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사.세 season (1)] : "비를 피하려는 이들"

2024-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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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서, 더위를 피해 시원한 곳으로 가다
우리는 8월을 피서철이라고 부른다. "더위를 피하여 시원한 곳으로 피함"이라는 뜻인 피서와 걸맞게 모두는 이곳저곳으로 떠나, 더위를 피해 쉼의 시간을 갖는다.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잠시나마 쉬는 시간을 통해 한 해의 나머지 일상을 영위하기 위하려는 노력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삶의 질을 향상하기 위해 더위를 피하는 이때, 누군가는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무언가를 피해야만 한다. 뜨거운 여름날, 3회의 걸쳐서 그런 이들에게 주목해 보려고 한다. 특별히 이번 호는 살기 위하여 비를 피하려는, 피해야만 하는 그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올해는 유난히 비가 많이 왔다. 7월 한 달 중 비 내린 날은 지난 10년 중 가장 많았으며 강수량도 최다 수준을 기록했다. 해가 바뀌면 바뀔수록 비는 점점 더 많이 그리고 자주 내린다. 이러한 기후의 변화는 우리의 생활에도 많은 변화를 불러왔다. 이제는 외출할 때 가벼운 우산을 가지고 나가는 것이 일상이 되었으며, MZ 사이에서는 레인부츠, 초경량 우산 등 장마 기간에 구비해야 하는 아이템들도 하나씩 늘어가고 있다. 이렇듯, 내리는 비는 우리의 일상을 바꾸어 놓기도 하지만 매년 동일하게 우리의 일상에 침투해 오기도 한다. 여름에 내리는 비, 장마는 해마다 우리에게 ‘수해’라는 사건을 가져온다. 우리는 해마다 수해로 농가가 피해를 보며 그들의 일터에 지장이 생겼다는 뉴스를 듣고 했다. 또 수해로 인해 이재민이 발생했다는 뉴스도 매년 전해져온다. 그렇지만 우리의 귀에는 이런 현실보다도 채솟값이나 과일값이 인상되었다는 이야기가 더욱 잘 들려왔다. 이는 우리가 수해에 대해 무감각했기 때문일까? 수해가 나의 이야기가 아니라서 금방 잊혔던 것일까?

 

살아남기 위해  비를 피해야만 하는 이들의 이야기
재작년 2022년 8월 8일, 신림동 반지하 수해 사건은 우리에게 잊지 못할 충격을 안겨준다. 이 사건은 일터에서 벌어진 일도 아니고 농가나 길거리에서 벌어진 일도 아니다. 특별한 어떠한 장소가 아닌 본인이 살고 있는 집이라는 일상의 공간에서 벌어진 일이다. 수해는 그들의 생활에 피해를 준 것을 넘어, 일가족 3명이 목숨을 잃는 참사가 되었다. 여성 가장 1명, 여성 가장의 딸 1명, 여성 가장의 지체 장애인 언니 1명이 물이 불어나는 집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이날 상도동에서도 1명이 침수되는 집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목숨을 잃었다. 그는 기초생활 수급 대상자였다. 전문가라 불리는 이들과 정치인들은 사고 현장을 방문했고 다시는 이러한 사고는 없을 것이라며 호언장담 했다. 그들은 사람이 안전하게 살 수 없는 반지하가 문제이기에 반지하를 없애는 정책을 내놓았다. 그리고 이 대안으로 주거 이주 비용 지원과 일정 기간 주거비를 지원해 준다는 대안을 세웠다.


 <2022년 8월 8일 반지하 침수가 발생했던 서울시 관악구 신림동 소재 주택 반지하, 출처: 환경정의>


참사가 발생한 지 2년이 지난 지금, 무엇이 바뀌었을까? 지난 6월 환경정의는 정보공개 요구를 통해 서울시를 대상으로 ‘반지하 침수 방지시설 설치 현황’ 자료를 요구했다. 이 자료에 따르면 서울 전체 반지하 23만 7619 가구 중 단 2%에 해당하는 4,982가구만이 지상으로 이주할 수 있었다. 심지어 이 중 정부의 지원을 받아 이주한 가구는 단 786가구에 불과했다. 정부는 반지하 거주 가구에 보증금 무이자 융자와 공공임대주택 우선 공급을 정책으로 내세웠지만, 2023년 예산 수립 과정에서 정작 공공임대주택 예산을 대폭 삭감했다. 작년 신림동 참사가 일어났던 서울시는 반지하 전수조사를 이듬해 6월까지 완료하였지만, 침수 위험 주택에 물막이판조차 제대로 설치하지 못했다. 서울 시내 반지하주택 중 12%(2만 8439호)가 차수시설, 피난시설 등 침수 방지시설이 필요한 침수 위험 가구였지만 실제로 시설을 설치한 가구는 33%(5108가구)이고 나머지 67%(1만 144가구)는 여전히 피난시설이 설치되지 않았다. 더욱이 절망적인 현실은, 재작년 8월 참사가 일어났던 신림동 주택 지하, 그 앞집에 아직도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이다.

또다시 여름은 우리를 찾아왔고, 이어 장마도 우리에게 다가왔다.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가? 여전히 우리는 그날의 사건을 ‘그들’의 문제로만 여기고 있지 않은가? 마치 영화 기생충의 한 장면처럼 말이다. 극 중에서도 비가 내렸다. 이 비로 인해 반지하에 살고 있던 기택(송강호)과 이웃들의 집은 물에 잠긴다. 집중호우로 인한 피해는 기택과 그의 가족들에게는 재난이고 참사이며 생존이 달린 비극적인 기억이다. 하지만 똑같은 비도 연교(조여정)에게는 오히려 “미세먼지 제로”의 날을 만들어 준 하나의 해프닝에 불과하다.

집중호우 다음 날, 기택과 연교은 얼굴을 마주했다. 그 둘은 서로 얼굴을 마주하며 다송(여정의 아들)이 생일파티를 위해 장을 보러 다닌다. 파티를 준비하는 연교에게는 집중호우 이후 맑아진 하늘을 마주할 여유가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지난밤 쏟아지는 비로 인해 집에 불어난 물을 퍼내느라 피부가 망가져 버린 기택의 얼굴을 마주할 여유 혹은 마음은 없었던 듯하다.


<출처: 영화 '기생충'>

우리는 연교의 모습에서 우리의 얼굴을 엿볼 수 있다. 7월 내내 내리는 비는 우리에게 출근길과 퇴근길을 부단히도 걱정하게 한다. 애써 계획한 휴가에 비가 내리면 어쩌지라는 망설임을 갖게 한다. 혹은 열심히 준비한 여름성경학교, 수련회의 물놀이가 비로 인해 무산되면 어떡하냐는 고민도 갖게 한다. 우리가 이런 고민을 할 때, 비를 피하지 못하는 누군가는 그 자리에서 비가 나를 지나가길 간절히 바라고 있다.

누군가의 목숨을 앗아간 비극적 참사인 수해는 결코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결코 사사로운 문제도 아니고 사적인 문제는 더욱이 아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공적인 삶으로 건져 내야 한다. 결국 문제는 부지런히 돈을 벌어 이주하지 않는 그들이 아니며, 자신의 집을 보수하지 않는 그들이 아니다. 수해의 문제는 부지런히 돈을 벌어 이주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우리들이며, 정책을 보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우리들이다. 개인의 노력과 개인의 해결을 촉구하며, 참사를 공적인 영역으로 인지하지 못하는 ‘우리’공동체가 문제이다.


무언가를 피해야만 살아 남을 수 있는 그들의 문제, 사적문제가 아닌 공적문제로 

만약 우리 사회가 이 문제를 공적으로 인식하는 사회였다면 어땠을까? 그래서 그들에게 공적인 삶이 가능했다고 가정해 본다면? 그들의 목소리는 높아지고 높아져 권력자들에게 ‘들릴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공적인 삶의 영역이 부여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목소리 대신, 그들의 죽음만이 사회에 도달하게 된 것이다. 그들에게 공적인 삶의 영위가 가능했더라면 공동의 방패를 가지고 자신들의 죽음을 막을 수 있어야 했지만, 방패가 없는 그들은 지금도 고작 ‘물막이’하나를 방패 삼아 살아가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공적인 삶을 살아가야 할까? 교회는 어떠한 방식으로 공적인 삶을 가능하게 할 수 있을까? 교회는 공적인 공간이 되어야 하며, 믿는 사람들의 모임인 교회는 공적 공간에 지속적으로 노출 되어야 한다.
교회는 그들이 사는 세상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의 이야기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이야기를 전해야 한다. 그들이 찾아올 수 있는 공간이 되어 낯선 사람들을 마주하고 환대해야한다. 또한 ‘성문 밖’ 이야기를 선포하고 ‘성문 밖’으로 나갈 것을 가르쳐야한다. 집 없는 이와 돈 없는 이, “도저히 혼자서는 도달하지 못하는 수위의 음량의 목소리를 가진 이들이” 모이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 교회를 이루는 그리스도인들이 공적 공간에 참여하여 낯선 이와 마주함을 통해 차이를 생성하고 차이를 토론해야한다. 생각과 자원을 서로 공유해야하며 “생동하는 실체”가 되어야한다. 믿는 사람들의 모임인 교회의 구성요소인 '사람들'은 공적인 공간에 지속적으로 노출되어야한다. 그리하여 반복적으로 낯선이들을 마주해야하고, 타인의 얼굴을 마주할 수 있는 공간에 찾아가야 한다. 무엇보다 개인의 일상적인 장소가 공적인 장소가 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자신을 노출시켜야한다. 우리는 공적인 공간에 노출될 수록, 낯선 사람들을 마주할 수록, 반복적으로 군중을 접할수록 두려움이 사라지며 우리 안에 가지고 있던 높은 벽이 허물어지기 때문이다.

'성문 밖' 이야기를 선포하며 그 곳으로 나가야 한다고 가르치는 교회, 그리고 '성문 밖'에서 낯선 이의 얼굴을 마주하며 나 아닌 다른 이에게 시선과 마음을 돌리는 교회 구성원들. 바로 '성문 밖' 예수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외치던 외침이 아닐까. 


글. 김민아 (문화선교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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