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십](번역) 왜 모두가 진정한 신학자가 되어야 하는가?

2023-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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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y Everyone Should Be a Serious Theologian   by Scott Sauls


기독교 신앙인 중에서, 신학을 사랑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신학을 혐오하는 이도 있다.

 

우리는 신학을 사랑한다. 신학이 여러 가지 측면에서 우리의 신앙생활을 풍요롭게 해주기 때문이다. 신학은 66권의 성경을 정리하고, 체계화하며, 이야기화한다. 우리에게 때로는 부담으로 다가오는 성경을 더욱 이해하기 쉽고, 소화 가능한 방식으로 정리하는 데에 신학은 많은 도움을 준다.

신학은 또한 하나님, 세계, 이웃, 그리고 우리 자신을 더 분명하게 볼 수 있는 “해석의 렌즈”를 제공하며, 우리의 신앙을 굳건하고 깊이 있게 붙잡아주는 역할을 한다. 신학은 우리에게 진실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분별할 수 있는 확신을 주고, 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것과 멀리해야 하는 것을 분별할 수 있도록 해준다. 또한, 건강한 삶을 살 수 있게 해주는 것과 우리 삶을 저해하는 것에 대해서도 분명히 알려준다. 우리가 겸손함(humility)과 관심을 갖고 신학을 대할 때, 신학은 우리에게 매우 강력한 자산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신학을 잘못된 방향으로 사용한다면, 최악의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경고하듯이, 우리가 모든 신비를 헤아릴 수 있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이는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이다. 야고보 역시 바울과 비슷한 말을 한다. 그는 물샐틈없는 가장 올바른 교리 체계를 갖는 것 ‘그 자체’가 우리를 지옥의 악마와도 같은 범주에 들게 한다고 직설적으로 말한다. 그리고 야고보는 덧붙인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우리는 성경 전체를 외우거나 믿을 수 있고 성경의 모든 단어를 사용해서 설교할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성경에 순종하지 않을 수 있다. 이것이 사실로 다가온다면, 우리는 귀신들처럼 떨려야 할 것이다. 그리고 바로 예수님께 나아가야 할 것이다.

 

나의 전임자였던 내슈빌의 Christ Presbyterian Church의 찰스 맥고원(Charles McGowan)은 한 비유를 들어주었는데, 이 재치 있는 비유는 내 사역에 꽤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 이야기의 요점은 다음과 같다.

스콧(Scott), 나는 기독교인에게 신학이란 우리 몸의 골격 또는 뼈대(skeleton)와 같은 기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뼈대는 몸의 나머지 부분에 그 구조와 힘을 제공하기 위한 절대적 요소입니다. 하지만 뼈대가 몸과 함께 있는 것처럼, 신학이 우리 자신의 영성을 위한 거의 유일한 것이거나 심지어는 가장 주된 것처럼 보인다면, 그것은 우리가 영적으로 아프거나 죽었다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찰스는 이 비유를 통해서, 사람들이 신학을 깊이 공부하는 신학교를 종종 사역자들의 “무덤”으로 여기는 이유를 설명한다. 이들은 신학교에서 배우는 지나치게 학문적인 성경 연구에 대해 우려를 표한다. 이러한 연구 때문에, 하나님을 추구하는 것이 도리어 무미건조하고 생명력이 없으며 여러 방면에서 쓸모없는 노력이 될 것을 걱정하는 것이다.

긍정적으로 보자면, 이러한 우려를 표하는 사람들은 첫 번째이자 가장 중요하고 큰 계명인 우리 주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우리의 이웃을 우리의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을 잊지 않고 소중히 기억하는 사람들이다.

 

이 뼈대 비유는 특히 우리와 같은 개혁교회 전통과 연결된다. 알다시피, 개혁교회에 속해 있는 우리는 건전한 교리를 강조한다고 알려져 있다. 우리 대부분은 건전한 교리, 즉 성경에 근거한 정확한 신학이 전통의 가장 큰 강점이라고 말할 것이다. 이것은 사실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영적 삶의 자연스러운 결과로서 마음의 우선순위를 정하지 못하고 방황할 때, 다시 말해서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와 같은 성령의 열매를 그 마음의 중심에 맺지 못했을 때, 우리는 모든 것을 놓칠 위험이 있다. 성경은 성령의 ‘검’으로 깊이 있게 탐구되어야 하고, 성경으로부터 출발한 건전한 교리는 항상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으로 이어져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믿음이 무덤으로 떨어질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성경을 ‘공부’하는 것과 신학에 참여하는 것을 멈추어야 하는가? 아니면, 신학을 경시할 정도로 “거만하게 만드는” 지식을 두려워해야 하는가? “나에게 교리를 주지 말고, 예수님만 주십시오”라고 말하는 통속적 입장을 받아들여야 하는가? (물론 ‘나에게 예수님을 달라’라는 것 자체에 이미 교리가 담겨 있다.)

 

건전한 교리를 추구하는 자세를 무덤으로 보내듯이 추방하기보다는, 로마서 12장 1~2절 말씀을 떠올려보자.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나는 이 말씀대로 건전한 신학 교리를 구원하고 회복시켜야 한다고 믿는다.

성경이 건전한 교리를 어디에서 언급하든 간에, “건전함(sound)”으로 번역되는 그리스어 단어는 “건강함(healthy)”을 뜻하는 일반적인 의학 용어였다. 골격 또는 뼈대는 건강의 적이 아니며, 오히려 건강의 든든한 친구이자 지지자이다.

 

필자가 커버넌트 신학교(Covenant Theological Seminary) 1학년에 재학중일 때, 단 도리(Dan Dori)는 학문적인 하나님 추구가 우리를 “무덤”에 이끌지 않는다고 말했다. 오히려 이 학문적인 자세는 우리가 ‘마음 속에서’ 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만큼, 우리의 영혼과 힘으로 건강하고 올바르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해준다. 하나님을 완전히 사랑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하나님으로부터 명확하게 들어야 한다. 진리의 말씀을 문화나 최신 종교적인 경향이나 감정이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들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떤 방식의 사랑과 찬양을 받기를 원하시는지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남편이 아내를 적극적으로 알기(그녀가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이 그녀를 사랑받는다고 ‘느끼게’ 하는지)에 실패한다면 남편은 과연 그의 아내를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을까?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한정적으로 알 뿐이다. 신학에 대한 추구와 건전한 교리가 제한되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을 올바르게 사랑하는 데에 있어 한계를 겪게 될 것이다.

 

내가 말하려는 바는, 교리적인 모든 것을 끊어내자는 것이 아니라. 교리주의적인 모든 것을 끊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교리주의자들의 전형은 신약성경에서 나오는 바리새인들의 모습이고 우리는 이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교리주의자가 되는 것은 거만하고, 영적으로 비대해지고, 건방져지는 것이고, 이는 신앙에 있어서 위협적이고 배타적인 사람이 되는 것을 말한다. 교리주의적이라 함은, 성경을 매일 읽고 3주에 한 번씩은 성경 연구를 하면서도 어느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우리 스스로는 높이면서, 다른 이웃들은 천대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전형적인 바리새인들로, 그들은 “우리가 그들과 같지 않고 다른 사람이라는 것”에 감사해 한다.

 

따라서 목회자에게 있어서, 풍부하게 연구되고, 건전하고, 성경적으로 근거가 있는 ‘건강한’ 교리는 필수적이다. 목회자의 건전한 정도(또는 불건전한 정도)는 그가 섬기는 교회 공동체에도 영향을 준다. 거만한 목회자는 거만한 성도들을 끌어들이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신학적인 깊이가 얕은 목회자는 돌밭에 떨어진 씨처럼, 뿌리가 없는 성도들을 끌어들일 위험이 있다. 둘 중에 어떤 경우가 더 최악인지는 확신할 수 없다. 전자에서 우리는 냉담한 반응을 경험할 것이고, 후자에서는 공동체가 붕괴되거나 교리적 바람과 파도에 휘둘릴 수 있다. 어느 쪽이든, 모두 열정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열정과 열의는 잘못된 것이며 건전하지 못한 것이다. 건전한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건전한 교리가 보존되어야 할 첫 번째 이유는 이것이다. 바르고 건강한 교리 없이는, 예수님 대신 단지 교리 없는 문화의 제자(disciples of culture)가 될 위험이 있다. 성경을 근거로 한 건강한 교리는 우리를 지혜롭고 분별력 있게 한다. 즉 우리의 방식보다 높은 하나님의 방식이, 그리고 우리의 생각보다 높은 하나님의 생각이 우리 마음에 깊이 뿌리내릴 것이다. 기억해야 할 점은, 세상의 문화는 변하고 인간의 철학과 생각은 변하지만 진리는 늘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경과 성경으로부터 파생되는 건강한 신학을 연결하는 것이다. 성경은 상대적인 것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대신에, 성경은 우리 인간 시스템과 철학, 신학적 구조를 면밀하게 살피고, 좋고 참인 것을 분별하거나 반대로 나쁘고 거짓된 것을 질책한다.

 

건전한 교리가 사역자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두 번째 이유는 맥체인(McCheyne)이 전에 말했듯이, 사역자가 성도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위대한 것이 거룩함이기 때문이다. 목회자들은 단지 우리 자신이 하나님과 함께 간 만큼만 사람들을 인도할 수 있다. 우리는 이를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라는 바울의 말씀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있음으로써 거룩한 예수님의 모습을 ‘닮게’ 된 12명의 제자들도 보게 된다. 그들은 예수님께 쉬운 멍에와 짐을 가볍게 하는 은혜를 배웠고, 이를 통해 영혼의 쉼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비로소 그들은, 그분의 은혜와 진리를 세상에 전하고 교회를 세우고 가꾸며 그의 이름으로 선한 일을 감당하는 사람으로 준비될 수 있었다.

진리와 신학이 우리 안에서 불이 붙을 정도로 스며든다면 큰 파급효과가 있을 것이다. 스펄전(Spurgeon)은 청교도 존 번연(John Bunyan)의 유명한 말을 인용하며 이렇게 말했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을 자르면, 하나님은 성경의 피를 흘릴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성경의 피를 흘릴 때, 즉 진리가 우리 내면에 깊숙이 들어와서 우리가 그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줄 때, 그 진리는 영향력과 전염성을 갖게 될 것이다. 우리와 우리가 이끄는 사람들을 위한 하나님 나라의 덕, 즉 사랑과 성령의 열매는 하나님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지 우리 스스로가 성취하는 것이 아니다.

 

스펄전과 존 번연이 그랬듯이, 우리의 뼈대를 감싸는 근육이 우리의 육신뿐 아니라 영혼에도 새로운 생명을 주길 기대하며 글을 마친다.

 

 

Scott Sauls

Scott Sauls는 테네시 주의 내슈빌에 있는 Christ Presbyterian Church의 담임목사이며, 다음 책들의 저자이다.

Jesus Outside the Lines: A Way Forward for Those Who are Tired of Taking Sides.
Beautiful People Don’t Just Happen: How God Redeems Regret, Hurt, and Fear in the Making of Better Humans.


Churchleaders.com에 게시된 "Why Everyone Should Be a Serious Theologian"
문화선교연구원에서 번역하여 한국교회와 공유합니다.
(번역: 이광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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