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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TT리뷰 [오트밀]드라마 <폭싹 속았수다> - 성실한 사랑의 본(本)

2025-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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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한 달, 참 많이도 울었다. 4주 간에 걸쳐 네 편씩 총 열여섯 편을 차례로 공개한 기존의 넷플릭스답지 않은 전략은 오히려 작품의 화제성을 오랜 시간 유지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요즘같이 빠르게 트렌드가 바뀌고, 장기간 선도하는 유행이 자주 등장하지 않는 시대에 한 달이 넘는 기간 동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던 드라마. 가족주의의 보편적 리얼리티와 성실한 사랑이라는 판타지를 짭조름하게 버무린 <폭싹 속았수다>1)를 차근히 톺아보자.

1) ‘폭싹 속았수다’는 제주어로 ‘무척 수고하셨습니다’라는 뜻이다.



가족주의의 보편적 리얼리티

이 드라마가 선택한 여러 전략 중 하나는 ‘미시적인 보편성’이다. <폭싹 속았수다>는 ‘애순이네’라는 한 가족의 미시적인 세계를 들여다보면서 그 작고 거대한 우주를 보편에 맞닿게 그려낸다. ‘가족’은 인간이 생을 시작하면 가장 먼저 경험하게 되는 공동체이자 사회다. 최초의 경험이자, 살아내는 동안 지속되는 가족 안에서의 경험은 대부분의 사람에게 적용되는 보편의 지점이라 할 수 있다.

60년대 제주. 학교 창문을 닦는 아이의 무릎에는 양초가 놓여 있고, 칠판에는 기생충 박멸 포스터가 붙어있다. 시장에서 국화빵을 굽는 할머니의 목에는 피난 당시 실종된 아이를 찾는 팻말이 걸려 있으며, 그 옆에서 양배추와 생선을 파는 애순과 관식의 얼굴은 새카맣다. 미술팀의 디테일한 세트와 분장은 시청자를 그 시절로 고스란히 데려다 놓는다. 

지금은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들이 훨씬 많을 그 시대의 제주에서 살아가는 광례와 애순. 염혜란 배우가 분한 광례는 시청자들로부터 어머니의 사랑이라는 보편적 정서를 이끌어낸다. 1화부터 광례의 모성에 이입한 시청자는 가부장, 시댁, 밥벌이 같은 키워드들을 쫓으며 살아본 적 없는 그 시대와 공간에 보편적이고도 디테일한 공감의 영역으로 끌려 들어간다. 나문희, 김용림, 오민애, 백지원, 장혜진, 김금순, 정해균, 오정세, 엄지원 등 작은 배역도 뚜렷하고 리얼한 연기로 채워준 배우들 덕에 그 설득력은 한층 더해진다. 


다만, 대중성을 위해 보편에 기댄 나머지, 5-60년대 실제 제주에서는 결코 덜어낼 수 없을 역사를 과감히 들어냈다. 전쟁 직후의 피난 상황까지도 담았던 제작진이 ‘4.3 사건’을 지운 것은 다분히 의도적이라고 할 수 있다. 소품이나 설정, 아주 조금의 대사만으로도 녹여낼 수 있었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금명이 대학에 입학했던 87년의 ‘6월 항쟁’도 과감히 소거함으로써 드라마가 지향하는 보편의 방향을 뚜렷하게 설정했다. 그러나 보편적 가족주의에 기대다 보니, 그 보편 바깥에 있는 존재들에 대해서는 신경 쓸 여력이 없어 보였다. 다시 말해, <폭싹 속았수다>가 추구하는 방향은 보편적인 가족의 모습을, 정치적인 맥락은 소거한 후 보다 쉽게 대중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사실적으로 그려내는 데 집중한 것이다.



성실한 사랑이라는 판타지

리얼리티를 살리고자 공간과 시대적 배경을 섬세하게 구현하고 관록 있는 배우들의 연기로 리얼리즘을 더하면서도, 그 안에 담긴 일부 역사는 소거하는 선택은 <폭싹 속았수다>가 어떤 지향점을 가지고 있는지를 명확하게 한다. ‘가족’에 집중하면서 강조하고자 했던 것은 바로 가족 안에서 피어나고 이어지는 성실한 ‘사랑’이다. 

이 드라마에서 ‘판타지’로 지칭되는 사랑은 관식이다. 관식이를 보면서 많은 아내들이 남편을 타박했다는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들렸다. 사실 관식도 여느 남편들처럼 바깥일을 하는 사람이었다. 아내와 아이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배를 타고 고기를 잡아야 했던, 그래서 손가락이며 무릎이 성하지 않았던 우리네 아버지 상일 따름이다. 그런 그를 판타지로 전환하는 지점은 ‘조오련식 바다 수영’과 ‘밥상 돌아앉기’였다. 

이미 배는 떠난 시점이었지만, 애순이 있는 방파제와는 비가 오는 바다에서 자칫 잘못하면 빠져 죽을 만큼의 거리였지만, 관식은 애순을 향한 일념으로 멋지게 복귀한다. 바다 수영은 애순이만을 바라보는 관식의 일편단심 사랑과 열정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밥상 돌아앉기’는 가히 혁명으로 평가된다. 가부장제 시절을 살아온 어머니 할머니들은 시집살이를 겪었다. 심지어는 남성과 어른, 여자와 아이가 상을 나누어 앉던 시절. 그 시절에 관식이 애순과 금명을 향해 돌아앉은 작은 움직임은 그 시절을 겪은 모든 여성에게 ‘환상’이었을 것이다. 이후로도 드라마 내내 애순만을 바라보고 섬세하게 챙기고 따뜻하게 보듬는 관식의 성격은 그 환상을 배가시킨다. 


관식과 대척점에 있는 존재가 ‘부상길’이다. ‘부상길’은 그 시대를 살아내던 당시의 전형적 남성성을 담당한다. 가부장적 권위를 세우기도 하고, 욕망을 이기지 못해 계집질도 하고, 그러면서도 아내가 떠나갈까 전전긍긍해하는 소심하고도 멋없는 타입이다. 그런데 소위 ‘찌질한’ 이 캐릭터가 ‘학씨 아저씨’로 큰 사랑을 받았던 이유는 느리지만 확실히 변화했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곁에는 관식의 ‘성실한 사랑’이라는 본이 자리하고 있었다.


관식의 사랑은 애순과 금명이 은명이에게만 흘러가지 않았다. 관식의 아들인 은명이 상길의 딸 현숙을 아내로 맞이하면서 상길은 관식의 사돈이 되었다. 가족이 되면서 두 사람은 접점이 많아졌고, 결국 상길은 관식의 모습에서 성실하고 따뜻한 사랑을 느낀다. 그리고 자신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자신은 왜 가족을 제대로 지켜내지 못했는지 깨닫는다.



잃어버린 공동체성의 재현

상길 한 사람이 변화되는데 관식의 존재만 영향을 미쳤던 것은 아니다. 온 마을이 그를 견뎌내었다. 상길에게 직접적으로 가르치거나 방향을 제시하는 경우는 드물었지만, 그를 견뎌내 주거나 지켜보는 방식으로 공동체에서 함께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 전했다. 드라마에서 공동체는 곧 가족의 확장이다. 그리고 그 공동체는 상길뿐 아니라 어린 날의 관식과 애순도 사랑으로 돌보았다. 

애순이네 쌀독이 비어갈 무렵, 집주인 할머니는 하루 세 식구 먹을 양만큼 채워주었다. 고집스러운 애순의 자존심을 지켜주면서도 그들의 가난에서 눈을 돌리지 않았던 주인네 사랑이 있었기에 애순과 관식은 멋지게 자랄 수 있었다. 


고치가라 고치가 고치글민 백 리 길도 십 리된다
같이 가라 같이 가. 같이 가면 백 리 길도 십 리된다.

                                 <폭싹 속았수다> 6화 40분 35초


그렇게 같이 살아냈던 해녀 이모들은 확장된 가족 공동체의 전형이다. 애순의 잃어버린 아이를 자기 자식처럼 함께 찾고, 애순이 당하는 불의에 함께 분노하고, 심지어 애순이 차린 가게도 함께 도와 꾸려간다. 가족처럼 지낸 공동체 구성원의 일을 자신의 일처럼 여기고 연대하는 일은, 요즘 시대에는 많이 사라진 모습이기도 하다. 

과거 ‘정(情)’이라고 불리던 한국의 독특하면서도 따뜻한 공동체성이 이제는 오지랖, 참견에 지나지 않는다. 가족의 개념이 가부장제에서 벗어나고 여성 인권이 신장됨에 따라 정으로 여길 수 있던 행동들이 일면 폭력적이었다는 사실을 인지하면서부터는 타인의 영역에 침범하는 것을 조심히 여기는 시대가 되었다. 그러나 <폭싹 속았수다>는 그 시절 ‘정’을 다시 소환하여 공동체성의 따뜻함을 충분히 조명한다. 소멸해 가는 공동체적 연대를 ‘가족’이라는 틀 안에서 시청자의 눈을 뜨겁게 만들며 다시 한 번 상기시키는 것이다.



한국교회 공동체는 ‘사랑’의 본이 될 수 있을까.

지금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관식의 사랑을 찾기 힘든 ‘판타지’라 여기고, 가족적인 공동체성도 소멸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살아가면서 많이 체감되기도 한다. <폭싹 속았수다>는 과거에 분명히 존재했던 공동체성과, 관식의 성실한 사랑을 덧붙여 메말라가는 사람들의 마음 밭에 눈물을 뿌려 촉촉하게 위로했다. 

드라마에서 중요하게 여겼던 ‘사랑’과 ‘공동체’라는 키워드는 사실, 교회와 무척이나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 교회의 본질이기도 하다. 머리 되신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사랑으로 그의 몸 된 교회로서 모여 움직이는 곳이 교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의 한국 교회는 변화에 민감하지 않다.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구조적으로 그렇게 되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특히나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교회일수록 의견을 합치시켜 변화를 이끌어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기 마련이다. 관식이 보여준 ‘판타지’적 사랑과 마을 사람들이 보여준 공동체성은 어쩌면 상길에게만이 아니라 한국교회에도 ‘본’이 될 수 있다. 성실하고 우직하게 본질적으로 사랑하는 것. 누군가를 변화시키려고 애쓰다가 선을 넘어 폭력성을 띤다거나 빨리 식어버려 마음을 쉽게 돌리기보다 그 자리에서 그대로 있으면서 최선을 다해 사랑할 때 변화는 느릿하지만 확실하게 찾아올 것이다. 

다만 앞서 잠깐 언급했듯, 교회는 보편의 바깥에 있는 존재들에게 소홀했던 드라마보다 조금 더 나아져야 한다. 교회는 4.3 사건에서도 눈을 돌리지 않아야 하며, 가족다운 가족을 가지지 못한 이들을 살필 줄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감당하셨던 소외된 이들과의 연대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교회에 주어진 사명이기 때문이다. 과거의 미숙하던 오지랖이나 참견을 뛰어넘어 예의 있고 따뜻한 ‘정’으로 뭉친 공동체, 우직하고 성실하게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기꺼이 사랑하는 교회들이 많이 세워지기를 소망한다. 그 언젠가 살아낸 시절의 끝에 하나님께서 미쁘다 여기실, 세상 곳곳에 ‘본’으로 우뚝 서 있는 사랑 가득한 그리스도인들에게. “폭싹 속았수다.”



글. 김유민 연구원 (문화선교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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