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해야 할 일>은 올해 9월에 개봉한 박홍준 감독의 두 번째 영화이다. <해야 할 일>은 49회 서울독립영화제 최우수작품상, 25회 부산독립영화제 심사위원특별상, 28회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감독조합 플러스엠상을 수상하며 독립영화계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영화는 조선소에서 근무하는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어느날, 그들이 일하고 있는 회사에 구조조정 지시가 떨어지고 누군가는 이를 시행해야 하며 누군가는 이의 대상자가 되어야 하는 현실에 놓여있다. 실제로 박 감독은 약 4년간 조선소 인사팀에서 막내로 일했던 경험이 있다. 또한 그가 근무했던 조선소에서도 구조조정이 실시되었는데, 그는 막내의 입장에서 구조조정을 지켜보며 무거운 무거운 분위기를 온 몸으로 느꼈다고 한다. 이러한 그의 경험은 영화를 제작하는데 있어서 조금 더 섬세하고 예민하게 작동했다. 그는 노동문제를 경험하는 이들의 입장이 아닌, 노동문제를 시행하는 이의 입장에서 영화를 제작하였다. 주인공 준희가 해고를 당하는 이가 아닌 해고를 해야 하는 이의 입장에 서 있다. 오히려 해고 해야 하는 사람의 입장으로 겪는 딜레마와 구조적인 문제들이 이 영화를 조금 더 사실적으로, 우리의 삶으로 여겨지게끔 만드는 실제적 장치들이다.
구조 아래 있는 이들에게 생기는 불안감
준희는 지극히 평범한, 어쩌면 평범하기 위해 노력하는 인물이다. 그는 여자친구 재이와 함께 미래를 그리며, 회사대출로 아파트를 마련하였다. 회사에서는 팀원들에게, 상사에게 인정받는 직장생활을 하는 중이다. 그는 정든 부서를 떠나 인사팀으로 발령 났다. 비록 낯선 업무지만 같은 팀사람들과 얼굴을 익히며 업무를 배우는 중이다. 이러한 그의 일상은 반복되고 또 반복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일컫는 ‘회사원’처럼 말이다. 그러던 중 준희의 조선소에서는 ‘구조조정’을 시행하라는 지시가 떨어진다. 회사의 분위기는 한순간 냉랭해진다. 누가 구조조정의 대상이 될 것인가 조마조마하며 하루하루 살얼음 판을 걷는 분위기다. 이러한 일상을 살아가는 준희에게도 열정이 가득했던 한때가 있었다. 그는 대학생때 학생회 활동을 하며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희망을 품고 살아갔던 젊은이다. 그러나 그렇게 열정 가득한, 정의가 불탔던 때는 정말 ‘한 때’였던 걸까. 자신을 설득하며 학교를 바꿔보자고 힘을 주어 이야기한 그 선배가, 지금은 구조조정의 뒷이야기를 해달라며 찾아온 보수 언론의 기자가 되었을 줄은 몰랐을 것이다. 그렇다고해서 준희에게 선배와 다른 무언가가 있다는 것은 아니다. 준희와 선배와는 별 다를 바가 없다. 가슴 한 켠에, 추억 속에 열정이 가득했던 그의 현실은 매일 정해진 곳에 정해진 시간에 정해 내려오는 일을 해내야하는 구조 속에 있는 한 부품과 같이 작용할 뿐이다.
기준은 누가 정하는 것일까?
준희는 인사팀 선배와 함께 주말에 나와 근무를 한다. 그들의 업무는 바로 해고 대상자를 정하는 일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해고 대상자를 정하는 것이라기보다는 해고 대상자가 될 사람들의 수를 최대한 많이 확보를 하는 것이다. 준희는 엑셀을 이리저리 만지며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입력한다. 엑셀 차트에 다양한 기준을 입력하고 윗사람들이 원하는 기준의 ‘인원’이 나오게 하는 것이 그들이 할당받은 업무이다.
이 가운데 타당한 해고 기준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준희는 해고가 아닌 고통분담, 순환휴직을 제안해 보지만 돌아오는 선배의 대답은 그러한 방법들은 이미 여러 차례 시도했고 반복되었다는 것이었다. 대상자의 기준 중 하나는 ‘승급 연차 초과자' 들이다. 하지만 이것이 타당한 해고의 기준이 되지는 못한다. 그동안 회사에 다니며 승진을 못 한 것이 노동자들의 잘못이라고만은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동안 회사의 재정이 어려워 진급을 해주지 못한 것인데, 승진을 못 한 것이 해고의 기준이 될 것이라 누가 생각할 수 있었겠는가. 또 다른 해고의 기준은 “전졸여”라 불리는 이들, 전문대 졸업 여사원들이다. 전문대라는 타이틀은 회사의 위기 상황 때마다 그들을 끈질기게 따라다니며 그들의 목숨을 움켜쥐고 있다. 전졸여 꼬리표는 그들이 아무리 열심히, 성실히 일해도 그들에게서 절대 떨어질 여지를 주지 않는다. 또 다른 해고의 기준은 개인의 평가가 아닌 팀의 실적 평가이다. 하지만 이 또한 과연 타당한 기준일까? 자재팀 같은 경우는, 팀 내의 실적 부족이라기보다는 경제상황에 따라 운용할 수 있는 자재의 한계가 있다. 자재팀에게 팀의 실적은 그들이 통제할 수 없는 상황 때문에 나타난 결과 값이다. 그러므로 이 구조조정에서 명확하고 정확한 해고의 기준은 없다. 단지 준희의 손 끝에 움직이는 엑셀 창에서 적절한 인원이 뽑힐 때 까지 이리저리 응용해 입력하는 ‘입력값’이 그들의 밥벌이자 생존의 수단을 유지시킬 수도 있고, 단절 시킬 수도 있게 되는 것이다. 더욱이 허무한 것은 그 와중에 윗사람들이 제외하라는 이들은 해고의 대상에서 철저하게 '제외' 된다. 해고에 정확하고 명확한, 더욱이 정직한 기준은 존재하지 않는다.
누구의 잘못일까?
이제 구조조정 문제가 조선소를 본격적으로 압박해온다. 구조조정 대상자들에게는 기한이 통보되었다. 기한 내에 자진해서 나가게 된다면 조금이라도 나은 처우를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정해진 기간을 초과해서 해고처리가 된다면, 그들은 그나마 회사 측에서 제시했던 대우도 받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인사팀은 각자 구조조정 대상자를 찾아다니며 면담을 나누어 대상자들이 먼저 회사를 나갈 것을 권유한다. 이 과정에서 어떤 이들은 분노를 하고, 어떤 이들은 체념을 한다. 어떤 이들은 반복되는 구조조정에 질려 회사를 나가게 된다. 구조조정에 속한 모든 이들은 자신의 삶의 의미, 존재 가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갖는다. 구조조정 대상자와 시행자, 각각의 역할과 위치는 다르지만 그들이 회사라는 조직에 갖는 배신감과 인생에 대해 갖는 허탈함과 허무함은 동일하다. 구조조정으로 벌어진 일, 과연 누구의 잘못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구조조정 대상자의 태만함? 구조조정 시행자의 악랄함? 적어도 영화에서 비춰지는 이들에게 '태만함'과 '악랄함'은 찾아볼 수 없다. 다만 그들을 감싸고 있는 구조의 '거대함'만 보일뿐이다. 구조 아래 놓여진 이들은 누가 피해자이고 누가 가해자인지 모를 정도로, 자신들의 위치와 역할을 괴로워하며 헷갈려한다. 커다란 구조 앞에 놓여있는 구성원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현실에 순응하며, 혹은 현실에 안주하며 아니 어쩔 수 없는 현실에 안타까워하며 외면? 오히려 냉혹한 현실 앞에 조금 더 둔감해지기 위해 노력해야하는 것일까? 그것이 사회 구성원들이 이 사회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일까?
둔감한 세상 속에 사라지는 예민함 살아내기
예수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러 산으로 올라가며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에게 “깨어 기도하라(마26:41)”라고 말씀하셨다. 어두컴컴한 밤, 모두가 잠든 밤, 그리하여 아무것도 분간할 수 없고 구분할 수 없는 밤은 깨어있으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잠들 수 밖에 없는 환경이다. 이러한 밤에 예수님은 더욱 깨어 기도하고, 그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원하며 자신의 길을 찾아 나서려고 한다. 그 당시 예수님은 제자들이, 둔감한 세상 속에서 사라지는 예민함을 살아내길 원하셨다. 이 도전의 메세지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해당된다. 이러한 개인의 실천은 구조적인 문제를 외면하자는 것도 아니며, 구조의 문제는 너무나도 거대해서 개인이 움직일 수 없으니 포기하자는 말도 아니다. 다만 구조의 문제를 끊임없이 인식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움직이는 존재가 되자는 다짐이다. 거대한 구조는 우리에게 둔감함을 요구한다. 타인의 고통에 둔감하기, 우리 주변에 일어나는 일들에 둔감하기, 더나아가 교회는 교회의 일에만 몰두하고 세상의 일과는 분리되기, 교회 내부에 존재하는 구성원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교회밖의 이들에게는 조금 느슨하게 관심갖기를 요구한다. 하지만 이러한 세상일수록 우리는 더욱 민감해져야 한다. 타인의 고통에 민감하기, 주변에 일어나는 일들을 똑똑히 바라보기, 교회에가 세상에 일에 더욱 관심 갖고 길을 터주기, 교회 밖 이들에게 끈끈한 연대로 그들을 교회 안으로 초대해야한다.
함께 예민해지자고, 혼자가 아닌 함께라면 예민함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준희에게 건네는 재이의 손이 나의 손이 될 수 있기를, 우리의 손이 될 수 있기를, 그러한 손들이 모인 곳이 교회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한다.
*이미지 출처: 영화 <내일 할 일>
글. 김민아(문화선교연구원)
영화 <해야 할 일>은 올해 9월에 개봉한 박홍준 감독의 두 번째 영화이다. <해야 할 일>은 49회 서울독립영화제 최우수작품상, 25회 부산독립영화제 심사위원특별상, 28회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감독조합 플러스엠상을 수상하며 독립영화계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영화는 조선소에서 근무하는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어느날, 그들이 일하고 있는 회사에 구조조정 지시가 떨어지고 누군가는 이를 시행해야 하며 누군가는 이의 대상자가 되어야 하는 현실에 놓여있다. 실제로 박 감독은 약 4년간 조선소 인사팀에서 막내로 일했던 경험이 있다. 또한 그가 근무했던 조선소에서도 구조조정이 실시되었는데, 그는 막내의 입장에서 구조조정을 지켜보며 무거운 무거운 분위기를 온 몸으로 느꼈다고 한다. 이러한 그의 경험은 영화를 제작하는데 있어서 조금 더 섬세하고 예민하게 작동했다. 그는 노동문제를 경험하는 이들의 입장이 아닌, 노동문제를 시행하는 이의 입장에서 영화를 제작하였다. 주인공 준희가 해고를 당하는 이가 아닌 해고를 해야 하는 이의 입장에 서 있다. 오히려 해고 해야 하는 사람의 입장으로 겪는 딜레마와 구조적인 문제들이 이 영화를 조금 더 사실적으로, 우리의 삶으로 여겨지게끔 만드는 실제적 장치들이다.
구조 아래 있는 이들에게 생기는 불안감
준희는 지극히 평범한, 어쩌면 평범하기 위해 노력하는 인물이다. 그는 여자친구 재이와 함께 미래를 그리며, 회사대출로 아파트를 마련하였다. 회사에서는 팀원들에게, 상사에게 인정받는 직장생활을 하는 중이다. 그는 정든 부서를 떠나 인사팀으로 발령 났다. 비록 낯선 업무지만 같은 팀사람들과 얼굴을 익히며 업무를 배우는 중이다. 이러한 그의 일상은 반복되고 또 반복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일컫는 ‘회사원’처럼 말이다. 그러던 중 준희의 조선소에서는 ‘구조조정’을 시행하라는 지시가 떨어진다. 회사의 분위기는 한순간 냉랭해진다. 누가 구조조정의 대상이 될 것인가 조마조마하며 하루하루 살얼음 판을 걷는 분위기다. 이러한 일상을 살아가는 준희에게도 열정이 가득했던 한때가 있었다. 그는 대학생때 학생회 활동을 하며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희망을 품고 살아갔던 젊은이다. 그러나 그렇게 열정 가득한, 정의가 불탔던 때는 정말 ‘한 때’였던 걸까. 자신을 설득하며 학교를 바꿔보자고 힘을 주어 이야기한 그 선배가, 지금은 구조조정의 뒷이야기를 해달라며 찾아온 보수 언론의 기자가 되었을 줄은 몰랐을 것이다. 그렇다고해서 준희에게 선배와 다른 무언가가 있다는 것은 아니다. 준희와 선배와는 별 다를 바가 없다. 가슴 한 켠에, 추억 속에 열정이 가득했던 그의 현실은 매일 정해진 곳에 정해진 시간에 정해 내려오는 일을 해내야하는 구조 속에 있는 한 부품과 같이 작용할 뿐이다.
기준은 누가 정하는 것일까?
준희는 인사팀 선배와 함께 주말에 나와 근무를 한다. 그들의 업무는 바로 해고 대상자를 정하는 일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해고 대상자를 정하는 것이라기보다는 해고 대상자가 될 사람들의 수를 최대한 많이 확보를 하는 것이다. 준희는 엑셀을 이리저리 만지며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입력한다. 엑셀 차트에 다양한 기준을 입력하고 윗사람들이 원하는 기준의 ‘인원’이 나오게 하는 것이 그들이 할당받은 업무이다.
이 가운데 타당한 해고 기준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준희는 해고가 아닌 고통분담, 순환휴직을 제안해 보지만 돌아오는 선배의 대답은 그러한 방법들은 이미 여러 차례 시도했고 반복되었다는 것이었다. 대상자의 기준 중 하나는 ‘승급 연차 초과자' 들이다. 하지만 이것이 타당한 해고의 기준이 되지는 못한다. 그동안 회사에 다니며 승진을 못 한 것이 노동자들의 잘못이라고만은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동안 회사의 재정이 어려워 진급을 해주지 못한 것인데, 승진을 못 한 것이 해고의 기준이 될 것이라 누가 생각할 수 있었겠는가. 또 다른 해고의 기준은 “전졸여”라 불리는 이들, 전문대 졸업 여사원들이다. 전문대라는 타이틀은 회사의 위기 상황 때마다 그들을 끈질기게 따라다니며 그들의 목숨을 움켜쥐고 있다. 전졸여 꼬리표는 그들이 아무리 열심히, 성실히 일해도 그들에게서 절대 떨어질 여지를 주지 않는다. 또 다른 해고의 기준은 개인의 평가가 아닌 팀의 실적 평가이다. 하지만 이 또한 과연 타당한 기준일까? 자재팀 같은 경우는, 팀 내의 실적 부족이라기보다는 경제상황에 따라 운용할 수 있는 자재의 한계가 있다. 자재팀에게 팀의 실적은 그들이 통제할 수 없는 상황 때문에 나타난 결과 값이다. 그러므로 이 구조조정에서 명확하고 정확한 해고의 기준은 없다. 단지 준희의 손 끝에 움직이는 엑셀 창에서 적절한 인원이 뽑힐 때 까지 이리저리 응용해 입력하는 ‘입력값’이 그들의 밥벌이자 생존의 수단을 유지시킬 수도 있고, 단절 시킬 수도 있게 되는 것이다. 더욱이 허무한 것은 그 와중에 윗사람들이 제외하라는 이들은 해고의 대상에서 철저하게 '제외' 된다. 해고에 정확하고 명확한, 더욱이 정직한 기준은 존재하지 않는다.
누구의 잘못일까?
이제 구조조정 문제가 조선소를 본격적으로 압박해온다. 구조조정 대상자들에게는 기한이 통보되었다. 기한 내에 자진해서 나가게 된다면 조금이라도 나은 처우를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정해진 기간을 초과해서 해고처리가 된다면, 그들은 그나마 회사 측에서 제시했던 대우도 받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인사팀은 각자 구조조정 대상자를 찾아다니며 면담을 나누어 대상자들이 먼저 회사를 나갈 것을 권유한다. 이 과정에서 어떤 이들은 분노를 하고, 어떤 이들은 체념을 한다. 어떤 이들은 반복되는 구조조정에 질려 회사를 나가게 된다. 구조조정에 속한 모든 이들은 자신의 삶의 의미, 존재 가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갖는다. 구조조정 대상자와 시행자, 각각의 역할과 위치는 다르지만 그들이 회사라는 조직에 갖는 배신감과 인생에 대해 갖는 허탈함과 허무함은 동일하다. 구조조정으로 벌어진 일, 과연 누구의 잘못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구조조정 대상자의 태만함? 구조조정 시행자의 악랄함? 적어도 영화에서 비춰지는 이들에게 '태만함'과 '악랄함'은 찾아볼 수 없다. 다만 그들을 감싸고 있는 구조의 '거대함'만 보일뿐이다. 구조 아래 놓여진 이들은 누가 피해자이고 누가 가해자인지 모를 정도로, 자신들의 위치와 역할을 괴로워하며 헷갈려한다. 커다란 구조 앞에 놓여있는 구성원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현실에 순응하며, 혹은 현실에 안주하며 아니 어쩔 수 없는 현실에 안타까워하며 외면? 오히려 냉혹한 현실 앞에 조금 더 둔감해지기 위해 노력해야하는 것일까? 그것이 사회 구성원들이 이 사회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일까?
둔감한 세상 속에 사라지는 예민함 살아내기
예수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러 산으로 올라가며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에게 “깨어 기도하라(마26:41)”라고 말씀하셨다. 어두컴컴한 밤, 모두가 잠든 밤, 그리하여 아무것도 분간할 수 없고 구분할 수 없는 밤은 깨어있으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잠들 수 밖에 없는 환경이다. 이러한 밤에 예수님은 더욱 깨어 기도하고, 그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원하며 자신의 길을 찾아 나서려고 한다. 그 당시 예수님은 제자들이, 둔감한 세상 속에서 사라지는 예민함을 살아내길 원하셨다. 이 도전의 메세지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해당된다. 이러한 개인의 실천은 구조적인 문제를 외면하자는 것도 아니며, 구조의 문제는 너무나도 거대해서 개인이 움직일 수 없으니 포기하자는 말도 아니다. 다만 구조의 문제를 끊임없이 인식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움직이는 존재가 되자는 다짐이다. 거대한 구조는 우리에게 둔감함을 요구한다. 타인의 고통에 둔감하기, 우리 주변에 일어나는 일들에 둔감하기, 더나아가 교회는 교회의 일에만 몰두하고 세상의 일과는 분리되기, 교회 내부에 존재하는 구성원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교회밖의 이들에게는 조금 느슨하게 관심갖기를 요구한다. 하지만 이러한 세상일수록 우리는 더욱 민감해져야 한다. 타인의 고통에 민감하기, 주변에 일어나는 일들을 똑똑히 바라보기, 교회에가 세상에 일에 더욱 관심 갖고 길을 터주기, 교회 밖 이들에게 끈끈한 연대로 그들을 교회 안으로 초대해야한다.
함께 예민해지자고, 혼자가 아닌 함께라면 예민함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준희에게 건네는 재이의 손이 나의 손이 될 수 있기를, 우리의 손이 될 수 있기를, 그러한 손들이 모인 곳이 교회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한다.
*이미지 출처: 영화 <내일 할 일>
글. 김민아(문화선교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