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십]교회 리더십 계승, 종교개혁의 역사에서 해답을 찾다

2026-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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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의 역사를 통해 배우는 리더십 계승의 원칙

루터, 츠빙글리, 칼뱅의 후계자들


들어가며

1546년 2월 18일, 비텐베르크 대학에 루터의 부고가 전해졌습니다. 수업 중에 소식을 접한 필립 멜란히톤은 학생들에게 스승의 죽음을 알리며 열왕기하의 한 구절을 인용했다고 전해집니다.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여.”

 

며칠 뒤 열린 장례식에서 멜란히톤은 조사를 읽었습니다. 그 자리에 모인 모든 사람은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지금 조사를 읽고 있는 저 사람이 루터의 길을 이어가는 무거운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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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텐베르크 성(城) 교회에 있는 루터의 무덤>

 

우리는 16세기 종교개혁을 떠올릴 때 자연스럽게 루터, 츠빙글리, 칼뱅과 같은 종교개혁자들의 이름을 기억합니다. 그들은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고백을 붙들고 살아간 신앙의 거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시작하고 기초를 놓은 종교개혁이 5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세상을 떠난 뒤, 그 길을 이어받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필립 멜란히톤, 하인리히 불링거, 테오도르 베즈. 우리에게는 생소한 이름들입니다. 거대한 발자국을 남긴 선대(先代)의 뒤를 잇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있었기에 종교개혁의 정신은 오늘 우리에게 전해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후계자로 세워지고 걸어간 길은 담임 목회자의 은퇴와 새로운 목회자의 청빙이라는 거대한 리더십의 변화를 앞둔 이 시대의 교회를 향해 귀중한 메시지를 던집니다. 거인의 뒤를 잇는다는 것은 어떤 일이었을까요? 그들은 그 길 위에서 어떤 사명을 감당해야 했을까요?


준비된 사람 그러나 분명하지 않았던 자리 : 필립 멜란히톤

필립 멜란히톤(Philipp Melanchthon, 1497-1560)은 스물한 살에 비텐베르크 대학의 교수가 되어 루터와 함께 28년 동안 사역했습니다. 그는 종교개혁진영 최초의 조직신학 책인 『신학총론』을 저술했고, 루터를 대신하여 1530년 아우크스부르크 제국의회에 참석하여 신앙고백문을 작성했을 정도로 루터의 오른팔과 같은 인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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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멜란히톤, 루카스 크라나흐, 1543년>


1546년 루터가 세상을 떠났을 때, 멜란히톤이 루터의 뒤를 이을 사람이라는 데 아무도 이견이 없었습니다. 그는 누구보다 잘 준비된 후계자였습니다. 다만 멜란히톤은 루터의 뒤를 이으면서 공식적인 청빙을 받거나 직위에 임명되지 않았습니다. 남은 이들 가운데 가장 무게감 있는 인물이었기에 자연스럽게 루터의 후계자로 인정받은 것입니다.


평화로운 시절이었다면 큰 문제가 없었겠지만, 교회를 둘러싼 상황이 크게 요동치기 시작했습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중심으로 연합한 로마가톨릭 진영 제후들과 개신교 진영 제후들의 동맹 사이에 벌어진 슈말칼덴 전쟁에서 개신교 진영은 패배했습니다. 종교개혁의 중심 도시인 비텐베르크는 함락되었고 대학은 문을 닫았으며, 개신교를 보호해 주던 영주는 포로가 되었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황제는 예배와 교리를 다시 로마가톨릭 쪽으로 되돌릴 것을 개신교 진영에 요구했습니다.


종교개혁이 존망의 기로에 선 급박한 상황에서 멜란히톤은 선택해야 했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종교개혁의 핵심 진리를 지키는 대신, 본질이 아니라고 여긴 예식과 관습의 문제에서는 어느 정도 양보하여 개신교를 지키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생각을 달리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소한 양보도 신앙을 내려놓는 일이라고 보았으며, 이런 중요한 문제를 결정할 권한이 멜란히톤에게 주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양측의 논쟁은 격렬해졌지만, 멜란히톤에게는 자신의 판단을 뒷받침할 공적인 권위가 분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평신도 신학자로서 공식적으로 루터가 맡았던 직책에 임명되지 않았으며, 그의 권한을 명시한 문서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멜란히톤이 기댈 수 있는 것은 그의 학식과 루터와 함께한 시간에 대한 기억뿐이었습니다. 좀처럼 좁혀지지 않은 양 진영의 논쟁이 오랫동안 이어지면서 교회와 멜란히톤은 상처를 입었습니다.


멜란히톤은 훗날 ‘독일의 스승’이라 불릴 만큼 능력 있고 잘 준비된 후계자였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개인의 역량이 뛰어나더라도 거대한 발자국을 남긴 전임자의 뒤를 이어 급변하는 상황에 대응하고 공동체 안팎의 갈등까지 조율한다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공적 절차를 통해 세워지다 : 하인리히 불링거

1531년 10월 11일, 취리히 사람들은 하루아침에 도시의 수석 목사를 잃었습니다. 취리히는 카펠 들판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로마가톨릭 칸톤 연합군에게 크게 패배하였습니다. 이 전투에서 목숨을 잃은 수백 명의 시민 중에는 취리히의 종교개혁자이자 수석 목사인 울리히 츠빙글리(Ulrich Zwingli, 1484-1531)도 있었습니다. 츠빙글리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도시의 강단은 텅 비었고, 사람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신 것인가?’라고 질문했습니다.


암울한 상황 속, 비어버린 강단에 선 사람은 스물일곱 살의 젊은 목사 하인리히 불링거(Heinrich Bullinger, 1504-1575)였습니다. 그는 낯선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불링거는 1523년부터 카펠의 수도원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고, 취리히를 오가며 츠빙글리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두 사람은 스무 살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금세 가까워졌습니다. 1527년에 불링거는 수도원장의 허락을 받아 다섯 달 동안 취리히에 머물면서 헬라어를 다듬고 히브리어를 배우기 시작했고, 이듬해에는 시의회의 지명을 받아 츠빙글리와 함께 베른에서 열린 논쟁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8년 동안 이어진 두 사람의 인연은 마치 루터와 멜란히톤의 모습과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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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리히 불링거의 초상화, 한스 아스퍼, 1550년>


하지만 갑작스러운 츠빙글리의 사망으로 인해 불링거는 멜란히톤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걷게 됩니다. 츠빙글리의 사망으로부터 두 달이 지난 12월 9일, 취리히 시의회와 시민들은 공적인 절차에 따라 불링거를 도시의 안티스테스(Antistes)에 선출했습니다. 안티스테스는 ‘앞에 서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도시 교회를 대표하는 최고 목회자를 가리키는 직함으로 반드시 안수받은 목사여야 했고, 의회의 투표로 선출되었으며, 목회자들의 정기 회의를 주재하고 목회자 후보를 시험하는 일까지 담당했습니다. 공적 절차에 따라 세워진 츠빙글리의 후계자가 어떻게 선출되며, 어떤 일을 담당하고, 어떤 권한과 책임을 지는지 공적으로 정해져 있었던 것입니다. 생전에 츠빙글리가 불링거를 후계자로 낙점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하지만, 불링거를 세운 것은 소문이 아니라 시의회와 시민들의 공식 절차였습니다.


불링거는 시의회의 결정을 곧바로 받아들이지 않고, 목회자들에게 설교할 자유를 보장해 달라는 조건을 제시했습니다. 설교자가 강단에서 자유롭게, 눈치보지 않으며, 필요하다면 정부를 향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시의회는 몇 가지 조건을 달아 이 제안을 받아들였고, 합의 내용은 이듬해 문서로 정리되어 취리히 교회의 헌장이 되었습니다. 불링거가 어떤 권한과 책임을 지니는지 명시한 문서가 된 것입니다. 불링거가 취리히에서 사역한 44년이라는 긴 시간을 지탱해 준 것이 바로 공적 절차를 통해 작성된 문서였습니다. 시의회가 교회의 일에 간섭하려고 할 때마다 공적으로 인정된 문서와 직위는 불링거의 주장을 뒷받침한 중요한 기반이었습니다.


불링거는 도시 안팎의 여러 어려움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종교개혁의 정신을 지켰습니다. 그는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정립했으며, 1536년 동료들과 함께 제1 헬베틱 신앙고백을 작성했고, 1566년에는 제2 헬베틱 신앙고백을 작성하여 개혁교회의 기준을 세웠습니다. 불링거의 44년 사역이 순탄하기만 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는 끊임없이 시의회와 씨름해야 했고, 성찬을 이해하는 방식을 두고 루터파와 견해차를 좁히지 못했으며, 흑사병이 도시를 덮쳤을 때는 아내와 세 딸을 먼저 떠나보내야 했습니다.


준비된 사람과 준비된 제도 : 테오도르 베즈

제네바의 종교개혁자 쟝 칼뱅(Jean Calvin, 1509-1564)은 루터보다 스물여섯 살 아래였고 종교개혁 이후에 회심한 2세대 종교개혁자입니다. 『기독교강요』를 통해 개신교 신학의 기초를 놓았고 프로테스탄트 진영의 연합을 위해 헌신한 칼뱅은 세상을 떠나기 전에 미리 자신이 떠난 뒤의 일들을 준비했습니다.


칼뱅은 먼저 사람을 길러냈습니다. 그는 다음 세대 목회자를 양성하기 위해 1559년 제네바 아카데미를 세웠습니다. 유럽 각지에서 모여든 인재들이 이곳에서 교육받고 고향으로 돌아가 교회를 세웠습니다. 훗날 칼뱅의 뒤를 잇게 되는 테오도르 베즈(Théodore de Bèze, 1519-1605)는 로잔 아카데미의 교수로 사역하다가 교회에 대한 베른의 간섭에 실망하여 로잔을 떠나 제네바로 온 뒤 제네바 아카데미의 초대 학장이 되었습니다. 다음으로 칼뱅은 자신의 리더십을 조금씩 넘겨주었습니다. 그는 생애 마지막 2년여 동안 설교와 강의를 격주로 베즈와 나눠서 담당하였습니다. “이 사람이 내 후계자다”라고 발표하기 전에 실제 사역을 함께하면서 실질적인 리더십을 자연스럽게 넘겨준 것입니다. 자신이 세상을 떠난 뒤 자신에 대한 향수를 남기는 것마저도 원하지 않았던 칼뱅은 자신의 무덤이 순례지가 되지 않도록 표지를 남기지 말라고 당부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제네바의 공동묘지에 매장되었지만, 정확히 어디에 묻혔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칼뱅은 분명한 제도와 규정을 준비했습니다. 제네바에는 목사와 장로들이 매주 모여 교회의 대소사를 의논하는 목사회가 있었고, 그 안에는 다음 지도자를 어떻게 세울지에 관한 규정이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칼뱅은 세상을 떠나기 전 베즈를 자신의 뒤를 이을 사람으로 천거했지만, 그의 말 한마디로 후계가 결정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1564년 5월 칼뱅이 세상을 떠나자, 시의회는 베즈의 승계를 인정했고, 곧이어 목사회는 규정에 따라 베즈를 의장으로 선출했습니다. 전임자의 뜻이 있었고, 그 뜻이 공동체의 공적인 절차를 거쳐 확인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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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도르 드 베즈의 초상화, 작가 미상, 17세기. (제네바 도서관 소장)>


그런데 의장이 된 베즈는 한걸음 더 나아가 의장의 임기를 1년으로 정하고 해마다 선거로 뽑도록 하자고 요청했습니다. 목사회는 이를 받아들여 베즈를 1년 임기로 선출한 뒤 16년 동안 해마다 다시 선출했으며, 1580년에 이르러서는 의장직을 돌아가며 맡는 방식에 합의하였습니다. 베즈는 스스로 그 자리의 권위를 내려놓았습니다. 전임자에게서 이어받은 자리의 권위를 혼자 짊어지지 않고, 여러 사람이 함께 나누어서 지며 서로 협력하는 형태로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오랫동안 함께 준비했고, 규정과 절차에 따라 공식적으로 세워졌으며, 그 자리와 권위를 제도로 다듬어 물려준 후계자. 그렇게 세워진 든든한 기반 위에서 베즈는 성 바르톨로뮤 축일의 학살과 프랑스 종교전쟁의 혼란을 견디며 박해받는 개신교 교회와 신자들을 위로했고, 칼뱅이 기초를 놓은 개혁교회의 정신과 신학을 지키며 유럽 전역으로 확장했습니다. 하지만 베즈는 칼뱅에 비해 시 당국의 간섭에 맞서 교회의 독립성을 지켜내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합니다. 가장 잘 준비된 리더십 계승이었음에도 아쉬움은 있었던 것입니다.


한 걸음씩 나아간 세 사람

멜란히톤과 불링거는 상황이 비슷했습니다. 둘 다 선대(先代) 개혁자와 오랫동안 밀접한 관계를 맺어 왔고, 큰 위기의 한복판에서 뒤를 이어받았습니다. 다만 한쪽에게는 공식적으로 물려받은 직위가 없었고, 다른 한쪽은 분명한 절차를 거쳐 분명한 직위와 자격이 주어진 직위에 임명되었습니다. 사소해 보이는 차이였지만, 이 차이는 두 사람이 안팎의 큰 위기를 마주했을 때 그 대응 방법과 결과를 크게 달라지게 했습니다. 칼뱅과 베즈는 앞선 두 사람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멜란히톤에게는 사람의 준비가 있었고, 불링거에게는 공적인 절차가 있었다면, 베즈에게는 두 가지 준비가 함께 있었고, 교회의 리더십이 후대로 계속 이어질 수 있는 제도까지 마련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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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명의 후계자. 멜란히톤, 불링거, 베즈. AI Generated>


또 하나 눈여겨볼 것은 세 사람 모두 전임자의 견해만 고집하지 않고, 조금씩 바꾸었다는 점입니다. 멜란히톤은 성찬과 자유의지 문제에서, 불링거는 성찬 이해에서 전임자의 견해만을 고집하지 않았습니다. 베즈는 칼뱅이 기초한 목사회 운영 방식을 손보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바꾸었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바꾸었는지입니다. 변화의 과정이 공동체와 함께 공유될 때, 변화는 더 오래갈 수 있습니다. 이 시대 전임자의 길을 이어받은 새로운 지도자에게는 앞선 세대가 겪지 않았던 상황과 질문이 놓여 있습니다. 무엇을 그대로 지키고 무엇을 새롭게 살펴야 할지 분별하는 일 또한, 길을 이어받는 사람에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이 시대 교회를 향한 메시지

최근 앞으로 10년 안에 담임목사의 은퇴와 청빙으로 리더십 계승이 이루어질 것으로 예상되는 교회가 열 곳 중 예닐곱 곳에 이른다는 조사 결과가 있었습니다. 교회 리더십의 계승 먼 이야기가 아니라 많은 교회가 곧 마주할 현실입니다. 물론 16세기 유럽의 교회와 오늘 한국교회는 다릅니다. 그때는 도시 전체가 곧 교회였고, 목사직은 사실상 종신이었으며, 청빙에 시의회가 관여했기 때문입니다. 다만, 세 가지 정도의 교훈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새로운 리더십을 세우는 과정에는 공적인 절차가 필요합니다.

누군가를 세울 때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었다’ 또는 ‘알아서 잘 정했다’와 ‘이런 과정을 거쳐 이렇게 정했다’ 사이에는 생각보다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 간격은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드러납니다. 공식적으로 정해진 절차를 밟아 사람을 세우는 과정은 번거로워 보이지만, 세워진 사람의 권위를 세우고, 위기 앞에서 흔들리지 않게 지탱하는 울타리가 됩니다.

 

둘째, 모든 과정은 여유를 가지고 진행해야 합니다.

취리히와 비텐베르크는 지도자를 잃은 뒤 새로운 리더십으로의 계승을 고민했지만, 제네바는 칼뱅이 살아 있는 동안 다음 세대를 길러냈고, 두 사람이 동역하면서 천천히 리더십을 넘겨주었습니다. 갑작스러운 발표가 아니라 함께 일하며 자연스럽게 리더십이 옮겨 가는 과정을 통해 칼뱅의 리더십은 안정적으로 베즈에게 계승될 수 있었습니다.

 

셋째, 사람의 준비는 제도로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세 명의 후계자는 모두 개인적으로 잘 준비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중에서 특히 제네바는 사람과 제도를 함께 준비했습니다. 새로운 리더십을 세우며 ‘어떤 인물을 세울 것인가’에만 관심을 가진다면, 반쪽 관심입니다. 교회의 목회와 다양한 사역이 한 사람에게 얼마나 기대어 있는지, 그 사람이 없을 때 무엇이 남는지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고 계속 질문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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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뱅과 베즈가 목회한 제네바의 생피에르 교회>

 

닫으며

세 사람은 모두 거인의 뒤에 섰지만, 누구도 새로운 거인이 되려 하지 않았습니다. 멜란히톤은 독일 곳곳의 학교와 대학에 배움의 틀을 세웠고, 그 아래에서 수많은 교사와 목회자가 길러졌습니다. 불링거는 44년 동안 취리히에서 다음 세대를 세우며 유럽 각지에서 박해를 피해 온 이들을 돌보았고, 만 통이 넘는 편지로 유럽 곳곳에 세워진 교회들과 마음을 나누었습니다. 베즈는 제네바 아카데미에서 청년들을 가르쳐 각자의 고향으로 보내어 교회를 세웠고, 종교전쟁과 학살의 한복판에서 흩어지고 상처받은 개신교 신자들을 위로했습니다.


종교개혁으로부터 500여 년이 지난 지금, 우리가 기억하고 누리고 있는 개혁의 정신은 거인의 뒤를 더욱 풍성하게 이어간 후계자들 통해 지금까지 전해질 수 있었습니다. 세 사람의 후계자가 보여 주는 것은 하나입니다. 앞선 이들의 길을 이어받는다는 것은 단순히 그 빈자리를 채우는 것을 넘어, 앞선 세대가 세우고 지켜온 것을 다음 세대에 전달하고, 시대의 변화에 따라 새롭게 확장하는 일입니다. 사람은 떠나고, 늙고, 실패하고, 언젠가는 세상을 떠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에게 매이지 않고, 사람을 통해 흘러갑니다. 우리보다 앞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많은 이들이 걸어온 그 길이 이제 우리 앞에 놓여있습니다.


글. 정일석 연구원
문화선교연구원, 장로회신학대학교 역사신학 Ph.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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