 오롯이 아이들에게 집중하기 시작한다. 무니는 엄마와 자신을 분리시키려는 사람들로부터 도망쳐 퓨쳐 랜드 모텔에 머물고 있는 친구 젠시에게 달려간다. 젠시는 슬피 우는 무니의 손을 붙들고 도망간다. 카메라는 아이들을 쫓아 디즈니랜드로 들어가게 되는데, 이때 프레임은 오롯이 뛰는 아이들을 담아낸다. 주변의 화려한 놀이기구와 건물들은 더 이상 카메라의 관심사가 아니다. 이는 일면 폭력적인 현실로부터 벗어나는 아이들을 그 공간의 주인처럼 전환하고자 한 감독의 의도라고 할 수 있다. 디즈니랜드가 어떤 공간인가. 꿈과 환상이 넘쳐나는 아이들의 이상향이다. 동시에 거대 자본으로 이루어졌으며 무니와 젠시 같은 빈곤에 속한 아이들에게는 함부로 침범할 수 없는 공간이기도 하다. 그런데 션 베이커 감독은 이 아이들을 꿈과 환상이 가득한 디즈니랜드의 주체로 치환하여 그 세계 속으로 도망가게 하는 것으로 결론을 맺는 것이다. 

현실적인 이야기들만을 응시해 오던 관객은 이 같은 결말에 의아함을 품을 수 있다. 도대체 이게 무슨 결론이란 말인가. 그래서 아이들은 어떻게 되었나. 무니와 해일리는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션 베이커 감독은 무니와 해일리에 관한 이야기를 어떤 형태로 결론내리고 싶어 하지 않았다. 바비라는 캐릭터를 통해 충분히 어필했듯, 이 영화는 관객이 느낄 무기력함을 전면에 내세운다. 감독 스스로도 이 참담한 현실에 동일한 무기력함을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감독으로서 할 수 있는 유일한 결말은 아이들을 그 현실에 두지 않는 것이었다. 션 베이커는 무니를 엄마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는 해일리에게 남겨두지도, 그렇다고 엄마로부터 분리하여 보호소로 보내지도 않는다. 디즈니랜드가 원래 의도했던 아이들이 순수함을 잃지 않고 마음껏 뛰놀 수 있는 세계로 보냄으로써 감독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감행한다. 



7. 소외된 자들의 예수는 지금 어디에 있나.

감독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선택을 무니에게 건넸다. 그리고 영화를 바라보는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는다. 그 질문 앞에서 답답함을 느낀다면, 이 영화를 잘 쫓아오셨다. 이제 구체적인 고민 속으로 들어가보자.

이미 방치된 채로 자라버려서, 생계를 위해 몸을 팔았던 해일리. 그녀와 함께 제대로 된 교육도 받지 못한 무니. 이들이 이런 상황에 내몰리는 동안, 그들과 기꺼이 함께 계시려 했던 예수의 의지는 어디에 있었나. 교회는 이들에게 어떤 사랑을 건네고 있었던가. 어쩌면 팔짱 끼고 한걸음 뒤에서 음행한 여인을 향해 돌을 치려 했던 서기관, 바리새인들과 다름 없는 모습으로 서있지는 않았던가. 정작 예수를 전혀 알지 못하는 그들의 관계 속에도 본질적 사랑의 조각,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기꺼이 당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놀라운 사랑의 흔적이 담겨져 있다는 사실은 전혀 발견하지 못한 채 말이다. 

영화를 눈으로 쫓는 내내, 예수의 부재를 통탄해했고, 동시에 창조적 형상으로 그들에게 남겨진 사랑의 흔적에 감탄했으며, 그 사랑이 제도와 교육과 환경들 안에서 어그러져 있음에 속상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얽히고설켜 결코 풀 수 없을 것 같은 복잡한 문제에 적절한 질문을 던지는 일이 결코 쉽지 않음을 감안할 때, 이 영화는 자신의 화두와 질문을 훌륭하게 전달한다. 그리고 영화를 본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보다 직접적으로 그 질문이 울릴 것이다. 


“소외된 자들의 예수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이제 교회는 이 훌륭한 질문에 적절한 화답을 할 차례다. 상황과 문제들에 대한 해답은 감독인 션 베이커도 내놓지 못했다. 그저 젠시를 통해 무지개 너머로 무니를 옮겨주었을 뿐이다. 사실 그 어떤 교회도, 기관도, 정부도 이상적이고 확실하며 깔끔한 답안은 내놓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적어도 소외된 이들이 왜 소외되어 있는지, 또 그들의 삶에는 어떤 그리스도의 조각들이 있는지 응시할 필요가 있다. 그 세계를 인지조차 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적 연대의 시작점에도 서지 못할 것이다. 해일리와 무니의 상황에 손조차 대지 못하던 바비만큼이라도 일단은 마주해보려 노력한다면, 부끄러워 어쩔 줄 모르는 감정이 나를 감싼다면, 비로소 우리는 질문에 대한 답변을 내놓을 준비를 한 셈일테다. 

지금을 살아내는 그리스도인들이 기꺼이 이 영화의 관객이 되어, 소외되어 있는 이들이 존재하고 있음을 인지하고, 과연 우리는 그들을 무지개 너머로 데려다줄 수 있을까 함께 고민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글. 김유민 연구원 (문화선교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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