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날 영국은 여전히 국가 정체성에 기독교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 헨리 8세 이후 기독교(성공회)는 국교로서 국가 정체성과 긴밀하게 결합해 왔다. 2020년 유고브(YouGov) 조사에 따르면 영국인의 56%가 영국을 “기독교 국가”라고 응답했고, 여기에는 비기독교인(47%)과 무종교인(49%)도 포함되었다.1)
그렇지만 이런 현실 뒤편에 정부가 교회 인사권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할 수 있는 특수한 구조가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영국 국왕이 영국국교회 수장으로서 성직자와 교회 요직을 임명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2012년 여성 성직자 임명 반대 사태 당시 총리였던 데이비드 캐머런이 “매우 슬프다”며 심경을 밝히면서, 교회에 “날카로운 촉구”가 필요하다고 입장을 표명했던 사례가 이를 잘 보여준다. 일부 의원은 의회 개입을 주장하기도 했다.2)
결국 “기독교 국가”라는 틀 안에서 정부가 교회 내부에 개입할 소지가 높아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종교와 정치의 결합이 “기독교가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낙관적 전망으로만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함을 드러낸다. 미국이 종교와 정부를 분리하는 정교분리의 원칙을 분명히 했던 것도 이러한 현실적 이유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기독교는 정치에 아예 무관심할 수도 없다.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을 위한 나라요, 이 세상의 유익과 축복, 구속과 구원을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정치에 관여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며, 오히려 어떤 의미에서 정치적이어야만 한다.”(81쪽)는 이 책 『예수와 권세(Jesus and the Powers』의 언급처럼, 교회는 정치와 완전히 단절되기 어렵다. 그렇다면 어떠한 방식으로 참여할 것인가?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는 정치 갈등, 사회 혼란, 테러 등이 발생할 때 종교가 일정 부분 개입되어 있는 장면이 왕왕 포착된다. 전통적 종교의 영향력이 줄어드는 듯한 탈종교, 탈기독교 시대에, 역설적으로 기독교는 정치의 중심부에서 갈등에 연루되는 일도 잦아졌다. 한국 또한 정치적 양극화와 이념 간 갈등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종교와 정치의 관계는 중요한 주제로 부상하고 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톰 라이트(N. T. Wright)와 마이클 F. 버드(Michael F. Bird)의 신간 『예수와 권세』는 교회의 공적, 정치적 역할을 심도 있게 다루고 있다. 저자들은 성경과 교회사, 현대 사회의 맥락을 두루 살피면서 고대 제국과 교회의 역사적 관계부터 현대 자유민주주의 사회 체제에서 교회의 역할까지 폭넓게 분석한다. 그리고 “예수의 십자가와 그분의 나라”라는 핵심 축을 놓고 기독교인이 정치 영역에서 가져야 할 태도와 기준을 설득력 있게 풀어낸다.
왜 이 책을 읽어야 하는가
탈종교화, 교회 이탈 가속화, SBNR(Spiritual But Not Religious) 현상은 전통적인 교회의 목소리가 점차 희미해지는 듯한 시대 흐름을 보여준다. 그러나 저자들은 바로 이런 시대일수록 교회가 정치적, 사회적 갈등의 한가운데 놓인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책의 1장에서 3장은 예수님과 초대교회가 로마 제국이라는 막강한 권력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 이후 기독교가 제국의 종교로 변모하며 어떻게 제국주의적인 일들을 양산했는지를 짚어본다. 이를 통해 독자가 교회와 정치권력의 역동적인 관계사를 파악하도록 돕는다. 4장부터 8장 결론까지는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지만, 이 세상을 위해 존재한다”라는 신학적 명제 아래 현대 사회 현실에서 기독교의 정치 참여와 책임을 구체적으로 풀어낸다.
책의 전개와 핵심 내용
(1) 교회와 제국(권력)의 역사적 관계
- 예수 시대와 초대교회: 저자들은 성서학자로서 성경 전체를 종횡무진하며 유대교로부터 교회까지 권력과 제국 간의 관계를 톺아본다. 예수님은 폭력을 동원해 평화를 유지하는 로마 제국 시대에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다. 그분의 나라는 정복이 아닌 성령의 능력에 기초해 생명과 해방을 가져오는 통치이다. 유대교로부터 반제국적이고 반이교적인 정서를 계승한 초대 교회 역시 당대 권력에 맞섰지만, 공동선을 위해 헌신하며 그리스도를 증언했다는 점에서 로마 제국과 대조를 이룬다.
- 교회와 제국의 역사적 결탁: 저자들은 기독교를 세계적인 종교로 만든 것은 복음 전도가 아니라 제국의 패권이었다고 일침 한다. 서구 문명 형성에 일정 기여를 했으나 식민주의, 노예제, 신정정치 등을 통해 부를 축적하며 온갖 문제를 일으킨 부끄러운 과거도 지적하고 있다. 문제는 제국의 질서가 형태만 달리할 뿐 지속되고 있다는 점이다. 저자들은 오늘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제국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건설에 기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려면 기독교의 복음이 정치와 사회에 어떤 함의를 갖고 있는지 숙고할 필요가 있다.
(2) 복음의 정치·사회적 차원
- 예수의 나라와 권세: 책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나라가 세상의 나라들처럼 폭력이나 강압을 통해 얻은 승리가 아니라, “용서와 새롭게 된 인간으로 번성할 자유”를 핵심으로 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기독교인은 공동체 내외부에서 모든 권세들을 하나님과 화해하게 하는 일을 실천해야 한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정치에 헌신해야 하는 것이다.
- 정부와의 관계: 저자들은 로마서 13장, 베드로전서 2장 등 여러 성경 구절을 예로 들며, 정부가 공동선을 위해 하나님이 권한을 위임하셨으므로 원칙적으로 존중하며 협력하되, 그 권위에 절대적 신성을 부여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또한 정치권력은 하나님이 주신 책임을 수행해야 한다. 부패와 폭력에 맞서는 예언자적 기능도 감당해야 하지만, “학대 앞에서도 시민 불복종의 길을 가기를 매우 꺼려했던” 칼뱅의 예를 들며 이 주제에 대해 매우 신중하게 접근해야 하고, 그 기준은 반드시 비폭력적인 평화의 방식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3) 오늘의 권세에 대한 비판과 경계
그렇다면 누구에게 저항해야 하는가? 저자들은 전체주의와 기독교 민족주의, 시민 전체주의의 위험을 경고한다.
- 먼저 기독교 민족주의는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국가와 동일시하곤 한다. 저자들은 기독교인들이 국가로부터 특권을 부여받고, 기독교가 진정한 신앙 감정의 일부가 아니라 애국심의 외형적 표현이 된다는 점에서 기독교인이나 비기독교인 모두에게 위험하다고 지적한다. 관용적 사회를 이루기보다 다른 종교나 이웃을 배제하고, 특정 교파나 인종을 우월시하며, ‘십자가 없는 하나님 나라’를 추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 전체주의를 살펴보면, 교회는 파시즘이나 공산주의 등 권위주의 국가 권력과 결탁해 특정한 기독교의 해석을 강제할 수 있다. 다원성을 내세우며 종교나 이념의 다양성을 억압하는 시민 전체주의 역시 연성 권위주의적 방식으로 나타나기 쉬우므로 경계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한다.
(4) 교회가 지향해야 할 정치 참여의 방식
그렇다면 교회는 어떻게 정치에 참여해야 하는가? 저자들은 오늘날을 공포와 분열의 시대로 진단하며, 기독교인이 사적인 영역을 넘어 공적 영역에서도 선을 행하고, 선을 만들어 가고, 선을 지탱하기 위해 노력하는 공적 신앙을 요청한다. 신실한 신앙인의 진정성 있는 정치 참여는 하나님의 뜻을 위하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면서 동시에 세상을 위하는 ‘이 세상의 시민’ 임을 인정하는 태도에서 출발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타인을 존중하고, 사회 전체에 기여하는 이웃 사랑이야말로 근본적인 자유주의적 가치라고 강조한다.
- 자유민주주의: 저자들은 독재와 전체주의를 막기 위한 현실적 수단으로 “가장 덜 나쁜 제도”로서 자유민주주의를 제시한다. 보편적 참정권, 법치, 권력 분립, 표현의 자유, 자기비판 등은 시민의 안전과 번영을 위해 필수 불가결하다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언제나 훼손될 위험을 안고 있지만, 다원적이고 다문화적인 환경에서 살아가는 기독교인은 “다양성 안에서 일치를 찾고, 정치적 규율로서 환대를 실천하며, 모두의 공동선에 보탬이 됨으로써 하나님 나라 건설에 기여”해야 함을 역설한다.(292쪽)
- 당당한 다원주의: 저자들은 이 과정에서 ‘당당한 다원주의(confident pluralism)’라는 개념을 통해, 국가 권력을 이용해 상대방을 억누르는 대신 서로의 자유를 존중하고 설득하며 살아가는 길을 제안한다. 자유민주주의는 본래 여러 정치적 관점을 만드는 것이기에, 사회적 동질성을 만드는 시도야말로 반자유주의적이고 비민주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갈등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하더라도, 공평한 제도에 대한 신뢰와 관대한 신앙적 헌신을 통해 평화로운 공존으로 나아가야 함을 주장한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정치사회적 변혁의 멀고도 험한 길
『예수와 권세』는 분열과 경쟁이 심화되는 현대사회에서 교회가 어떻게 정치적 존재로 거듭나고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지 다루고 있다. 저자들은 신정정치나 왕권신수설처럼 통치자를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절대화하는 모델을 거부한다. 동시에, 교회가 철저히 정치 영역에서 물러나거나 분리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비성경적이라고 말한다. 교회가 사회, 정치 영역에 참여할 때 직면하는 딜레마를 성경적으로 접근함과 동시에 현실에서 일어날 수 있는 기독교의 기능 장애, 곧 기독교 민족주의와 전체주의, 그리고 민주주의의 편향이나 독재 가능성을 예리하게 비판하며 원칙적인 행동 지침도 제시한다. 물론 모든 정치적 상황에 일률적으로 적용하기에는 한계가 있고, 원론적인 주장이 많다는 점 또한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이만큼 좋은 정치신학 입문서는 당분간 찾아보기 힘들 것”이라는 강영안 교수의 말이 과언이 아닐 만큼 하나님 나라 신학의 관점에서 성경과 현대 문화를 폭넓게 조망하고, 정치신학의 기본기를 다질 수 있도록 돕는다. 더욱이 엄중한 한국 사회의 현실과 복잡한 정치 지형에서 이 책의 이야기는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이 책은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종으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의 통치라는 신학적 비전 아래에서 기독교인들이 국가 권력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고 정치에 참여해야 하는지 안내한다. 기독교인과 신앙 공동체는 제국의 방식, 곧 폭력과 힘이 아닌 용서와 관용, 희생과 섬김, 화해와 사랑의 공적 증언으로 하나님 나라 건설에 기여하고, 그 나라를 준비하고, 그 나라를 선취하며, 그 나라의 충만한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 부르심을 받았다. 어쩌면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는 하나의 “불가능한 가능성”으로서 결코 완성될 수 없으며, 앞으로 더 험난한 길을 걸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을 위해 교회가 공동선과 평화를 지향하며 삶의 현장에 참여하고, 다양한 견해를 가진 이웃들과 대화를 통해 공존의 장을 넓혀 갈 것을 요청한다. 복음이 교회 울타리 안에 갇히지 않고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며, 교회가 이 땅의 정치와 사회를 어떻게 섬겨야 할지 고민하는 이들에게 『예수와 권세』는 유익한 도전과 통찰을 제공한다.
*각주
1) Milan Dinic, “Britain is still a Christian country, say most Britons,” YouGov, https://yougov.co.uk/society/articles/33541-britain-still-christian-country-say-most-britons, [게시 2020.12.29.].
2) “Women bishops: PM 'very sad' at Church of England rejection,” B.B.C., https://www.bbc.com/news/uk-20433152, [게시 2012.11.21.].
김지혜 책임연구원
[그리스도인의 정치 참여][기독교와 정치]
오늘날 영국은 여전히 국가 정체성에 기독교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 헨리 8세 이후 기독교(성공회)는 국교로서 국가 정체성과 긴밀하게 결합해 왔다. 2020년 유고브(YouGov) 조사에 따르면 영국인의 56%가 영국을 “기독교 국가”라고 응답했고, 여기에는 비기독교인(47%)과 무종교인(49%)도 포함되었다.1)
그렇지만 이런 현실 뒤편에 정부가 교회 인사권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할 수 있는 특수한 구조가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영국 국왕이 영국국교회 수장으로서 성직자와 교회 요직을 임명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2012년 여성 성직자 임명 반대 사태 당시 총리였던 데이비드 캐머런이 “매우 슬프다”며 심경을 밝히면서, 교회에 “날카로운 촉구”가 필요하다고 입장을 표명했던 사례가 이를 잘 보여준다. 일부 의원은 의회 개입을 주장하기도 했다.2)
결국 “기독교 국가”라는 틀 안에서 정부가 교회 내부에 개입할 소지가 높아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종교와 정치의 결합이 “기독교가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낙관적 전망으로만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함을 드러낸다. 미국이 종교와 정부를 분리하는 정교분리의 원칙을 분명히 했던 것도 이러한 현실적 이유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기독교는 정치에 아예 무관심할 수도 없다.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을 위한 나라요, 이 세상의 유익과 축복, 구속과 구원을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정치에 관여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며, 오히려 어떤 의미에서 정치적이어야만 한다.”(81쪽)는 이 책 『예수와 권세(Jesus and the Powers』의 언급처럼, 교회는 정치와 완전히 단절되기 어렵다. 그렇다면 어떠한 방식으로 참여할 것인가?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는 정치 갈등, 사회 혼란, 테러 등이 발생할 때 종교가 일정 부분 개입되어 있는 장면이 왕왕 포착된다. 전통적 종교의 영향력이 줄어드는 듯한 탈종교, 탈기독교 시대에, 역설적으로 기독교는 정치의 중심부에서 갈등에 연루되는 일도 잦아졌다. 한국 또한 정치적 양극화와 이념 간 갈등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종교와 정치의 관계는 중요한 주제로 부상하고 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톰 라이트(N. T. Wright)와 마이클 F. 버드(Michael F. Bird)의 신간 『예수와 권세』는 교회의 공적, 정치적 역할을 심도 있게 다루고 있다. 저자들은 성경과 교회사, 현대 사회의 맥락을 두루 살피면서 고대 제국과 교회의 역사적 관계부터 현대 자유민주주의 사회 체제에서 교회의 역할까지 폭넓게 분석한다. 그리고 “예수의 십자가와 그분의 나라”라는 핵심 축을 놓고 기독교인이 정치 영역에서 가져야 할 태도와 기준을 설득력 있게 풀어낸다.
왜 이 책을 읽어야 하는가
탈종교화, 교회 이탈 가속화, SBNR(Spiritual But Not Religious) 현상은 전통적인 교회의 목소리가 점차 희미해지는 듯한 시대 흐름을 보여준다. 그러나 저자들은 바로 이런 시대일수록 교회가 정치적, 사회적 갈등의 한가운데 놓인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책의 1장에서 3장은 예수님과 초대교회가 로마 제국이라는 막강한 권력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 이후 기독교가 제국의 종교로 변모하며 어떻게 제국주의적인 일들을 양산했는지를 짚어본다. 이를 통해 독자가 교회와 정치권력의 역동적인 관계사를 파악하도록 돕는다. 4장부터 8장 결론까지는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지만, 이 세상을 위해 존재한다”라는 신학적 명제 아래 현대 사회 현실에서 기독교의 정치 참여와 책임을 구체적으로 풀어낸다.
책의 전개와 핵심 내용
(1) 교회와 제국(권력)의 역사적 관계
- 예수 시대와 초대교회: 저자들은 성서학자로서 성경 전체를 종횡무진하며 유대교로부터 교회까지 권력과 제국 간의 관계를 톺아본다. 예수님은 폭력을 동원해 평화를 유지하는 로마 제국 시대에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다. 그분의 나라는 정복이 아닌 성령의 능력에 기초해 생명과 해방을 가져오는 통치이다. 유대교로부터 반제국적이고 반이교적인 정서를 계승한 초대 교회 역시 당대 권력에 맞섰지만, 공동선을 위해 헌신하며 그리스도를 증언했다는 점에서 로마 제국과 대조를 이룬다.
- 교회와 제국의 역사적 결탁: 저자들은 기독교를 세계적인 종교로 만든 것은 복음 전도가 아니라 제국의 패권이었다고 일침 한다. 서구 문명 형성에 일정 기여를 했으나 식민주의, 노예제, 신정정치 등을 통해 부를 축적하며 온갖 문제를 일으킨 부끄러운 과거도 지적하고 있다. 문제는 제국의 질서가 형태만 달리할 뿐 지속되고 있다는 점이다. 저자들은 오늘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제국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건설에 기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려면 기독교의 복음이 정치와 사회에 어떤 함의를 갖고 있는지 숙고할 필요가 있다.
(2) 복음의 정치·사회적 차원
- 예수의 나라와 권세: 책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나라가 세상의 나라들처럼 폭력이나 강압을 통해 얻은 승리가 아니라, “용서와 새롭게 된 인간으로 번성할 자유”를 핵심으로 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기독교인은 공동체 내외부에서 모든 권세들을 하나님과 화해하게 하는 일을 실천해야 한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정치에 헌신해야 하는 것이다.
- 정부와의 관계: 저자들은 로마서 13장, 베드로전서 2장 등 여러 성경 구절을 예로 들며, 정부가 공동선을 위해 하나님이 권한을 위임하셨으므로 원칙적으로 존중하며 협력하되, 그 권위에 절대적 신성을 부여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또한 정치권력은 하나님이 주신 책임을 수행해야 한다. 부패와 폭력에 맞서는 예언자적 기능도 감당해야 하지만, “학대 앞에서도 시민 불복종의 길을 가기를 매우 꺼려했던” 칼뱅의 예를 들며 이 주제에 대해 매우 신중하게 접근해야 하고, 그 기준은 반드시 비폭력적인 평화의 방식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3) 오늘의 권세에 대한 비판과 경계
그렇다면 누구에게 저항해야 하는가? 저자들은 전체주의와 기독교 민족주의, 시민 전체주의의 위험을 경고한다.
- 먼저 기독교 민족주의는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국가와 동일시하곤 한다. 저자들은 기독교인들이 국가로부터 특권을 부여받고, 기독교가 진정한 신앙 감정의 일부가 아니라 애국심의 외형적 표현이 된다는 점에서 기독교인이나 비기독교인 모두에게 위험하다고 지적한다. 관용적 사회를 이루기보다 다른 종교나 이웃을 배제하고, 특정 교파나 인종을 우월시하며, ‘십자가 없는 하나님 나라’를 추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 전체주의를 살펴보면, 교회는 파시즘이나 공산주의 등 권위주의 국가 권력과 결탁해 특정한 기독교의 해석을 강제할 수 있다. 다원성을 내세우며 종교나 이념의 다양성을 억압하는 시민 전체주의 역시 연성 권위주의적 방식으로 나타나기 쉬우므로 경계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한다.
(4) 교회가 지향해야 할 정치 참여의 방식
그렇다면 교회는 어떻게 정치에 참여해야 하는가? 저자들은 오늘날을 공포와 분열의 시대로 진단하며, 기독교인이 사적인 영역을 넘어 공적 영역에서도 선을 행하고, 선을 만들어 가고, 선을 지탱하기 위해 노력하는 공적 신앙을 요청한다. 신실한 신앙인의 진정성 있는 정치 참여는 하나님의 뜻을 위하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면서 동시에 세상을 위하는 ‘이 세상의 시민’ 임을 인정하는 태도에서 출발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타인을 존중하고, 사회 전체에 기여하는 이웃 사랑이야말로 근본적인 자유주의적 가치라고 강조한다.
- 자유민주주의: 저자들은 독재와 전체주의를 막기 위한 현실적 수단으로 “가장 덜 나쁜 제도”로서 자유민주주의를 제시한다. 보편적 참정권, 법치, 권력 분립, 표현의 자유, 자기비판 등은 시민의 안전과 번영을 위해 필수 불가결하다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언제나 훼손될 위험을 안고 있지만, 다원적이고 다문화적인 환경에서 살아가는 기독교인은 “다양성 안에서 일치를 찾고, 정치적 규율로서 환대를 실천하며, 모두의 공동선에 보탬이 됨으로써 하나님 나라 건설에 기여”해야 함을 역설한다.(292쪽)
- 당당한 다원주의: 저자들은 이 과정에서 ‘당당한 다원주의(confident pluralism)’라는 개념을 통해, 국가 권력을 이용해 상대방을 억누르는 대신 서로의 자유를 존중하고 설득하며 살아가는 길을 제안한다. 자유민주주의는 본래 여러 정치적 관점을 만드는 것이기에, 사회적 동질성을 만드는 시도야말로 반자유주의적이고 비민주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갈등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하더라도, 공평한 제도에 대한 신뢰와 관대한 신앙적 헌신을 통해 평화로운 공존으로 나아가야 함을 주장한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정치사회적 변혁의 멀고도 험한 길
『예수와 권세』는 분열과 경쟁이 심화되는 현대사회에서 교회가 어떻게 정치적 존재로 거듭나고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지 다루고 있다. 저자들은 신정정치나 왕권신수설처럼 통치자를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절대화하는 모델을 거부한다. 동시에, 교회가 철저히 정치 영역에서 물러나거나 분리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비성경적이라고 말한다. 교회가 사회, 정치 영역에 참여할 때 직면하는 딜레마를 성경적으로 접근함과 동시에 현실에서 일어날 수 있는 기독교의 기능 장애, 곧 기독교 민족주의와 전체주의, 그리고 민주주의의 편향이나 독재 가능성을 예리하게 비판하며 원칙적인 행동 지침도 제시한다. 물론 모든 정치적 상황에 일률적으로 적용하기에는 한계가 있고, 원론적인 주장이 많다는 점 또한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이만큼 좋은 정치신학 입문서는 당분간 찾아보기 힘들 것”이라는 강영안 교수의 말이 과언이 아닐 만큼 하나님 나라 신학의 관점에서 성경과 현대 문화를 폭넓게 조망하고, 정치신학의 기본기를 다질 수 있도록 돕는다. 더욱이 엄중한 한국 사회의 현실과 복잡한 정치 지형에서 이 책의 이야기는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이 책은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종으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의 통치라는 신학적 비전 아래에서 기독교인들이 국가 권력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고 정치에 참여해야 하는지 안내한다. 기독교인과 신앙 공동체는 제국의 방식, 곧 폭력과 힘이 아닌 용서와 관용, 희생과 섬김, 화해와 사랑의 공적 증언으로 하나님 나라 건설에 기여하고, 그 나라를 준비하고, 그 나라를 선취하며, 그 나라의 충만한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 부르심을 받았다. 어쩌면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는 하나의 “불가능한 가능성”으로서 결코 완성될 수 없으며, 앞으로 더 험난한 길을 걸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을 위해 교회가 공동선과 평화를 지향하며 삶의 현장에 참여하고, 다양한 견해를 가진 이웃들과 대화를 통해 공존의 장을 넓혀 갈 것을 요청한다. 복음이 교회 울타리 안에 갇히지 않고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며, 교회가 이 땅의 정치와 사회를 어떻게 섬겨야 할지 고민하는 이들에게 『예수와 권세』는 유익한 도전과 통찰을 제공한다.
김지혜 책임연구원
[그리스도인의 정치 참여][기독교와 정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