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돌아온 정치의 계절, 그리스도인의 정치 참여에 대해

2024-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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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의 사회적 신뢰도가 땅에 떨어졌다는 말조차 이제는 별 감흥도 흥분도 안타까움도 없어진 듯하다. 어떤 이는 그런 패배주의적 발언을 자제하라며, 매스컴과 언론이 조작한 탓에 한국교회의 선행이 묻히고 작은 흠결이 마치 모든 교회가 다 그런 양 오해되고 있다고 불평을 늘어놓는다. 전혀 없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언론과 미디어가 그런다고 해서, 그들에게 근원적 원인을 돌려서야 문제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겠는가?

그럼 일반 언론보다 기독교 언론의 보도 행태는 더 신뢰할 만한가? 교계에 대한 부당한 비난에 방어와 해명은 필요한 작업이겠으나, 때로 정치적 편향을 그대로 내보이는 기독교 언론의 발언들을 보면 더하면 더했지, 세속 언론이나 방송보다 더 우월한 도덕적 품격을 드러내지는 못한다. 그렇다면, 차라리 정치에 입을 닫는 편이 낫지 않을까? 영혼 구원과 복음에 대해서만 말하는 것이 오히려 교회의 본분이 아니겠는가?

진정한 그리스도의 제자라면, 바른 신학 위에 서 있는 교회라면 그리 말해서는 안 된다. 정치에 대해 말하는 것과 침묵하는 것은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다. 전자는 기독교 신앙의 본분에 속하는 일이며, 정치에 침묵하는 것은 제자로서의 삶을 외면하는 일이다. ‘침묵’이란 물리적으로 말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때로는 빌라도 앞의 주님처럼 침묵할 때가 있으나, 그것은 묵인이나 회피가 아니라 말하지 않음이 더 강력한 발화자의 메시지를 드러낸다.

교계의 정치적 지형은 여의도만큼 복잡하고 또 단순하다. 수도권만 놓고 보면, 보수적 교단과 진보적 교단의 정치적 지향이 대체로 다르고, 대형교회와 중소형 교회의 정치적 지향이 대체로 다르다. 항존직 그리스도인과 젊은 그리스도인의 정치적 지향이 대체로 다르고, 강남의 교회와 강북의 교회가 그 정치적 지향이 대체로 서로 다르다. 각각이 지지하는 정치세력에 대한 충성도는 십자가를 향한 그것만큼 아니, 때로는 그것보다 더 결연하고 극단적이기도 하다.

 

정치 양극화와 교회의 정치

올해는 우리나라에 총선이 예정되어 있다. 직업 정치인들은 또다시 극단적 구도로 서로에 대한 증오의 정치를 일삼으며 정치 전쟁을 부추기고 있다. 급기야 야당 대표나 여당 국회위원을 향한 테러까지 발생했는데, 생명에 대한 위협이며 민주주의에 대한 중대한 도전임에도 불구하고 온갖 음모론만 난무하고 있다. 민생과 미래 세대에 대한 비전을 토론하기보다 서로를 악마화하며 국민을 선동하는 정치가 횡행하고 있다.

미움과 증오가 한국 정치를 지배하는 이유에 대해, 아직 근대적 의미의 시민사회가 성숙하지 못하였고, 한반도 분단 상황이 지속되면서 반공주의에 익숙한 세대의 불안감이 격렬한 이념 투쟁으로 전화되고 있다는 전문가들의 분석도 설득력이 있다. 이에 비해 최근 부쩍 목소리가 커진 청년들의 경우 부모 세대와는 전혀 다른 기준이 있는 듯하다. 이념 지향성보다는 자신들에게 실질적인 이득을 줄 세력을 지지하는 경향이 매우 강력하게 나타난다.

극단적인 정치 양극화는 우리나라의 일만은 아니다. 지난 미국 대선 국면에서 공화당 대통령 후보였던 트럼프를 지지하는 이들이 국회의사당에 난입하는 사건이 있었다. 이 충격적인 사건에 대한 법적 처분도 아직 마무리되지 못했는데, 트럼프를 지지하는 이들과 반대하는 이들의 극한 대립이 올해 치러질 미국 대선을 또다시 파국으로 몰고 갈 가능성이 커졌다. 그를 지지하는 이들 대부분이 복음주의 백인 그리스도인이라는 점이 씁쓸하다.

남미를 제외하면, 최근 대부분 대륙에서 근본주의 우파 정권이 득세하고 있다. 전쟁, 경제 위기 등의 불안한 국제 정세에 따라 자국민 우선주의, 보호 무역주의, 지구화를 지양하는 블록화 등의 보수화 흐름이 발생하고 있다. 유럽의 경우 인도주의적 난민 보호 정책을 포기하거나 약화하는 정권이 지지를 받고, 자국민의 일자리를 우선하려는 정책이 선택을 받는다. 그래서 기후 위기 대응이나 전쟁 종식을 위한 대화에 실질적 힘이 실리지 못하고 있다.

팬데믹 이후 전 지구는 물가와의 전쟁을 벌이고 있으나 좀처럼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가운데 상류층과 중, 하류층의 소득격차는 날로 커지고 있다. 생존 자체의 위기에 내몰리는 이들이 늘어나니 유럽 농민들의 트랙터 시위와 같이 성난 민심은 정치권을 상대로 분노를 표출하게 된다.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 양측의 긴장이 대화와 토론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면 좋지만, 빈부격차가 극심해지는 상황에서는 그럴 여유가 없다. 투쟁만이 살길이라 느낀다.

경제적인 불안과 정치의 양극화는 불가분의 관계다. 학자들은 정치적 양극화가 겉으로는 선호하는 이념이나 노선의 차이처럼 보이지만, 좀처럼 그 갈등의 골이 좁혀지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합리적인 선택이 아니라 ‘정서적인 양극화(affective polarization)’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밝힌다.1 심지어 유권자들은 특정 정당이나 세력을 향한 지지가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한다고 믿게 되었다. 이는 가족에게서 느끼는 유대감, 연대감과 같은 정서적 특성을 띤다는 것이다. 경제적인 불안과 생존에 대한 위협은 자신들의 이득을 보장해 줄 정치세력을 지지함으로써 가족적 유대감을 중심으로 강력한 정서적 연대를 형성하게 된다.

‘정서적 양극화’를 부추기는 요소 중 가장 강력한 도구는 뉴미디어 ‘유튜브’이다. 과거에도 특정 채널의 뉴스만을 시청하는 양극화가 있었지만, 유튜브는 이 기제를 더욱 강화하여 비슷한 성향의 콘텐츠만을 소비하게 함으로써 정치적 정체성을 강화하고 자신의 지지에 대해 확신을 하게 만든다. 이런 소비 행태는 자신이 지지하는 세력에 대한 인식에는 별 영향을 끼치지 않으나 반대하는 세력에 대한 반감을 더욱 고조시킨다.2

교회의 경우 이러한 양상은 더 명확하게 드러난다. 종교적 공동체는 자신들의 종교적 신념에 비추어 정치세력의 주장을 분별해야 하는데, ‘정서적 양극화’ 양상은 종교적 신념이나 신앙윤리의 실천을 무력화하고 세속 정치의 논리를 그대로 답습하도록 만든다. 최근 한 조사(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지앤컴에 의뢰: 2023.1-2월)에 따르면, 50대 이상의 한국교회 목회자는 일반인들보다 보수 성향이 월등히 높았다.3

한편 19-34세의 기독청년들의 인식조사(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지앤컴에 의뢰: 2023.11월)에 따르면, 청년들의 정치 성향은 “보수도 진보도 아니다.”가 52.2%, “진보(약간 진보와 매우 진보)”가 26%로 나타났고, 정치 관심도에 있어서도 “조금 있다.”(39.3%)와 “많이 있다.”(8.2)를 합치면 47.5%로 나타났다.4 기독청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청년들의 정치 관심도가 전에 없이 높아져 있다.

목회자들의 성향을 놓고 추측하건대, 교회의 기성 세대의 정치적 지형과 기독청년들의 정치적 지형에는 차이가 어느 정도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서적 연대를 기반한 ‘정서적 양극화’는 한국교회의 신앙적 공동체성과 어떤 연관을 맺는가? 조금 과장해서 표현한다면, 기성 세대와 유사한 정치적 성향을 가진 청년들, 그러니까 위에 언급한 통계를 따라 산술적으로만 보면 보수 성향의 기독청년 21.8%만이 교회에서 가족적 유대감을 형성할 가능성이 클 것이다.

이런 분석의 함의는, 한국교회의 목회자와 기성 세대가 정치적 성향을 바꿔야 한다던가, 한국 기독청년의 정치 성향이 보수적인 방향으로 수렴할 것이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신앙 공동체의 가족적 유대감은 매우 중요한 결속의 요소인데, 서로 다른 정치 지향을 가진 신구 세대의 갈등이 표면화되어 종교 특유의 공동체성이 심각한 균열을 맞게 된다면, 사회적 갈등을 조정하고 중재해야 하는 교회가 오히려 갈등의 진원이 되지나 않을까 근심이 크다.

그래서 아예 교회에서 정치 이야기나 정치적 의제에 대한 언급을 자제하는 것이 한국교회의 상례처럼 되어 있다. “교회에서는 정치 이야기는 하지 않고, 신앙에 관련한 이야기만 하는 것이 좋다.”는 식의 교훈이 마치 지혜로운 것처럼 회자하기도 한다. 워낙 갈등이 심한 주제이다 보니 그리 말하는 취지를 충분히 이해한다. 사랑의 교제를 나눠야 할 교회에서 다툴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를 하느니, 자신의 정치적 정체성은 드러내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다.

과연 그러한가? 앞서도 밝혔듯이, 한국인 대부분이 정치적 성향을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요소로 받아들이고 있는 상황에서, 이를 표면화하지 않는 신앙 공동체가 정서적인 유대감을 깊이 유지할 수 있을까? 아니면, 정치적 성향이 유사한 이들끼리 모여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차라리 자연스러운 것일까? 선거철만 되면 일부 목회자들이 특정 세력을 지지하며 이념 갈등을 부추기는데, 목회자는 그럴 수 있어도 교인들은 정치를 논하면 안 되는 일인가?

 

정치와 신학

정치를 다루는 신학이 ‘정치신학’이다. 정치적인 것에 대해 신학적으로 성찰하는 것인데, 정치신학은 중립적이지 않다. “중립적이지 않다.”라는 말의 의미는, 특정 정치세력을 지지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정치적 의제에 대해 중립적 입장을 취하지 않고 비판하며 성찰한다는 의미이다. 교회에서 정치 이야기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식의 주장은 신학적으로 옳지 않다고 평가한다. 신학은 비정치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현재 상황을 유지하려는 의도가 있다고 비판한다.

모든 신학이 정치적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정치신학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정의와 사랑의 세계를 도모하기 위한 모든 행위를 다룬다. 세상에서 이뤄지는 모든 일이 정치적인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정치란, 여의도의 직업 정치인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우리는 소시민으로 살아가지만, 이웃을 대하는 태도나 심지어 가족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정치적인 관계를 전제한다. 힘을 가진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관계는 언제 어디서나 작동한다.

정치신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가 정치적 세계라고 본다. 그래서 잘못된 힘의 불균형을 고치고, 힘이 없어서 고통받는 이들에게 정의로운 세상이 되도록 하는 것이 교회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힘을 가진 자는 힘을 가진 사람들끼리 모여 살고 싶어 한다. 신앙생활도 유사하다. 권력을 가진 자들이나 비슷한 경제력을 가진 이들끼리 모여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미국의 기독교윤리학자 리처드 니버(Richard Niebuhr)에게는 교회를 분열시키는 도덕적 실패의 결과였다. 그는 교회가 분열하는 원인이 신학이나 교리 때문이 아니라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배제와 차별 때문이라고 보았다.5

한편, 리처드 니버의 형제인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는 ‘기독교 현실주의’를 제시하며, 죄의 결과인 불공정한 체제를 넘어설 수 없는 인간은 현실의 한계를 인정하고 실현 가능한 정의를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회주의식 개혁에도 관심이 많았던 그는 노동조합을 위한 시민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랑은 말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권리를 보장하는 정의로운 제도를 만드는 것이라 보았다.

여성신학도 남성에 비해 제대로 그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는 여성들에게 정의로운 제도를 보장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요즘에는 여성의 사회 진출도 활발해졌고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치는 여성들도 많아져서 예전처럼 사회 제도에 의해서 억압을 받고 있다는 인식은 줄어들었지만, 여성신학은 사회보다 오히려 교회 안에서 해결해야 할 일이 많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남미의 해방신학, 미국의 흑인신학, 우리 70년대의 민중신학이 모두 이런 정치적 신학이었다.

한편, 최근 시민사회와 적극적인 대화를 모색하는 공공신학의 경우 정치신학과는 결이 다르지만, 신학의 공공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맥은 같다. 영국 에딘버러 대학교에서 기독교윤리학을 가르쳤던 던컨 포레스터(Duncan Forrester)는 “교회는 정치에 관여해야 합니다. 교회는 사회 문제에 대한 기독교적 관점을 제시하고 정책 결정에 영향력을 발휘해야 합니다.”라고 주장했다. 그에게는 빈부격차, 차별, 억압과 같은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교회의 역할이었다. 포레스터는 그리스도인들의 정치 참여가 사회의 변화를 추진할 수 있기에 기독교가 결코 중립성을 유지해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6 그가 추천한 그리스도인의 정치적 실천은 ‘사회 문제에 대한 기독교적 관점을 제시하는 캠페인’, ‘정치인들에게 공개 서신 보내기’, ‘선거 투표 참여’, ‘정치 관련 시민 단체 참여’ 등이었다.

공공신학은 이념의 시대에 발전한 정치신학에 비해 오늘의 성숙한 시민참여적 민주주의 사회에서 효능감이 더 높으리라 생각한다. ‘기독교 현실주의’가 국제 질서에서는 여전히 중요한 나침반이 되지만, 오늘 교회가 정치에 참여할 때 공공신학적 감수성이 더 효과적이라 말할 수 있겠다. 물론 가난한 이들을 위한 정치신학을, 모두를 위한 ‘공동의 선’을 지향하는 실천으로 전환할 때 종종 사회 변화의 선명한 비전이 제시되지 않는다는 한계는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나라처럼 극단의 정치 양극화 상황에서 중도를 두텁게 지향하는 공공신학의 효능은 적지 않다. ‘공동의 선’을 위한 교회의 공적 역할을 모색하고 더 좋은 사회로 나아가는 공공신학의 목표가, 지금의 첨예한 갈등의 대결 구도를 유연화하고 정치를 ‘모두의’ 정치로 재구성하는 데 활용될 수 있기를 우선적으로 기대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선거에 참여하는 그리스도인은 ‘공동의 선’을 추구하는 정책과 정치인을 지지해야 한다.

 

공동의 선을 위한 정치에 참여하자

정치를 자신들의 전유물로 생각하고, 선거철만 되면 이리저리 당을 만들어 패거리 다툼을 일삼는 이들에게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 이념과 명분도 중요하지만, 지금처럼 민생이 어려운 때에 우리의 삶을 변화시킬 바른 정책과 제도를 제시하는 이들에게 표를 주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를 인간의 행복을 추구하는 ‘최고선’의 행위라고 했다. 그러니 사사로움이 없이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람들이 소명감을 가지고 정치에 헌신하도록 해야 한다.

빈센트 바코트(Vincent Bacote)는 그리스도인의 정치적 제자도를 설명하면서 ‘공적 거룩함’에 대해 말하는데, 그것은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레 19:2).”라는 말씀에 근거하여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마 22:39).”라는 말씀에서 가장 잘 표현되며, ‘원수를 사랑하는 일(마 5:44; 롬 12:17-22)’에서 절정에 이른다고 한다.7 정치 참여를 통해 ‘공적 거룩’을 성취하고자 하는 그리스도인은 우리 정치권에서 판을 치는 혐오와 차별과 증오와 미움의 행위에 절대 동참하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교회에서 정치적인 이야기를 ‘모두를 위한 이야기’로 나눌 방법을 찾아보기 바란다. 자신만의 주장과 자신이 지지하는 이들의 주장을 쏟아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좋은 정책과 제도가 어떤 것인지 의견을 모으는 일이 교회에서도 가능해지기를 기대한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장 좋으시고 정의로우며 공정한 정책과 제도를 선택하는 일에는 우리의 기도와 경청의 지혜가 필요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국교회 기성 세대에게 꼭 부탁하고 싶은 말이 있다. 기성 세대가 그동안 한국의 발전과 선진화, 민주화를 위해 헌신하고 수고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이다. 그런데 지금 젊은 청년 세대가 살아갈 세상은 이전과 너무도 다르다. 가능하다면 교회가 청년들을 위한 투표, 청년들이 행복해지는 정치, 청년들이 더 많이 참여하는 정치 제도를 만드는 일에 참여하기를 소망한다. 정치의 계절, 그리스도인의 공의로운 정치 참여를 기대한다.


글. 성석환 (장로회신학대학교 기독교와문화 교수 / 도시공동체연구소장)



미주 ______

1 김기동, 이재묵, “당파적 정체성, 연령, 그리고 정서적 양극화,” 「정치안보연구」 25권 2호(2022); Shanto Iyengar, Gaurav Sood, and Yphtach Lelkes, “Affect, Not Ideology: A Social Identity Perspective on Polarization,” Public Opinion Quarterly, 76(2012).

2 장승진, 한정훈, “유튜브는 사용자들을 정치적으로 양극화시키는가?: 주요 정치 및 시사 관련 유튜브 채널 구독자에 대한 설문조사 분석,” 「현대정치연구」 제14권 2호(2021). 이 논문에 따르면, 연령별로 또 성별에 따라 다른 유튜브 소비행태를 보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관련기사링크) 일반인이 38%가 보수인 반면 50대 이상 목회자는 51%가 보수였다. 담임목사의 지도력에 따라 교회 전체의 성향이 좌우된다고는 할 수 없고, 또 보수로 응답한 이가 더 많다는 것 자체가 특별한 메시지를 던지지는 않는다. 다만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은 일반인들과는 다른 정치적 지향을 하고 있다고 판단할 수 있다.

4 김상덕, 송진순, 이민형, 정경일, 「2023 주요 사회 현안에 대한 개신교인 인식조사-기독청년 인식조사: 가치관, 마음, 신앙」 (서울: 도서출판 기사연, 2023).

5 Richard Niebuhr, The Social Sources of Denominationalism (Cleveland: the world publishing company, 1957).

6 Duncan Forrester, Christian Justice and Public Policy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7), 9-37.

7 Vincent Bacote, The Political Disciple: A Theology of Public Life, 성석환 역, 『정치적 제자도: 공적 삶을 위한 신학 원리』 (서울: 새물결플러스, 2021), 98-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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