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길게 늘어선 줄 앞에서 공정을 배웁니다. 먼저 온 사람이 먼저 들어간다는 질서는 낯선 사람들을 하나의 약속 안에 세웁니다. 돈이 많다고 해서, 목소리가 크다고 해서 앞자리를 차지할 수 없습니다. 오래 기다린 사람에게 줄이란 단지 입장하는 순서가 아니라, 그가 들인 시간과 수고를 존중해 달라는 무언의 요청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런데 대전 성심당의 ‘임산부 프리패스’를 둘러싼 논란은 이 익숙한 공정에 다른 질문을 던집니다. 어떤 이는 오래 서 있기 어려운 몸을 위한 마땅한 배려라고 말하지만, 또 다른 이는 먼저 온 사람의 권리를 건너뛰는 이른바 ‘역차별’이라고 주장합니다. 하기야 줄은 정직하지만 거기 서 있는 몸은 제각각일 것입니다. 모두에게 똑같은 시간이라고 해도 각자의 몸이 감당해야 하는 무게는 같지 않겠지요. 가만 보면 같은 시간이 꼭 같은 부담은 아닌 것이지요.

대전 성심당 줄서기. 출처 매일경제, 원출처 성심당
그러니 공정에 민감한 마음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특권과 반칙, 불투명한 절차에 지친 우리 사회에서 공정은 힘 있는 사람이 규칙을 마음대로 바꾸지 못하게 하는 소중한 방어선이기도 하니까요. 다만 모든 예외를 특혜로 의심하기 시작하면 규칙은 사람을 보호하기보다 서로 다른 형편을 지워 버릴 수 있게 마련입니다. 물론 부당한 특혜는 이미 유리한 사람에게 근거 없이 더 유리한 길을 열어 줄 것입니다. 하지만 정당한 배려는 불리한 조건에 놓인 사람도 함께 들어올 수 있도록 문을 열어 주지 않을까요.
사도 바울은 교회를 한 몸에 비유하며 “몸의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부족하게 여겨지는 지체에게 더욱 큰 존귀를 더하셔서, 몸 안에 분쟁이 없고 지체들이 서로 돌보게 하신다는 뜻입니다(고전 12:22–25). 여기서 약함은 존재 가치가 낮다는 뜻이 아닙니다. 특정한 상황에서 더 많은 보호와 돌봄이 필요하다는 뜻이지요. 모든 지체의 존엄은 같지만 필요한 돌봄의 모양과 분량까지 같지는 않다는 것이지요. 같은 존엄은 때로 다른 배려를 요청하곤 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공정은 공동선으로 깊어집니다. 공동선이란 다수의 편익을 합친 총계도 아니고, 한 사람의 필요를 위해 나머지 모두를 무시하는 온정도 아니지 않습니까. ‘나 홀로 좋음’이 아니라 ‘더불어 좋음’, 곧 개인의 좋음과 전체의 좋음이 함께 살아나는 관계와 질서, 그것이 공동선입니다. 만약 공정이 줄의 순서를 묻는다면, 공동선은 그 줄이 누구에게 더 무거운지도 한 번 더 묻지요. 그래서 공정은 공동선의 출발점이지만 종착점은 아닙니다.
그래서 이 길을 실제로 살아내려면 인격과 자유가 필요합니다. 보통 자아는 내 차례와 권리를 지키려 합니다. 물론 그것도 중요하겠지요. 하지만 인격은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갑니다. 타자에게도 합당한 자리가 있음을 인정하고, 그의 번성을 염원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도 내 권리를 끝까지 주장할 수 있는 능력에 머물지 않습니다. 칼뱅이 강조했듯이 자유는 이웃의 덕을 세우는 데 사용되어야 하며, 이웃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때는 스스로 절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 차례를 억지로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더 절실한 필요를 지닌 이웃에게 자리를 내어 줄 수 있는 자유 말입니다. 자유는 이웃이 함께 살아갈 자리를 만들 때 가장 자유답습니다.
그렇게 보면 그리스도인의 베풂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주는 시혜일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아무 자격 없이 하나님의 선물을 받은 사람들이며, 자신에게 맡겨진 것을 이웃의 필요에 따라 흘려보내는 은혜의 분배자이니 말입니다.
아무리 유명한 성심당이라 해도 결국에는 사람의 배를 채우는 빵집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번 논쟁은 빵보다 먼저 배를 생각하게 합니다. 욥은 양털로 따뜻해진 ‘허리’가 자신을 위해 복을 빈다고 했고(욥 31:20), 칼뱅은 가난한 이를 먹이고 입힌 선행을 두고 “그들의 배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축복할 것”이라고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 칼뱅의 관심은 도움을 받는 사람을 흠잡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상대의 감사 여부가 선행의 가치를 결정하지 못한다는 뜻이었지요.
사실 배와 허리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이는 덜 배고프고 덜 춥고 덜 힘들어진 몸 자체가 하나님 앞에서 베푼 이를 증언한다는 뜻일 것입니다. 임신으로 평소와 다른 무게와 변화를 감당하는 몸이 잠시라도 덜 힘들어질 수 있다면, 덜 힘들어진 그 몸 자체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축복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렇다고 좋은 뜻만으로 제도를 운영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상대가 감사하지 않는다고 해서 선행의 가치가 무효가 되지는 않겠지만, 제도를 고의로 부정 이용하는 행위는 공동체의 신뢰를 해치게 됩니다. 일부의 악용 사례 때문에 배려 자체를 없애자는 것도 성급하지만, 선한 취지라는 이유로 허술한 절차를 방치해서도 곤란할 것입니다. 대상과 범위, 확인 방식과 운영 원칙은 투명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배지는 확인하자. 그러나 배려까지 거두지는 말자.” 누군가 배지를 악용해 줄을 건너뛴다고 해서, 우리까지 선의를 건너뛸 필요는 없기 때문이지요. 부정 이용은 제도로 걸러내되 선의 자체를 약화시킬 이유는 없습니다. 좋은 인격은 좋은 제도를 필요로 하고, 좋은 제도 역시 그것을 악용하지 않는 인격을 필요로 합니다.
이 논란 앞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누구보다 먼저 자신을 돌아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고백하는 교회의 공간과 예배가 임산부와 장애인, 노인과 어린아이, 그리고 돌봄을 맡은 이들에게 실제로 열려 있는지요. 더 많은 돌봄이 필요한 교우가 배려받기 위해 매번 자신의 형편을 설명하며 미안해해야 하지는 않는지요. 반대로 교회의 재정과 인사와 의사 결정에 모두가 신뢰할 만한 공정한 절차는 충분한지요.
한국교회의 과제는 공정에 관한 옳은 의견을 내놓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자신의 정당한 자유를 이웃의 유익을 위해 절제하고, 타자에게 마땅한 자리를 내어 주며, 받은 은혜를 자발적인 베풂으로 흘려보내는 공적 인격을 길러 내야 하지 않을지요. 교회는 세상을 향해 공정의 심판관이 되려 하기보다는 공정과 자비가 함께 사는 법을 배우는 공동선의 학교가 되어야 합니다.
다시 길게 늘어선 그 줄 앞으로 돌아가 볼까요? 공정한 공동체는 줄을 없애는 공동체도, 무원칙한 새치기를 허용하는 공동체도 아닐 것입니다. 줄의 질서를 지키면서도 그 줄이 누구에게 더 무거운지 세심하게 살펴보고, 필요한 사람에게 잠시 문을 열어 주는 그런 마음들이 모인 곳이야말로 진정 공정한 공동체가 아닐지요. 누군가에게 자리를 내어 주는 일이 곧 내 자리를 빼앗기는 사건으로만 느껴지지 않을 때, 우리는 비로소 함께 사는 법을 배웁니다.
이렇듯 공정은 사람들을 같은 줄에 세우는 데서 시작하지만, 공동선은 그 줄 안에서 서로 다른 몸의 무게를 알아보는 데서 완성되어 갑니다. 지금 우리의 공정은 모두를 같은 줄에 세우는 데서 멈추어 있나요? 아니면 그 줄이 누구에게 더 무거운지도 바라보고 있나요?
글. 송용원 교수 (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
우리는 길게 늘어선 줄 앞에서 공정을 배웁니다. 먼저 온 사람이 먼저 들어간다는 질서는 낯선 사람들을 하나의 약속 안에 세웁니다. 돈이 많다고 해서, 목소리가 크다고 해서 앞자리를 차지할 수 없습니다. 오래 기다린 사람에게 줄이란 단지 입장하는 순서가 아니라, 그가 들인 시간과 수고를 존중해 달라는 무언의 요청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런데 대전 성심당의 ‘임산부 프리패스’를 둘러싼 논란은 이 익숙한 공정에 다른 질문을 던집니다. 어떤 이는 오래 서 있기 어려운 몸을 위한 마땅한 배려라고 말하지만, 또 다른 이는 먼저 온 사람의 권리를 건너뛰는 이른바 ‘역차별’이라고 주장합니다. 하기야 줄은 정직하지만 거기 서 있는 몸은 제각각일 것입니다. 모두에게 똑같은 시간이라고 해도 각자의 몸이 감당해야 하는 무게는 같지 않겠지요. 가만 보면 같은 시간이 꼭 같은 부담은 아닌 것이지요.
대전 성심당 줄서기. 출처 매일경제, 원출처 성심당
그러니 공정에 민감한 마음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특권과 반칙, 불투명한 절차에 지친 우리 사회에서 공정은 힘 있는 사람이 규칙을 마음대로 바꾸지 못하게 하는 소중한 방어선이기도 하니까요. 다만 모든 예외를 특혜로 의심하기 시작하면 규칙은 사람을 보호하기보다 서로 다른 형편을 지워 버릴 수 있게 마련입니다. 물론 부당한 특혜는 이미 유리한 사람에게 근거 없이 더 유리한 길을 열어 줄 것입니다. 하지만 정당한 배려는 불리한 조건에 놓인 사람도 함께 들어올 수 있도록 문을 열어 주지 않을까요.
사도 바울은 교회를 한 몸에 비유하며 “몸의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부족하게 여겨지는 지체에게 더욱 큰 존귀를 더하셔서, 몸 안에 분쟁이 없고 지체들이 서로 돌보게 하신다는 뜻입니다(고전 12:22–25). 여기서 약함은 존재 가치가 낮다는 뜻이 아닙니다. 특정한 상황에서 더 많은 보호와 돌봄이 필요하다는 뜻이지요. 모든 지체의 존엄은 같지만 필요한 돌봄의 모양과 분량까지 같지는 않다는 것이지요. 같은 존엄은 때로 다른 배려를 요청하곤 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공정은 공동선으로 깊어집니다. 공동선이란 다수의 편익을 합친 총계도 아니고, 한 사람의 필요를 위해 나머지 모두를 무시하는 온정도 아니지 않습니까. ‘나 홀로 좋음’이 아니라 ‘더불어 좋음’, 곧 개인의 좋음과 전체의 좋음이 함께 살아나는 관계와 질서, 그것이 공동선입니다. 만약 공정이 줄의 순서를 묻는다면, 공동선은 그 줄이 누구에게 더 무거운지도 한 번 더 묻지요. 그래서 공정은 공동선의 출발점이지만 종착점은 아닙니다.
그래서 이 길을 실제로 살아내려면 인격과 자유가 필요합니다. 보통 자아는 내 차례와 권리를 지키려 합니다. 물론 그것도 중요하겠지요. 하지만 인격은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갑니다. 타자에게도 합당한 자리가 있음을 인정하고, 그의 번성을 염원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도 내 권리를 끝까지 주장할 수 있는 능력에 머물지 않습니다. 칼뱅이 강조했듯이 자유는 이웃의 덕을 세우는 데 사용되어야 하며, 이웃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때는 스스로 절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 차례를 억지로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더 절실한 필요를 지닌 이웃에게 자리를 내어 줄 수 있는 자유 말입니다. 자유는 이웃이 함께 살아갈 자리를 만들 때 가장 자유답습니다.
그렇게 보면 그리스도인의 베풂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주는 시혜일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아무 자격 없이 하나님의 선물을 받은 사람들이며, 자신에게 맡겨진 것을 이웃의 필요에 따라 흘려보내는 은혜의 분배자이니 말입니다.
아무리 유명한 성심당이라 해도 결국에는 사람의 배를 채우는 빵집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번 논쟁은 빵보다 먼저 배를 생각하게 합니다. 욥은 양털로 따뜻해진 ‘허리’가 자신을 위해 복을 빈다고 했고(욥 31:20), 칼뱅은 가난한 이를 먹이고 입힌 선행을 두고 “그들의 배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축복할 것”이라고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 칼뱅의 관심은 도움을 받는 사람을 흠잡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상대의 감사 여부가 선행의 가치를 결정하지 못한다는 뜻이었지요.
사실 배와 허리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이는 덜 배고프고 덜 춥고 덜 힘들어진 몸 자체가 하나님 앞에서 베푼 이를 증언한다는 뜻일 것입니다. 임신으로 평소와 다른 무게와 변화를 감당하는 몸이 잠시라도 덜 힘들어질 수 있다면, 덜 힘들어진 그 몸 자체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축복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렇다고 좋은 뜻만으로 제도를 운영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상대가 감사하지 않는다고 해서 선행의 가치가 무효가 되지는 않겠지만, 제도를 고의로 부정 이용하는 행위는 공동체의 신뢰를 해치게 됩니다. 일부의 악용 사례 때문에 배려 자체를 없애자는 것도 성급하지만, 선한 취지라는 이유로 허술한 절차를 방치해서도 곤란할 것입니다. 대상과 범위, 확인 방식과 운영 원칙은 투명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배지는 확인하자. 그러나 배려까지 거두지는 말자.” 누군가 배지를 악용해 줄을 건너뛴다고 해서, 우리까지 선의를 건너뛸 필요는 없기 때문이지요. 부정 이용은 제도로 걸러내되 선의 자체를 약화시킬 이유는 없습니다. 좋은 인격은 좋은 제도를 필요로 하고, 좋은 제도 역시 그것을 악용하지 않는 인격을 필요로 합니다.
이 논란 앞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누구보다 먼저 자신을 돌아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고백하는 교회의 공간과 예배가 임산부와 장애인, 노인과 어린아이, 그리고 돌봄을 맡은 이들에게 실제로 열려 있는지요. 더 많은 돌봄이 필요한 교우가 배려받기 위해 매번 자신의 형편을 설명하며 미안해해야 하지는 않는지요. 반대로 교회의 재정과 인사와 의사 결정에 모두가 신뢰할 만한 공정한 절차는 충분한지요.
한국교회의 과제는 공정에 관한 옳은 의견을 내놓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자신의 정당한 자유를 이웃의 유익을 위해 절제하고, 타자에게 마땅한 자리를 내어 주며, 받은 은혜를 자발적인 베풂으로 흘려보내는 공적 인격을 길러 내야 하지 않을지요. 교회는 세상을 향해 공정의 심판관이 되려 하기보다는 공정과 자비가 함께 사는 법을 배우는 공동선의 학교가 되어야 합니다.
다시 길게 늘어선 그 줄 앞으로 돌아가 볼까요? 공정한 공동체는 줄을 없애는 공동체도, 무원칙한 새치기를 허용하는 공동체도 아닐 것입니다. 줄의 질서를 지키면서도 그 줄이 누구에게 더 무거운지 세심하게 살펴보고, 필요한 사람에게 잠시 문을 열어 주는 그런 마음들이 모인 곳이야말로 진정 공정한 공동체가 아닐지요. 누군가에게 자리를 내어 주는 일이 곧 내 자리를 빼앗기는 사건으로만 느껴지지 않을 때, 우리는 비로소 함께 사는 법을 배웁니다.
이렇듯 공정은 사람들을 같은 줄에 세우는 데서 시작하지만, 공동선은 그 줄 안에서 서로 다른 몸의 무게를 알아보는 데서 완성되어 갑니다. 지금 우리의 공정은 모두를 같은 줄에 세우는 데서 멈추어 있나요? 아니면 그 줄이 누구에게 더 무거운지도 바라보고 있나요?
글. 송용원 교수 (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