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안보를 지향하는 지구공동체, 평화의 공동체로 부름받은 교회
인간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라는 말이 있다. 집단을 이루어 함께 살기를 시작한 이래로 인간 사회에는 언제나 갈등이 있었고, 갈등은 새로운 변화의 시작점이 되기도 했지만 때로는 폭력과 전쟁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위키피디아에서 “전쟁 목록”으로 검색하면 인간사에서 지금까지 있어 온 수많은 전쟁들을 확인할 수 있다. 영어로 된 페이지(“Lists of Wars”로 검색)를 보면 더 자세한 목록이 있는데, 1800년부터 현재까지 전 세계적으로 전쟁 없이 지나간 해는 단 한 해도 없다.
2022년에 시작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은 2년 가까이 이어지고 있고, 최근에 시작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전쟁은 전면전으로 들어서고 있다. 이러한 전쟁을 일으키는 수뇌부들과 지배적 문화는 언제나 이를 정당화하려 노력한다. 정의로운 전쟁, 정당한 전쟁, 거룩한 전쟁 등. 그러나 잔혹한 폭력과 죽임을 몸으로 마주하는 현장의 시민들에게 전쟁은 괴물 그 자체일 뿐이다. 몇몇 권력자들과 특정 집단들에게는 이익이 갈 수도 있다. 모든 폭력에는 이에 기생하여 자기의 이익을 취하려는 이들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설 땅과 존재의 기반을 잃고 피난하는 사람들, 죽임과 폭력의 현장 속에서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사람들, 강제로 생명을 빼앗긴 사람들, 그리고 이 모든 고통을 현장에서 몸으로 겪어내야 하는 이들에게 전쟁은 피할 수 없는 죽음의 현실일 뿐이다.
<출처: SBS 뉴스>1
‘국가안보’를 넘어서, ‘인간안보’
표면적으로 근대국가는 전쟁과 폭력을 지양하고 절제하며 이를 없어야 할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한 가지 예외 상황이 있는데, 그것은 국가의 존립 및 안보와 국민의 안전이 걸려있을 때 전쟁과 폭력을 허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세계 곳곳의 여러 권력집단들은 이러한 ‘대의명분’을 악용하여 전쟁을 벌여왔다.) 이러한 ‘국가안보’ 담론은 개인보다 국가 전체의 안전을 우선시하고, 지구공동체 전체보다 개별국가의 존립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또한 자국의 안보와 타국의 안전이 충돌할 때, 국가안보 담론을 따르는 현실국가는 자국의 안보를 우선시하는 것 외에 다른 선택을 하기 어렵다. 그렇기에 신뢰관계가 없는 적대적 나라들은 생존을 위해 군비경쟁을 계속하게 되고, 때로는 전쟁으로 이어가며 비참한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이러한 현실을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없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고귀한 생명이며, 함께 지구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피조물 역시 우리의 이웃이자 하나님의 계속적 창조의 작품이다. 전쟁과 폭력의 고통 가운데 있는 생명의 소리에 응답해야 할 과제가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이에 세계교회는 지속적으로 이 문제에 대해 논의하고 참여해왔다. 작년에 독일에서 있었던 세계교회협의회 11차 총회에서도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한반도의 상황, 팔레스타인 지역의 갈등 등을 다루며 지구공동체의 평화를 위해 모든 교회가 함께 힘쓸 것을 촉구했다.(관련기사)
<출처: World Council of Churches>2
이처럼 우리 신앙의 궁극적 지향점을 놓지 않으려면 국가안보 담론을 넘어서는 고민과 논의가 필요한데, 평화학이나 국제연구 분야에서 이에 대한 힌트를 찾을 수 있다. 바로 ‘인간안보’라는 개념이다. 국내 1호 평화학 박사인 정주진은 국가안보와 인간안보를 다음과 같이 비교한다.
국가안보는 국가의 영토, 경제, 정치와 관련된 보호와 안전을 목표로 삼지만 인간안보는 개인과 공동체의 안전과 안녕을 목표로 삼는다. 국가안보는 일차적으로 군사력에 의존하지만 인간안보는 다양한 사회 영역에서 발굴되고 형성된 자원과 노력에 의존한다. 또한 국가안보는 세계안보와 단절된 개별 국가의 안전에 집중하지만 인간안보는 국가를 넘어 인간사회의 상호의존에 집중한다. 국가안보에 초점을 맞추는 경우 인간안보는 충족되지 않지만 인간안보에 집중하면 국가안보는 자연스럽게 충족된다. 개인과 공동체의 안전하고 평화로운 삶을 위해서는 국가의 안전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다만 그렇게 안전하고 평화로운 삶의 추구가 폭력적인 방법이나 인류 사회의 공존을 거스르는 방식은 아니어야 한다.3
즉 인간안보는 개인과 공동체의 평화를 함께 고민하고, 한 국가를 넘어서 지구공동체에 속한 다양한 사회와 공동체의 평화적 관계 및 구조 형성을 추구하는 담론이다. 자국중심주의라는 국제정치의 필연적 입장을 넘어서서, 인간과 생명의 안전과 평화를 우선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안보 개념은 단순히 이상과 이론만으로 시작된 개념은 아니다. 이는 현실의 국제정세 속에서 시작된 논의였고, 1994년 유엔개발계획의 제안으로 국제사회에 알려졌다. 초창기 인간안보 제안은 개별국가의 권리보다는 국제기구 등의 역할을 강조했으며, 개별국가만으로는 지구공동체의 인간안보를 달성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러나 2001년 9.11 테러 이후로 국제사회는 미국을 중심으로 하여 개별국가의 권한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갔고, 인간안보 개념은 이러한 현실을 겪으며 계속해서 변화되어 왔다.4
정치적 현실에서 생겨난 이러한 논의에는 여러 국제단체들과 개별국가들의 이권이 개입되기에 우리가 무조건적으로 수용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인간안보 담론이 가진 고유의 방향성, 나아가 지구공동체의 모든 피조물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고민하는 일종의 ‘생명안보’를 고민하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공감하며 함께 참여해야 할 일이다. 우리가 처한 정치적 현실과 전 지구적 기후위기의 상황으로 볼 때, 인간안보와 생명안보는 어쩌면 꿈만 같은 이야기로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신앙인의 결기와 상상력이 필요하다.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의 ‘불가능한 가능성(Impossible Possibility)’이라는 말을 떠올려 본다. 적대와 불신, 폭력과 전쟁의 현실에서 평화는 불가능해 보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붙잡고 상상하고 그려내고 시도하며 끝까지 추구해야 하는 것은 평화가 우리의 소명이기 때문이다.
교회, 평화의 공동체
그리스도인들은 평화의 사람으로 부르심을 받았고, 교회는 평화의 공동체로 부르심을 입었다. 교회가 평화의 공동체라는 것은 크게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하나는 내적으로 안전하고 평화로운 공동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외적으로 평화를 만들어가고 구축하는 공동체라는 것이다.
교회공동체의 모든 구성원들이 평화를 경험하고 누리기 위해서는 몇 가지 필요한 것들이 있다. 당연히 그 기초는 성도 개인과 하나님과의 화평한 관계 형성이다. 하나님께 용서받고 용납되며 그분과 동행하는 성도들의 삶은 평화로운 공동체의 초석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함께, 공동체의 평화는 구성원들의 역동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위해서는 공동체 구성원들 사이의 관계, 공동체의 체계와 구조, 그리고 공동체가 가진 문화 모두를 평화에 대한 지향으로 바꾸어나가야 한다. 특히 한국적 상황에서 교회가 관심을 더 두어야 할 것은 평화적인 문화와 구조에 있다. 평화학의 연구 결과를 참조하면, 위계적이고 수직적인 문화와 구조를 지양함과 동시에, 수평적이고 자발적인 문화와 의사결정 구조를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다.
평화만들기(peace-making), 평화구축(peace-building)을 함께 나누고 이야기하며 각자의 삶의 자리와 사회 속에서 이를 실천할 수 있는 사람들을 길러내는 것도 평화의 공동체인 교회가 힘써야 할 일이다. 주님은 우리를 평화의 사람으로 부르셨고, 평화의 사도로 세상 속에 보내셨다. 그리고 평화를 힘쓰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자녀’라는 칭호를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기의 자녀라고 부르실 것이다.”(마5:9, 새번역)
평화에 대한 한국교회 성도들의 인식은 세대에 따라 조금 다른 양상을 보인다. 보통 시니어 층으로 갈수록 평화에 대한 공감대와 소명의식이 더 깊어지고, 청소년이나 청년들은 평화 및 통일에 대한 관심도가 장년층보다 낮은 경향을 보인다. 이에 대한 많은 걱정과 우려들이 있지만, 세대에 맞는 접근을 통해 적절한 내용을 함께 나누고 배운다면, 이들 역시 평화의 필요성과 중요성에 공감하며 실제적으로 평화를 경험하고 실천하는 Peace-maker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본다. 평화교육, 비폭력 대화, 써클 모임 등 작은 곳에서부터 평화의 삶의 방식을 경험할 수 있는 배움과 모임들이 많이 있다. 특히 청소년과 청년들은 이러한 자발적이고 수용적인 배움의 공간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자기 자신을 드러내고 참여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평화를 경험하고 함께 배우는 평화공간을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지속적으로 만들어줄 수 있다면, 우리의 다음 세대는 우리를 뛰어넘는 평화에 대한 상상력으로 한반도와 지구공동체의 평화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출처:Youtube, solar SUN>5
‘평화는’이라는 어린이 노래에는 이런 가사가 있다.
평화는 우리 맘속에 / 빛나는 고운 무지개 / 평화는 기쁨이라네
미래는 평화스럽고 / 세상은 우리 것이니 / 다 함께 평화를 이루자
평화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미래는 평화스럽다’는 희망을 우리 아이들과 함께 나눌 수 있도록, 오늘도 우리의 자리에서 평화를 이루어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되기를 소망한다.
글. 김용준 (문화선교연구원)
미주 ──
1 “쪼개진 세계…곳곳에서 이스라엘 vs 팔레스타인 지지 시위,” <SBS 뉴스> (2023. 10. 11).
2 “WCC assembly proposes ‘A Pilgrimage of Justice, Reconciliation and Unity’,” <WCC News> (2022. 9. 8).
3 정주진, <평화학> (철수와영희, 2022), 71.
4 이혜정, 박지범, “인간안보: 국제규범의 창안, 변형과 확산,” <국제지역연구> 22-1 (2013).
5 초등학교 2학년 아이들이 평화에 관하여 그린 그림들이다. solar SUN, “평화는” (2020. 12. 15).
인간안보를 지향하는 지구공동체, 평화의 공동체로 부름받은 교회
인간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라는 말이 있다. 집단을 이루어 함께 살기를 시작한 이래로 인간 사회에는 언제나 갈등이 있었고, 갈등은 새로운 변화의 시작점이 되기도 했지만 때로는 폭력과 전쟁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위키피디아에서 “전쟁 목록”으로 검색하면 인간사에서 지금까지 있어 온 수많은 전쟁들을 확인할 수 있다. 영어로 된 페이지(“Lists of Wars”로 검색)를 보면 더 자세한 목록이 있는데, 1800년부터 현재까지 전 세계적으로 전쟁 없이 지나간 해는 단 한 해도 없다.
2022년에 시작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은 2년 가까이 이어지고 있고, 최근에 시작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전쟁은 전면전으로 들어서고 있다. 이러한 전쟁을 일으키는 수뇌부들과 지배적 문화는 언제나 이를 정당화하려 노력한다. 정의로운 전쟁, 정당한 전쟁, 거룩한 전쟁 등. 그러나 잔혹한 폭력과 죽임을 몸으로 마주하는 현장의 시민들에게 전쟁은 괴물 그 자체일 뿐이다. 몇몇 권력자들과 특정 집단들에게는 이익이 갈 수도 있다. 모든 폭력에는 이에 기생하여 자기의 이익을 취하려는 이들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설 땅과 존재의 기반을 잃고 피난하는 사람들, 죽임과 폭력의 현장 속에서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사람들, 강제로 생명을 빼앗긴 사람들, 그리고 이 모든 고통을 현장에서 몸으로 겪어내야 하는 이들에게 전쟁은 피할 수 없는 죽음의 현실일 뿐이다.
<출처: SBS 뉴스>1
‘국가안보’를 넘어서, ‘인간안보’
표면적으로 근대국가는 전쟁과 폭력을 지양하고 절제하며 이를 없어야 할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한 가지 예외 상황이 있는데, 그것은 국가의 존립 및 안보와 국민의 안전이 걸려있을 때 전쟁과 폭력을 허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세계 곳곳의 여러 권력집단들은 이러한 ‘대의명분’을 악용하여 전쟁을 벌여왔다.) 이러한 ‘국가안보’ 담론은 개인보다 국가 전체의 안전을 우선시하고, 지구공동체 전체보다 개별국가의 존립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또한 자국의 안보와 타국의 안전이 충돌할 때, 국가안보 담론을 따르는 현실국가는 자국의 안보를 우선시하는 것 외에 다른 선택을 하기 어렵다. 그렇기에 신뢰관계가 없는 적대적 나라들은 생존을 위해 군비경쟁을 계속하게 되고, 때로는 전쟁으로 이어가며 비참한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이러한 현실을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없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고귀한 생명이며, 함께 지구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피조물 역시 우리의 이웃이자 하나님의 계속적 창조의 작품이다. 전쟁과 폭력의 고통 가운데 있는 생명의 소리에 응답해야 할 과제가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이에 세계교회는 지속적으로 이 문제에 대해 논의하고 참여해왔다. 작년에 독일에서 있었던 세계교회협의회 11차 총회에서도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한반도의 상황, 팔레스타인 지역의 갈등 등을 다루며 지구공동체의 평화를 위해 모든 교회가 함께 힘쓸 것을 촉구했다.(관련기사)
<출처: World Council of Churches>2
이처럼 우리 신앙의 궁극적 지향점을 놓지 않으려면 국가안보 담론을 넘어서는 고민과 논의가 필요한데, 평화학이나 국제연구 분야에서 이에 대한 힌트를 찾을 수 있다. 바로 ‘인간안보’라는 개념이다. 국내 1호 평화학 박사인 정주진은 국가안보와 인간안보를 다음과 같이 비교한다.
즉 인간안보는 개인과 공동체의 평화를 함께 고민하고, 한 국가를 넘어서 지구공동체에 속한 다양한 사회와 공동체의 평화적 관계 및 구조 형성을 추구하는 담론이다. 자국중심주의라는 국제정치의 필연적 입장을 넘어서서, 인간과 생명의 안전과 평화를 우선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안보 개념은 단순히 이상과 이론만으로 시작된 개념은 아니다. 이는 현실의 국제정세 속에서 시작된 논의였고, 1994년 유엔개발계획의 제안으로 국제사회에 알려졌다. 초창기 인간안보 제안은 개별국가의 권리보다는 국제기구 등의 역할을 강조했으며, 개별국가만으로는 지구공동체의 인간안보를 달성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러나 2001년 9.11 테러 이후로 국제사회는 미국을 중심으로 하여 개별국가의 권한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갔고, 인간안보 개념은 이러한 현실을 겪으며 계속해서 변화되어 왔다.4
정치적 현실에서 생겨난 이러한 논의에는 여러 국제단체들과 개별국가들의 이권이 개입되기에 우리가 무조건적으로 수용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인간안보 담론이 가진 고유의 방향성, 나아가 지구공동체의 모든 피조물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고민하는 일종의 ‘생명안보’를 고민하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공감하며 함께 참여해야 할 일이다. 우리가 처한 정치적 현실과 전 지구적 기후위기의 상황으로 볼 때, 인간안보와 생명안보는 어쩌면 꿈만 같은 이야기로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신앙인의 결기와 상상력이 필요하다.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의 ‘불가능한 가능성(Impossible Possibility)’이라는 말을 떠올려 본다. 적대와 불신, 폭력과 전쟁의 현실에서 평화는 불가능해 보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붙잡고 상상하고 그려내고 시도하며 끝까지 추구해야 하는 것은 평화가 우리의 소명이기 때문이다.
교회, 평화의 공동체
그리스도인들은 평화의 사람으로 부르심을 받았고, 교회는 평화의 공동체로 부르심을 입었다. 교회가 평화의 공동체라는 것은 크게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하나는 내적으로 안전하고 평화로운 공동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외적으로 평화를 만들어가고 구축하는 공동체라는 것이다.
교회공동체의 모든 구성원들이 평화를 경험하고 누리기 위해서는 몇 가지 필요한 것들이 있다. 당연히 그 기초는 성도 개인과 하나님과의 화평한 관계 형성이다. 하나님께 용서받고 용납되며 그분과 동행하는 성도들의 삶은 평화로운 공동체의 초석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함께, 공동체의 평화는 구성원들의 역동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위해서는 공동체 구성원들 사이의 관계, 공동체의 체계와 구조, 그리고 공동체가 가진 문화 모두를 평화에 대한 지향으로 바꾸어나가야 한다. 특히 한국적 상황에서 교회가 관심을 더 두어야 할 것은 평화적인 문화와 구조에 있다. 평화학의 연구 결과를 참조하면, 위계적이고 수직적인 문화와 구조를 지양함과 동시에, 수평적이고 자발적인 문화와 의사결정 구조를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다.
평화만들기(peace-making), 평화구축(peace-building)을 함께 나누고 이야기하며 각자의 삶의 자리와 사회 속에서 이를 실천할 수 있는 사람들을 길러내는 것도 평화의 공동체인 교회가 힘써야 할 일이다. 주님은 우리를 평화의 사람으로 부르셨고, 평화의 사도로 세상 속에 보내셨다. 그리고 평화를 힘쓰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자녀’라는 칭호를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기의 자녀라고 부르실 것이다.”(마5:9, 새번역)
평화에 대한 한국교회 성도들의 인식은 세대에 따라 조금 다른 양상을 보인다. 보통 시니어 층으로 갈수록 평화에 대한 공감대와 소명의식이 더 깊어지고, 청소년이나 청년들은 평화 및 통일에 대한 관심도가 장년층보다 낮은 경향을 보인다. 이에 대한 많은 걱정과 우려들이 있지만, 세대에 맞는 접근을 통해 적절한 내용을 함께 나누고 배운다면, 이들 역시 평화의 필요성과 중요성에 공감하며 실제적으로 평화를 경험하고 실천하는 Peace-maker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본다. 평화교육, 비폭력 대화, 써클 모임 등 작은 곳에서부터 평화의 삶의 방식을 경험할 수 있는 배움과 모임들이 많이 있다. 특히 청소년과 청년들은 이러한 자발적이고 수용적인 배움의 공간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자기 자신을 드러내고 참여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평화를 경험하고 함께 배우는 평화공간을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지속적으로 만들어줄 수 있다면, 우리의 다음 세대는 우리를 뛰어넘는 평화에 대한 상상력으로 한반도와 지구공동체의 평화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출처:Youtube, solar SUN>5
‘평화는’이라는 어린이 노래에는 이런 가사가 있다.
평화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미래는 평화스럽다’는 희망을 우리 아이들과 함께 나눌 수 있도록, 오늘도 우리의 자리에서 평화를 이루어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되기를 소망한다.
글. 김용준 (문화선교연구원)
미주 ──
1 “쪼개진 세계…곳곳에서 이스라엘 vs 팔레스타인 지지 시위,” <SBS 뉴스> (2023. 10. 11).
2 “WCC assembly proposes ‘A Pilgrimage of Justice, Reconciliation and Unity’,” <WCC News> (2022. 9. 8).
3 정주진, <평화학> (철수와영희, 2022), 71.
4 이혜정, 박지범, “인간안보: 국제규범의 창안, 변형과 확산,” <국제지역연구> 22-1 (2013).
5 초등학교 2학년 아이들이 평화에 관하여 그린 그림들이다. solar SUN, “평화는” (2020. 12.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