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성빈의 문화칼럼] 예수님은 어떻게 사람을 이끄셨는가 - 성육신적 소통의 신학과 목회의 원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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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말

목회의 소통은 단순한 기술이나 화법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목회자의 인격과 신학, 그리고 하나님 이해가 드러나는 목회의 본질이다. 오늘날 교회의 소통 위기는 결국 목회의 위기이며, 더 깊이 말하면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하고, 그 복음을 어떻게 전할 것인가에 관한 신학적 위기이기도 하다.

오늘의 목회 현장을 돌아보면 이러한 위기는 여러 모습으로 나타난다. 설교와 가르침에는 익숙하지만 경청에는 서툴고, 답을 제시하는 데는 능숙하지만 질문을 통해 상대를 세우는 데는 미숙하다. 또한 눈앞에 드러난 필요에는 민감하지만 그 이면에 자리한 영적 갈증까지 헤아리지는 못한다. 이러한 현상은 서로 다른 문제가 아니라 하나의 뿌리에서 비롯된 복합적인 증상이다. 복음서가 증언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소통은 바로 이러한 위기에 대한 성서적 해답이며, 오늘의 목회가 다시 회복해야 할 원형(archetype)이다.


그렇다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진리는 어떻게 인간에게 전달될 수 있는가? 초월하시는 하나님께서 시간과 공간 속에 살아가는 인간과 어떻게 만나시며, 복음은 어떻게 인간의 언어와 관계를 통해 전달되면서도 그 진리성을 잃지 않을 수 있는가? 이 질문은 단순한 커뮤니케이션의 문제가 아니라 계시와 선교, 곧 하나님의 자기 전달(self-communication)에 관한 신학적 질문이다. 소통의 효율성을 앞세우다가 복음을 희석하면 교회는 세속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다. 반대로 복음의 순수성만을 내세운 채 소통을 등한시하면 교회는 세상과 단절된 게토(ghetto)가 된다. 그러므로 복음의 진실성과 소통의 개방성을 함께 붙드는 일은 오늘의 목회가 외면할 수 없는 과제이다.

이 질문에 대한 성경의 답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 방식에서 시작된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서로 고립된 존재가 아니라 영원한 사랑 안에서 교제하시며 완전한 일치를 이루신다. 하나님의 존재 자체가 관계이며 교통(koinonia)이고 사랑의 소통이다. 그리고 이 삼위일체적 교제가 역사 가운데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 사건이 바로 성육신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멀리서 말씀으로만 다스리지 않으시고, 인간의 몸을 입고 인간의 역사 속으로 들어오셨다. 성육신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궁극적인 커뮤니케이션이며,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소통이 어떤 것인지를 자신의 삶으로 보여 주신 분이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예수의 소통은 단순한 대화 기법이나 설득의 기술이 아니다. 그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과 성육신의 자기 비움을 인간의 삶 속에서 드러낸 존재 방식이다. 그러므로 예수를 소통의 모델로 삼는다는 것은 효과적인 대화법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 방식을 배우는 일이다.


요한복음 4장에 기록된 사마리아 여인과의 만남은 이러한 예수의 소통을 가장 집약적으로 보여 주는 본문이다. 예수께서는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의 민족적 적대, 남성과 여성 사이의 사회적 장벽, 정결과 부정이라는 종교적 경계를 넘어 먼저 대화를 시작하신다. 그리고 그 짧은 만남 속에서 예수의 소통을 이루는 세 가지 특징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첫째는 상대의 자리로 내려가는 전인격적 경청이고, 둘째는 질문을 통해 상대를 대화의 주체로 세우는 소통이며, 셋째는 인간의 영적 갈증을 꿰뚫어 생명의 자리로 이끄는 통찰이다. 이 세 가지는 결국 한 사람의 변화에 머물지 않고 공동체의 화해와 회복을 지향한다. 이 글은 이 세 가지 특징을 중심으로 예수의 소통을 살펴보고, 그것이 오늘의 목회 현장에 주는 신학적·목회적 함의를 모색하고자 한다.



1. 전인격적 경청 ― 침묵과 낮아짐, 그리고 환대

예수의 소통에서 기억할 점은 말씀하시기 전에 함께 계셨다는 점이다. 예수의 경청은 단순히 상대의 말을 끝까지 들어 주는 의사소통의 기술이 아니라, 상대의 삶 속으로 들어가 그의 자리에 함께 서는 존재 방식이다. 성육신이 하나님께서 인간의 역사 속으로 내려오신 사건이라면, 경청은 그 성육신이 일상의 만남 속에서 반복되는 ‘작은 성육신’이라 할 수 있다. 듣는다는 것은 상대를 이해하기 위한 방법 이전에, 상대와 관계를 맺기 위한 자기 비움의 실천이다.

요한복음은 이러한 예수의 경청을 매우 인상적인 장면으로 시작한다.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요 4:6) 이 말씀은 그저 상황 설명에 그치지 않는다. 피곤하신 예수의 모습은 인간의 연약함을 기꺼이 받아들이신 성육신의 현실을 보여 준다. 예수께서는 권위자의 자리에 서서 사람을 부르지 않으셨다. 피곤한 몸으로 우물가에 앉아 사람을 기다리셨다. 경청은 바로 이 자리에서 시작된다.

잠시 후 사마리아 여인이 물을 길으러 오자 예수께서는 먼저 “물을 좀 달라”(요 4:7)고 말씀하신다. 도움을 요청하는 이 한 마디는 당시의 사회적 관습을 고려하면 매우 파격적이었다. 유대인 남성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을 건네는 것 자체가 금기였고, 더욱이 도움을 청한다는 것은 자신의 우월한 위치를 내려놓는 행동이었다. 예수께서는 가르치는 분이기 이전에 먼저 도움을 구하는 분으로 다가가셨다. 경청은 상대보다 높은 자리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을 낮추어 상대에게 다가갈 때 비로소 진정한 대화가 시작된다.


더욱 의미심장한 것은 만남의 시간이다. 여인은 사람들이 거의 오지 않는 정오에 홀로 우물가를 찾았다. 공동체의 시선을 피하려는 그녀의 삶이 그 시간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예수는 여인의 그 시간의 의미를 아셨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말을 건네셨다. 예수의 다가감은 말 이전에 상대의 삶과 처지를 읽어 내는 공감이며, 상대가 가장 외롭고 가장 고립되어 있는 자리까지 기꺼이 함께하시는 사랑이다.

여인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다.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요 4:9) 그녀가 놀란 것은 단순히 말을 건넨 사실 때문만이 아니다. 자신을 한 인간으로 존중하는 태도를 처음 경험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그녀를 ‘문제 많은 여인’으로 규정하지 않으셨고, 유대 사회가 붙여 놓은 낙인의 시선으로 바라보지도 않으셨다. 먼저 한 사람으로 만나고, 한 사람으로 존중하셨다. 참된 경청은 상대의 말을 듣기 전에 상대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데서 시작된다.


이러한 경청은 성경이 말하는 환대(hospitality)의 본질과도 맞닿아 있다. 신약성경에서 환대를 뜻하는 필록세니아(φιλοξενία)는 문자 그대로 ‘낯선 이를 사랑함’을 의미한다. 환대란 손님을 예의 바르게 맞이하는 친절이 아니라, 경계 밖에 있는 사람을 공동체 안으로 맞아들이는 사랑의 행위이다. 예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을 손님으로 맞이하신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한 사람으로 존중하셨다. 이처럼 예수의 경청은 상대를 설득하기 위한 준비 과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살아 내는 사건이었다.

오늘의 목회는 이 점에서 예수에게 다시 배워야 한다. 우리는 흔히 경청을 상담 기법이나 의사소통 기술로 이해한다. 그러나 예수의 경청은 기술 이전에 영성이며, 방법 이전에 존재 방식이다. 목회자가 성도를 끝까지 들어 주는 이유는 더 나은 답을 준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의 이야기를 들어 주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성육신의 하나님을 믿는 교회는 사람들을 자기 앞으로 오게 만드는 공동체가 아니라, 먼저 그들의 삶 속으로 찾아가는 공동체여야 한다.

결국 경청은 자신을 비우는 사랑이며, 상대의 자리까지 내려가는 겸손이다. 예수께서 우물가에서 보여 주신 경청은 ‘침묵의 기술’이 아니라 ‘성육신의 삶’이었다. 이러한 경청이 있었기에 질문이 가능했고 통찰이 가능했으며 한 사람이 변화하고 마침내 공동체의 화해로 이어질 수 있었다. 그러므로 목회적 소통의 출발점은 말을 잘하는 능력이 아니라, 예수처럼 먼저 낮아져 상대의 삶 곁에 머무는 데 있다.



2. 질문을 통한 주도적 대화 ― 자유를 세우는 성육신적 소통

예수의 소통은 사람을 설득하기보다 사람을 일으켜 세우는 소통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답을 주기보다 먼저 질문하신다. 질문은 단순한 대화의 기술이 아니라 상대를 하나의 인격으로 존중하는 방식이며, 성육신적 소통이 인간의 자유를 대하는 방식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피조물로 창조하셨지만 결코 조종의 대상으로 대하지 않으셨다. 창조에서부터 계시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은 인간에게 응답할 자유를 허락하신다. 사랑은 강요될 수 없으며, 믿음 역시 명령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시되 인간의 응답을 기다리신다. 이러한 하나님의 존재 방식은 성육신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을 억압하거나 굴복시키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니라 진리 안에서 자유롭게 응답하도록 초대하기 위해 오셨다. 그러므로 질문은 단순한 교육 방법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를 존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방식이다.


요한복음 4장에서도 예수는 처음부터 자신을 계시하지 않으신다. “물을 좀 달라”(요 4:7)는 요청으로 대화를 시작하시고, 이어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요 4:10)이라고 말씀하신다. 다시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요 4:16)고 하심으로 여인 스스로 자신의 삶을 마주하도록 이끄신다. 예수는 결론을 선언하기보다 질문과 요청을 통해 여인이 스스로 진리에 이르도록 기다리신다.

복음서 전체를 살펴보면 이러한 방식은 예수 소통의 일관된 특징이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를 만나셨을 때도 예수께서는 이미 그들의 슬픔과 절망을 알고 계셨다. 그럼에도 곧바로 설명하지 않으시고 “무슨 일이냐”(눅 24:17)고 물으신다. 그들이 마음속 이야기를 모두 털어놓을 때까지 묵묵히 들으신 뒤에야 비로소 성경을 풀어 주신다. 질문이 먼저이고 설명은 그 다음이다. 만일 그 순서가 바뀌었다면 그것은 대화가 아니라 일방적인 강의가 되었을 것이다.

제자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막 8:27), 이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막 8:29)고 물으신다. 베드로의 “주는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신앙고백은 주입된 지식의 결과가 아니라 질문 속에서 스스로 내린 결단이었다. 질문은 상대를 시험하기 위한 장치가 아니라 믿음을 자기 고백으로 성숙하게 만드는 통로였다.


이러한 질문의 신학적 의미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관계성 안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하나님은 인간을 ‘나-그것(I-It)’의 대상으로 대하지 않으시고 ‘나-너(I-Thou)’의 인격적 관계로 부르신다. 그러므로 예수의 질문은 정보를 얻기 위한 탐문이 아니라 관계를 시작하는 초대이다. 상대를 판단하기 위한 심문이 아니라 그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존중하는 사랑의 표현이다. 질문은 인간의 자유를 인정하고 그 자유 안에서 진리를 선택하도록 기다리는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다.

세계기독교커뮤니케이션협의회(WACC)의 「모두를 위한 커뮤니케이션 원칙」은 수동적 대상이 아니라 자신의 목소리와 선택을 가진 주체가 될 때 비로소 가능성이 실현된다고 말한다.1) 이것은 예수께서 복음서에서 몸소 실천하신 원리를 오늘의 언어로 옮긴 것일 뿐이다. 사마리아 여인을 가르침의 대상으로만 여기셨다면 처음부터 모든 답을 말씀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질문을 통해 그녀를 대화의 주체로 세우셨고, 결국 그녀는 복음의 첫 번째 증언자가 되어 마을 사람들을 예수께로 이끌었다. 성육신적 소통은 사람을 수동적인 청중으로 머물게 하지 않는다. 사람을 하나님 나라의 동역자로 세운다.

1) WACC, “ Communication for All: Sharing WACC’s Principles,” 

https://new.waccglobal.org/wp-content/uploads/2019/09/Communication-for-All.pdf


오늘의 목회는 여기에서 중요한 도전을 받는다. 우리는 종종 설교를 통해 답을 제시하는 데 익숙하지만, 성도들이 자신의 믿음을 스스로 고백하도록 기다리는 일에는 서툴다. 상담에서도 조언은 빠르지만 질문은 부족하다. 그러나 질문 없는 소통은 쉽게 의존성을 낳고, 답만 제시하는 목회는 사람을 성장시키기보다 목회자에게 의존하게 만들 수 있다. 반대로 질문은 성도를 하나님 앞에 직접 서게 하며, 자신의 삶 속에서 복음을 발견하도록 돕는다. 이것이 성육신적 소통이 지향하는 목회의 모습이다.

결국 예수의 질문은 말의 기교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드러나는 방식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자유를 존중하셨기에 예수께서는 질문하셨고, 질문하셨기에 사람들은 자신의 언어로 믿음을 고백할 수 있었다. 성육신적 소통은 답을 강요하는 소통이 아니라, 질문을 통해 사람을 하나님의 진리 안으로 초대하는 소통이다. 이러한 질문이 있었기에 예수의 통찰은 정죄가 아니라 치유가 되었고, 한 사람의 변화는 공동체의 회복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3. 영적 갈증을 꿰뚫는 통찰 ― 실존을 품으시는 성육신적 소통

성육신적 소통은 사람의 말을 듣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그것은 말 뒤에 감추어진 삶을 읽고 삶의 표면 아래 흐르는 갈증을 함께 품는 데까지 나아간다. 그러므로 예수의 통찰은 사람의 약점을 드러내는 초자연적 능력이 아니라 인간의 실존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시선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외면을 넘어 마음을 보시는 분이시며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그 하나님의 시선을 인간의 역사 속에서 구체적으로 보여 주셨다.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는 이러한 통찰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잘 보여 준다. 대화는 우물물에서 시작되지만, 예수는 곧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요 4:13-14)라고 말씀하신다. 여인이 길어 올리는 물을 통하여 그녀 안에 자리한 더 깊은 목마름을 보셨다. 눈에 보이는 필요를 넘어 보이지 않는 갈증으로 나아가시는 것, 바로 여기에 예수의 통찰이 있다.

이어지는 말씀은 더욱 놀랍다. “네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18절) 이 말씀은 여인의 과거를 폭로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예수께서는 그녀의 상처를 들추어 정죄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녀가 평생 채우려 했던 목마름의 근원을 사랑으로 드러내셨다. 예수께서 아신 것은 단순한 사실이 아니라 한 인간의 고독과 상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깊은 갈망이었다.


이 점에서 예수의 통찰은 하나님의 전지성보다 하나님의 긍휼을 드러낸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시지만, 성육신 안에서 그 앎은 심판보다 구원으로 나타난다. 예수께서는 사람의 숨겨진 죄를 폭로하여 부끄럽게 만드는 대신, 그 죄의 뿌리에 있는 목마름을 치유하시기 위해 가까이 다가오신다. 그러므로 성육신적 통찰은 사람을 분석하는 능력이 아니라, 사람을 회복시키는 사랑이다.

이러한 통찰은 필자가 주장하는 ‘시선의 신학’과도 깊이 연결된다. 물 위를 걷던 베드로가 예수에게서 바람과 파도로 시선을 돌리는 순간 물속으로 가라앉았듯이(마 14:28-32), 사마리아 여인 역시 우물물이라는 눈앞의 현실에 시선이 머무는 한 참된 생명을 발견할 수 없었다. 예수께서는 그녀의 시선을 우물에서 생명의 샘으로, 결핍에서 충만으로, 과거에서 하나님 나라로 옮겨 놓으신다. 성육신적 통찰은 단순히 문제를 정확하게 진단하는 능력이 아니라, 인간의 시선을 하나님께로 다시 향하게 하는 구원의 사건이다.


흥미롭게도 여인은 자신의 삶 깊은 곳이 드러나자 곧바로 화제를 예배 논쟁으로 돌린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요 4:20). 인간은 자신의 상처가 드러날 때 흔히 논쟁과 이론 뒤로 숨으려 한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논쟁에 갇히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24절). 예수께서는 그리심산과 예루살렘이라는 오래된 대립을 넘어 예배의 본질을 새롭게 열어 주신다. 통찰은 사람의 상처를 넘어 공동체를 갈라놓는 오래된 갈등까지 치유하는 힘으로 확장된다.

그 결과는 놀랍다. 여인은 물동이를 버려두고 마을로 달려가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29절)고 외친다. 조금 전까지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홀로 우물가를 찾던 여인이 이제는 공동체를 향한 첫 번째 복음의 증언자가 된다. 이것이 성육신적 통찰이 만들어 내는 변화이다. 예수께서는 그녀의 과거가 아니라 정체성을 바꾸셨다. 수치의 기억은 증언의 이야기로, 고립은 공동체를 향한 선교로 변화되었다.


오늘의 목회는 이 점에서 깊은 성찰을 요구받는다. 우리는 사람을 너무 쉽게 평가하고 분석하려 한다. 그러나 사람을 아는 것과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다르다. 목회적 통찰은 사람의 문제를 정확히 진단하는 능력 이전에, 그 사람을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보는 영적 감수성이다. 성도의 말 뒤에 숨은 눈물을 보고, 분노 뒤에 감추어진 상처를 읽으며, 죄책감 아래 흐르는 은혜에 대한 갈망을 발견하는 것, 이것이 목회자에게 필요한 통찰이다.

결국 예수의 통찰은 하나님의 성육신의 사랑이 가장 깊이 드러난 사건이다. 성육신하신 하나님은 인간의 삶을 멀리서 관찰하지 않으시고, 그 삶 속으로 들어오셔서 가장 깊은 목마름을 생명의 샘으로 바꾸신다. 그러므로 성육신적 소통의 목표는 사람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지 않다. 사람의 존재를 새롭게 하는 데 있다. 이러한 통찰이 있었기에 사마리아 여인의 변화는 한 개인의 회심을 넘어 공동체 전체의 화해와 믿음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화해로 열매 맺는 소통: 성육신적 소통의 공동체적 열매

성육신적 소통은 개인의 변화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언제나 공동체를 새롭게 한다. 하나님께서 성육신을 통해 인간과 화목하게 되셨듯이, 예수의 소통 역시 사람과 사람 사이를 다시 잇고 공동체를 회복시키는 열매를 맺는다. 그러므로 경청과 질문, 그리고 통찰은 각각 독립된 소통의 기술이 아니라 하나의 성육신적 소통이 공동체 안에서 드러나는 과정이며, 그 궁극적인 목적은 화해(reconciliation)에 있다.

요한복음 4장은 이러한 사실을 아름답게 보여 준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를 만난 후 물동이를 버려두고 마을로 달려간다.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29절) 이제까지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정오에 홀로 우물가를 찾던 여인이 이제는 공동체 한가운데로 들어간다. 수치와 고립의 상징이었던 사람이 공동체를 연결하는 증언자가 된 것이다.


이 변화는 단지 한 사람의 회심이 아니다. 마을 사람들은 여인의 증언을 듣고 예수께 나아와 “자기들과 함께 유하시기를 청하니”(40절) 예수께서는 그들과 이틀 동안 함께 머무신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은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42절)고 고백한다. 한 사람과의 대화는 공동체 전체의 믿음으로 이어지고, 개인의 치유는 공동체의 화해로 확장된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예수께서 사마리아 사람들 가운데 ‘머무르셨다’는 사실이다. 성육신은 하나님께서 인간 가운데 거하신 사건이며(요 1:14), 요한복음 4장에서는 그 성육신의 원리가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의 관계 속에서 다시 구현된다. 적대와 배제의 경계가 함께 머무는 자리로 바뀌고, 낯선 이들은 이웃이 되며, 오래된 분열은 새로운 공동체의 가능성으로 전환된다. 성육신적 소통은 결국 함께 머무는 공동체를 만들어 낸다.

이 점에서 예수의 소통은 화해의 신학과 깊이 연결된다. 오늘날 우리 사회와 교회는 이념과 세대, 계층과 지역, 신학적 입장의 차이로 분열되어 있다. 그러나 갈등은 서로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 서로를 이해하려 하지 않을 때 심화된다. 성육신적 소통은 다름을 제거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다름 속으로 들어가 함께 살아가는 길을 연다. 경청은 상대를 배제하지 않고, 질문은 상대를 존중하며, 통찰은 상대를 정죄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세 가지는 결국 화해라는 하나의 열매를 맺는다.


오늘의 목회 역시 다르지 않다. 당회는 서로를 설득하는 회의가 아니라 함께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심방은 문제를 해결하는 방문이 아니라 성도의 삶 속에 함께 머무는 성육신적 만남이어야 한다. 청년 사역은 세대를 규정하는 프로그램이 아니라 질문과 경청을 통해 함께 미래를 만들어 가는 동행이어야 한다. 성육신적 소통은 목회의 모든 자리에서 공동체를 새롭게 하는 원리로 구현되어야 한다.

예수께서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시작하신 소통은 한 사람을 변화시키는 데 머물지 않았다. 그것은 공동체를 회복하고 오래된 경계를 허물며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관계를 열어 가는 사건이었다. 이것이 성육신적 소통이 맺는 열매이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가운데 거하셨듯이, 교회 역시 세상 가운데 함께 거하는 공동체가 될 때 비로소 화해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오늘의 목회가 회복해야 할 것은 단순한 소통의 기술이 아니라, 경청과 질문과 통찰을 통해 사람을 하나님과 이웃에게 다시 연결하는 성육신적 소통의 영성이다.




  임성빈 CVO (문화선교연구원)

장신대 명예교수/전 총장, 한국리더십학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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