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장칼럼]책 <기독교는 세상을 어떻게 변화시키는가?>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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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화되는 코로나19의 시대를 지나가면서 교회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본다. 양적 질적 회복을 간절히 소망하는 이 상황, 교회다운 교회로 다시 서는 길은 무엇일까. 교회는 교회가 처한 세상이라는 맥락의 한 복판에서 인간과 역사, 문화, 사회와 자연을 바라보는 건강한 관점을 필요로 하며, 그 인식에 응답하는 교회로 존재할 때 우리는 교회와 세상의 변화와 회복을 소망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점에서 제임스 헌터의 책 <기독교는 세상을 어떻게 변화시키는가?>(The Irony, Tragedy, & Possibility of Christianity in the Late Modern World. 2010. oxford)는 다시 한 번 음미해볼 만한 책이다.


저자 J. 헌터는 미국 교회에서 일어난 종교와 사회 간의 관계, 특히 교회 공동체가 세상을 변화시키려 노력한 것들을 평가하는 일을 지속적으로 해왔다. 이 책은 그 노력을 집대성한 기념비적인 성과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 그는 미국 기독교 진영(우파, 좌파, 신재세례파)의 문화 전략이 모두 성공하지 못하였음을 주장한다. 기독교 일반에 존재하는 관점은 ‘개인의 마음과 정신이 가장 중요한 문화적 변수’라는 것이다. 세계관의 변화와 실천이 중요한 이유가 그것이며, 이 전제 아래 선거와 같은 정치활동, 시민사회 운동 등을 수행한다. 하지만 이러한 연결고리는 실패해왔다. 왜냐하면 문화는 본질적으로 변증적이며, 매우 복합적이고 권력적이기 때문이다. 헌터는 오랜 역사의 예들을 통해 다음과 같이 결론 내린다. “문화의 중첩된 분야와 사회생활의 중첩된 영역에서 활동하는 엘리트들의 네트워크가 공통된 목적으로 다양한 자원과 행동을 결집할 때 세상을 바꿀 잠재력이 가장 크다”.


이점에서 기독교 우파와 좌파는 협력하지 못했다. 문화 격동기라 할 수 있는 1960년대 이후, 기독교는 문화 영역에서 제 역할을 하지 못했으며, 양 진영 모두 강력한 사회적 네트워크 속에서 일하지 못했고, 공통된 의제를 가지고 협조하지 못했다.


복음주의와 같은 기독교 우파는 자신들의 왕국에 깊이 박혀있거나 반지성주의가 너무 심했다. 미국의 문제를 “세속화”라는 용어로 단순화시켰고, 급진주의 운동에 대한 분노에 기반 했으며 기도와 행동을 통해 권력을 되찾고 하나님의 영광을 재현하려고 한다. 기독교 좌파는 어떠한가. 좌파는 그들의 영향력 감소가 기독교 우파의 이념과 이슈, 제도의 영향력 증대에 있다고 진단하며 동일하게 권력 쟁취를 통해 제도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하지만 정치를 통해 사회 변화를 추구하는 것, 공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을 혼합하는 것, 자신들의 정치적 견해를 정당화하기 위해 성경을 선택적으로 사용하는 것에서 기독교 우파를 흉내 내는 결과를 보여주었고 결과는 우파와 다르지 않았다. 이 양 흐름과 구별되는 신재세례파는 교회와 지배 문화 사이의 강력한 대립이 내재해 있고, 신학과 교회를 진정으로 탈세속적(postsecular)으로 끌고 가려고 한다. 하지만 여기에는 세상과의 분리주의적 유혹이 자리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이 세 틀은 성공하지 못했고 교회는 새로운 전환을 시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교회는 어디에서 시작해야 하는가? 이 근본 물음 속에서 헌터는 창조 명령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창조 명령에 대한 최고의 이해는 세상 자체를 바꾸는 것에 관한 것으로 이해하지 않는 것이다. 창조명령은 “서구 문명 구하기”, “문화 전쟁에서 승리하기” 혹은 그것과 비슷한 것이 아니다. 창조 명령을 잘못 이해하여 역사를 통제 하겠다 마음먹었을 때 이것은 언제나 비극을 초래했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인가. 그는 교회 안에 만연한 “권력 중독”의 해독제로 “신실한 현존(faithful presence)”에 대해 이야기한다. 선한 의도만으로 세상에 참여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신실한 현존의 신학은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을 실행하고 타인을 위해 그것을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이다. 실실한 현존은 자신이 속한 제도 속으로 그리고 삶의 모든 영역 내에 새로운 제도를 형성하는 것으로까지 확장되는 것을 말한다. 신실한 현존은 기독교인이 타인과 세상을 공유하고 세상의 번영에 기여하는 것이다. 이 명령은 ‘새로운 도시 광장’의 이미지에서 포착된다. 기독교 공동체에는 자기 전통의 자원들을 활용하여 계속 견지하고 추구하고, 일하고, 육성해야 할 공동선이 존재한다. 이것은 새로운 언어를 필요로 하며, “문화를 장악하는 것”, “문화전쟁에서 승리하는 것” 등에 대한 일체의 담론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탈-콘스탄티누스적(post-Constantinian) 참여로 이동하는 것이다. 교회가 거부해야 하는 것은 콘스탄티누스적 권력 추구의 경향이다. 기독교인들의 가장 건강한 행동 과정은 법, 정책, 정치적 동원을 통해 신앙을 표현하려고 다시 시도하기보다, 잠시 침묵하며 샬롬의 행동을 통해 자신들의 신앙을 공적으로 실천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교회는 긍정과 대립 사이의 변증적 긴장 속에서 살아내어야 하며 하나의 형성(formation)으로서 근본적으로 삶을 변화시키는 것이어야 한다.


마지막 결론에서 이 책은 우리들에게 다시 책의 제목으로 돌아가게 한다. “기독교로 인해 세상은 변할까.” 그는 이 질문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한다. 이 욕망이야말로 세상과 역사가 관리될 수 있다는 모호한 전제에 근거하기 때문임을 지적한다. 역사의 올바른 과정을 결정하게 되면 모든 것이 종속되게 된다. 심지어 하나님마저도 말이다. 이것이 바로 역사의 아이러니고 비극이다. 기독교는 세상의 의를 확립하거나 선한 가치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근원적 선을 추구하는 것이며, 인간의 삶속에서 그분을 예배하고 경배하는 일이 최우선임을 인정하는데서 출발해야 한다. 이것은 값싼 경건주의가 아니다. 오히려 역사와 사회의 “필연성”에 묵이지 않는 “자유”이다. 기독교인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완벽한 세상이나 완전히 새로운 세상을 만들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모든 타인을 위해 신실한 존재로 샬롬을 실천하고 추구함으로써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 이 점에서 교회는 더욱 겸손하고 신실해야 한다.

 

헌터의 통찰은 우리에게 교회의 의미, 신앙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코로나19사태 속 위기의 한국교회가 지금 회복해야 할 것은 교회 됨의 의미가 아닐까. 진정한 제자도란 무엇인지, 과거의 영광을 애타게 재현하려는 것이 아니라, 정체된 것 같은 이 시간, 신앙인과 교회 됨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기초를 견고하게 다져야는데 우선순위를 두어야 하지 않을까. 세상을 경영하고, 역사를 통제하고자 하는 욕망에서 벗어날 때 겸손하지만 견고한 교회의 모습이 드러나고,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응답할 때, 신실한 교회됨이 나타날 것이다. 헌터의 통찰을 코로나19의 시대, 한국 교회가 다시 음미해보아야 할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백광훈 원장 (문화선교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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