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치는 매우 중요하다. 심지어 당신이 그리스도인이라면 정치 활동 참여는 필수적인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정치적인 활동을 해야 하는 이유는 ‘문화’의 중요성 때문이다. 이는 더 나아가 세계적으로도 중요한 문제이다. 우리는 세계 시민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성경은 시민으로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계 속에서 정치 참여를 이행할 의무가 있다고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산상수훈에서 '빛과 소금'이라는 비유를 통해,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인의 정치 참여의 필요성을 언급하셨다. (마 5:13-16). 빛과 소금은 여러 중요한 의미의 비유이다. 예수님이 살던 당시, 소금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것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겨졌다. 소금이 없으면 음식의 맛과 향을 구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소금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음식이 썩지 않도록 보존해주는 일이다. 만약 우리가 생선이나 고기를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바로 먹기 보다는 그 전에 거기에 소금을 칠 것이다. 소금은 고기가 썩지 않도록 방지해주는 역할을 한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도 이와 같이 소금과 같은 역할로서 존재해야 하며, 소금과 같이 행동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세상의 빛으로 부르셨다. 우리가 빛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삶에 역사하신다는 것을 뜻하며, 동시에 예수님이 모든 사람들에게 전하고자 하시는 진리를 우리를 통해 깨닫게 하시는 것이다. 빛은 곧 그리스도의 메시지이다.
그렇기에 당신은 이렇게 생각해볼 수 있다 : 소금은 무엇에 대해 대항하고 막아내는 부정적 이미지의 의미를 가지며, 동시에 빛은 무엇인가를 이루어지게 하도록 만드는 긍정적인 이미지의 의미를 갖는다.
즉, 우리는 소금으로써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도덕적, 문화적 침식에 저항할 수 있어야 한다.
즉, 우리는 이 땅에 진리가 선포되고 이루어질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문화에 대해 수동적인 관찰자로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대해 ‘존 스토트(John Stott)’는 “고기를 소금에 절이지 않고서 고기가 상했다며 비난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이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비난이다. 진짜 우리가 가져야 할 질문은 ‘소금은 어디에 있는가?’이다”라고 말했다.
존 스토트의 이러한 질문은 명백하게 그리스도인의 정치 참여와 관련이 있다.
나는 종종 ‘그리스도인들이 정치참여나 선거 투표에 참여하고 신경 써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받는다. 아마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음, 어떤 것을 우리의 힘으로 만들어낼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하나님께서 하시게 그냥 둬야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접근은 수동적인 시민 활동이자, 치명적인 결점인 운명론적인 생각에 지나지 않는다. 더구나 그리스도인들의 이러한 말에는 어떠한 성경적인 근거도 없다.
이처럼 대체로 그리스도인들은 무의식적으로 정치적인 일들에 개입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내가 아는 한에 있어 명확하게 말하자면, 그리스도인들은 입법과 관련된 일들, 그리고 투표 활동에 정치적인 사명을 추구하는 것을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정치적인 것에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는 우리의 생각은, 이 세상에 대해 빛과 소금의 사명을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정치적인 시민’이 될 수 있을까?
여기에는 우리가 마음에 새겨야 할 3가지 혁신적인 것들이 있다. (다음에 올 내용은 미국의 상황을 고려하며 쓴 것이다. 각 나라의 상황과 문화에 따라 충분히 바뀔 수 있는 것들이다.)
1. 정치 문제에 있어서 우리는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여야 한다.
만약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라면, 우리는 대부분 공화당(Republican)에도, 민주당에도 속하지 않는다. 우리가 공화당이건 민주당이건 이것은 본질적인 문제가 안 된다. 우리는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존재해야 하고, 공화당원 혹은 민주당원이 되는 것은 그다음 이야기일 뿐이다. 여러분들 중에 일부는 정치적으로 진보도 보수도 아닌 중도라는 것에 안도감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해서, 아마도 우리는 신학적으로는 보수적이지만 사회적 감수성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 아마도 우리는 진보주적인 것에는 매우 보수적으로 느낄 수도 있지만, 매우 진보적인 것에는 반대로 보수적이라고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아마도 우리는 생명의 신비함에 대해 관심을 가지면서도 동시에 지구 온난화에 대해서도 걱정하고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부터 분리되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사실상 우리는 분리를 느낄 것이다.
우리의 순종은 예수님을 향한 것이지, 어떤 당이나 이념을 향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진정한 시민권은 국가에 있는 것이 아닐뿐더러, 정치적 당파에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우리의 진정한 시민권은 하나님 나라에 있다. 그리고 예수의 제자로서, 우리는 어떤 문제들에 대해서는 이쪽 진영이 더 옳다는 것을 느낄 것이고, 다른 문제에 있어서는 또 반대쪽 진영이 더 낫다는 합리적인 판단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완전히 다른 논지의 이슈에 대해서는, 두 진영이 틀린 관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알 것이다.
정치적으로 옳고 그름에서 더 나아가, 성경적 가치관을 고수하고 있는지를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어떤 한 정당을 따를 수도 있지만, 그리스도의 제자로서는 절대 그 정당의 의견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복종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항상 정당들을 넘어서 존재해야 하며, 거기가 어디든 간에 예수님이 이끄시는 곳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명확히 보길 원하시고, 듣길 원하시는 것에 대해서는 절대로 우리의 눈을 가리거나 귀를 막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정치적인 입장에(political party) 반대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우리는 어떤 주(또는 국가)에 주인이거나 하인이 아닌, ‘양심’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2. 우리는 ‘두 가지의 악들(Evils)’ 중에 그나마 덜 악한 것에 투표하는 것뿐이다.
어떤 정책이 정치적으로 명확히 구분되지 않거나, 어떤 후보의 정책이나 성향에 대해서 매력을 느끼지 못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투표를 하는 게 좋을까? 종종 사람들은 “악한 것들 중에 그나마 덜 악한 것에” 투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최근 선거를 보면 대다수의 미국인들이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참여했다.
이렇게 생각하는 데는 한 가지 이유가 있다.
이 세상에 완벽한 후보자는 없다. 하지만 몇몇 사람들은 이러한 생각에 대해 “그리스도인이라면 악을 선택해서는 안 되기에 어느 쪽에도 투표를 하지 않는 게 낫다”라고 반응하곤 한다. 나는 이러한 생각은 잘못된 것이라고 본다.
투표용지 후보에 ‘예수님’이 없으시다면, 우리는 누가 선거에 출마하든지 간에 여러 악 중에서 그나마 덜 악한 것을 고를 수밖에 없을 것이고, 똑같은 일을 매 선거마다 반복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정체성을 포기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모든 후보자들에게 결점이 있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선택’하고 ‘투표’ 해야 한다.
나는 지금껏 당신이 선택한 것보다 더 과감한 제안을 하나 할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헌신적인 사람인지 아닌지에 대한 문제가 아니다. 여러 후보자가 있으면 좋긴 하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후보자가 ‘그리스도와 문화’라는 중대한 문제에 대해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는지가 관건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종종 대표자(ex. 의원, 주지사, 대통령 등)를 선출하는 일에 있어서 간과하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지역을 대표하는 목사를 선출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3. 기독교 정치 참여의 핵심은 성경적 세계관을 주관하는 기독교 정신이다.
그래서 투표의 핵심은 무엇인가? 정치 참여의 핵심은 무엇인가?
그리스도인의 투표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지금까지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은 투표와 정치적 참여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우리가 하려는 것은 우리의 생각을 분류해내는 것이다. 이는 특정 카테고리로 분리시키는 것을 의미하는데, 예를 들어 ‘신앙’과 ‘일’, ‘페이스북’, ‘주식시장’ 등 이 모든 것들을 각각 다른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분리된 한 영역에 관한 우리의 생각을 또 다른 영역에 대한 생각과 공유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어떤 이슈에 대해서 무조건적으로 우리의 신앙을 끼워 맞춰 통찰하지 않아야 한다.
"성경적으로 보았을 때, 인간의 성화된 삶과 인간의 삶의 종말을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성경적으로 이민에 대해서 생각한다는 것을 어떤 것을 의미하는가?"
"동성 결혼 또는 성 정체성을 둘러싼 첨예한 문제에 대해서 성경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가난한 자들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 성경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어떤 것을 의미하는가?"
성경적 관점으로 사회적 이슈를 보려고 시도하는 그리스도인들이 거의 없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들은 ‘좌’와 ‘우’를 막론하고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그들의 생각을 복음주의적인 열정으로 인식해 버린다.
나는 2016년 선거 기간 때 ‘라이프웨이 리서치(Lifeway Research)’에서 나온 연구 결과를 본 적이 있다. 내가 이 리서치에서 발견한 것은 10명 중 1명 꼴의 사람들만이 성경이 그들의 정치적 견해들을 만드는데 영향을 주었다고 응답했다는 것이다. 나머지 대다수의 사람들은 거의 친구 혹은 미디어에 의해 영향을 받고 있다고 답했다.
우리는 반드시 기독교 세계관을 갖고 사역을 해야 한다. 여기서 ‘세계관’이 핵심 단어이다. 세계관은 우리로 하여금 다른 생각들을 판단하는 데 있어서 하나의 준거 틀을 마련해 준다. 이것은 인간이 기독교적 관점에서 광범위한 인간의 생각과 창조 세계를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방법이다.
‘마틴 루터 킹’ 목사(Martin Luther King, Jr)의 기독교적인 세계관은 각종 인종차별에 저항하는 것들이었다. ‘버밍엄 감옥’에서 그가 썼던 글을 통해 그의 세계관을 자세히 통찰해 보고자 한다.
“...여기에는 2가지 종류의 법이 있다: 정의로운 법과 불공정한 법이다. 정의로운 법은 도덕률 또는 하나님의 법에 의해 형성된 법이다. 하지만 불공정한 법은 도덕률에 어긋나는 법이다. 모든 차별과 관련된 형태의 법은 전부 불공정한 법이다."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인간의 법 위에 있는 하나님의 정의로운 법에 대한 권리를 주장했다. 킹 목사의 이러한 주장에는 다른 어떤 세계관도 필요 없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을 통해 킹 목사는 하루하루 그를 필요로 하는 곳에 빛과 소금의 존재로 살아갈 수 있었다.
쟁점은 그리스도인이 투표를 거부함으로써 정치적인 참여를 하느냐 마느냐에 있지 않다. 핵심은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정치에 참여할 것인가이다. 이에 대한 답은 명확하다.
그리스도인답게 행동하라.
이 글은 허가를 받아 여기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James Emery White
제임스 에머리 화이트는 노스캐롤라이나 캐롯 지역에 있는 'Mecklenburg' 지역 교회를 개척했고, 담임 목사로 시무하고 있다. 그리고 고든 코넬 신학교에서 4번째 총장으로 섬겼으며, 신학과 문화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그의 최근 출판 저서 “After ‘I Believe’”는 현재 '아마존' 또는 'favorite bookseller'에서 구매할 수 있다. Church & Culture blog를 무료 구독을 하고 마음껏 자료를 볼 수 있다. 이곳에 방문하면, 과거에 블로그에 공지했던 것들을 볼 수 있고, 전 세계의 교회와 문화에 대한 최신 뉴스를 읽을 수 있고, 팟캐스트로도 들을 수 있다.(Instagramat @JamesEmeryWhite)
Churchleaders.com에 게시된 "On Being a Political Christian"을
문화선교연구원에서 번역하여 한국교회에 공유한다.
(번역자: 이광명)
정치는 매우 중요하다. 심지어 당신이 그리스도인이라면 정치 활동 참여는 필수적인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정치적인 활동을 해야 하는 이유는 ‘문화’의 중요성 때문이다. 이는 더 나아가 세계적으로도 중요한 문제이다. 우리는 세계 시민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성경은 시민으로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계 속에서 정치 참여를 이행할 의무가 있다고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산상수훈에서 '빛과 소금'이라는 비유를 통해,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인의 정치 참여의 필요성을 언급하셨다. (마 5:13-16). 빛과 소금은 여러 중요한 의미의 비유이다. 예수님이 살던 당시, 소금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것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겨졌다. 소금이 없으면 음식의 맛과 향을 구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소금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음식이 썩지 않도록 보존해주는 일이다. 만약 우리가 생선이나 고기를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바로 먹기 보다는 그 전에 거기에 소금을 칠 것이다. 소금은 고기가 썩지 않도록 방지해주는 역할을 한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도 이와 같이 소금과 같은 역할로서 존재해야 하며, 소금과 같이 행동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세상의 빛으로 부르셨다. 우리가 빛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삶에 역사하신다는 것을 뜻하며, 동시에 예수님이 모든 사람들에게 전하고자 하시는 진리를 우리를 통해 깨닫게 하시는 것이다. 빛은 곧 그리스도의 메시지이다.
그렇기에 당신은 이렇게 생각해볼 수 있다 : 소금은 무엇에 대해 대항하고 막아내는 부정적 이미지의 의미를 가지며, 동시에 빛은 무엇인가를 이루어지게 하도록 만드는 긍정적인 이미지의 의미를 갖는다.
즉, 우리는 소금으로써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도덕적, 문화적 침식에 저항할 수 있어야 한다.
즉, 우리는 이 땅에 진리가 선포되고 이루어질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문화에 대해 수동적인 관찰자로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대해 ‘존 스토트(John Stott)’는 “고기를 소금에 절이지 않고서 고기가 상했다며 비난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이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비난이다. 진짜 우리가 가져야 할 질문은 ‘소금은 어디에 있는가?’이다”라고 말했다.
존 스토트의 이러한 질문은 명백하게 그리스도인의 정치 참여와 관련이 있다.
나는 종종 ‘그리스도인들이 정치참여나 선거 투표에 참여하고 신경 써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받는다. 아마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음, 어떤 것을 우리의 힘으로 만들어낼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하나님께서 하시게 그냥 둬야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접근은 수동적인 시민 활동이자, 치명적인 결점인 운명론적인 생각에 지나지 않는다. 더구나 그리스도인들의 이러한 말에는 어떠한 성경적인 근거도 없다.
이처럼 대체로 그리스도인들은 무의식적으로 정치적인 일들에 개입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내가 아는 한에 있어 명확하게 말하자면, 그리스도인들은 입법과 관련된 일들, 그리고 투표 활동에 정치적인 사명을 추구하는 것을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정치적인 것에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는 우리의 생각은, 이 세상에 대해 빛과 소금의 사명을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정치적인 시민’이 될 수 있을까?
여기에는 우리가 마음에 새겨야 할 3가지 혁신적인 것들이 있다. (다음에 올 내용은 미국의 상황을 고려하며 쓴 것이다. 각 나라의 상황과 문화에 따라 충분히 바뀔 수 있는 것들이다.)
1. 정치 문제에 있어서 우리는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여야 한다.
만약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라면, 우리는 대부분 공화당(Republican)에도, 민주당에도 속하지 않는다. 우리가 공화당이건 민주당이건 이것은 본질적인 문제가 안 된다. 우리는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존재해야 하고, 공화당원 혹은 민주당원이 되는 것은 그다음 이야기일 뿐이다. 여러분들 중에 일부는 정치적으로 진보도 보수도 아닌 중도라는 것에 안도감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해서, 아마도 우리는 신학적으로는 보수적이지만 사회적 감수성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 아마도 우리는 진보주적인 것에는 매우 보수적으로 느낄 수도 있지만, 매우 진보적인 것에는 반대로 보수적이라고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아마도 우리는 생명의 신비함에 대해 관심을 가지면서도 동시에 지구 온난화에 대해서도 걱정하고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부터 분리되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사실상 우리는 분리를 느낄 것이다.
우리의 순종은 예수님을 향한 것이지, 어떤 당이나 이념을 향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진정한 시민권은 국가에 있는 것이 아닐뿐더러, 정치적 당파에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우리의 진정한 시민권은 하나님 나라에 있다. 그리고 예수의 제자로서, 우리는 어떤 문제들에 대해서는 이쪽 진영이 더 옳다는 것을 느낄 것이고, 다른 문제에 있어서는 또 반대쪽 진영이 더 낫다는 합리적인 판단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완전히 다른 논지의 이슈에 대해서는, 두 진영이 틀린 관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알 것이다.
정치적으로 옳고 그름에서 더 나아가, 성경적 가치관을 고수하고 있는지를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어떤 한 정당을 따를 수도 있지만, 그리스도의 제자로서는 절대 그 정당의 의견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복종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항상 정당들을 넘어서 존재해야 하며, 거기가 어디든 간에 예수님이 이끄시는 곳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명확히 보길 원하시고, 듣길 원하시는 것에 대해서는 절대로 우리의 눈을 가리거나 귀를 막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정치적인 입장에(political party) 반대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우리는 어떤 주(또는 국가)에 주인이거나 하인이 아닌, ‘양심’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2. 우리는 ‘두 가지의 악들(Evils)’ 중에 그나마 덜 악한 것에 투표하는 것뿐이다.
어떤 정책이 정치적으로 명확히 구분되지 않거나, 어떤 후보의 정책이나 성향에 대해서 매력을 느끼지 못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투표를 하는 게 좋을까? 종종 사람들은 “악한 것들 중에 그나마 덜 악한 것에” 투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최근 선거를 보면 대다수의 미국인들이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참여했다.
이렇게 생각하는 데는 한 가지 이유가 있다.
이 세상에 완벽한 후보자는 없다. 하지만 몇몇 사람들은 이러한 생각에 대해 “그리스도인이라면 악을 선택해서는 안 되기에 어느 쪽에도 투표를 하지 않는 게 낫다”라고 반응하곤 한다. 나는 이러한 생각은 잘못된 것이라고 본다.
투표용지 후보에 ‘예수님’이 없으시다면, 우리는 누가 선거에 출마하든지 간에 여러 악 중에서 그나마 덜 악한 것을 고를 수밖에 없을 것이고, 똑같은 일을 매 선거마다 반복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정체성을 포기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모든 후보자들에게 결점이 있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선택’하고 ‘투표’ 해야 한다.
나는 지금껏 당신이 선택한 것보다 더 과감한 제안을 하나 할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헌신적인 사람인지 아닌지에 대한 문제가 아니다. 여러 후보자가 있으면 좋긴 하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후보자가 ‘그리스도와 문화’라는 중대한 문제에 대해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는지가 관건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종종 대표자(ex. 의원, 주지사, 대통령 등)를 선출하는 일에 있어서 간과하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지역을 대표하는 목사를 선출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3. 기독교 정치 참여의 핵심은 성경적 세계관을 주관하는 기독교 정신이다.
그래서 투표의 핵심은 무엇인가? 정치 참여의 핵심은 무엇인가?
그리스도인의 투표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지금까지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은 투표와 정치적 참여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우리가 하려는 것은 우리의 생각을 분류해내는 것이다. 이는 특정 카테고리로 분리시키는 것을 의미하는데, 예를 들어 ‘신앙’과 ‘일’, ‘페이스북’, ‘주식시장’ 등 이 모든 것들을 각각 다른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분리된 한 영역에 관한 우리의 생각을 또 다른 영역에 대한 생각과 공유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어떤 이슈에 대해서 무조건적으로 우리의 신앙을 끼워 맞춰 통찰하지 않아야 한다.
성경적 관점으로 사회적 이슈를 보려고 시도하는 그리스도인들이 거의 없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들은 ‘좌’와 ‘우’를 막론하고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그들의 생각을 복음주의적인 열정으로 인식해 버린다.
나는 2016년 선거 기간 때 ‘라이프웨이 리서치(Lifeway Research)’에서 나온 연구 결과를 본 적이 있다. 내가 이 리서치에서 발견한 것은 10명 중 1명 꼴의 사람들만이 성경이 그들의 정치적 견해들을 만드는데 영향을 주었다고 응답했다는 것이다. 나머지 대다수의 사람들은 거의 친구 혹은 미디어에 의해 영향을 받고 있다고 답했다.
우리는 반드시 기독교 세계관을 갖고 사역을 해야 한다. 여기서 ‘세계관’이 핵심 단어이다. 세계관은 우리로 하여금 다른 생각들을 판단하는 데 있어서 하나의 준거 틀을 마련해 준다. 이것은 인간이 기독교적 관점에서 광범위한 인간의 생각과 창조 세계를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방법이다.
‘마틴 루터 킹’ 목사(Martin Luther King, Jr)의 기독교적인 세계관은 각종 인종차별에 저항하는 것들이었다. ‘버밍엄 감옥’에서 그가 썼던 글을 통해 그의 세계관을 자세히 통찰해 보고자 한다.
“...여기에는 2가지 종류의 법이 있다: 정의로운 법과 불공정한 법이다. 정의로운 법은 도덕률 또는 하나님의 법에 의해 형성된 법이다. 하지만 불공정한 법은 도덕률에 어긋나는 법이다. 모든 차별과 관련된 형태의 법은 전부 불공정한 법이다."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인간의 법 위에 있는 하나님의 정의로운 법에 대한 권리를 주장했다. 킹 목사의 이러한 주장에는 다른 어떤 세계관도 필요 없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을 통해 킹 목사는 하루하루 그를 필요로 하는 곳에 빛과 소금의 존재로 살아갈 수 있었다.
쟁점은 그리스도인이 투표를 거부함으로써 정치적인 참여를 하느냐 마느냐에 있지 않다. 핵심은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정치에 참여할 것인가이다. 이에 대한 답은 명확하다.
그리스도인답게 행동하라.
이 글은 허가를 받아 여기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James Emery White
제임스 에머리 화이트는 노스캐롤라이나 캐롯 지역에 있는 'Mecklenburg' 지역 교회를 개척했고, 담임 목사로 시무하고 있다. 그리고 고든 코넬 신학교에서 4번째 총장으로 섬겼으며, 신학과 문화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그의 최근 출판 저서 “After ‘I Believe’”는 현재 '아마존' 또는 'favorite bookseller'에서 구매할 수 있다. Church & Culture blog를 무료 구독을 하고 마음껏 자료를 볼 수 있다. 이곳에 방문하면, 과거에 블로그에 공지했던 것들을 볼 수 있고, 전 세계의 교회와 문화에 대한 최신 뉴스를 읽을 수 있고, 팟캐스트로도 들을 수 있다.(Instagramat @JamesEmeryWhite)
Churchleaders.com에 게시된 "On Being a Political Christian"을
문화선교연구원에서 번역하여 한국교회에 공유한다.
(번역자: 이광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