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TT리뷰 [오트밀]넷플릭스 오리지널 <비프:성난사람들>을 보고 - "당신의 분노는 결코 납작하지 않다"

2023-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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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나 영화를 즐겨 보는 사람들이라면, 지난 4월에 공개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BEEF(성난 사람들)>을 흥미롭게 감상했을 것이다. 미국 제작사인 A24가 만들었지만, 제작부터 출연진까지 대부분이 아시안, 그중에서도 한국계 미국인이 주를 이루고 있는 작품이라 국내에서 더 큰 관심을 받았다. 하지만 이러한 점을 차치하고 보더라도, 이 드라마는 시작부터 끝까지 각본, 연출, 연기력, 예술성, 디테일 등 뭐 하나 빠지는 거 없는 탄탄한 작품이었다는 점에서 주목받을 만했다. 특히 드라마가 그리고 있는 주제가 매우 신선했는데, 인간 내면에 있는 ‘분노’와 그 표출로 인한 ‘사건들’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했다. 

하지만 <성난 사람들>은 여타의 작품들처럼, 분노 표출을 그저 악인의 산물인 것 마냥, 또한 분노 표출의 결과는 패망인 것 마냥 단순하고 납작하게만 그리지 않는다. 인생의 중요한 깨달음, 즉 ‘빛의 형상은 어두움을 의식하면서 온다는’ ‘칼 융’의 말을 인용한 이성진 작가의 의도를 따라, 분노를 때로는 애처롭고, 때로는 반갑게, 때로는 공포스럽고, 때로는 사랑스럽게 그려내고 있다. 그래서 시청자들로 하여금, 자신이 가진 분노를 죄스럽고 수치스럽게 여기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인정하고 보듬으며 해소지점을 찾아가도록 생각하게 만든다. 그래서 아직 보지 않은 분들이 계시다면 꼭 추천하고 싶은 작품이다.

 

<당신의 분노는 결코 납작하지 않다>

극 중 주인공들의 분노는 이렇게 시작된다. 외출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각자 다른 이유로 분노를 품고 있던 두 사람이 날카로운 경적소리로 조우하게 된다. 그들은 ‘너 때문’이라는 좋은 계기를 삼아 내면에 있던 분노를 꺼내 ‘로드레이지(Road Rage;보복운전)’라는 사건으로 이끌어간다. 당사자들은 이 사건 자체가, 자신들이 분노를 갖게 된 서막인 것처럼 여기지만, 이를 지켜보던 시청자들은 알고 있다. 그들의 분노는 바로 직전 사건에서부터, 아니 함께 살고 있는 가족들로부터, 아니 훨씬 더 오래전 어린 시절부터 생겨나 쭉 품고 있었던 것이라는 것을. 그게 오늘에야 ‘편하고’, ‘자유롭게’ 표출된 것뿐임을.

‘에이미’는 어린 시절부터, 고국을 떠나 미국에 정착하면서 경제적 문제를 겪은 부모의 갈등과 외도, 정서적 유기를 감내하며 살아왔다. 아버지의 외도를 목도하고도 덮고 살아왔다는 괴로움에서부터 분노는 피어났다. 남편과 꾸린 가정만큼은 잘 지키고 싶은 마음에, 악착같이 사업을 성공시키려 하지만, 아시안이라는 이유로 늘 ‘애매하게’ 차별하고 무시하는 시선들에 부딪힌다. 그뿐이던가. ‘유명한 예술가 집안’이라는 허울뿐인 명예만 끌어안고 살아가는 시댁과, 분노의 경험을 나누려고 노력해도 ‘파워 긍정’으로 덮어버리는 남편에 대한 섭섭함 때문에 분노는 좀처럼 풀리지 않고 괴물처럼 커져만 간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 ‘조건 없는 사랑’을 느끼지 못했지만, 여전히 그 사랑을 갈구하며 살아간다.

‘대니’ 역시 어린 시절 고국을 떠나와 어려움을 겪는 부모의 갈등 밑에서 자라왔다. 그것도 첫째 아들로. 대부분의 1.5세 이민자들이라면 겪는 고충일 터인데, 대니는 낯선 곳에서 부모와 형제를 짊어지고 언어 및 여러 행정 능력 등을 빠르게 탑재해 다방면에서 일찍이 가장으로 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아주 어린 시절부터 동생을 책임져, 부모들이 겪는 경제적 어려움을 덜어줘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린다. 하지만 미국에 정착한 부모는 특정 사건으로 한국에 추방당하게 되고, 동생마저 점점 엇나가 대니를 인정해 주지 않는 눈치다. 가족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면서까지 성실하게 살려는 그에게 세상은 매일 가혹할 뿐이다. 희생 뒤에 숨기고 가둬두기만 했던 그의 분노는 터질 일만 기다리고 있었다. 세상 어디에도 자신의 고생과 노력을 알아주는 이 하나 없지만, 여전히 그는 인정을 갈구하며 살아간다.

이처럼 에미미와 대니의 분노는 결코 납작한 것이 아니었다. 뿌리 깊게 박혀 있어 꽤 견고하고 단단한 것이었다. 분노가 만들어지고 쌓이게 된 사건들은 다 달랐지만, 이 분노들은 점진적이고 연쇄적으로 이어져 있는 것들이었다. 특별히 둘 다 ‘이방인’이라는 정체성에서 피어난 상처도 있겠지만, 예로부터 아시아인들은 온순하다는 미국 사회의 고정관념 때문에 더욱 솔직하게 표출하지 못했던 어려움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에이미와 대니의 분노는 단편적인 시선으로, 단순하게 다루려는 방식으로 접근해서는 안 되는 것들이었다.

그런데, 극 중에서 로드 레이지 사건을 겪은 에이미에게 남편 ‘조지’가 건넨 조언이 인상적이다.

“거기서 멈춰, 긍정적인 일에만 집중해. 알았지? 감사 일기 쓰기를 다시 시작하는 게 좋겠다.”

필자는 ‘감사 일기’를 권유하는 대목에서, 문득 기독교에서 말하는 감사 일기가 떠올랐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 혹은 감사 일기를 쓰는 행위는 부정적 감정을 다루는 데 효과적이다. 하지만 상처 입은 혹은 현재 진행형의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무작정 감사 일기만이 만사형통의 지름길인 마냥 제안하는 것은 폭력적인 일이 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교회 문화 혹은 기독교 가정의 문화에서는 ‘분노’에 대해 ‘참고’, ‘인내하고’, ‘감사할 것을 찾으라’는 조언으로 다루려는 분위기가 대다수다. <성난 사람들>은 이런 부분을 짚으며 ‘꺼내서’, ‘직면하고’, ‘다스리는’ 방식을 찾아야 한다고 말하는 듯하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아주 어릴 때부터 부모로부터, 사회로부터 상처를 받고 분노를 품으며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덮어두기만 했다가는 언젠간 터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동족은 서로를 알아볼 수 없다>

‘에이미’와 ‘대니’는 많은 것이 닮아있다. 그들이 처음 만났을 땐 ‘차(車)’에 가려져 서로의 얼굴을 확인할 수 없었다. 복수하는 과정에서 얼굴과 얼굴로 조우하긴 했지만, 이미 ‘분노’라는 거대한 몸집에 가려져 서로의 마음이 닮아있다는 걸 알아볼 수 없었다. 다만 에이미의 남편이, 대니의 동생 등 그들을 지켜본 주변인들이 서로 닮았다고 증언해 줄 뿐이다.

그런 그 둘이 연쇄적으로 일으키는 복수를 보다 보면, 가끔은 과하고 억지스럽게 여겨질 때도 있다. “이제 그만하면 됐어!”, “그만 멈춰!”라고 외치게 된다. 분명 이들의 복수전이 흥미롭게 느껴진다거나, 혹은 응원하게 되는 그런 대목은 절대 아니다. 하지만, 보편적인 인간의 내면을 그대로 잘 그리고 있는 듯해서 공감은 된다. 한 번 누군가를 미워하면 끝까지 미워하고, 한 번 자신이 당했던 건 끝까지 갚아주고 싶어 하는 인간의 어두운 내면 말이다.

에이미는 ‘식물 전문가’로서 사업을 성공시키고, 많은 이들에게 인정을 받아왔다. 하지만 독이 있는 열매를 식용 열매인 ‘엘더 베리’로 착각해 목숨을 잃을 뻔한 ‘가짜 전문가’였을 뿐이다. 대니도 마찬가지다. ‘건설 전문가’라 자처할 땐 언제고, 가족을 위해 지은 집에 배선을 잘못 깔아 몽땅 불태워버렸다. 그런데 사실, 오늘날 우리에게도 그들과 같은 ‘가짜 전문가’스러운 면모가 있지 않은가. 일터에서도, 교회에서도, 심지어 가족관계 안에서도 솔직할 수 없고 전문가인 척 살아가야 할 때가 많이 있다. 그래야만 타인의 신뢰를 얻을 수 있고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성난 사람들>은 우리의 삶을 밖에서부터 시작해 속마음까지 들어와 촬영한 결과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범했던 에이미와 대니가 행복과 인정을 위해 열심히 살아가지만, 분노 폭발의 경험을 계기로 속에 있던 것들을 꺼내고 또 꺼내고 다 꺼내서 보여주는 구성이었다. 마치 마지막 화에서 ‘뱃속에 있는 음식물이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을 정도로 다 토해냈던’ 둘의 모습처럼 말이다. 그러나 왜곡된 종교적 믿음이나 행위로 눌러놓기만 하려 했다면, 평온과 인내라는 허울뿐인 말들로 가둬두기만 하려 했다면, 이 분노는 결국 자기 자신을 병들게 했을지도 모른다. 다 토해내야만 우리는 다시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다.

 

<혼자서는 어려운 일이다>

이 작품은 ‘분노’만큼 ‘인정’에 대해서도 큰 비중으로 다루고 있다. ‘인정의 부재가 한 사람에게 끼치는 악영향’과 동시에 ‘인정이 한 사람에게 끼치는 기적’의 모습들을 보여준다. 대니는 동생 폴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형이다. 폴은 형 대니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동생이다. 에이미는 남편 조지에게 감정적으로 전혀 공감을 받지 못한다. 조지는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예술적으로 인정받지 못했으며, 자신의 아내도 자기를 인정해 주지 않는다고 믿는다.

가장 가까운 사이에서 인정의 부재를 겪는 그들이, 낯선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기도, 해주기도 하며 행복감을 경험한다. 대니는 복수를 하기 위해 만난 조지에게 인정하는 좋은 말들을 해주며 감동을 주고, 조지는 대니에게 “넌 좋은 사람이야”라는 말로 화답한다. 여기서 대니의 마음속 복수심은 눈 녹듯 사라지고, 조지는 아버지로부터 받지 못해 온 인정을 받고 상한 마음을 치유하게 된다. 에이미와 폴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폴에게서 “누구 때문에 기분을 잡쳤어요? 어디로 가야 때려줄 수 있어요? 또 뭐가 싫어요?”라는 위로의 말을 듣자, 에이미는 “맙소사... 그게.. 그런 질문은 받아본 적 없어요”라고 답한다. 자신이 겪는 분노와 쌓인 화를 인정받은 경험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폴 역시 에이미로부터, 형에게 받지 못해 온 인정과 기대를 받고는 행복해한다. 하지만 이들은 결국, 서로를 잘 몰랐기 때문에 쉽게 인정해 줄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에이미가 말하는 ‘누군가를 조건 없이 사랑하는 일’은 결국 최악의 상황으로 갈 때야 가늠해 볼 수 있다. 인정받을만한 일 앞에서 당연하게 받는 칭찬이 아닌, 어린 시절 상처로부터, 현재 겪는 실패와 좌절감, 충분히 망했고 망가진 듯한 모습을 드러냈을 때도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사랑받고 지지 받는 종류의 감정 말이다. 이러한 경험이 없었던 사람들에게는, 속에 있는 상처와 분노를 직면하고 꺼내고 나눌 용기도 생길 수 없다. (에이미 역시, 어린 시절부터 ‘문제가 위기가 될까 두려워하고 무시하고 덮으려는’ 양육자로부터 성장해 왔다.) 결국 ‘분노를 잘 다루는 방법’은 좋을 때만 용인해 주는 양육자나 지도자가 아닌, 나쁠 때도 옆에 있어줄 수 있는 좋은 공동체로부터 습득할 수 있다. 가족이든, 교회든.

어린 시절 교회를 다녔지만 지금은 신앙이 없는 듯한 대니가 (돈을 벌 목적으로) 한인교회에 찾아갔다가 우는 장면은 이 드라마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다. 다른 목적, 즉 돈이 될만한 일을 찾기 위해 간 예배였지만, 그는 오랜만에, 혹은 거의 처음으로 ‘조건 없는’ 사랑과 인정을 경험한 듯했다. (물론, 이 한 번의 위로로 대니의 모든 상황과 감정이 해결되지는 않았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이라면 이런 경험들 하나씩은 있을 것이다. 크게 상처받고, 아무도 나를 이해해 주지 못할 거란 기분을 느낀 어느 날, 교회에서 찬양을 부르다 슬퍼져서 내 안에 있는 모든 울음들을 꺼내놓게 되었던 경험. 그것은 대단한 신앙의 소유자이기 때문에, 수분 내에 하나님을 느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단지 ‘이제야’ 내 모든 어두움을 꺼내놓을 수 있는 분을 만났다는 감격과 안도감만으로 위로를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장면은 그 순간들을 너무나도 잘 녹여내고 있다.

분노를 다루는 일. 분명 혼자서는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장 가까운 가족이나 소속된 교회가 나에게 조건 없는 사랑을 줄 것이라고 기대해서도 안 된다. 에이미와 대니의 가족들처럼, 가장 가까이에 있기 때문에 더 상처 주는 일도 많다. 거짓 없고 조건 없는 사랑이 나를 온전하게 해 줄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보다, 조건 없는 사랑의 원천인 하나님과 분노를 다루어 가는 법도 배워나가야 할 것이다.

“부끄러워할 필요 없어 괜찮아. 다 보여. 안 숨겨도 돼, 괜찮아.”

 

<어둠 없이 빛을 경험할 수 없다>

에이미가 ‘고요 하우스’ 매각을 성공시키고 가족들과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던 한때, 대니가 부모님을 위한 집을 완공시키고 꿈에 가까워지던 한때, 둘은 깊고 눅눅하고 추운 ‘바닥’으로 향해 가는 환상을 보게 된다. (실제로 이들이 환상을 본 것인지, 혹은 그들이 가진 감정을 그런 장면으로 표현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둘 다 표면적으로는 사업에서나 가정에서나 성공해서 주변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곳으로 올라왔지만, 그들은 오히려, “가슴 위에서 바닥을 느끼고” 있었다.

우리 개개인이 가진 문제들(죄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사실은 우리의 바닥이 바로 근거리에 있다는 것을 알아챘으면서도 다 괜찮은 척 덮고, 끊임없이 인정받기 위해 전문가인 척 살아간다면 우리는 해결로 나아갈 수 없다. 바닥을 직면하기 싫어서, 그 바닥으로 내려가기 싫어서 숨겨놓았던 것들이 더 큰 분노로 불어날 뿐이다. 에이미와 대니처럼, 결국 바닥에 누워 마주 보고 나서야, ‘나’ 혹은 나와 닮은 ‘너’를 위로하고 나서야 우리는 모든 것들을 해소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러고 나니 진짜 아무것도 없네.”

“더 자주 이럴걸.”

십자가 죽음으로부터 부활이 나올 수 있었고, 케노시스(자기 비움)로부터 십자가 영광이 드러날 수 있었던 것처럼, 이미 있는 어둠에 대하여 직면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모두 빛을 느낄 수 없다. 더 나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더 나은 교회가 되는 것은 모두가 ‘선함’에 전문가인 척하기보다, ‘악함’을 공감하고 인정하고 하나님 안에서 (왜곡되지 않게) 다룰 수 있을 때 가능하다.

 


글. 임주은 연구원 (문화선교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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