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신학생·사역자 그리고 청년의 눈으로 본 "우리시대 청년 노동에 대한 단상"

2024-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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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과 학부를 졸업한 후, 신학대학원에 진학한 강인구 전도사는 2024년 영등포산업선교회 프로그램인 ‘기독청년 노동훈련’에 참여하고 수료했다. 지난 7월 수료 감사예배와 보고대회를 한 후 자신이 경험했던 한국 사회의 청년 노동의 현장을 진솔하게 기록했다. 기독청년으로서, 신학생으로서, 사역자로서, 그리고 청년 노동자로서 한국교회에 하고 싶은 이야기를 문화선교연구원 소식지에 실어보냈다.


아르바이트 인생의 시작

아르바이트(이하 ‘알바’)를 안 해본 청년이 얼마나 될까? 내가 교회에서 만난 청년 중 알바를 해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사역을 하고 있는 청년들도 마찬가지다. 학부에서도 그랬고 신대원에서도 대부분의 학생들이 사역과 알바를 병행하고 있었다. 생활비, 등록금, 가족의 병원비, 결혼 등 각자의 이유는 달랐지만, 인생의 크고 작은 이벤트를 위한 자금을 모은다는 목적은 같았다. 나의 경우는 수학능력시험이 끝난 2015년 11월부터 알바를 시작했다. 그때는 사회생활 경험을 한다는 명목이었다. 군 전역 후에는 학교 근처 식당에서 꽤 오랜 기간 일을 했다. 부모님께 경제적으로 의존하지 않고 생활비는 직접 벌어서 쓰자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렇게 20대의 대부분을 알바를 하며 보냈다.

 

노동훈련을 통해 경험한 '알바'의 현실

대학 시절, 기독교인의 사회 참여와 공적 책임 등에 관해 관심이 생기면서 ‘영등포산업선교회’를 알게 되었고, 노동 이슈에 관한 여러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생겼었다. ‘노동 운동’이라는 것이 참 멋진 일이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여전히 내가 노동자라는 인식은 없었다. 꽤 오랜 시간 노동자의 삶을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에서 ‘노동 이슈’로 다루어지고 있는 사건들이 내 문제로 와닿지는 않았다. 사회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담론들과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 사이에는 큰 간극이 있다고 느낀 것이다. “나는 왜 노동을 하면서도 ‘노동’이라는 말과 친숙하지 않을까?”, “실제 나의 노동과 사회적 담론으로서의 노동은 어떻게 다르고, 또 어떻게 연결될까?”라는 질문이 내 안에 생기기 시작했다. 

영등포산업선교회에서 주관하는 ‘제3기 기독청년 노동훈련’에 참가하게 된 것은 이 질문들 때문이었다. 노동훈련은 직접 일하고 경험한 것들을 기록하고, 그 속에서 과제를 찾아 노동에 실제로 적용해 보며 그 모든 과정을 글로 정리하는 훈련 과정이다. 훈련은 약 6개월간 진행되었다. 한 달은 구직활동에 전념하였고, 5개월 정도는 택배 하차 및 분류 작업장에서 일을 하게 됐다. 그중 한 달 정도는 의류 선별(피킹) 작업장에서 일하며 ‘투잡’을 뛰기도 했다. 내가 경험한 두 가지 일 모두 ‘알바’라고 불리는 단시간, 비숙련 노동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일들을 하면서 느낀 점은 ‘알바’는 모든 곳에서 소외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먼저, 알바는 사회보장 시스템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다. 노동훈련 이전에 경험했던 알바를 포함해서 내가 알바를 하며 맺은 모든 계약은 ‘프리랜서 계약’이었다. 근로기준법에 따르면 사업주가 지정한 일터에서 사업주가 지시하는 업무를 수행하는 사람은 ‘근로자(노동자)’이다. 이 경우 사업주와 노동자는 ‘근로계약’을 맺게 되어 있다. 이 경우 사업주는 노동자에게 4대 보험(국민연금, 건강보험, 고용보험, 산재보험) 가입을 보장해주어야 한다. 따라서, 근로계약을 맺은 노동자는 사회적 위험으로부터 법적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된다. 반면에 프리랜서 계약은 사업주와 노동자의 관계로 맺는 계약이 아니다. 사업주와 사업주로서 계약을 맺는 것이다. 그래서 한쪽이 다른 한쪽에게 4대 보험을 보장해 줄 의무에서 자유롭다. 소득세 3.3%만 원천징수될 뿐이다. 따라서 각종 사회적 위험에 관한 법적 보호를 받기 어렵게 된다. 모든 위험 부담을 개인이 떠안아야 한다. 알바는 분명히 ‘근로 계약’을 맺어야 하는 위치에 있음에도 프리랜서 계약을 맺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심지어는 계약서 자체도 제대로 안 쓰는 게 현실이다. 알바는 법적으로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마땅히 받아야 할 사회보장 시스템도 받지 못한다.

알바는 안전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다. 근로계약을 맺은 노동자는 일하다가 안전사고가 발생하면 산재처리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프리랜서 계약을 맺은 알바는 안전사고가 발생해도 산재처리를 받기 어렵다. 알바를 고용한 사용자는 안전사고에 관한 책임을 회피할 여지가 생긴다. 그래서 현장의 안전 관리에 소홀하게 된다. 훈련 기간 중 일했던 택배사 한쪽 구석엔 안전모와 형광 밴드 등 안전 용품이 걸려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것을 사용하지는 않았다. 하루는 팀장님이 알바생을 모아놓고 “원래는 써야 하는데, 편의상 안 하는 거야. 만약 점검 나와서 직원이 물어보면 다 하고 있고 안전교육도 받았다고 해. 지금 이게 안전교육이야.”라고 말했다. 그 후로도 아무도 안전모와 형광밴드는 착용하지 않았다. 알바생이 ‘편의’를 위해 안전 용품 착용을 원하지 않더라도 회사는 착용하도록 권하고 개입하는 것이 필요하다. 하지만 회사는 알바의 안전을 책임지지 않았다. 안전에 관한 모든 책임은 개인에게 넘어간다.

알바가 겪는 또 다른 소외는 비인격적 대우를 받는 것이다. 알바생은 일 처리를 위한 도구적 가치로 평가될 뿐, 인격적인 주체로 대우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단기간·비숙련 노동일수록 그 정도는 심각하다. 하나의 작은 예로, 택배사에서 일한 지 3개월이 될 때까지 내 이름을 묻는 사람은 없었다. 그곳에서 나는 이름이 있는 고유한 인격체가 아니라, 똑같이 생긴 기계 부품 중 하나 정도로 취급받았던 것 같다. 알바생을 고유한 인격체로 보지 않는 직원들일수록 알바를 쉽게 하대하기도 하고 심지어 비하하는 표현까지 사용한다. 의류 선별 작업장에서 직원들은 알바생들에게 일처리에 관해 충분히 설명해주지 않으면서, 그들이 작은 실수라도 하면 짜증내기 일쑤였다. 직원들끼리는 실수한 알바생을 보고 ‘바보’라고 불러댔다.

마지막으로, 알바는 노동자로서 받아야 할 관리에서 소외되기도 한다. 알바생들 사이에서 무단결근, 연락 두절과 같은 일이 꽤 자주, 익숙하게 있었는데 문제는 그 누구도 연락을 하거나 사정을 묻지 않았다. 그렇게 무단결근이 길어지면 그 자리는 마치 기계 부품을 갈아 끼우듯 금방 다른 사람으로 대체된다. 누군가 무단결근 했을 때 피해를 보는 것은 오히려 정상 출근한 알바생들이었다. 출근한 인원들끼리 모든 물량을 다 처리해야 했기 때문이다. 결근한 사람이 받는 페널티 혹은 출근한 사람이 받는 보상이랄 게 전혀 없었기 때문에 불만이 생길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그러나 회사는 여기에 개입하지 않았다. 기본적인 출결 관리, 근무 태도에 관한 최소한의 관리가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회사 측이 경제적인 이유로 알바생을 관리하는 데 돈과 노동력을 투자하지 않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우리시대, 청년 노동의 얼굴

문제는 이렇게 부당한 대우를 받고, 소외되더라도 알바는 쉽게 문제 제기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오히려 이러한 문제 상황을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고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경우가 허다하다. 학창 시절부터 주입식 교육을 받고 입시 경쟁 속에 억눌렸던 청년 세대는 자신의 삶을 건강하게 지키는 데 익숙하지 않고, 인간의 존엄과 주체성을 훼손하는 권력 구조에 저항하는 것을 상상하지 못한다. 자기가 맺는 계약의 형태가 부당하다는 것을 잘 모르고, 자신의 몸을 안전하게 지키는 것에 신중하지 않으며, 무시받거나 하대 받더라도 쉽게 저항하지 못하는 소극적인 자아를 가진 노동자가 세상에 나오게 된다. 청년 세대는 입시 경쟁이 끝나면 바로 취업 경쟁에 뛰어들게 되는데, 입시 경쟁과 취업 경쟁 사이에서 경험하는 노동의 형태가 ‘알바’이다. 청년들은 학창 시절 억눌렸던 자아에서 벗어나 주체적이고 행복한 자아를 마주하기도 전에 알바를 하며 또다시 노예근성을 내면화한다.

우리 사회는 자신의 안녕과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건강한 자아를 가진 청년들을 길러내야 한다. 그래야만 일터에서 건강하게 자아를 실현하는 노동자가 많아질 수 있다. 나는 건강한 자아와 주체적인 태도를 가진 사람을 육성하는 일을 교회가 나서서 관심해야 하고 또 감당해 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청년 노동에 대한 기독교적 단상

성경은 제국의 권력에 예속되기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을 지키는 이야기로 가득하다. 창세기 1장의 이야기는 고대 근동의 창조 설화들의 메시지에 반하여 인간의 존엄과 노동에 신성함에 관하여 이야기했다. 이집트 노예였던 히브리인들이 이집트 파라오의 예속으로부터 해방되는 경험은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형성했다. 시내산에서 모세가 받았던 계명에는 모든 인간에게 휴식을 부여하고, 부당한 착취와 차별을 금하는 내용으로 가득하며, 구약성경에는 이러한 토라의 계명을 잘 지켰는지, 잘 못 지켰는지에 대한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통치)”를 “복음”으로 선포하셨다. 로마 황제의 통치가 “복음”이라고 했던 것에 정면충돌하는 선포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 선포는 로마 황제의 예속으로부터 저항하는 메시지로 읽을 수 있다. 예수께서 로마의 정치범을 처형하는 도구였던 십자가형을 받으셔야 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초대교회 교인들도 그 정신에 따르다 로마의 박해를 받았던 것을 볼 수 있다. 이처럼 성경은 인간을 권력자 아래에 예속하는 것에 저항하고 인간의 존엄을 지키려는 이야기로 읽을 수 있다.

중세 가톨릭 교황이 제국의 황제와 같은 권력을 쥐게 되면서, 종교를 예속화의 도구로 사용했을 때 그것에 ‘저항’ 한 것이 개신교의 근본정신이기도 하다. 인간의 존엄을 심각하게 훼손한 나치 정권에 저항했던 본회퍼 목사님의 삶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중세와 근대를 거쳐 지금에 이르기까지 기독교 역사 속에서 제국주의적인 권력에 저항하여, 인간의 존엄과 주체성을 지켜 온 인물들이 계속 있었다는 것은 자랑스러운 일이며, 우리가 계승해야 할 정신이라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청년이 알바를 하고 소외를 경험하는 이 시대에 우리는 성경을 읽으며, 신앙 선배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를 예속하는 이 시대의 권력에 저항하는 정신을 기를 수 있다. 그리고 우리의 존엄함을 훼손하는 소리로부터 우리 자신과 이웃을 지키는 사랑을 배울 수 있다. 그런 일을 감당하는 사역자가 되고 싶다. 세상의 교육 시스템이 가르치지 못하는 사랑과 저항정신을 배우고, 주체적이고 행복한 노동을 실현하는 사람이 되는 데 이바지하는 목회를 하고 싶다. 노동훈련을 통해 얻게 된 사역자로서의 꿈과 희망이다.

 

 

글. 강인구 전도사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신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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