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와 교회](번역) 포스트코로나 시대의 교회-왜 교회로 돌아가야 하는가? By Carmen Joy Imes

2020-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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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아침에 나는 따뜻한 담요를 껴안고 벽난로 앞에 앉아 조용함을 즐긴다. 얼마 후에 나머지 가족이 동요하며 다음의 몇 가지 선택 중에 고민할 것이다. 교회에 갈 준비를 할 것인가? 집에서 온라인 예배를 드릴 것인가? 온라인 예배를 나중에 볼 것인가? 아니면 오늘은 그냥 예배를 드리지 말 것인가?


이러한 옵션 중 일부는 2020년에 COVID19로 인해 등장했다. 지난 6개월 동안 ‘Zoom(온라인 회의 플랫폼)’ 또는 ‘YouTube’로 집에서 예배를 드린 후에, 당연한 줄만 알았던 삶의 리듬은 더 이상 당연한 일상이 아니게 되었다.


현재 캐나다 앨버타 시골 카운티의 COVID19 확진자는 없다. 이 주 전역의 유치원에서 12학년까지의 학생들이 다시 학교로 돌아갔고, 교회는 다시 모일 수 있게 되었지만, 여전히 많은 예방 조치가 따른다. 교회에 참석하는 것은 이제 더 복잡해졌다. 일부 교회에서는 사전 등록, 마스크 및 손 소독제 사용이 필수다. 대부분의 사람들끼리 사회적 거리를 확보하기 위해 교회 좌석들이 떨어져 있거나 군데군데 차단되어 있다. 찬양을 부르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많은 주일 학교 프로그램들이 중단되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 악수도 못하고 로비에서 모이지를 못하는데 왜 굳이 교회를 가야 하는가?


집에 머물러야 했던 기간 동안 많은 교회들이 예배의 지속성을 지키기 위하여 각종 장비와 훈련에 투자하였으며 온라인 스트리밍에 도전하였다. 이를 잘 수행한 교회들은 또 새로운 도전을 직면한다. 즉, 대면 예배로 돌아가기 위한 준비작업이다.  


한 지방 목회자는 저예산과 부족한 경험 가운데서도 자신의 교회가 디지털 방식으로 연결하려는 시도를 통해 행복한 결과를 가져왔다고 말했다. 그러나 아무도 그에게 온라인 예배들을 계속 지속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그들은 모두 교회로 돌아오기를 열망한다. 또 다른 목회자는 교회를 재개하는 것이 처음 교회를 시작했던 것보다 더 어렵다고 말했다.


솔직히 우리 교회는 예배를 디지털화하는 훌륭한 일을 해왔고, 우리 지도자들은 직접 만나는 지금도 온라인 예배를 계속하기로 결정했다. 이것은 부분적으로 면역력이 약해 아직 안전하게 모일 수 없는 사람들, 격리된 사람들, 그리고 우리의 작은 마을을 넘어 더 많은 청중에게 도달하기 위한 것이다. 사실상 6 피트 간격으로 의자를 둔 상태에서 주일 아침에 우리 모두가 건물 안에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약에 당신이 속한 지역의 자치단체가 예배를 금지하고 있다면 반드시 집에 머물러야 한다. 정부 지도자들은 여러분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이 상황은 영원히 지속되지 않을 것이다. 그날이 오면 결국 제한은 풀릴 것인데, 왜 굳이 코로나의 상황 속에 복잡한 절차를 통해 예배드리고, 거리를 두며 인사 나누고, 숨 막히게 노래를 부르며 주말의 평화를 깨트려야 하는가? 왜 그냥 집에서 드리지 않는 것인가?


COVID19는 우리 모두에게 더 큰 질문을 던졌다. 어쨌든 교회의 요점은 무엇인가? 직접 모이는 것 말고도 온라인으로도 교회가 존재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왜 다시 돌아가야 하는가?


교회 전통에 따라 분명한 대답이 보일 수 있다. 바로 성찬식이다. 당신이 만약에 성공회, 가톨릭 또는 루터 교인이라면 6개월 이상 성찬 없이도 지내왔을 것이다. 침례교도에게도 가정에서 성찬을 위한 크래커와 주스는 성찬과 동일한 것이 아닐 것이다. 아마도 당신은 그러한 성찬의 부재에 대한 아픔을 느끼고 돌아가고 싶어 할 것이다. 성찬식은 기독교 예배에 있어서 ‘YouTube’가 실현시켜줄 수 없는 아주 중요한 차원 중에 하나이다. 그것은 더 넓은 문제를 가리킨다: 바로 그리스도의 체현이다.


500여 년 전 하이델베르그 요리 문답은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딜레마를 예측하듯이 다음과 같이 질문을 통해 설명하였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당신의 유일한 위로는 무엇인가? 살아서나 죽어서나 나는 나의 것이 아니요, 몸도 영혼도 나의 신실한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다.” (하이델베르그 요리 문답: 문답 1)


내 몸은 예수의 것이다. 더 나아가, 나는 또한 세상에서 그분의 은혜의 수단인 교회에 속한다. 물론 매주 예배에 참석하는 것보다 교회가 되는 것(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훨씬 많지만, 모이는 예배는 교회의 일부가 되는 중요한 측면 중 하나이다. 교회를 참석하지 않기로 선택하면 무언가 상실된 것 같다.


나의 부재는 그리스도께서 교회 안에서 그리고 교회를 통해 성취할 수 있는 것을 감소시키는 반면, 나의 존재는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는 가시적인 수단이 된다. 궁극적으로 "내가 그것을 통해 무엇을 얻는 것"이 아니다. 교회에서의 나의 존재를 보류한다면 교회는 세상에서의 목적을 완전히 성취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실제로 교회에 모이는 것은 중요하다.

하이델베르그 요리 문답을 쓴 이들은 우리가 가정에서 예배해야 할 것을 거의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우리가 예수님의 몸과 영혼에 속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구현된 예배의 중요성을 인정한다. 온라인으로 접속하더라도 가능하지 못한 일이 물리적으로 함께 모였을 때에 발생할 수 있다.

James K. A. Smith의 저서 「You Are What You Love」(Brazos, 2016)에 따르면, 우리의 신체적 참여는 지금은 감지할 수 없는 결과를 가져 오지만, 이는 의미 있는 결과를 낳는다. 우리의 습관적인 행동은 우리의 사랑을 형성하고, 우리의 사랑은 우리의 존재를 형성한다. 스미스는 특정 덕목을 기르기 위해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마음에 새겨지는 그 관행에 몰두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주장하기를,

“…반형성적인 기독교 예배는 단순히 정보만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가 다른 곳에서 흡수하는 상징적 우주의 의식적 정화를 정기적으로 겪는 그리스도 중심의 상상의 공간이다. 기독교 예배는 우리에게 생각하는 방법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우리에게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준다. 그리고 이는 우리를 성경의 이야기에 초대하고 그 이야기를 뼈에 심음으로써 가능케 한다 (You Are What You Love, 85).”

이를 염두에 두고, 내가 사는 지역에서 모임이 허락되었는데, 나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이유로 교회에 다시 참석하기로 결정했다.


1. 교회에서의 매주마다 함께 하는 교제는 나의 사랑을 지향하게끔 돕는다.


매주마다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를 통해 내 마음은 다른 방향으로 표류하지 않고 예수님을 향해 가도록 재조정된다. 이는 꼭 특정한 주에 영감을 받거나 도전을 받지 않더라도 마찬가지다. 교회는 나의 당면한 문제와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 존재하는 자판기가 아니다. 교회는 해마다 경작되면서 영적인 자양분을 공급하는 밭이다. 내가 매 주일마다 교회에서 배를 가득 채우지 못한다고 해서 그것이 교회를 가는 것을 무의미하게 만들지 않는다. 나는 풍성한 수확을 낼 때까지 매주 조금씩 성장하도록 밭을 돌본다.


2. 매주 교회에서의 교제를 통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하나님의 가족에 동참하는 것임을 기억한다.


내가 기독교인이 되기를 서원했을 때, 그것은 나의 영원한 운명을 보장하는 전환이 아니었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이 되고 지금 여기에서 내가 사는 방식을 바꾸는 것을 의미한다. 매주 이 사람들과 함께 이 경험을 공유하는 것은 결국 서로를 돌보는 관계적 네트워크가 추가되는 것이다. 이는 하룻밤 사이에 일어나지 않지만 (교회는 자판기가 아닌 ‘밭’이라는 것을 기억하라), 우리가 함께 삶을 살면서 믿음의 여정에서 서로를 지원한다. 단순히 집에서 온라인 예배를 시청하는 것은 나를 적극적인 참여자라기보다는 고독한 소비자로 만든다. 디지털 예배는 이같이 어려운 상황에 우리를 연결시켜주는 선물 같았지만, 신앙 공동체를 발전시키는 지속 가능한 방법은 아니다.


3. 매주마다 교회에서의 교제를 통해 나는 다른 사람들을 위한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에 동참할 수 있다.


교회 출석을 위한 나의 노력은 나의 리더들을 격려하고, 그들의 사역을 옹호한다. 카메라에 대고 설교를 시도했던 목회자들은 이전과 같지 않음을 알 것이다. 나의 참석은 나의 목사님과 예배 인도자가 공부하고, 계획하고, 준비하는 일을 후원한다. 이는 그들의 메시지에 에너지와 연대를 제공한다.


나의 존재는 또한 함께 참석한 모든 사람들을 위한 공동 예배의 가치를 확인시켜준다. 6피트 떨어진 곳에서의 나의 미소와 인사, 그리고 (마스크 뒤에서) 찬양을 위해 높이는 나의 목소리는 함께 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도록 한다. 이것이 곧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이 된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의 하나님 형상으로서의 정체성은 물리적으로 표현되어 하나님의 임재와 통치를 일깨워준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서로 대변하는 것이다. 나는 나 혼자만의 존재가 아니다. 나는 나보다 더 큰 것, 즉 지상에 존재하는 그리스도의 몸 된 공동체의 일원이다. 이 어려운 해의 끊임없는 시련으로 집에서 고립되고 외상을 입은 사람들에게 나의 육체적 존재는 생명선이 될 수 있다. 서로 눈을 맞추는 일은 한주 동안 살아갈 힘을 준다.


4. 매주마다 교회의 교제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충성을 선언하는 수단이다.


겉으로는 교회가 약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교회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의 실재를 증거 하는 가시적 수단이다. 교회에 매주 참석하는 것은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나라가 우리 공동체의 다른 구체적인 어떤 기관들보다 더 실질적이고 오래 지속된다는 것을 인정하고 증명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사회의 우체국, 가게, 학교, 정치인 및 그들의 사무실보다 오래 지속될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COVID-19과 천재지변, 그리고 우리 세계의 모든 추악한 불평등보다 더 오래 지속될 것이다. 나의 참여가 이를 보장하며 더 크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 한다.


이러한 여러 가지 이유로 나는 교회에 간다. 나는 당신도 가능한 한 빨리 교회에 돌아갈 수 있길 바란다. 우리의 상황은 여전히 이상적이지 않을 수 있지만 예배의 장기적인 이점들은 우리가 예배를 참석하기 위해 겪어야 하는 번거로움 들을 훨씬 능가한다. 내가 흥분하든 그렇지 않든(나는 보통 그렇다!), 교회는 내 가족이며, 교회 없이 나는 내가 될 수 없다.

 

Churchleader.com에 게시된 "Church After COVID19 — Why Bother Going Back?"
문화선교연구원에서 번역하여 한국교회에 공유한다. (번역자: 이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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