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피터 파커의 고립과 우리 시대의 고립
현관문에 엉기성기 쳐진 거미줄은 그 집이 이미 인기척이 끊긴 지 오래되었음을 드러낸다. 아무도 찾지 않는 집, 그곳엔 피터 파커가 혼자서 산다. 스파이더맨은 여전히 범죄자를 잡고 위기에 빠진 사람을 구해내고 세상을 이롭게 하는 영웅으로 활약한다. 하지만 그 거미 가면 속의 피터는 누구도 기억하지도, 알지도 못한다. 옛 애인 MJ도, 절친 내드도 그를 모른다. 세상에 존재하지만 누구의 기억에도 없는 사람. 바로 영화 〈스파이더맨: 브랜드 뉴 데이〉의 피터의 현실이다. 그는 세상과 단절되어 있고, 관계에서 고립되어 있다.
그런데 그의 고립에는 이유가 분명하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자기 때문에 위험에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 그들의 기억에서 지워지는 길을 스스로 선택했다. 자기방어가 아니라 타인을 위한 자기희생이다. 그래서 그의 고립은 처연하면서도 숭고하다. 하지만 동기의 선함이 항상 결과의 선함으로 이끌진 않는다. 사랑과 헌신으로 선택한 결정이라 해도, 고립은 고립이다. 과연 타인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그 사람과의 관계 자체를 제거하는 것이 진짜 사랑의 완성일까? 사랑하기에 떠난다는 말은 얼마나 진실할까? 사랑하는 사람들의 안전을 얻었지만, 그들과 나눴던 추억과 관계를 잃고 자신의 존재마저 상실한다면, 그게 옳은 결정일까?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도 관계를 지우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다만 이유는 피터와는 사뭇 다르다. 피터가 타인을 보호하기 위함이었다면, 우리는 종종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타인을 지운다. 나에게 상처를 주고, 스트레스를 주고, 나와 맞지 않고, 내 삶에 도움 되지 않으니 지운다. 무엇보다 나에게 ‘무해한 사람’이 아니기에 관계를 끊는다. 신체적·정서적·경제적 무해함을 지나치게 추구하는 태도는 때로 ‘손절’이라는 선택으로 이어진다.

스파이더맨 브랜드 뉴 데이 스틸컷 출처 엠파이어
외로움의 역설, 단절과 손절
이승연의 《손절사회》는 이 기묘한 현상의 이면을 파헤친다. 책의 부제부터 직설적이다. ‘손익계산이 되어버린 인간관계, 연결 불가능성의 시대에 관한 탐구’. 저자가 인터뷰에서도 밝혔듯이 ‘손절’은 투자 용어다. 더 큰 손실을 막기 위해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보유자산을 처분하는 적극적인 형태의 자기방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 용어가 인간관계 안으로 슬그머니 들어왔다. 사람을 만나고 헤어지는 일에 ‘손실’과 ‘이익’이라는 경제적 언어가 붙는다. 책 표지도 매우 인상적이다. 계산기 형상이다. 그런데 이상한 계산기다. 숫자와 사칙연산 기호 사이에, ‘MUTE’, ‘BLOCK’, 그리고 몇몇 ‘이모티콘’ 버튼이 있다. 감정의 용어다. 이제 계산기는 돈만 계산하지 않는다. 사람과 관계까지 계산한다. 이 사람은 나에게 유익한가, 유해한가? 나를 성장시키는가, 소모시키는가? 내 감정적 에너지 소모의 효율성은 어떤가? 투자로서 가치가 있는가? 그래서 엔터를 누른다. ‘BLOCK’
저자는 여기서 우리가 왜 사람과 관계를 이렇게 생각하게 되었는지를 탐구한다. 특히 신자유주의와 치료요법 문화가 어떻게 인간에게 고통을 회피하고, 자신을 끊임없이 관리하며, 타인을 평가하고 관계마저 최적화하도록 만들었는지를 추적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사라져가는 타자와 관계, 돌봄과 연대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이승연 손절사회 출처 교보문고
고통을 삭제한 곳에서 성장은 가능할까?
저자가 주목하는 대표적인 현상은 ‘치료요법 문화’다. 행복해야 하고, 긍정적이어야 하고, 스트레스도 없고 자존감도 높아야 한다. 좋은 말이다. 그런데 세상은 항상 그렇게만 흘러가지 않는다. 슬프고 힘들 때도 있고, 감정적 손실을 겪기도 한다. 실패와 절망도, 이로 인한 아픔과 고통도 다가오고, 상처가 생기기도 한다. 문제는 사람들이 이런 현상들을 더 이상 자신의 성찰과 관심을 요구하는 ‘관계적 사건’으로 보지 않고, 치료하거나 회피해야 할 ‘감정적 손상’으로 인식한다는 데 있다. 그러면 해결책은 간단하다. 관계를 끊으면 된다. 갈등을 회피하고 갈등의 대상을 제거하면 된다. 그리고 우리 사회는 이런 방법을 성공적인 처세술이자 인간관계로 평가하고 칭송한다. 시중에 등장하여 베스트셀러가 된 성공을 위한 자기계발서의 상당 부분은 이런 관점을 담고 있다.
당연히 끊어야 할 관계는 있다. 폭력과 학대, 지속적인 착취와 권력남용, 부당한 성적·경제적 요구는 사라져야 한다. 문제는 이런 ‘부당한 폭력’과 ‘불편함’을 구별하지 못하는 태도이다. 나를 파괴하는 관계에서 벗어나는 것과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타자를 제거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모든 고통이 사람을 성장시키는 것은 아니지만, 고통을 전혀 통과하지 않은 성숙도 기대하기 어렵다. 거미는 성장을 위해 탈피한다. 기존의 외골격을 벗어던지는 순간 가장 취약해지지만, 그 과정 없이는 더 큰 성체로의 성장은 이뤄지지 않는다. 탈피하지 않으면 성장할 수도 없다. 고통의 시간을 견뎌내야 한다. 껍질을 벗는 것은 고통스럽지만 꼭 필요한 과정이다.
한병철의 진단과 손절사회
저자는 사람과 사회를 ‘프로필’로 보는 현상에 주목한다. 특히 MBTI는 누군가를 만났을 때, 상대방을 이해하는 필수요소로 작동한다. 하지만 복잡하고 다양하며 때로 모순적이기까지 한 인간을 MBTI와 같은 하나의 지표만으로 설명하거나 단순화하는 건 편리하지만 오해와 왜곡을 초래한다. 사람은 프로필보다 크고 복합적이다. 그런데 프로필과 지표는 분류에 쉽고 예측하기에 유용하다. 관리가 가능해진다. 이런 관리의 편이성은 경쟁과 성과로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 현대사회에 꼭 필요한 덕목으로 자리 잡는다. 이 지점에서 한병철의 저작들은 ‘손절사회’를 해석하는 데 도움을 준다.
먼저, 한병철은 《피로사회》에서 신자유주의 시대의 인간을 ‘성과주체’로 읽었다. 과거의 권력이 “강제와 규율”로 명령했다면, 오늘의 인간은 “자율과 경쟁”으로 스스로의 성과를 독려한다. 자유로워진 것 같지만 실상은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개발하고 관리하고 착취한다. 더 탁월한 성과를 내기 위해 스스로 시간을 관리하고, 감정을 관리하고, 건강을 관리하고, 인간관계도 관리한다. 좋은 관계에 투자하고 불필요한 관계는 정리한다. 《피로사회》의 ‘자기 경영’이 《손절사회》에서는 ‘관계 경영’으로 확장된다.
이런 확장은 한병철의 《타자의 추방》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타자는 본래 불편하다.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나와 생각이 다르고, 때로 나를 오해하며 내 기대를 배반한다. 그래서 타자를 만난다는 것은 내가 만든 세계에 균열이 생기는 일이다. 그래서 타자를 배제하고 단절한다. 이는 디지털 세상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SNS는 쉽게 차단할 수 있다. ‘좋아요’ ‘팔로우-언팔’ 버튼은 일종의 권리이자 권력으로 작동한다. 불편한 타자를 하나씩 제거하면 삶은 편안해진다. 게다가 요즘엔 AI가 나를 가장 잘 이해하고 공감하는 친구로 타자의 자리를 대신한다. 하지만 문제는 남는다. 타자를 제거해서 편해졌지만 외로움이 밀려온다. 세계가 작아진다. 나와는 다른 사람을 견디지 않아도 되는 세상은, 결국 나와 비슷한 사람과 나를 닮은 알고리즘만 남는 세상으로 변한다. 한병철이 말하는 ‘같은 것의 지옥’이 발생한다. 이런 ‘같음’은 나를 성장시키지 못한다. 오히려 고립은 깊어지고 자기 확신은 강력해진다. 그래서 나와 다른 타자는 고통스럽지만 필요하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손절이 비단 관계의 단절에만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공동체성의 상실로 이어진다. 한병철의 《서사의 위기》는 이 문제를 다룬다. 본래,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만나고 이야기하고 오해하고 다투고 실망하고 다시 만나고 때로 용서하는 시간과 경험이 쌓이면서 ‘우리’라는 이야기, 즉 ‘서사’가 생긴다. 이를 관계와 공동체의 차원으로 적용해 보면, 손절은 단지 관계를 끊는 일이 아니라 그 서사가 형성될 시간을 삭제하는 일이 된다. 공유된 경험이 결여된 무리는 함께 있어도 동질감을 갖지 못한다. 함께 있다고 모두 공동체가 되는 것은 아니다. 또한 공동체는 단지 비슷한 생각의 사람들이 모인 장소적 개념을 넘어선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충분히 긴 시간을 함께 살아냄으로써 ‘우리의 이야기’를 갖게 된 공유된 정체성 개념이다. 여기엔 당연히 갈등과 인내, 용서와 화해도 포함된다.
진단에 비해 다소 아쉬운 처방전
우리 사회의 이런 진단에 대해 저자는 그 대안으로 ‘경청과 돌봄’, ‘사랑과 연대의 회복’을 이야기한다. 결론의 제목도 ‘사랑은 나의 권력’이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무언가 부족해 보인다. 350페이지에 달하도록 신자유주의, 치료요법 문화, 소비주의, 상품화, 정신의학, 젠더, SNS와 AI까지 동원해 거대한 사회구조를 분석한 뒤, “타인의 이야기를 듣고 사랑해야 한다”라고만 말한다면, 처방전의 크기가 진단서에 비해 너무 초라해 보인다. 신자유주의가 관계를 파괴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개인 몇 명의 경청만으로 신자유주의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단절과 자기 계발’을 비판했지만, 오히려 ‘관계 계발’이라는 심화된 자기 계발로 들어서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도 생긴다.
또 다른 문제도 있다. ‘신자유주의’와 ‘치료요법 문화’를 너무 두드러지게 부각했다. 이는 우리 사회 일면의 현상을 설명하기에는 좋은 이론이지만, 모든 현상에 꼭 들어맞는 진단은 아니다. 가족구조, 노동 환경, 경제 양극화, 디지털 기술, 젠더 및 세대 갈등 같은 변수들은 저마다 다른 역사와 맥락을 가지고 있다. 당연히 그 치료법도 ‘경청과 돌봄’, ‘연대와 사랑’만으론 해결할 수 없다. 특히 그 분석과 해결책으로 심리학과 정신의학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사회학적인 요소가 다소 약화된 경향이 보인다.
그렇다면 교회는?
문제는 기독교 공동체, 즉 교회다. 설교자나 목회자는 “관계의 손절은 옳지 않으니 손절하지 말라”고 쉽게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용서와 사랑’을 역설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동네 약국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아스피린이나 진통제와 같을 수 있다. 순간적 증상의 완화는 가능하지만, 병의 근본적 원인까지 치료하기는 쉽지 않다. 구체적이고 명확해야 한다. 어떤 고통은 견뎌야 하고, 어떤 폭력에서는 도망쳐야 하는지를 분별해야 한다. 또한 사람이 왜 아픈지를 개인의 믿음이나 성격에서만 찾지 않고, 그를 아프게 만드는 관계와 제도와 문화까지 간파하고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도록 도와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설교자는 답을 대신 내려주는 판단자가 아니라 공동체가 자신의 고통을 해석하도록 돕는 해석자여야 한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함께 해결책을 고민하고 실천적 행동으로 나갈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한다. 예를 들어, 갈등이 생겼을 때 누가 옳은지를 곧바로 결정하지 않는 것, 먼저 당사자의 이야기를 충분히 듣는 것, 사실과 감정을 구분하는 것, 개인의 문제인지 구조의 문제인지 파악하는 것, 잘못한 사람에게는 책임을 묻되 사람 자체를 폐기하지 않는 것, 피해자를 보호하되 화해를 강요하지 않는 것, 그리고 회복이 가능한 관계에는 충분한 시간을 허락하는 것들이다. 즉, 사안에 따라 다르기는 하겠지만, 그 방법을 계발하고 가르쳐야 한다. 그 과정 자체가 관계를 형성하고 공동체성을 만드는 중요한 토대가 된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6장 2~5절에서 서로 모순되는 듯이 말한다. 2절에서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고 말하다가, 5절에선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고 명한다. 흥미롭게도 헬라어 원문에서 두 ‘짐’은 서로 다른 단어다. 2절의 ‘짐’(βάρη, burdens)은 함께 져야 할 무거운 부담을, 5절의 ‘짐’(φορτίον, load)은 각자가 감당해야 할 자기 몫의 책임을 가리킨다. 하지만 이 둘은 공동체의 관점에선 모두 필요하다. 내 몫의 삶은 내가 책임져야 한다. 그러나 혼자 감당하기 어려운 당신의 짐에는 내 어깨를 내어주어 도울 수 있다. 완벽한 의존도 아니고 각자도생도 아니다. 공동체 안에서의 진짜 홀로서기다. 주체적 자세를 견지하면서 서로 돕는 것이다. 〈스파이더맨: 브랜드 뉴 데이〉의 피터에게 필요한 것도 이것이었다. 자기 선택에 책임지는 사람이 되면서 다시 타인과 관계를 맺는 것이다. 거미가 탈피하듯 옛 몸을 벗지만, 세상을 완전히 등지고 벗어버리지는 않는 것이다. 기독교적 자율성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에게서 독립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과의 관계가 건강하기에, 타인에게 맹목적으로 의존하지 않는 것이다.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하고 책임지되, 타인의 판단과 자유도 인정한다. 그리고 공동체 안에서 자신의 몫을 감당한다.
‘손절하지 않는 사회’가 해답이 아니다!
고린도전서 12장 21절에서 바울은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지 못하리라”고 말한다. ‘쓸 데가 없다.’ 이보다 더 손절사회의 특징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문장은 없을 것이다. 쓸모의 여부로 누군가를 판단하는 사회가 우리 사회의 자화상이다. 하지만, 몸은 바로 그 쓸모 없어 보이는 지체들을 모두 포함하여 온전함을 이룬다. ‘무해한 교회’ 역시 올바른 방향성은 아니다. 나와 생각이 같은 사람, 정치적 견해가 비슷한 사람, 신학적 취향이 맞는 사람, 나를 불편하게 하지 않는 사람들만 모인 공동체는 편안할 수 있지만, 하나님 나라는 그렇게 만들어지지 않았다. 다양성이 공존한다.
‘손절사회’는 우리 사회의 특징을 드러낸다. 그렇다고 그 해결책이 손절하지 않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거나, 손절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 ‘무해한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피상적인 접근이다. 누구도 떠날 수 없고, 무조건 용서해야 하며, 모든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공동체는 사랑의 공동체가 아니라 폭력적인 공동체다. 오히려 이단·사이비 집단에서 흔히 발견되는 폐쇄적 공동체의 모습에 가까워질 수 있다.
그래서 교회가 제시할 수 있는 대안은 ‘안전하게 갈등할 수 있는 공동체’이다. 다르지만 내쫓거나 단절하지 않아야 한다. 책임을 묻지만 잘라내지 않아야 한다. 상처가 있지만 함께 보듬어 가야 한다. 피해자에게 화해를 강요하지 않지만 그 아픔과 관계가 회복되도록 도울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갈등이 생겼을 때, 함께 그 갈등의 양상을 살피고 분석하고 머리를 맞대는 ‘해석공동체’로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이런 공동체가 관계를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서로의 경계를 침범하지 않고, 갈등을 손절로 끝내지 않고 새로운 서사로 바꾸어 내는 진짜 하나님 나라의 모습일 것이다.
* 함께 나눌 질문
- 내가 생각하는 ‘유해한 사람’과 ‘무해한 사람’의 기준은 무엇인가? 실제 폭력과 위험 때문인가, 아니면 나와 다르고 나를 불편하게 한다는 이유 때문인가?
- 반드시 ‘벗어나야 할 폭력’과 ‘성장하기 위해 통과해야 할 갈등’을 우리는 어떤 기준으로 분별할 수 있을까?
- MBTI·애착유형·정신의학적 진단은 인간을 이해하도록 돕는가, 아니면 사회가 만들어 낸 고통까지 개인의 심리적 문제로 바꾸고 있지는 않은가? 사회의 구조적 문제와 개인의 문제를 잘 분별하고 있는가?
- 우리 교회에는 갈등이 발생했을 때, 그것을 듣고 해석하고 조정하고 책임을 묻고 회복하도록 도울 수 있는, 이른바 ‘해석공동체’가 있는가? 어떻게 이를 만들고 운영할 수 있을까?
- 나는 타인과 함께 살아갈 수 있을 만큼 홀로 서 있는가? 그리고 우리 공동체는 서로 다름에도 함께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아갈 준비가 되어 있는가? 고립과 홀로서기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
글. 임명진 목사
대학에서 문학비평을 전공하고, 하나님의 극적인 개입으로 회심하여 목회의 길에 들어섰다. 선교와 성서신학에 관심이 많아 대학원에서 이를 공부했지만, 실제 청년사역 현장에서 다양하게 고민하고 방황하는 청년들에게 올바른 길을 제시하기 위해 문화해석의 필요성을 느껴 다시 대학원에서 문화/사회학을 공부했다. 2017년부터 서울 북악산 자락에 ‘북악하늘 커뮤니티’를 만들어 목사와 도서관장으로 일하고 있으며, ‘책(인문·사회학)과 영화’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사역하고 있다. 〈가스펠투데이〉 ‘영화와 복음’에 만 6년째 칼럼을 게재하고 있으며, ‘노는 게 제일 좋아’를 목회적 실천 방향으로 잡고 생활하는 한량이다.
피터 파커의 고립과 우리 시대의 고립
현관문에 엉기성기 쳐진 거미줄은 그 집이 이미 인기척이 끊긴 지 오래되었음을 드러낸다. 아무도 찾지 않는 집, 그곳엔 피터 파커가 혼자서 산다. 스파이더맨은 여전히 범죄자를 잡고 위기에 빠진 사람을 구해내고 세상을 이롭게 하는 영웅으로 활약한다. 하지만 그 거미 가면 속의 피터는 누구도 기억하지도, 알지도 못한다. 옛 애인 MJ도, 절친 내드도 그를 모른다. 세상에 존재하지만 누구의 기억에도 없는 사람. 바로 영화 〈스파이더맨: 브랜드 뉴 데이〉의 피터의 현실이다. 그는 세상과 단절되어 있고, 관계에서 고립되어 있다.
그런데 그의 고립에는 이유가 분명하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자기 때문에 위험에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 그들의 기억에서 지워지는 길을 스스로 선택했다. 자기방어가 아니라 타인을 위한 자기희생이다. 그래서 그의 고립은 처연하면서도 숭고하다. 하지만 동기의 선함이 항상 결과의 선함으로 이끌진 않는다. 사랑과 헌신으로 선택한 결정이라 해도, 고립은 고립이다. 과연 타인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그 사람과의 관계 자체를 제거하는 것이 진짜 사랑의 완성일까? 사랑하기에 떠난다는 말은 얼마나 진실할까? 사랑하는 사람들의 안전을 얻었지만, 그들과 나눴던 추억과 관계를 잃고 자신의 존재마저 상실한다면, 그게 옳은 결정일까?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도 관계를 지우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다만 이유는 피터와는 사뭇 다르다. 피터가 타인을 보호하기 위함이었다면, 우리는 종종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타인을 지운다. 나에게 상처를 주고, 스트레스를 주고, 나와 맞지 않고, 내 삶에 도움 되지 않으니 지운다. 무엇보다 나에게 ‘무해한 사람’이 아니기에 관계를 끊는다. 신체적·정서적·경제적 무해함을 지나치게 추구하는 태도는 때로 ‘손절’이라는 선택으로 이어진다.
스파이더맨 브랜드 뉴 데이 스틸컷 출처 엠파이어
외로움의 역설, 단절과 손절
이승연의 《손절사회》는 이 기묘한 현상의 이면을 파헤친다. 책의 부제부터 직설적이다. ‘손익계산이 되어버린 인간관계, 연결 불가능성의 시대에 관한 탐구’. 저자가 인터뷰에서도 밝혔듯이 ‘손절’은 투자 용어다. 더 큰 손실을 막기 위해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보유자산을 처분하는 적극적인 형태의 자기방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 용어가 인간관계 안으로 슬그머니 들어왔다. 사람을 만나고 헤어지는 일에 ‘손실’과 ‘이익’이라는 경제적 언어가 붙는다. 책 표지도 매우 인상적이다. 계산기 형상이다. 그런데 이상한 계산기다. 숫자와 사칙연산 기호 사이에, ‘MUTE’, ‘BLOCK’, 그리고 몇몇 ‘이모티콘’ 버튼이 있다. 감정의 용어다. 이제 계산기는 돈만 계산하지 않는다. 사람과 관계까지 계산한다. 이 사람은 나에게 유익한가, 유해한가? 나를 성장시키는가, 소모시키는가? 내 감정적 에너지 소모의 효율성은 어떤가? 투자로서 가치가 있는가? 그래서 엔터를 누른다. ‘BLOCK’
저자는 여기서 우리가 왜 사람과 관계를 이렇게 생각하게 되었는지를 탐구한다. 특히 신자유주의와 치료요법 문화가 어떻게 인간에게 고통을 회피하고, 자신을 끊임없이 관리하며, 타인을 평가하고 관계마저 최적화하도록 만들었는지를 추적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사라져가는 타자와 관계, 돌봄과 연대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이승연 손절사회 출처 교보문고
고통을 삭제한 곳에서 성장은 가능할까?
저자가 주목하는 대표적인 현상은 ‘치료요법 문화’다. 행복해야 하고, 긍정적이어야 하고, 스트레스도 없고 자존감도 높아야 한다. 좋은 말이다. 그런데 세상은 항상 그렇게만 흘러가지 않는다. 슬프고 힘들 때도 있고, 감정적 손실을 겪기도 한다. 실패와 절망도, 이로 인한 아픔과 고통도 다가오고, 상처가 생기기도 한다. 문제는 사람들이 이런 현상들을 더 이상 자신의 성찰과 관심을 요구하는 ‘관계적 사건’으로 보지 않고, 치료하거나 회피해야 할 ‘감정적 손상’으로 인식한다는 데 있다. 그러면 해결책은 간단하다. 관계를 끊으면 된다. 갈등을 회피하고 갈등의 대상을 제거하면 된다. 그리고 우리 사회는 이런 방법을 성공적인 처세술이자 인간관계로 평가하고 칭송한다. 시중에 등장하여 베스트셀러가 된 성공을 위한 자기계발서의 상당 부분은 이런 관점을 담고 있다.
당연히 끊어야 할 관계는 있다. 폭력과 학대, 지속적인 착취와 권력남용, 부당한 성적·경제적 요구는 사라져야 한다. 문제는 이런 ‘부당한 폭력’과 ‘불편함’을 구별하지 못하는 태도이다. 나를 파괴하는 관계에서 벗어나는 것과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타자를 제거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모든 고통이 사람을 성장시키는 것은 아니지만, 고통을 전혀 통과하지 않은 성숙도 기대하기 어렵다. 거미는 성장을 위해 탈피한다. 기존의 외골격을 벗어던지는 순간 가장 취약해지지만, 그 과정 없이는 더 큰 성체로의 성장은 이뤄지지 않는다. 탈피하지 않으면 성장할 수도 없다. 고통의 시간을 견뎌내야 한다. 껍질을 벗는 것은 고통스럽지만 꼭 필요한 과정이다.
한병철의 진단과 손절사회
저자는 사람과 사회를 ‘프로필’로 보는 현상에 주목한다. 특히 MBTI는 누군가를 만났을 때, 상대방을 이해하는 필수요소로 작동한다. 하지만 복잡하고 다양하며 때로 모순적이기까지 한 인간을 MBTI와 같은 하나의 지표만으로 설명하거나 단순화하는 건 편리하지만 오해와 왜곡을 초래한다. 사람은 프로필보다 크고 복합적이다. 그런데 프로필과 지표는 분류에 쉽고 예측하기에 유용하다. 관리가 가능해진다. 이런 관리의 편이성은 경쟁과 성과로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 현대사회에 꼭 필요한 덕목으로 자리 잡는다. 이 지점에서 한병철의 저작들은 ‘손절사회’를 해석하는 데 도움을 준다.
먼저, 한병철은 《피로사회》에서 신자유주의 시대의 인간을 ‘성과주체’로 읽었다. 과거의 권력이 “강제와 규율”로 명령했다면, 오늘의 인간은 “자율과 경쟁”으로 스스로의 성과를 독려한다. 자유로워진 것 같지만 실상은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개발하고 관리하고 착취한다. 더 탁월한 성과를 내기 위해 스스로 시간을 관리하고, 감정을 관리하고, 건강을 관리하고, 인간관계도 관리한다. 좋은 관계에 투자하고 불필요한 관계는 정리한다. 《피로사회》의 ‘자기 경영’이 《손절사회》에서는 ‘관계 경영’으로 확장된다.
이런 확장은 한병철의 《타자의 추방》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타자는 본래 불편하다.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나와 생각이 다르고, 때로 나를 오해하며 내 기대를 배반한다. 그래서 타자를 만난다는 것은 내가 만든 세계에 균열이 생기는 일이다. 그래서 타자를 배제하고 단절한다. 이는 디지털 세상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SNS는 쉽게 차단할 수 있다. ‘좋아요’ ‘팔로우-언팔’ 버튼은 일종의 권리이자 권력으로 작동한다. 불편한 타자를 하나씩 제거하면 삶은 편안해진다. 게다가 요즘엔 AI가 나를 가장 잘 이해하고 공감하는 친구로 타자의 자리를 대신한다. 하지만 문제는 남는다. 타자를 제거해서 편해졌지만 외로움이 밀려온다. 세계가 작아진다. 나와는 다른 사람을 견디지 않아도 되는 세상은, 결국 나와 비슷한 사람과 나를 닮은 알고리즘만 남는 세상으로 변한다. 한병철이 말하는 ‘같은 것의 지옥’이 발생한다. 이런 ‘같음’은 나를 성장시키지 못한다. 오히려 고립은 깊어지고 자기 확신은 강력해진다. 그래서 나와 다른 타자는 고통스럽지만 필요하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손절이 비단 관계의 단절에만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공동체성의 상실로 이어진다. 한병철의 《서사의 위기》는 이 문제를 다룬다. 본래,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만나고 이야기하고 오해하고 다투고 실망하고 다시 만나고 때로 용서하는 시간과 경험이 쌓이면서 ‘우리’라는 이야기, 즉 ‘서사’가 생긴다. 이를 관계와 공동체의 차원으로 적용해 보면, 손절은 단지 관계를 끊는 일이 아니라 그 서사가 형성될 시간을 삭제하는 일이 된다. 공유된 경험이 결여된 무리는 함께 있어도 동질감을 갖지 못한다. 함께 있다고 모두 공동체가 되는 것은 아니다. 또한 공동체는 단지 비슷한 생각의 사람들이 모인 장소적 개념을 넘어선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충분히 긴 시간을 함께 살아냄으로써 ‘우리의 이야기’를 갖게 된 공유된 정체성 개념이다. 여기엔 당연히 갈등과 인내, 용서와 화해도 포함된다.
진단에 비해 다소 아쉬운 처방전
우리 사회의 이런 진단에 대해 저자는 그 대안으로 ‘경청과 돌봄’, ‘사랑과 연대의 회복’을 이야기한다. 결론의 제목도 ‘사랑은 나의 권력’이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무언가 부족해 보인다. 350페이지에 달하도록 신자유주의, 치료요법 문화, 소비주의, 상품화, 정신의학, 젠더, SNS와 AI까지 동원해 거대한 사회구조를 분석한 뒤, “타인의 이야기를 듣고 사랑해야 한다”라고만 말한다면, 처방전의 크기가 진단서에 비해 너무 초라해 보인다. 신자유주의가 관계를 파괴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개인 몇 명의 경청만으로 신자유주의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단절과 자기 계발’을 비판했지만, 오히려 ‘관계 계발’이라는 심화된 자기 계발로 들어서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도 생긴다.
또 다른 문제도 있다. ‘신자유주의’와 ‘치료요법 문화’를 너무 두드러지게 부각했다. 이는 우리 사회 일면의 현상을 설명하기에는 좋은 이론이지만, 모든 현상에 꼭 들어맞는 진단은 아니다. 가족구조, 노동 환경, 경제 양극화, 디지털 기술, 젠더 및 세대 갈등 같은 변수들은 저마다 다른 역사와 맥락을 가지고 있다. 당연히 그 치료법도 ‘경청과 돌봄’, ‘연대와 사랑’만으론 해결할 수 없다. 특히 그 분석과 해결책으로 심리학과 정신의학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사회학적인 요소가 다소 약화된 경향이 보인다.
그렇다면 교회는?
문제는 기독교 공동체, 즉 교회다. 설교자나 목회자는 “관계의 손절은 옳지 않으니 손절하지 말라”고 쉽게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용서와 사랑’을 역설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동네 약국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아스피린이나 진통제와 같을 수 있다. 순간적 증상의 완화는 가능하지만, 병의 근본적 원인까지 치료하기는 쉽지 않다. 구체적이고 명확해야 한다. 어떤 고통은 견뎌야 하고, 어떤 폭력에서는 도망쳐야 하는지를 분별해야 한다. 또한 사람이 왜 아픈지를 개인의 믿음이나 성격에서만 찾지 않고, 그를 아프게 만드는 관계와 제도와 문화까지 간파하고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도록 도와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설교자는 답을 대신 내려주는 판단자가 아니라 공동체가 자신의 고통을 해석하도록 돕는 해석자여야 한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함께 해결책을 고민하고 실천적 행동으로 나갈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한다. 예를 들어, 갈등이 생겼을 때 누가 옳은지를 곧바로 결정하지 않는 것, 먼저 당사자의 이야기를 충분히 듣는 것, 사실과 감정을 구분하는 것, 개인의 문제인지 구조의 문제인지 파악하는 것, 잘못한 사람에게는 책임을 묻되 사람 자체를 폐기하지 않는 것, 피해자를 보호하되 화해를 강요하지 않는 것, 그리고 회복이 가능한 관계에는 충분한 시간을 허락하는 것들이다. 즉, 사안에 따라 다르기는 하겠지만, 그 방법을 계발하고 가르쳐야 한다. 그 과정 자체가 관계를 형성하고 공동체성을 만드는 중요한 토대가 된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6장 2~5절에서 서로 모순되는 듯이 말한다. 2절에서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고 말하다가, 5절에선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고 명한다. 흥미롭게도 헬라어 원문에서 두 ‘짐’은 서로 다른 단어다. 2절의 ‘짐’(βάρη, burdens)은 함께 져야 할 무거운 부담을, 5절의 ‘짐’(φορτίον, load)은 각자가 감당해야 할 자기 몫의 책임을 가리킨다. 하지만 이 둘은 공동체의 관점에선 모두 필요하다. 내 몫의 삶은 내가 책임져야 한다. 그러나 혼자 감당하기 어려운 당신의 짐에는 내 어깨를 내어주어 도울 수 있다. 완벽한 의존도 아니고 각자도생도 아니다. 공동체 안에서의 진짜 홀로서기다. 주체적 자세를 견지하면서 서로 돕는 것이다. 〈스파이더맨: 브랜드 뉴 데이〉의 피터에게 필요한 것도 이것이었다. 자기 선택에 책임지는 사람이 되면서 다시 타인과 관계를 맺는 것이다. 거미가 탈피하듯 옛 몸을 벗지만, 세상을 완전히 등지고 벗어버리지는 않는 것이다. 기독교적 자율성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에게서 독립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과의 관계가 건강하기에, 타인에게 맹목적으로 의존하지 않는 것이다.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하고 책임지되, 타인의 판단과 자유도 인정한다. 그리고 공동체 안에서 자신의 몫을 감당한다.
‘손절하지 않는 사회’가 해답이 아니다!
고린도전서 12장 21절에서 바울은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지 못하리라”고 말한다. ‘쓸 데가 없다.’ 이보다 더 손절사회의 특징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문장은 없을 것이다. 쓸모의 여부로 누군가를 판단하는 사회가 우리 사회의 자화상이다. 하지만, 몸은 바로 그 쓸모 없어 보이는 지체들을 모두 포함하여 온전함을 이룬다. ‘무해한 교회’ 역시 올바른 방향성은 아니다. 나와 생각이 같은 사람, 정치적 견해가 비슷한 사람, 신학적 취향이 맞는 사람, 나를 불편하게 하지 않는 사람들만 모인 공동체는 편안할 수 있지만, 하나님 나라는 그렇게 만들어지지 않았다. 다양성이 공존한다.
‘손절사회’는 우리 사회의 특징을 드러낸다. 그렇다고 그 해결책이 손절하지 않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거나, 손절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 ‘무해한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피상적인 접근이다. 누구도 떠날 수 없고, 무조건 용서해야 하며, 모든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공동체는 사랑의 공동체가 아니라 폭력적인 공동체다. 오히려 이단·사이비 집단에서 흔히 발견되는 폐쇄적 공동체의 모습에 가까워질 수 있다.
그래서 교회가 제시할 수 있는 대안은 ‘안전하게 갈등할 수 있는 공동체’이다. 다르지만 내쫓거나 단절하지 않아야 한다. 책임을 묻지만 잘라내지 않아야 한다. 상처가 있지만 함께 보듬어 가야 한다. 피해자에게 화해를 강요하지 않지만 그 아픔과 관계가 회복되도록 도울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갈등이 생겼을 때, 함께 그 갈등의 양상을 살피고 분석하고 머리를 맞대는 ‘해석공동체’로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이런 공동체가 관계를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서로의 경계를 침범하지 않고, 갈등을 손절로 끝내지 않고 새로운 서사로 바꾸어 내는 진짜 하나님 나라의 모습일 것이다.
* 함께 나눌 질문
글. 임명진 목사
대학에서 문학비평을 전공하고, 하나님의 극적인 개입으로 회심하여 목회의 길에 들어섰다. 선교와 성서신학에 관심이 많아 대학원에서 이를 공부했지만, 실제 청년사역 현장에서 다양하게 고민하고 방황하는 청년들에게 올바른 길을 제시하기 위해 문화해석의 필요성을 느껴 다시 대학원에서 문화/사회학을 공부했다. 2017년부터 서울 북악산 자락에 ‘북악하늘 커뮤니티’를 만들어 목사와 도서관장으로 일하고 있으며, ‘책(인문·사회학)과 영화’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사역하고 있다. 〈가스펠투데이〉 ‘영화와 복음’에 만 6년째 칼럼을 게재하고 있으며, ‘노는 게 제일 좋아’를 목회적 실천 방향으로 잡고 생활하는 한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