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교회]ChatGPT와 교회(3) - "인공지능 시대의 신학과 목회: 존재는 '연립(聯立)'이다"

2023-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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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혼자가 아니다

‘OPEN AI’사가 개발한 ChatGPT 열풍이 거세다. 드디어 SF영화에 등장하는 인공지능이 출현하는 시대가 되었다는 호들갑들도 있고, 인간을 대치하는 인공지능의 시대가 도래하였다는 앞선 예측들도 많다. 온갖 예측들과 기대가 난무하지만, 이러한 첨단 기술의 등장과 더불어 촉발되는 변화의 토대에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거론하는 이야기들은 찾기 어렵다. 분명한 것은 이제 우리는 인공지능과 더불어 살아가면서, 존재의 역량을 발휘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문제는 이 ‘더불어-살기’의 의미와 ‘존재역량’(ontic capability)의 의미를 심도 있게 성찰하거나 사유하지 못한 채, 흥행성 이슈로 소비되는 경향이 너무 강하다는 것이다.

ChatGPT에게 기후변화와 에너지 전환 시대에 대한 에세이를 부탁해 보았다. 잠깐 사이, 영어로 써 내려준 에세이는 군더더기 없이 괜찮아 보였다. 매우 창조적인 에세이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여러 가지 자료들을 잘 취합해서 나름 조리 있게 논리적으로 정리한 글이었다. 아마도 이번 학기에 이걸 활용해서 학생들이 기말 페이퍼를 써내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미국 일부 학교에서는 인공지능을 통해 작성한 에세이를 금지한다는 뉴스 기사들이 있었지만, 내 생각에 그게 가능할까 싶기도 하고, 또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 시절, 전자계산기를 쓰면 암산 능력이 떨어진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었는데, 실상 미국 학교들에서는 전자계산기가 필요한 계산에는 시험장에서도 쓸 수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던 기억이 난다. 전자계산기를 쓰면 암산 능력이 떨어진다는 말은 곧 우리가 스마트폰에 모든 전화번호들이 저장되어 있어서 암기하지 않기 때문에 암기력이 떨어진다는 말과 같다.

그런 생각들은 역설적으로 우리가 존재를 매우 개인적으로 상상하고 있다는 것의 방증이기도 하다. 한 존재의 역량은 외부 기기나 장비의 도움 없이 스스로 자립적 역량으로 발휘되는 것이라는 막연한 상상 말이다. 사실 이 막연한 상상이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종교개혁 이래 ‘인간’을 개인(individual)으로 조망하는 시대로 접어들었고, 그래서 각 개인의 독립성과 자유를 보장하는 인권 개념을 통해 삶의 역량을 판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존재가 각 개인들로 구성되는 것이고, 그들 간의 상호작용을 통해 세계가 움직이는 것이라면, 그건 막연한 상상이 아니라, 우리들이 살아가는 세계의 세계관이다. 이것이 다윈의 자연선택 개념과 연동되면서, 지금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적자생존과 무한경쟁 그리고 승자독식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다윈의 자연선택은 당대 융기하고 있던 자본주의적 체제와 더불어 존재를 ‘개인’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그래서 자연선택이란 개체들 간에 생존을 위한 무한경쟁과 적자생존으로 여겨졌고, 그렇기에 자본주의적 경쟁을 통한 승자독식의 체제는 마치 자연의 진실인 듯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다. 특별히 일본제국의 침략과 식민지 침탈을 경험한 나라들의 사람들은 이미 일본제국이 본색을 드러내기 전부터 서구제국이 강력하게 다가오는 모습들을 예감하며, 자강론(自强論)을 펼치면서 민족자주독립의 기치를 내걸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시절 지식인들의 예감은 빗나가지 않았다. 결국 서구 제국주의를 그대로 모방한 일본제국은 서구의 적자생존과 무한경쟁 그리고 승자독식의 제국주의적 정치를 실현하기 시작했고, 주변국들을 제압해 나가던 자신감은 곧 탈아입구(脫亞入歐), 즉 자신들은 아시아의 수준을 넘어섰다는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자신감의 표출은 곧 존재가 각 개인 혹은 각 나라 간의 경쟁으로 이루어진다는 사회적 상상의 결과이다. 이러한 사회적 상상이 나라와 민족들을 적자생존과 무한경쟁의 장으로 몰아간다. 현실적으로 각자가 얼마나 다른 사람들과 존재들에게 의존하고 있는지를 외면하고 말이다. 그리고 이 사회적 상상은 지난 시대의 유물로 사라지기보다, 오히려 전기에너지로의 전환을 꿈꾸는 에너지 전환 시대에 더욱더 강화되면서, 자국중심주의를 정당화하고 있다.

팬데믹은 우리들의 이러한 사회적 상상을 근원적으로 깨뜨린 사건이다. 그 작은 바이러스 때문에 전 세계인들의 생활이 이토록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었다. 게다가 소위 ‘세계화’ 시대에 진행된 경제와 교역의 네트워크로 인해 팬데믹은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고, 이제 엔데믹으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우리들은 다시 팬데믹 이전의 일상으로 복귀하겠다는 생각을 여전히 강하게 갖고 있다. 하지만 팬데믹 이전으로의 복귀는 없다. 왜냐하면 포스트휴먼과 인공지능의 도래는 이미 ‘인간’이란 홀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님을 증언할 뿐만 아니라, 세계화를 가능케 했던 디지털 네트워크는 우리가 어떻게 연결되고 그를 통해 어떤 세계를 창출할 수 있는지를 알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팬데믹으로 가상 세계로의 접근 가능성은 높아졌고, 우리가 이런 인공장치들과 더불어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진실을 드러내 주었기 때문이다.

 

 

존재는 연립(聯立)이다

인간은 이성이나 인간적 감정을 통해 ‘인간’이라는 현상을 구현하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인간의 본질은 비인간 존재들과 연결되어 새로운 행위자-네트워크를 구현해 낼 수 있는 연결의 역량일 것이다. 우리는 인간의 지능이 생물학적 두뇌의 역량으로부터 나온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두뇌의 지능적 역량은 신경 세포들 간의 연결의 역량이며, 이 연결의 역량은 인간의 생물학적인 몸을 ‘인터페이스’로 세계로 연장하여 발휘되는 것이다. 즉 지능은 두뇌라는 기관의 역량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신경세포가 연결의 역량을 몸과 인공장치 및 도구들을 ‘인터페이스’로 활용하여 엮어내는 연결의 역량을 통해 발휘되는 것이다. 이렇게 놓고 본다면, 인공지능 시대는 인공지능이 인간의 노동을 대치하는 시대라기보다는 인간과 기계의 공생구조가 새롭게 재편되는 시대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 구조적 재편을 어떻게 해 나가야 될 것인지에 대한 고민과 궁리가 필요한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철학자 앤디 클라크(Andy Clark)는 인간이 기계 및 디지털 장치들로 연장할 수 있는 역량을 주목하면서, 인간을 ‘자연적으로 태어난 사이보그’(natural-born cyborg)라고 명하였다. 그는 우리가 인간을 ‘도구적 존재’ 즉 호모 파베르(homo faber)라고 정의할 때, 이미 그에 대한 생각들을 담고 있었다고 말한다. ‘호모 파베르’는 그 도구들이 인간의 생각과 활동을 위한 보조장치들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도구를 만들어 삶을 새롭게 만들어 나가는 데에 소위 인간의 ‘본질’이 있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자연적으로-태어난-사이보그’라는 말은 우리 인간이 이미 기계나 디지털 장비들과 존재적으로 혼융된 ‘잡종’ 즉 ‘하이브리드’라는 말이다. 사실 우리는 스마트폰 시대에 이미 두뇌 역량의 일부를 스마트폰으로 연장하여, 이 기기를 ‘외장 두뇌’로 활용하며 살아가고 있다. 우리가 전화번호를 외우지 못하는 것은 암기능력이 예전보다 떨어졌기 때문이 아니다. 스마트폰에 저장되어서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는 것을 굳이 생물학적 두뇌에다 저장할 필요성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물학적 두뇌와 스마트폰은 서로 ‘접속된’(coupling) 존재로서, 스마트폰이 출현하기 전의 생물학적 두뇌와는 다른 행위자-네트워크(actor-network)를 형성하며 존재를 창출해 나아간다. 즉 다른 기계나 장치와 장비로 우리의 정신적 혹은 신체적 역량들을 연장해 나아가면서, 우리는 인간을 ‘확장’(expand)하는 것이 아니라 ‘연장’(extend)하고 있으며, 여기서 ‘연장’은 이전과는 다른 행위자-네트워크를 형성하면서 새로운 존재의 역량 혹은 삶의 역량을 창출해 주고 있는 것이다.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존재는 다수(the multiple)라고 말한다. 우리 인간의 몸은 인간의 생물학적 몸만으로 구성되고 기능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음식물을 섭취하여 소화하는 기능은 우리 몸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우리의 장내에는 무수한 미생물과 박테리아류들이 함께 있고, 씹어 삼킨 음식물들을 분해해 주기 때문에 인체는 필요한 영양분을 흡수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그들과 연결되어 살아간다. 그 장내 미생물들과 박테리아의 상태가 건강하지 못하면, 우리는 속이 안 좋다는 느낌을 받게 되고, 심지어는 생활에 지장을 받기까지 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저 ‘몸 상태가 안 좋다’는 식으로 의식할 뿐이다. 큰 숲의 나무들은 외부 포식자의 침입이 있으면, 서로 소통하여 떫은 맛을 내는 효소들을 분비한다. 포식자가 그것을 먹고 소화가 잘 안 되게 만들어 다음에 침입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이 나무들 간의 소통은 무선통신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나무의 잔뿌리와 접속된 균근류 곰팡이균들의 네트워크를 통해 이루어진다. 사실 나무들은 이 곰팡이균들과의 연립이 아니라면 살아갈 수가 없다. 식물들은 바위를 분해하여 미네랄 영양분을 채취하지 못한다. 곰팡이균들이 그 일을 한다. 그들은 나무의 잔뿌리와 연결되어, 미네랄을 공급하고, 나무들은 곰팡이균들에게 광합성을 통해 만들어낸 탄소 영양분을 공급한다. 그렇게 그들은 함께 연립적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존재는 연립이다.

휠체어 장애인 김원영 작가는 김초엽과 함께 쓴 『사이보그가 되다』(2021)에서 휠체어라는 도구와 함께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연립의 존재’라고 표현한다. 사실 다른 존재로 역량을 연장하여, 새로운 행위자-네트워크를 형성하며 살아가는 모습은 ‘존재’란 어떤 것이나 사물이 아니라, 바로 그 연장하여 잇고 연합하는 능력 자체임을 증언한다. 우리가 장내 미생물들과 연결되어 새로운 행위자-네트워크를 형성하며 살아가듯, 김원영은 휠체어로 존재의 역량을 연장하여, 새로운 행위자-네트워크를 형성한 것이다. 그렇게 사이보그란 연립의 존재이고, 이 ‘연립’에 존재의 행위역량이 담겨있는 것이다.

 

인공지능과의 공생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이보그 시대에 우리가 안고 있는 부정의와 불공정성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도나 해러웨이는 인간이 사이보그가 되는 시대에 “일자리의 여성화”와 “빈곤의 여성화” 문제를 지적한다. 이는 일자리에 여성들이 많이 고용되고, 빈곤이 여성처럼 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우리가 지난 가부장제 시절의 여성이 겪던 차별과 혐오의 문제를 이제는 모든 노동자들의 공통조건이 되었다는 말이며, 그래서 그 차별받는 여성들이 겪는 빈곤의 문제를 이제는 여성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겪는 공통의 문제가 되었다는 말이다. 해러웨이는 이를 통해 사이보그나 인공지능이 일부 사람들이 그려내듯 장밋빛 미래를 약속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ChatGPT 이전, 이미 챗봇 인공지능으로 ‘이루다’가 개발되어, 출시된 적이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루다와 함께 살아가며 그 존재를 함께 삶을 만들어 나가는 동반자로 여기지 않았다. 남성 이용자들의 성희롱, 이루다의 혐오 발언, 게다가 개인정보유출 등의 논란으로 출시 3달 만에 폐쇄되었다. 이루다의 폐쇄는 인공지능 윤리에 대한 사회적 고민이 시급함을 알려준 계기가 되었다. 딥러닝을 기반으로 네트워크상에서 가용한 빅데이터 검색을 기반으로 학습한 이루다는 우리 사회의 선입견과 편견이 작동하고 있는 방식을 그대로 모방 학습하였고, 그래서 차별과 혐오를 그대로 반복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 시행착오는 매우 소중한 타산지석이 될 것이다.

결국 인공지능은 사람이 만든다. 그들과 더불어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에 대한 목적의식 없이, 맹목적인 기술개발을 매우 우려하며, 기술 철학자 손화철은 “목적이 이끄는 기술발전”을 구상해야 한다고 촉구한 바 있다. 기술 발전이 인간의 의도적인 목적과 계획대로 이루어져 나갈지에 대해서는 의구심이 들지만, 적어도 ChatGPT와 같은 인공지능의 발전을 구상하면서, 이런 존재들과 어떻게 더불어 살아가야 할 것인지에 대한 목적의식을 윤리적으로 진지하게 생각하고 개발을 진행해야 함을 이루다의 실패를 통해 깨달았다.

팬데믹이 발발하고, 많은 교회들은 생각보다 빨리 사이보그 시대에 적응했다. 대면 예배가 어려워지자, 비대면 예배를 위한 영상 장비들을 갖추고, 유튜브와 같은 SNS를 연결하여 예배와 만남을 이어나갔다. 또한 최근 내 스마트폰의 문제에는 ChatGPT를 활용한 설교작성 기술을 위한 세미나 광고 문자가 오기도 한다. 아마도 교회가 지난 이천 년이 넘는 동안 그렇게 수많은 역사적 굴곡을 겪으면서도 여전히 살아 움직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려는 목회자들의 그러한 노력들이 교회를 살아 숨 쉬게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여전히 우리 목회자들의 관심은 이런 기계나 장치 및 네트워크를 ‘어떻게 도구적으로 활용할 것인가’에 대한 관심이 주를 이룬다. 이러한 첨단 기술의 발전으로 도래하는 변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생각과 성찰이 상대적으로 빈곤한 것이다. 바로 여기에 ChatGPT 시대가 초래하는 변화의 위험이 놓여있다. 지금의 변화는 ‘인간’에 대한, 그리고 ‘지금까지 우리가 이룩해 놓은 문명’에 대한 근원적인 전환을 요청하고 있다. 그 전환은 인간을 개인이나 개체가 아니라, ‘연결하고 있고 연합하는 역량의 존재’로의 전환이다.

인간이 홀로 존재할 수 없듯, 교회도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도 이 사회와 사람들과 그리고 비인간 존재들과 더불어 행위자-네트워크를 창출하며, 발전과 성장을 거듭할 수도 있다. 우리는 ‘암세포’로부터 교훈을 새겨볼 필요가 있다. 암은 인체 내 세포들이 주변세포와의 세포통신 기능을 상실하고, 오로지 자기의 생존과 번식만을 위해 살아가기 시작하면서 일어난다. 즉 주변과 소통이 두절된 채 고립된 삶을 살아가며, 자신만의 생존을 염두에 두는 존재는 사회와 공동체에 암적인 존재가 되기 쉽다는 것이다. 여러 조직들과 공동체들과 사람들이 앞으로 ChatGPT와 같은 인공지능과 더불어 살아가며 새로운 행위자-네트워크들을 만들어 낼 것이다. 그런데 이런 연립의 행위자-네트워크들이 존재와 삶의 의미와 목적을 어떻게 염두에 두느냐에 따라, 이 공생은 은혜가 될 수도 아니면 저주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오늘날 교회가 첨단기술을 교회 자신만의 목적을 위해, 즉 도구적으로 활용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교회와 기술의 만남이 그다지 건강할 것으로 생각되지는 않는다. 인공지능의 빅데이터 검색 능력을 활용해, 풍성한 지식을 갖춘 설교들을 만들어 낼 수는 있겠지만, 이렇게 비인간 존재들과의 공생을 도구적으로 활용한다면, 팬데믹 시대가 알려준 교훈으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꼴이 될 것이다. 기후변화와 생태위기는 인간의 이기적인 문명발전에 비인간 존재인 기후시스템이나 대기 시스템 및 생태계가 스스로의 ‘응답-능력’(response-ability)을 발휘한 것이다. 그 결과가 기후재난들로 나타나고 있다. 그래서 팬데믹은 우리에게 여전히 묻는다. 비인간 존재들과 더불어 어떤 문명을 만들어 나갈 것인가를 말이다. ChatGPT 챗봇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인공지능은 우리의 대답이 아니라 우리에게 던지는 물음이다.


글쓴이 박일준(원광대학교 동북아시아인문사회연구소)

인간을 ‘사이-존재’로 정의하는 박사학위 논문을 마친 후, 인간의 주체성 문제를 알랭 바디우와 슬라보예 지젝의 철학을 통해 조망하면서, 인간과 기계의 공생이라는 주제를 앤디 클라크의 연장된 마음 이론과 신경가소성 개념을 통해 존재역량이라는 주제를 탐구하고 있다. 특별히 기후변화와 생태위기의 시대에 다른 존재로 자신의 행위역량을 연장하여 행위자-네트워크를 형성할 수 있는 비인간 존재들의 행위 주체성에 주목하면서, 여전히 유기체 중심적인 들뢰즈의 리좀적 네트워크를 넘어, 곰팡이균류의 균근류 네트워크를 통해 우리 시대의 윤리를 ‘책임(responsibility)의 윤리를 넘어 응답-능력(response-ability)의 윤리’로 전환하는데 관심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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